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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다는 것

0.

어제 그동안 미뤄뒀던 영화를 한편 봤다.

(어떤 영화는 꼭 때가 있는 거 같다. 남들이 다본 영화를 안볼때가 가끔 있는데 그건 낭중에 정말 문득 생각나서 봤을 때 왜 지금 봐야 했는지 알게 된다....게으른자의 변명? --;;)

 

켄 로치의 <자유로운 세계>.

 

사람은 아는 것만 보인다고..

이번에 부산 가서 들었던 마스터 클래스에서 소리는 존재하는 것인지 인식하는 것인지...뭐 그런 생각을 하게 했는데 역시나 눈으로 보는 것도 존재하는 것인지 인식하는 것인지...뭐 그런 생각이 늘 있다. 아는 만큼 보인다 뭐 그런 이야기도 있고.

 

내게서 안다는 것은 경험하는 것이다.

책을 읽을 때도 내 기억들의 경험들을, 물론 그 기억들 조차 내가 시간이 지나 재구성한 것인지도 모르지만, 여튼 내 경험들을 환기시켜 이해하고 세긴다.

 

영화를 볼 때도 그런 거 같다.

내가 경험한 것들 중에 선이 다아있으면 그것이 그 영화의 고갱이가 아니더라도 그것을 통해 내가 '퉁'하고 울린다. (요즘 내가 이 표현에 퉁해있다. 딱히 표현하긴 힘든데...이거이 딱 그거이란 말이지.)

 

1.

<빵과 장미>를 봤을 때, <원스>를 봤을 때도 난 그들이 '이주'라는 틀로 보인다. 많이 알아서...아니 그냥 내가 경험한 것 만큼 보인다는 말이지. 경험한다고 바로 아는 것은 아니다.

 

경험을 하면 알게 된다는 것은

같이일어나는 일은 아니다. 경험을 하는 순간 알게 되기도 하지만 이런 경우는 아주 드물고 대부분 시차를 두고 다가온다. 그건 가끔은 일년, 이년, 아니 십년이 지나서야 겨우 다가오기도 하고...그러다 그것이 아니라 다시 다가오기도 하고...한번도 아니고 여러번 다가오기도 한다. 그 시차가 횟수가 많으면 많을 수록 가슴을 치는 강도는 세지겠지. 머리를 쥐어 박기도 하고....여튼 경험은 내게 안다는 것을 준다. 고맙지만 그 시차를 생각하면....숨고 싶다.

 

<빵과 장미>에서의 그 유머와 리듬은 켄로치의 것이지.

사람을 쥐었다 놓았다...그리고 힘껏 짜서 다시 자유롭게 울 수 있게 하는 것.

그리고 잡혀가는 그녀가 씩씩하게 후일을 기약하는 캐릭터는..

불안하지만 현실에서는 불안하지만 그 순간만큼은 당당한 그 순간은

유난히 독립적이었던 한 이주노동자를 생각나게 한다.

현실은 그렇게 영화에서 다시 퉁하고 온다.

 

<원스>에서 처음 같이 있자는 남자의 말에 화를 내며 가는 주인공 여자에게서는 이주라는 틀로 관계가 도드라져 보이는 것. 그리고 낭중에 같이 걷자는 남자의 말에 문을 닫고 들어가는 '아이가 있는' 그녀.

 

2.

최근에 좋아하는 사람들과 술자리가 있었는데,

술자리에서도 여전히 그날 있엇던 온갖 회의 내용이 고스란히 이어져 진지하면서도 뭐가 앞이 안보여 애틋한 자리였다. 그러다 노래방을 가게 됐는데...그날 미루는 동네사람들이 봐주는 날이었고 저녁 늦게 내가 찾으러 가야했다. 술자리에 유난히 나를 좋아하던 활동가가 있었는데...이 친군. "나랑 결혼하자"란 말을 내게 서슴 없이 하는 그런 친구. 이 친군 결혼하자란 표현이 뭔가 통했단 그런 뜻으로 쓰는 것 같기도 하고 웃긴 표현이지만 그 맘이 뭔지 알거 같은 느낌도 들고...여튼

이 친구, 노래방까지는 못가고 일어서려는 나를 노래방까지 데려갔다. 그리고 노래 한곳을 하고 나오려는데..날 잡는다. "에잇 애는 버려." 하며.

순간 주인공에서 카메라가 확 멀어지는 느낌으로 내 앞의 모습들이 확 멀어지다가 멈춤한다.

