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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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에게 중요한 것과 그것을 얻는 길
- 살고자하는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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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농부가 투명구슬을 맺는 씨앗을 가지고 가만히 보니 길을 잃은 어떤 고아가 깨끗한 구슬을 원했다. 이에 농부는 어린 아이의 마음을 알고 찾아가 이렇게 말했다. “이 씨앗을 심고 마음을 다해 가꾸면 내가 원하는 열매를 많이 얻을 것이니라. 또한 사람들이 너에게 와 그 씨를 좀 나눠달라고 할 것이니라.” 어린 아이가 농부의 말을 듣고 자기의 땅에 그 씨를 심었더니 하얀 싹이 나왔다. 그리고 그것을 보자 무거운 짐을 내려놓듯 마음이 가벼워졌으며 너무 기뻐서 눈물이 났다. 또한 농부가 원하는 열매를 얻고자 자신의 힘과 정성과 뜻을 다해 가꾸었다. 그랬더니 그 나무는 투명구슬을 풍성히 맺었다. 또한 눈에 보이지 않는 열매를 원하는 사람들이 찾아와 그 씨를 얻어 자신들의 땅에 심었다. 그런데 뿌리가 튼튼하고 좋아서 그런지 그들의 나무와 가지들도 튼튼하고 좋았다. 그러므로 그들이 가꾼 나뭇가지들에도 투명구슬이 풍성히 맺혔다. 그러나 하얀 싹을 본 후 자신의 마음을 빨강구슬과 황금구슬에 빼앗긴 사람들은 농부가 원하는 구슬을 맺지 못했다. 반면 어떤 도박꾼이 빨강구슬과 황금구슬을 맺는 씨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가 가만히 보니 양털로 짠 옷을 입은 양치기 네 명이 울긋불긋한 구슬을 원했다. 그러니 도박꾼이 그들의 마음을 꿰뚫고 찾아가 이렇게 말했다. “내가 주는 씨앗을 심고 열심히 가꾸면 당신들이 원하는 구슬을 많이 얻을 것이오. 또한 당신들처럼 눈에 보이는 열매를 원하는 사람들이 그 씨를 받으러 구름 떼처럼 몰려올 것이오.” 이에 양치기들은 그 씨를 받아 자신의 땅에 심고 열심히 가꾸었다. 그랬더니 그들의 나무는 열정적이고 영광스런 구슬을 많이 맺었다. 또한 다른 양치기들과 양들이 대박난 소문을 듣고 몰려와 그 씨를 받아서 심었다. 그런데 그 뿌리가 튼튼하고 좋아서 그런지 나무와 가지들도 튼튼하고 좋았다. 그러므로 그들이 가꾼 나뭇가지들에는 빨강구슬과 황금구슬이 많이 맺혔다.
사람은 흙으로 지음을 받았으니 동물처럼 육신이 있고 그로 인해 육신의 생각이 있으나 동물과는 달리 코를 통해 생기를 받았으니 인격체로 불리며 마음이 있다. 그리고 사람들이 자유의지라 부르는 바로 그 마음에 따라 아버지께서 각 사람의 앞에 두신 생명과 사망을 선택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영생을 원하는 자는 자신과 자손이 살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거듭남의 은혜를 얻는다. 그러나 원치 않는 자는 십자가를 거부하되 악한 자는 자손들도 믿지 못하게 한다.
또한 사람은 땅에서 온 육을 따르면 썩어질 육을 위해 세상에 묶여 살고 영원한 셋째하늘에 계신 아버지께로 온 영을 따르면 그 귀하고 거룩한 것을 구하고 찾고 두드리며 하늘을 바라보고 살되 그 선택도 역시 사람의 능력과 판단이라 불리는 자유의지 즉 마음에 달려있다. 그러므로 거듭난 자라도 첫사랑을 버리고 자신의 마음이 원하는 것을 따라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구하며 살 수도 있고 영을 따라 살 수도 있다. 그리하여 육의 기회가 있을 동안 영혼의 구원을 이루어 생명나무의 약속에 참여하는 자들도 있고 혼의 거룩을 이루지 못하여 그 과정에서 호리까지 다 갚고 온전케 된 의인의 영들로 나오되 육체는 심판 받고 소멸되어 영혼이 하나님처럼 사는 백성들도 있고 끝까지 자신의 생각을 붙들고 거룩을 거부하므로 슬피 울며 이를 가는 곳에 처하는 자들도 있다.
결국 사람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 아버지의 나라에 들어가거나 은혜를 거부하고 영원한 유황불 못으로 들어가는 것과 또한 아버지의 자녀나 백성으로 살거나 영원히 슬피 우는 것이 사람의 능력과 수행과 교양 같은 외모가 아니요 공평하게 오직 각 사람의 마음에 달려있다. 이처럼 사람은 씨를 받았을 때 자신의 마음을 어디에 쓰느냐에 따라 아버지께서 내어놓으신 십자가를 통해 생명이나 사망을 이룰 수 있는 인격체다. 또한 그 뿌리가 좋아야 나무도 좋고 가지와 열매도 좋되 나무도 나쁘고 가지와 열매도 나쁜 것은 그 뿌리가 나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사람이 밖으로 내는 열매를 보면 그 뿌리를 알 수 있고 또한 그가 누구에게 어떤 씨를 받고 있는지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영의 뿌리를 얻은 자는 그 목자가 먼저 살고자하는 마음을 가지고 자신의 거룩에 애쓰며 오직 영으로만 모든 것을 다스린다. 그러므로 자신과 또한 거듭난 후 자신의 생각에서 돌이켜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그 가지들이 맺는 것은 오직 영의 열매이다. 즉 영의 씨를 얻은 목자는 그의 마음과 생각과 말과 행위로 오직 의롭고 거룩한 열매를 맺고 또한 그 목자에게서 영의 씨를 받으며 그 목자의 본을 보고 따르는 양들도 역시 하얀 털을 낸다. 