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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을 뛰어다니며 '슬라이드로 보는 노동운동사' 강연하는 박준성 선생

전국을 뛰어다니며 '슬라이드로 보는 노동운동사' 강연하는 박준성 선생

<내 배운 지식으로 무엇을 할꼬 하니>

그 노래가 흘러나오는 동안 어두운 강의실 안 사람들
모두 한 두 번쯤은 울었겠지. 눈물 흘리지 않았다면
마음으로라도 울었겠지. 맞벌이 부부가 일나간 사이
자물쇠로 잠긴 지하 셋방에서 불에 타 죽은 세살,
다섯 살 박이 두 아이 이야기(정태춘 '우리들의 죽음')에
슬퍼하고 분노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애초 그 강의실에
들어오지도 않았겠지.

공부는 해서 무엇하랴

박준성씨의 '슬라이드 노동운동사'는 민주노총, 금속연맹을 비롯한
숱한 운동 단체들의 간부 혹은 조합원 교육에서 언제부턴가
필수과목이 된 이른바 '진보진영의 명강의'다.
84년 여름, 30세 나이에 부천 YMCA가 개최한 노동교실에서
첫 강의를 했으니 올해로 16년째.
그간 1900년대 한국 노동자 운동을 주로 다룬 그의 강의는
여기저기 살이 붙고, 노래가 나오고(직접 부르기도 한다)
손수 찍은 사진까지 갖춘 '슬라이드 노동운동사'로 변모했다.

그의 20대는 박정희 유신시대 긴급조치가 발동하던 1975년에 시작해서
전두환 정권의 억압 통치가 계속되던 1984년 끝이 났다.
82년 어느날, 서울대 규장각에서 일하던 그는
도서관 앞 벤취에 앉아 있다 한 학생이 도서관 꼭대기에서
소리를 지르면서 아래로 떨어진 모습을 보았다.
당시 교내에 상주하던 짭새들은 땅바닥에 떨어진 학생은 살피지 않고
그 위로 사과탄을 던지고 아무도 다가서지 못하게 하였다.
숨진 학생은 김태훈 열사였고 그가 외친 소리는 '전두환 정권 물러가라'였다.

이 땅에서 공부는 더 해 무엇하랴.
이쯤에서 나약한 학자로의 길은 접어야겠다 생각한 그를 말린 것은
농민운동을 하고 있던 선배들이었다. 공부를 마저 하라고.
그래서 농민과 노동자들이 쉽게 읽을 수 있는 한국근현대사를 써 달라고 했다.
그러나 2년 후 석사 공부를 마쳤을 때 글은 도저히 쓸 수가 없었다.
말로는 어찌 될 것 같았다. 강의는 그렇게 시작이 됐다.

끊임없이 흔들린다

박준성 씨는 단체나 노동조합에서 강의를 해 달라는 요청이 오면
밤 10시건, 아침 9시건, 울산이건, 광주건 마다하지 않는다.
박사 학위를 따야 할 시기에 노동운동사 강의를 다니느라
논문 제출 시한까지 놓쳤고, 두 아이의 아버지,
40대 중반의 가징이 된 지금까지도 대학의 전임이 못되었다.
그의 전공은 조선후기부터 한말까지 토지문제와 민중운동.
그에게도 학자의 욕심, 안정적으로 연구하고픈 욕심은 있다.
그러나 얻는게 있으면 버리는 게 있는 법,
운좋게 대학에 자리를 잡았더라면 지금처럼 노동운동사 강의를
다니지는 못했을 것이다.

'남편은 우리 역사를 공부하고 가르치면서
모든 사람들이 사랍답게 살말한 세상을 만드는 일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어야 한다고 늘 바쁘다. ...
돈벌이와 관계없이 자기가 배운 공부를 그 일 하는데
다 쏟아부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통신에 올리는 글 끄트머리를
<끊임없이 흔들린다>고 다는 것은 흔들리는 자신을
끊임없이 추스리겠다는 다짐인가 보다' (김명희-우리식구).

그때 거기, 지금 여기

슬라이드 노동운동사에는 많은 주인공이 등장한다.
1931년에 을밀대에서 최초로 고공농성을 벌인 여성 노동자 강주룡,
자기 몸에 불을 질러 '근로기준법 준수'를 외친 전태일,
광주민중항쟁 당시 도청을 마지막까지 사수하다 숨진 윤상원,
그리고 작은 점으로만 찍힌 더 많은 사람들.
박준성씨는 노동운동사 강의를 하는 자신의 역할을
'선배 운동가들의 투쟁의 흔적을 발굴해 후대에 알려주는 연결자'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다.

그가 지난 해, 민주노총 경기북부 지역협의회에 강의를 갔을 때다.
처음으로 노조를 결성해 오랫동안 파업을 벌이고 있던
의정부 시설노조 조합원들이 강의에 참석했다.
'철의 노동자'를 부르자 하니 나이 지긋한 '환경 미화원' 분들이
주머니에서 큼지막한 글씨로 인쇄한 노래 가사를 꺼내
도수높은 안경을 쓰고 노래를 따라 부르셨다.
예전에는 그 나이 들도록 한 번도 불러보지 못했을 '철의 노동자'를
늙은 노동자들은 떠듬떠듬 자랑스럽게 불렀다.
그들도 느꼈을까. 슬라이드 안의 노동자들이 모두 그들의 선배요,
자신들의 투쟁 역시 선배들의 역사처럼 또 다른 역사로 남으리라는 것을.

그의 강의에 꼭 한 번은 등장하는 '수덕사'라는 절이 있다.
그 절 뒷산에 '천사불여일행(千思不如一行)- 천 번 생각함이 한 번
행동함만 같지 못하다'고 적힌 만공탑이 있다 한다.
천 번 생각함이 어찌 한 번 행함에 비길 것인가.
내 배운 지식을 어찌 할까 고민하던 박준성씨의 '한 번 행함'은
16년이 지난 지금도 진행 중이다.

- 장성희/jsh@left.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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