 

그녀 모습에서 날 봤다. 아이 때문에 일어나는 선배를 보며 난 잡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속으로라도 뭐라 뭐라 했다. 그렇다고 애 낳아보면, 애 키워보면 안다 뭐 그런 이야기를 하려는 건 결코 아니고...난 그냥 나의 경험들이...어떤식으로 작용하는 지 그게 뭔가 알고 싶은거지. 여튼 다큐를 만들때도 끝이 어딘지 모르며 달려가듯...계속 쓰면.

 

참...이상한게. 이런 말을 다른 누군가에게 들었다면 아니면 얼마전에 들었다면 난 화를 버럭 냈거나 아님 상처 받고 꼬리 내리며 나왔을텐데....

난 그녀 손을 잡고 웃으며 "그건 힘들겠다." 그러고는 다독이며 나왔다.

 

그때 난 <원스>에서 같이 좀 걷자던 남자를 뒤로 하고 들어가는 그녀가 됐고. 그래서 아마도 원스 하니 그게 먼저 떠올랐나 보다. 이전엔 같이 자자던 말에 화를 내던 이주민과 영주민의 관계가 먼저 떠올랐는데....

 

3.

여튼..<자유로운 세계>를 보면서 난 내가 경험했던 것들 중에서 이질적인 면 때문에 시종 몰입이 안됐다. 이곳과 너무나 다른 현실, 당당한 이주노동자.

이곳은 불법이주노동을 안하더라도 순종적이길 강요하고 굴욕을 강요한다.

아마도 이곳에서는 돈 많은 남자 이외에는 대부분이 그걸 강요 받는지도 모르겠다.

여튼...난 그곳에서 당당한 그 사람들의 모습에서..순간. 한 다큐가 생각났는데

 

이주 관련 다큐로 처음 만든 것은 인권운동사랑방에서 제작지원해서 이주 관련 작업을 하는 사람들이 모여 만든 옴니버스였다.

 

그 중에 하나인 김이찬 감독이 만든 <동행>,

파업을 했던 이주노동자와 그 파업을 지원하러 왔던 한국활동가가 이야긴데.

거기서 나왔던 장면 중에 화면 사이즈는 여러명이 허리까지 나올 정도였고

그 중에 한명이 뭐라 이야기하는 장면이었는데..

 

여러명인 사람들은 이주노동자였고...주로 동유럽쪽이나 중앙아시아 쪽에서 온 이주노동자였고...그 중 한명이 지원하러 온 한국활동가에게 불안한 눈빛으로

"우리랑 끝까지 같이 갈 수 있어요?" 물어 본다.

그리고 그 보다도 더 불안한 모습으로 그 질문에 대답을 기다린다.

카메라는 그 긴박한 순간을 너무나 자연스럽게 담아낸다.

그 순간은 샷도 보이지 않고 사이즈도 보이지 않고 그 순간에 그 공간으로 날 이동시켰다. 난 그 장면이 명장면이라 했고 그 선배는 앞부분이 조금 지나 카메라를 들이댄 자신의 안타까움을 말했다.

 

다큐는 그렇게 다가온다. 그 사람의 진심을 담아내는 카메라는 조금은 느리고 어설프지만 그 공간의 경험하고 알고 그리고 담아낸다.

 

물론 이 순서가 매번 같지는 않다.

경험하고 알고 담아내고...

어떤때는 카메라가 담고 그 다음에서야 겨우 알고 경험하기도 한다.

어떤때는 카메라가 담고 경험하고 제작을 하면서 시간을 두고 알기도 한다.

역시 시차가 크면 클수록 가슴을 씨게 친다.

 

4.

본다는 것은 뭐냔 말이지. 소리처럼 존재하는 것인지. 인식하는 것인지.

보고 말면 그만인데...그걸 담아내야 한다는 사람으로서...

그 위치는 때론 구차하게도

때론 감동스럽기도

때론 아프다.

 

잘 담아내기 위해 경험을 무작정 할 것인가?

그런데 그 시차는?

 

이렇듯 영화를 본다는 것도 그냥 보는 게 아닌데..

한 사람에게 들어가 어떤 퉁을 만들지...모르는데..

아무리 머리를 가슴을 몸통을 짜내서 구성을 한다 한들...

어떤 퉁을 만들지 까지 내가 어찌....

그렇다고 그냥 당신이알고 있는 것만큼만 보소. 하고 몰라라 할 수도 없지.

물론 지금까진 그래왔지만 말이다.

에궁...게으른 자구나.

 

5.

아무래도 소설을 써야겠다.

그럼 좀 시차가 적어질 것도 같다.

뭔가를 써야겠단 생각은 처음이지 싶다.

 

 

그런데 말이지...이 맞춤법 모르는 내가...

가당키나 한 말이냐고요????????????????????

 

지금 부터 갈고 닦아서 십년 후에?

아니면 이십년?

아니면 삼십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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