오직 아버지께로 온 진리만이 사람을 씻어 거룩하게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 마찬가지로 육의 뿌리를 얻은 자도 그 목자가 먼저 썩어질 육의 욕심과 사망으로 들어갈 이 세상의 헛된 영광을 구하며 늘 육으로 모든 것을 다스린다. 그러므로 거짓된 목자의 뿌리로 인하여 그 가지들에 거하는 거짓목자와 양이 맺는 열매도 오직 육으로 나타나 육의 풍성함과 세상의 영광을 얻되 그들의 영혼은 늘 실족하며 마음에는 기쁨과 평화가 없다. 원수에게로 온 말은 사람을 오직 육과 세상으로 이끌어 들이며 세상은 사람의 마음과 영혼에 기쁨과 평화를 줄 수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사람들의 앞에 서서 영을 전하는 자에 대한 영 분별은 그가 맺는 열매를 보면 쉽게 알 수 있으니 그가 누군가에게 받은 영을 전하되 그의 입술과 행위가 의롭고 거룩한 열매를 맺고 있으면 그는 참된 목자다. 또한 그를 따르는 자들도 그가 전하는 말씀을 듣고 순종해 자신의 안에 거하는 죄와 싸우며 거룩에 애쓰고 있으면 그들은 그 목자의 양이 아니요 선한 목자의 음성을 듣고 따르는 그리스도의 양들이다. 그리하여 하늘에 쌓아두신 아버지의 그 기쁘신 뜻을 위하여 늘 영을 따른 목자와 양들이 목자장이신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의 자유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반대로 어떤 목자가 누군가에게 받은 영을 전하며 육의 이익을 끼치되 그에게는 주님께서 받으실 만한 거룩한 열매는 없고 오히려 선악의 연료가 되는 욕심이 그의 마음 깊은 곳에 있다. 고로 거짓목자를 판단할 수 있는 아주 쉽고 정확한 것으로서 그는 그리스도께서 광야의 시험에서 이기신 것들을 오히려 많이 가지고 있다. 즉 뒤에 숨겨놓은 돈과 쌓아 올린 영광이 그의 거짓됨을 증거하되 그것들을 보고 따른 거짓된 많은 목자들과 양들도 그를 따라 영원한 형벌로 들어간다. 하지만 아버지께서는 마음을 지으시고 그 양심 안에 생기를 넣어주셨어도 그 나무에 거하는 자들은 욕심으로 마음을 더럽히고 그 거짓된 것을 부러워하며 자기 발로 따라갔으니 누구를 탓하리요?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찌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생명의 근원되신 아버지와 그의 아들이시오 창조자이신 그리스도를 아는 자는 이 말씀을 안다면 이를 지키면 은혜와 유익이 있을 것이요, 아버지와 아들을 모르는 자는 말씀에 자신의 생명이 있으니 이 은혜를 입는 것이 유익하다.
어떤 영혼이 성경을 읽다 말씀을 전하는 목자들 가운데 거짓선지자가 있다는 구절을 보게 되었다. 또한 거짓선지자는 그 수효가 많고 때로는 표적을 보여 택함 받은 자들까지 유혹하다 마지막에는 유황불 못에서도 원수가 들어가는 가장 뜨거운 곳으로 던져진다고 되어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이 행여 거짓선지자를 따르다 자신도 마지막에 거짓선지자처럼 될까 봐 걱정되어 거짓선지자가 어떤 자인지를 정말로 알고 싶었다. 이에 지팡이로 백성들을 섬긴 사람이 그의 간절한 마음을 보고 찾아와 이러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어떤 사람이 무슨 일을 해볼까 하는 생각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다 그는 한 양치기가 많은 양들을 이리저리 이끄는 모습을 보았다. 그런데 그는 많은 양들이 양치기를 따르는 모습이 영광스럽게 보였으나 늑대가 왔을 때 양들을 지키기 위해 끝까지 싸우다 자신의 목숨을 잃어야 한다는 것은 깨닫지 못한 채 자신도 그저 많은 양들을 치고 싶은 마음으로 목자가 되어 그 소원을 열심히 이루어가고 있었다. 그러다 바닷속에 있는 도축장의 주인이 그에게 말하길 양털을 깎아 자기에게 주면 돈과 맛있는 것으로 보답하겠다고 했다. 이에 그는 날마다 양털을 깎아 그에게 바치되 양들에게 깨끗한 풀을 먹이지 않고 오히려 길거리의 개와 돼지가 먹는 것을 가져다 먹였다. 그러므로 양들은 하얀 털이 아니라 매우 더러운 털을 내며 병들어 갔으나 도축장주인은 더러운 털이 좋다며 돈과 맛있는 것을 점점 더 많이 주었다. 또한 그 목자는 지팡이가 있기는 했지만 양들이 잘못된 길로 가도 가만히 놔두었으니 양들이 맞아서 아프면 털을 내지 못할까 혹은 도망가지는 않을까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도축장주인이 한밤중에 찾아와 아주 큰 돈과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것을 주겠다고 하자 그 목자는 자신이 무엇을 어떻게 하면 되느냐고 물었다. 이에 도축장주인은 당신이 치는 양들이 무엇을 먹고 자랐는지 식별하기 위해 세자리 번호를 붙여서 도축장으로 데려오라고 했다. 이에 그 목자는 양들을 푸른 초장이 아닌 바다로 인도했으니 양들은 한 마리씩 물에 빠져 죽기 시작했고 또한 물에 빠져 죽어가는 양들을 보고도 건져내지 않고 오히려 계속해서 물속으로 이끌었다. 그러다 양들이 도축 당하기 직전에 식별번호를 받게 해주며 평화롭고 안전한 세상이라고 외쳤다." 지팡이로 백성들을 섬긴 사람은 이야기를 마치며 바로 이러한 자가 거짓선지자요 그를 따르며 길거리의 음식을 받아먹던 자들도 마지막에 이 세상이 사망으로 들어갈 때 함께 들어갈 것이라고 알려주었다.
그러므로 거짓선지자를 어떻게 판단하리요? 목자는 양들에게 받아먹는 자가 아니요 오히려 초장으로 인도하여 양들을 먹이는 자며 또한 마지막에 자기의 목숨을 구원코자 하는 자가 아니요 양들을 위해 자기의 목숨을 잃는 자니 참된 목자는 반드시 목자의 옷을 입고 나타나게 되어있다. 그러나 거짓된 목자는 오히려 자신이 양의 옷을 입고 나와서 그 양들을 하나씩 하나씩 삼킨다.
또한 목자는 목자장이 이 땅에 계실 때 어떠한 말과 행실로 양을 치다 마지막 순간에 어떻게 섬기셨는지를 자기의 마음에 품고 각오하고 있는 자이니 양들에게 늘 깨끗한 것을 먹이며 보이며 또한 지팡이가 양들의 앞에서 떠나지 아니한다. 그러므로 목자는 늘 거룩한 생명에 이르게 하는 말씀과 진리만을 먹이며 양 무리에게 거룩한 본을 보이며 또한 오직 지팡이를 바라보도록 이끈다. 이때 살고자하는 마음을 가지고 깨끗한 것에 순종하므로 자신을 늘 누룩에서 돌이키고 또한 불의와 죄악이 가득한 이 세상에서도 구별되어 나오는 영혼들이 있으리니 그들은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는 그리스도의 양들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양들을 거룩으로 이끈 목자가 마지막에 그리스도를 위해 목숨을 잃고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예하고 참된 목자를 따르며 자신을 신령한 지체로 단장한 양이 그리스도를 통해 무릇 살아서 정결한 신부의 생명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거짓목자는 지팡이가 무엇인지 모르기에 갈 길을 잃은 불쌍한 양들이 아무리 바라보아도 그 지팡이를 어디에다 두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지팡이와 상관없이 오늘은 이것을 내일은 저것을 하되 십자가의 고난과 영광을 가리키지 않는 말과 행위는 다 불법이다. 또한 거짓목자는 푸른 초장이 무엇인지 먹을 것이 어디에 있는지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주일에 육의 양식을 먹여 한주간 세상으로 이끈다. 그러나 양이 먹을 수 있는 것은 오직 풀이니 풀 외에 다른 것을 주어 거룩에 이르지 못하게 하는 자들은 다 거짓선지자라 판단을 내려야 한다. 즉 이것이 영이라 말하되 양들에게 육의 유익을 끼치며 이것이 영원한 셋째하늘의 영광이라 말하되 세상의 영광으로 양들을 이끄는 자들은 다 거짓에 속해있으니 따르든지 말든 지를 자기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
예를 들어 거짓된 목자는 그가 사람들의 앞에 서서 하는 말을 잘 들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여러분들이 헌금을 많이 해야 우리 교회가 살고 또한 내가 살고 내가 살아야 저 가난한 자들도 살 수 있습니다.” 이 말을 한 자가 바로 그 양의 옷을 입고 나온 자이다. 이렇게 말하는 자들도 많다. “666은 이단이나 혹은 내가 예수라고 하는 것입니다. 또한 믿는 자는 이미 사람의 수를 안 받은 것이고 안 믿는 자는 이미 받은 것이니 실제가 아니라 상징입니다. 게다가 온 세상에 평화와 안전을 가져다 주는 그것이 어떻게 짐승의 수가 될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말들로 원수의 나타남을 예비하고 있는 자들은 마지막 때의 대환난에서 양들이 반드시 666을 받도록 인도하여 자신도 양도 육과 세상의 삶을 유지하게 할 것이니 이런 말은 자신이 거짓선지자임을 스스로 증거한다.
그러나 거짓을 설교자의 속이 아닌 오히려 말씀을 듣는 자신의 속을 들여다보며 분별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그러므로 자신이 스스로 자신을 볼 때 영이 거듭났으나 아버지의 뜻에 관심이 없으니 혼의 거룩을 이루어가고 있지 않다. 또한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요 오히려 사망으로 들어가고 있는 이 세상을 따르며 썩어질 육의 욕심을 이루어가고 있다. 양들을 이렇게 노략질하고 있는 자를 어찌 참된 목자라 할 수 있으리요마는 기억할 것은 자신이 그런 목자를 따르고 있는 것은 영이 아닌 썩어질 육을 또한 아버지의 나라의 영광이 아닌 이 세상의 헛된 영광을 구하는 거짓된 마음이 이미 자신의 속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격체인 사람이 다른 누구를 탓하리요?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생명의 근원되신 아버지와 그의 아들이시오 창조자이신 그리스도를 아는 자는 이 말씀을 안다면 이를 지키면 은혜와 유익이 있을 것이요, 아버지와 아들을 모르는 자는 말씀에 자신의 생명이 있으니 이 은혜를 입는 것이 유익하다.
어떤 왕이 자기를 비우고 종처럼 낮아져 모든 사람들을 공평하게 섬긴 후 자기의 백성들에게 이런 말을 해주었다. “은혜 받은 자는 나의 빛나는 왕궁 안으로 들어올 것이되 내가 원하는 것은 오직 빛이 나는 돌이니 그것을 가져오는 자는 왕궁으로 들어올 수 있는 상급을 내릴 것이요 빛나지 않는 돌을 가져온 자는 성밖에 거할 것이요 똥이 묻은 돌을 가져온 자는 어두운 곳으로 쫓겨날 것이요 더러운 돌을 가져온 자는 은혜를 거부한 자들과 함께 뜨거운 감옥에 갇힐 것이니라.” 그런데 왕이 베푼 공평한 은혜를 거부한 자들은 빛난 돌을 원치 않았으니 어딜 가든 무얼 하든 누굴 만나든 늘 돌을 주워서 더러운 곳으로 던지며 발로 차버렸다. 하지만 성은을 받은 백성들은 왕을 만족시키고자 나름대로 돌이 있는 곳으로 가서 찾기 시작했다. 그런데 어떤 백성들은 많은 사람들이 가는 곳에는 좋은 돌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몰린다고 생각했으니 큰 문으로 들어가 넓은 길을 걸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은 사람들의 손이 많이 타서 깨끗한 돌이 다 더럽혀졌으니 그곳으로 간 자들은 더러운 돌을 주워 왕의 앞에 내어 놓았다. 한편 대부분의 백성들은 그냥 편하게 자기가 앉아있는 곳에서 주운 돌이 왕이 원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그들이 드린 것은 빛나지 않는 돌이었다. 반면 어떤 백성들은 저 돌은 더럽고 저 돌은 빛나지 않는다며 비판을 즐기되 자기자리에 그대로 앉아 자신이 원하는 곳으로 가 자신이 보기에 빛나는 돌을 주워서 드렸으나 그것은 똥 묻은 돌이었다. 그러나 몇 사람은 빛나는 돌을 얻으려면 반드시 좁은 문으로 들어가 고난의 길을 걸어야 함을 성은의 나무막대기를 보고 깨달았다. 그러므로 그 적은 무리는 그 어느 곳으로도 가지 아니하고 오직 자신이 있는 곳에서 자기의 앞에 있는 나무막대기를 잘 살펴보면서 돌을 주워 자신을 기쁘게 비춰보고 그 돌이 자신을 비추는 거울과 같은 깨끗한 돌을 드렸다. 이에 왕은 약속대로 그 19명에게는 영광스런 상급을 베풀되 다른 사람들의 모든 돌들은 다 버렸으니 향방 없이 달음질하고 허공을 치며 싸운 그들의 수고는 다 헛된 것이 되어버렸다.
이처럼 살고자하는 마음으로 십자가의 보혈을 믿고 영이 거듭나는 은혜를 얻은 자들에겐 이제 혼이 거듭나 새롭게 되는 기쁨과 육이 거듭나 영광에 참여하는 약속이 주어져있다. 그러나 많은 자들이 바리새인과 같은 자신의 의와 생각을 돌이키지 않아도 그리스도께서 받아주시고 아버지께서 자신의 혼과 육안에 임하시어 성전을 삼으신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의인이 아닌 죄인을 부르러 오셨으니 회개치 않는 세리와 창녀와 바리새인들은 불로 멸하시되 돌이키는 돈 벌레와 이방인과 목자들은 세상에서 불러내 자신을 따르게 하시고 아버지께서는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어 품어주신다. 그러나 자기의 의와 생각에서 돌이키는 것이 사람에게 가장 큰 고난이다.
그러므로 좁은 문으로 들어간다는 것이 무슨 뜻이겠는가? 많은 사람들이 왜 멸망으로 인도하는 큰 문으로 들어가며 넓은 길을 찾게 되는가? 왜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겠는가? 그 이유는 사람은 자신이 의롭다는 생각에서 돌이키는 것이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요 또한 자신의 불의와 잘못된 생각을 고침 받을까 두려워하기 때문이니 거듭나고도 말씀에 순종치 못하며 생명과 진리이신 그리스도를 따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자들이 돌이키지 아니한 채로 무엇을 원한다 할 때에 그곳으로 가 오히려 깨끗한 것도 더럽히므로 왕의 앞에 돌을 갖다 놓으니 그리스도께서 어찌 더러운 마음과 혼을 받으실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사람은 한 번 죽은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자신을 돌이키지 못한 자는 혼의 거룩에 이르지 못한 채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되 돌이 더러우니 주님께서 어찌 그 더러운 영혼을 받으시리요? 그럴 수 없도다. 그리하여 자신의 의와 생각을 부인하지 못하므로 그리스도를 따르지 아니하면서 말하고 행한 그들의 모든 수고는 다 헛된 것이요 그리스도의 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니 그리스도를 따르지 아니한 자는 결코 의와 거룩에 이르지 못한다.
게다가 누룩이라는 것은 서서히 퍼져 온 떡을 다 부풀게 하는 것이니 자신을 돌이키지 않은 자들이 아버지의 앞에 나와 주님을 섬긴다면서 많은 말들을 하고 각종 행위를 열심히 드리되 오히려 그들은 말할수록 행할수록 자신과 함께하는 영혼들까지 더럽힌다. 그러므로 그들의 말과 행위로 인하여 공동체 안에 있는 자들도 쉽게 더럽혀짐은 더러워지는 자들도 돌이키지 아니하고 그곳에 있기 때문이요 심지어 자신을 돌이키려는 영혼들까지 위험에 처한다. 하지만 돌이키지 않은 자들은 자신의 말과 행위로 자신과 다른 영혼들을 더럽히고 있음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자신이 빛이 되고 있다고 생각함은 늘 자신이 기준이 되어 자신의 눈에 보이는 돌만 고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좁은 문으로 들어가 협착하고 좁은 길을 걷는 영혼은 오직 그리스도만이 의로우심을 마음으로 믿고 자기의 의와 생각에서 돌이켜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요 그리스도께서는 오직 자기를 부인하고 자신을 따라오는 자에게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거룩한 것을 베푸시니 그는 이제 비로소 말씀과 기도로 또한 인자의 살과 피를 힘입어 자신을 빛나게 가꿀 수 있다. 또한 거룩하게 가꾼 자는 그의 머리 위에서 영광스런 빛이 나기에 자신의 주변에 있는 돌들에게까지 그 빛난 돌을 얻게 해준다. 그러므로 이 첫째하늘에서 가장 거룩하고 귀한 것을 말하며 행하는 자는 자신만이 아니요 자신의 가족과 주위에 있는 사람들도 그 빛과 생명을 얻게 한다.
이렇게 자신의 앞에 있는 그 영광을 소망하는 자는 살고자하는 마음을 가지고 돌을 보았을 때 아무런 설교나 다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그 돌을 들어 빛이 있는지 없는지 자신을 비추어보고 빛이 없는 것은 버린다. 어찌 생명의 말씀과 진리가 아닌 것이 불의한 죄인을 의롭고 거룩하게 가꿀 수 있도록 자신을 비추어주리요? 그러므로 지혜로운 자는 빛나는 돌을 찾았을 때는 우선 자신을 그 돌에 비추어보고 무엇보다 먼저 자신을 깨끗하게 가꾸며 기뻐하되 죽기까지 말씀에 순종하며 진리를 따른다. 그리하여 결국 영혼의 구원에 이른 그가 그 빛난 세마포를 입고 성소로 들어가 아버지의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보며 영광의 자유를 누리는 그 복을 얻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께서는 이 땅에서 얻는 그 기쁨과 아버지의 나라에서 누리는 그 영원한 복을 오직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르므로 이루어지도록 하셨으니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되 자신의 생각과 의의 기준으로 자신이 원하는 말과 행위를 하는 문은 크고 길이 넓기에 자신의 몸을 외식과 불법에 바치는 자가 많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생명의 근원되신 아버지와 그의 아들이시오 창조자이신 그리스도를 아는 자는 이 말씀을 안다면 이를 지키면 은혜와 유익이 있을 것이요, 아버지와 아들을 모르는 자는 말씀에 자신의 생명이 있으니 이 은혜를 입는 것이 유익하다.
끝없이 넓은 어떤 나라의 왕세자가 왕궁밖에 사는 백성들에게 이러한 말을 해주었다. “누구든지 나의 섬김을 받기 원한다면 내가 거룩한 말을 전하며 거룩한 행실을 보여 너희를 섬긴 것처럼 너희도 먼저 다른 사람들을 섬기어라. 그러면 너희는 나의 왕궁으로 들어와 왕자와 공주로 세움을 받을 것이니 너희는 나의 명을 직접 받을 수 있는 영광을 얻어 너희가 거룩한 말과 행실로 섬겼던 사람들을 계속 섬길 것이니라. 그러나 만일 자신이 원하는 말과 행위를 하므로 자신이 섬김을 받은 교만한 자들은 부끄러움을 당하리니 나의 왕궁 안으로 들어오지 못할 것이니라.” 왕세자의 말을 듣자 백성들 가운데 첫 번째 사람이 종처럼 낮아져 오직 왕세자의 말만을 전하며 거룩한 행실을 보여 다른 사람들을 섬겼다. 한편 두 번째 사람은 첫 번째 사람에게 자신이 거룩한 말과 행실로 섬김을 받은 대로 자신도 역시 종처럼 낮아져 다른 사람들을 섬겼다. 그러나 세 번째 사람들은 자신이 높아지는 것이 기뻤으니 섬기기보다는 오히려 섬김을 받고 싶었다. 심지어 왕세자보다 더 높아지고 싶었으니 그들은 자신이 왕세자의 종이라고 말하며 행했으나 그것은 오직 자신을 높이는 말과 행위였다. 그러므로 그들로 인해 섬김을 받지 못한 사람들은 왕의 말을 듣고 순종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의 말을 듣고 따르며 그들을 섬겼다. 이에 왕세자는 첫째 사람을 왕궁으로 불러 자기의 남동생으로 세운 후 어명을 내렸으니 그는 깨끗하고 올바른 마음에서 나오는 거룩한 말과 행실로 둘째 사람을 섬기는 왕자가 되었고 둘째 사람은 왕자가 된 첫째 사람에게 계속적으로 이런 저런 말을 듣고 순종하며 그 넓은 나라의 백성들을 섬기는 왕세자빈이 되었다. 그러나 자신이 하고 싶은 말과 이루고 싶은 계획을 통해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을 섬기게 만들었던 사람들은 왕세자빈의 섬김을 받으며 가장 낮은 백성으로 살거나 감옥에 갇히거나 형벌을 받았다.
이와 같이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말씀은 오늘 잠시 육신을 입고 사는 이 첫째하늘에서의 섬김과 내일 영원히 거하게 될 셋째하늘에서의 섬김의 비교이다. 그런데 사람은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전하거나 자신이 원하는 행위로서가 아니요 오직 살고자하는 마음으로 자기의 생각에서 돌이키고 주님을 따르며 그리스도께 받은 아버지의 생명의 말씀과 진리로 또한 거룩을 구하는 기도로 종처럼 낮아져 자신을 비워야 다른 사람들을 섬길 수 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시간과 공간의 한계가 없는 영원한 셋째하늘에서 자신이 누구에게 섬김을 받고자 하는 자는 이 첫째하늘에 있을 때 오히려 종같이 낮아져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사람들을 섬겨야 한다. 즉 자기가 원하는 말과 자기를 의롭게 보이는 행위와 육적인 기도를 함이 아니요 오직 말씀과 진리만을 전하며 또한 말씀에 순종하는 거룩한 행실을 하며 거룩을 구하는 기도로 섬겨야 한다. 그런 후 그리스도께서 그를 자신의 형제로 높여주시는 날에는 이 첫째하늘에서 섬긴 자를 셋째하늘에서도 그리스도께 받는 말씀으로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계속 섬기게 된다.
이처럼 이 첫째하늘에서 그리스도를 위한 정결한 처녀들의 거룩을 위해 말씀과 진리로 섬긴 영혼의 인도자들은 셋째하늘에 갔을 때 이방인의 장자로서 아버지와 아들의 섬김을 받으며 자신이 섬겼던 신령한 지체들에게 말씀과 진리를 전하되 한 몸의 인도자들에게 섬김을 받으며 다른 영혼들을 기도로 섬긴 그리스도의 신령한 몸은 셋째하늘에서 장자의 섬김을 받으며 온 백성들을 섬기게 된다. 그러나 이 땅에서 자신이 섬김을 받은 인도자들은 거룩한 육체를 통한 영광의 자유에 참예하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의문의 율법을 전하며 섬김을 받은 구약의 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은 독사의 자식들이니 유황불 못의 뜨거운 섬김을 받지만 이 첫째하늘에서 신령한 율법으로 백성들을 섬긴 선지자들은 셋째하늘에 갔을 때 유대인의 장자로서 여호와의 섬김을 받으며 자신이 섬겼던 12지파에게 영원히 율법을 선포한다. 왕이 백성의 말에 순종함이 아니요 백성이 어명을 듣고 따르며 없는 사람이 가진 사람을 대접함이 아니요 가진 사람이 없는 사람을 대접할 수 있으니 셋째하늘에서도 말씀으로 섬기는 자가 아래가 아니요 말씀을 전하는 그가 오히려 더 위에 있는 거룩한 자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 세상에서는 오직 오늘 하루를 살되 아버지의 나라에서는 영원히 사니 이 땅에서 대접하는 자는 짧은 시간을 대접하고 하늘에서는 영원한 시간을 누구에게 대접을 받는다.
하지만 이 땅에서 참으로 자신의 마음과 정성과 뜻을 다해 섬기려는 자들이 몇 없으니 그 이유는 말씀을 전하는 자들은 말씀보다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하며 그리스도의 의보다 자기의 의를 드러내고 싶어하고 기도하는 자들은 다른 영혼들의 거룩을 위해 간구하기보다는 썩어질 육과 세상의 헛된 것을 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기의 말과 계획을 아버지의 것으로 바꾸고 늘 그것을 이루어가며 말씀과 기도로 섬긴다 하되 사실은 불법을 행하며 대접받고 있는 것이니 말씀을 이용해 영광을 취한 자들은 새 예루살렘성전 밖에서 부끄러움을 당하거나 혹은 슬피 울며 이를 가는 어두운 곳이나 유황불 못의 가장 뜨거운 곳에서 불법을 행한 만큼 대접을 영원히 받는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생명의 근원되신 아버지와 그의 아들이시오 창조자이신 그리스도를 아는 자는 이 말씀을 안다면 이를 지키면 은혜와 유익이 있을 것이요, 아버지와 아들을 모르는 자는 말씀에 자신의 생명이 있으니 이 은혜를 입는 것이 유익하다.
어떤 거룩한 자가 늘 선한 마음을 품고 올바른 생각과 말과 행위만을 하며 죄와 실수를 저지르지 않았다. 그런데 그 성도가 가만히 보니 어떤 사람이 자신의 욕심과 교만을 이루고자 거짓말을 했다. 이에 거룩한 자는 죄에는 사망의 심판이 있음을 알기에 그를 불쌍히 여겨 그가 생명의 심판에 이르도록 하얀 책을 펴 지적해주었다. 그러나 범죄한 자는 성도에게 지적 받고도 생각과 말과 행위를 돌이키지 못함은 욕심과 교만을 돌이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과 함께하던 자들은 돌이키지 못한 자를 옳지 않다고 판단했으나 책으로 지적해준 성도는 의롭고 온전하다고 판단했다. 이번에는 자신을 돌이키지 못한 그 사람이 동일한 이유로 자신처럼 거짓말하는 다른 사람을 보았다. 이때 돌이키지 못한 자는 입을 닫지 않고 오히려 하얀 책을 펴더니 거짓말은 옳지 않다고 되어있는데 당신은 어찌 이렇게 행하느냐며 지적해주었다. 또한 상대방의 거짓말에 대해서는 소리를 높여 비판하되 자신은 믿는 자이니 거짓말을 해도 죄가 없으며 오히려 의로운 자라고 여겼다. 그러자 지적 받은 사람은 마음에 들보를 그대로 놔두고 있는 사람에게 당신이나 잘하라고 했고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그에게 어리석은 바리새인이라는 판단을 내렸다.
이와 같이 다른 사람의 잘못된 생각과 말과 행위와 실수를 어찌 잘못된 생각과 말과 행위와 실수를 저지르고 있는 자가 판단하거나 혹은 비판하는 것이 옳겠는가? 그러므로 거룩하고 정결한 공동체와 또한 그 한 몸에 거하고 있는 거룩한 가정에서는 다른 사람의 죄와 허물을 보았을 때 우선 자신에게 그와 같은 것들이 있는지 없는지를 돌아보는 것이 옳다. 또한 자신이 그 십자가의 길에서 말씀과 기도와 인자의 살과 피로 온전해졌을 때에도 자신의 의와 생각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요 오직 의로우시고 거룩하신 아버지의 말씀을 기준으로 하는 것이 옳다.
한편 온전한 사람이 잘못된 생각과 말과 행위와 실수를 한 그 영혼에게 이것은 잘못되었다 지적할 때는 살고자하는 마음을 가지고 자신의 생명을 위하여 특히 그것을 돌이키는 것이 옳다. 그리고 그가 은혜를 받은 자라면 자신을 온전함과 거룩에 이르도록 자신을 지적해준 지체에게 감사한 마음을 품는 것이 마땅하다.
사람은 이렇게 거룩하고 신령한 지체들과 함께 하며 자신도 역시 말씀에 순종하며 또한 아버지께로 부르짖으며 또한 인자의 살과 피를 의지하므로 아버지의 뜻에 이른다. 그러면 아버지께서는 거듭난 후에 의롭다 하신 영혼들과 거룩하다 하신 영혼들이 육신의 장막에서 나와 그리스도의 심판대에 섰을 때 생명의 심판을 내리시니 거룩하다고 인정받은 자들은 그리스도와 같은 거룩한 육체를 입는다. 그리하여 영광의 자유에 이른 자들이 천국에서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함께 다스린 후 셋째하늘에 올라갔을 때에 24장로와 장자와 자녀와 또한 신령한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아버지와 아들의 품에 영원히 함께 거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반드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아버지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갈 수 있으니 영의 거듭남을 얻은 자들 가운데 육신의 기회가 있을 때 혼의 거듭남을 이루지 못한 자들은 온전하게 되는 그 과정에서 거룩을 이루므로 온전케 된다. 그리하여 그 과정에서 호리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은 자들이 자신처럼 온전케 된 의로운 영혼들과 함께 셋째하늘에서 아버지의 의로운 백성으로서 영원히 거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와 아들께서는 사람들이 더 큰 구원에 이르길 원하시니 이 세상에 있을 때 거룩에 이르므로 아버지의 백성보다는 아버지의 자녀가 되는 그 권세와 언약을 이루기 원하신다. 그러므로 피의 은혜로 영이 거듭난 백성들에게 그리스도께서 늘 지적하시는 것은 그들의 깊은 속에 있는 마음과 혀와 생각이다. 그리하여 그것을 돌이키는 자들은 나중에 그리스도와 함께 성소에서 아버지의 자녀요 그리스도의 형제자매요 신령한 교회로서 거하겠고 돌이키지 못하는 자는 시온산에 있는 그 새 예루살렘성전으로부터 먼 곳에서 거하게 된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생명의 근원되신 아버지와 그의 아들이시오 창조자이신 그리스도를 아는 자는 이 말씀을 안다면 이를 지키면 은혜와 유익이 있을 것이요, 아버지와 아들을 모르는 자는 말씀에 자신의 생명이 있으니 이 은혜를 입는 것이 유익하다.
판단의 기준과 도구는 오직 아버지의 입에서 나온 의로우시고 거룩하신 말씀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판단은 아버지께로 가까이 가기 원하는 한 영혼이 어떠한 말과 행동을 하였을 때 그것을 말씀의 기준으로 옳다 틀리다 판단을 내려서 옳은 것을 옳다고 말해주며 틀린 것은 틀린 것이니 더 이상 그런 말을 뱉거나 그런 일을 행하지 말라고 말씀을 전해주는 것이다. 이때 그 판단의 말씀을 통해 돌이킨 영혼은 점점 더 거룩해져 아버지께로 더 가까이 나갈 수 있게 된다.
하지만 거룩하고 정결한 공동체에서 말씀으로 판단을 할 때나 판단치 않을 때에라도 거기에 비판이 있으면 안 된다. 그 이유는 자신의 영혼뿐만 아니라 다른 영혼들도 비판을 통해 서로를 선악의 죄 가운데로 더욱더 낮추게 하기 때문이다. 즉 판단이 아닌 비판을 하게 되면 더욱더 비판을 불러들여 그 죄가 비판을 즐긴 영혼들을 더욱더 옭아맨다. 또한 판단이 아닌 비판은 공동체에 거하는 자들을 생명이신 그리스도께로부터 더욱더 멀리 이끈다. 즉 거룩하신 말씀에 순종하거나 하나되지 않는 자들이 어찌 그리스도께로 또한 아버지께로 가까이 거할 수 있으리요?
예를 들어 거듭남의 은혜를 얻은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있다. 이때 남자가 여자에게 판단이 아닌 비판을 하니 여자는 저 아래로 내려간다. 하지만 비판 받은 여자만 아래로 내려가는 것이 아니요 비판한 그 남자도 여자와 함께 내려가되 비판한 남자는 비판을 받은 여자보다 더 아래에 거하게 된다. 남자가 먼저 죄를 불러들였기 때문이요 여자는 판단이 아닌 비판을 붙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른 영혼들에게 판단이 아닌 비판을 하는 자는 생명을 위하여 서로가 서로에게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한다.
게다가 원수는 늘 참소하는 자이니 그들의 말과 행위를 항상 듣고 보면서 때를 기다린다. 그러다 나중에 때가 되었을 때 혹은 덫을 만들어 잡은 후에 비판한 자들이 돌이키지 못하도록 한다. 또한 공동체에서 비판한 자는 나중에 자신도 판단이 아니라 비판을 받게 된다. 즉 비판한 자가 나중에 범죄했을 때 누군가가 그에게 말씀으로 판단을 주는 대신 비판을 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은 말씀을 알고 있음이 아니요 오직 아는 것을 순종하므로 거룩해진다. 그러므로 사람을 씻어 깨끗하게 하는 것은 오직 말씀의 판단이요 반대로 비판은 상대와 자신을 더욱더 죄 가운데로 들어가게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비판한 자는 자신이 비판한 만큼 비판을 받은 자는 자신이 비판을 받은 만큼 그 죄로 감싸이는 것은 그들이 말씀이 아닌 선악을 입에 담았기 때문이요 또한 어두운 세상으로 더욱더 깊이 빠져드는 것은 비판하는 자들이 거할 곳은 말씀의 판단이 있는 거룩한 공동체가 아니요 오직 사망으로 들어가는 이 세상이기 때문이다.
비판과 판단은 이처럼 한 사람의 생명과 관계된 중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누구를 판단할 때에나 판단하지 않을 때에도 비판은 안 하는 것이 옳고 판단은 마음의 문을 열고 듣되 비판은 육의 귀로도 듣지 말아야 한다. 또한 판단을 해야 할 때에도 오직 말씀의 판단을 하되 말씀을 모르는 자는 판단도 안 하는 것이 자신과 상대방의 생명을 위하여 참으로 옳고 지혜로운 것이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영원 전부터 아버지의 품에 함께 계셨으며 또한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낳으시고 자신의 말씀과 권위를 아들에게 주셨으니 그리스도께서는 진리를 알고 계신다. 또한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순종하여 아버지의 뜻을 이루셨으니 자신부터 의롭고 거룩하다. 즉 그리스도께서는 판단과 심판의 자격을 갖추고 계시니 공동체에서 거룩에 애쓰는 자들에게 판단하시고 또한 나중에 심판대에서는 각 사람의 영혼에게 영원한 생명과 사망의 심판을 내리신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몸에 거하는 지체들을 판단하시며 심판하실 때 자신의 생각이 아니요 오직 아버지의 말씀으로 하시니 그것은 비판이 아니라 판단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거룩하고 정결한 자들에게 주시는 판단과 심판대에서 내리시는 심판은 모두 다 공의롭고 정직하고 공평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목적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말씀의 판단과 심판을 내리시니 그들이 받은 완전한 판단과 심판을 깨닫고 돌이키므로 온전케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행하신다. 그러나 그것은 오로지 참 아들만 감사히 받되 사생자들은 받지 못하니 많은 자들이 살고자하는 마음이 없기에 육에 있을 때 판단을 받으면 더욱더 실망하고 장막에서 나와 그리스도의 심판대에 섰을 때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그 실망은 그들이 받은 판단과 심판이 잘못되었기 때문이 아니요 마음 없이 생명의 아버지를 헛되이 붙들기 때문이다. 즉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그것을 원치도 행치도 않으며 오히려 자기의 마음을 행위와 세상에 두고도 생명의 아버지께로 가까이 가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생명의 근원되신 아버지와 그의 아들이시오 창조자이신 그리스도를 아는 자는 이 말씀을 안다면 이를 지키면 은혜와 유익이 있을 것이요, 아버지와 아들을 모르는 자는 말씀에 자신의 생명이 있으니 이 은혜를 입는 것이 유익하다.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신령한 율법을 이루셨으나 의문의 율법은 폐하셨으니 만일 그 두 가지의 율법이 동일한 것이면 모순이 되어버리고 만다. 아버지의 말씀에는 이렇게 모순처럼 보이는 것들이 있으니 교만한 자는 깨달음을 구하기보다 자신이 옳음을 나타내고자 거룩한 말씀을 이용한다. 또한 사람은 행위로는 의롭게 되지 못하나 행함이 있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했으니 행위와 행함은 다른 것이어야만 모순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행위라는 것은 아버지께서 명하시지 않은 것을 행하는 것이니 사람의 기준으로 선하고 옳게 보이는 것도 행위일 뿐이다. 반면 믿음의 행함은 아버지의 약속을 믿고 순종하는 것이니 예를 들어 아버지께서는 세상을 물로 심판하시기 전에 세상에서 돌이켜 방주로 들어가라는 말씀을 미리 전하셨다. 이때 믿고 들어간 자는 의로 여기심을 받았으나 안 믿는 자들과 믿는다며 안 들어간 자들은 세상과 함께 사망으로 내려갔다. 마찬가지로 소돔과 고모라가 불로 멸망 당한다는 아버지의 말씀을 들었을 때도 이와 같았으되 소돔과 고모라는 마지막 때의 예표이니 하늘에서 내리는 유황비로 세상이 멸망을 당하기 전에 심판의 말씀을 믿고 순종할 자들을 위해 마지막 때에 예비하신 방주가 바로 광야의 예비처이다.
비판치 말라는 것도 이렇게 모순처럼 보이는 말씀들 가운데 하나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땅에 계실 때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옳고 그른 것을 말씀을 기준으로 스스로 판단하라고 말씀하셨고 거룩하신 영을 통해 그리스도의 계시를 받은 바울도 스스로 판단하라는 말씀을 늘 거룩하고 신령한 교회에 전했다. 그러나 판단을 명하신 그리스도께서 비판하지 말라고도 하셨으니 모순이 되지 않으려면 판단과 비판이 서로 다른 것을 의미해야 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판단과 비판의 각기 다른 정의를 깨달으면 비판은 멈추되 판단은 계속하므로 자신과 공동체의 거룩을 유지할 수 있다.
우선 판단이라는 것은 다음과 같이 믿는 자들이 그리스도의 거룩한 한 몸으로 모이는 상황에서 깨달을 수 있다. 예를 들어 거룩하고 정결한 공동체와 함께하는 한 지체가 간음을 범했을 때 그 영혼을 앞에 두고 다른 지체들과 함께 있을 때 오직 말씀을 편다. 그리고 간음한 그 영혼에게 이르길 그가 아버지께로 범죄한 것이요 또한 거룩한 지체로서도 범죄하였으니 돌이키라는 말씀을 명한다. 이처럼 오로지 말씀으로 행하는 그것은 판단이 되는 것이다.
이때 말씀으로 판단을 받은 자가 살고자하는 마음을 가지고 거룩을 이루기 위해 돌이킬 때에는 모든 지체들이 그를 따뜻하게 받아준다. 그리하여 돌이킨 자는 다른 자들과 함께 그 생명의 길을 계속해 걸을 수 있다. 그러나 만일 판단을 받고도 돌이키지 아니할 때에는 두 번 세 번 다시 말씀으로 그에게 명한다. 하지만 말씀으로 판단을 받았음에도 끝까지 돌이키지 아니하는 자는 한 몸에서 그를 내어 쫓는 것이 옳음은 적은 누룩이라도 온 덩어리에 퍼지기 때문이다.
반면 비판이라는 것은 이런 것이니 공동체의 한 지체가 똑같은 간음의 죄를 범했다. 이때 말씀으로도 그를 명하여 돌이키라고 똑같이 말하되 범죄한 것에 대하여 그 영혼에게 어떠한 이유나 어떠한 말이나 어떠한 행위를 통해 그의 범죄한 모습을 가릴 수 있도록 말한다면 그것은 비판이다. 또한 그에게 말하길 범죄하게 된 이유를 대라고 하는 것도 역시 비판이되 간음한 자가 간음한 자에게 말씀이 이러하니 돌이키라고 하는 것은 세상말로 내로남불이니 곧 바리새인의 비판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비판하지 말라고 하셨으며 제자들에게 계시를 주실 때도 역시 비판치 말라고 명하셨다. 그러므로 거룩한 공동체에 있는 어느 누구도 그리스도의 명령에 불순종하는 그런 비판적인 말들은 조금도 들을 필요가 없다. 사람은 사람의 말과 생각과 의와 주장을 듣고 의와 생명에 이르는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께서 전하신 말씀에 순종하므로 이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은 하나님보다는 사람을 두려워하며 하나님과 타협하기보다 사람과 타협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러므로 무엇이든 언제든 눈에 보이는 사람들에게 맞추는 자는 어떻게 사람들을 판단할 수 있냐고 생각하되 판단하는 것은 사람이 아니요 말씀이다. 또한 말씀으로 판단을 받은 그 영혼을 그의 안에서 살피시는 분이 계시니 그 영혼의 마음의 판단은 오직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 내리실 것이요 그리하여 한 몸에 거하는 자들은 오로지 비판이 아닌 판단만을 하는 것이 옳다. 그래야 자신도 원수의 선악에 의해 간음하는 자가 되지 않도록 그것을 보며 교훈을 삼을 것이요 또한 그 죄가 거룩한 공동체에서 더 이상 썩지 아니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고자하는 마음이 없거나 포기한 영혼들은 자기의 의와 생각에서 돌이켜 그리스도를 따르지 아니하며 또한 사람을 두려워하고 사람과 타협하는 데서도 돌이키지 못한다. 그러므로 아버지께서는 그런 자들에게는 말씀의 깨달음을 허락하시지 아니하신다. 그리하여 그들은 오히려 자기의 의와 깨닫지 못하는 말씀들을 합해 믿는 자들끼리 서로 거부하며 비판하며 싸운다.
예를 들어 어떤 자는 비판하지 말라는 말씀의 깨달음을 얻지 못하니 자신은 판단하지 않겠다느니 완전한 사람이 없다느니 그냥 좋은 게 좋은 거라는 말들을 하며 범죄한 그 영혼에게 명하여 돌이키라는 말조차 전하지 못한다. 게다가 어떨 때는 가장 의롭게 보이는 말로 즉 모든 심판은 하나님이 행하시니 우리는 무조건 용서와 사랑을 베풀고 그저 기도하자며 말씀의 판단을 말씀의 비판으로 바꾸므로 자신이 아버지보다 더 의로운 자리에 앉는다.
반대로 어떤 자는 판단의 정의를 모르니 판단하거나 끊어내라는 그 말씀들을 가지고 범죄한 영혼들을 판단하되 아직까지 그 죄를 끊어내지 못한 자신의 생각과 의와 감정과 경험으로 판단한다. 특히 자신의 생각과 관점이 다른 자들에 대해서는 더욱더 강하게 판단하되 늘 거룩하신 말씀들을 찾아 이용한다. 그러면서 자신이 심판보좌에 앉아 다른 사람들을 심판하는 그 행위를 육에서 나와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설 때까지 멈추지 아니한다.
그런데 이렇게 판단의 의미를 모르고 말씀으로 판단하기를 즐기는 자들이 만일 권위를 가지고 있으면 반드시 사람의 피를 흘리게 되어있다. 그러므로 사람의 역사가운데서 구약의 제사장으로부터 수많은 자들이 자신은 하나님을 잘 믿는다며 칼로 찌르거나 불로 태워 다른 믿는 자들의 피를 흘리고 자신도 그 사망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이 마지막 때에는 그것이 참으로 간편해졌으니 교만한 바리새인들의 자손들은 키보드와 마우스로 이 순간에도 그 피 흘림을 멈추지 않고 있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생명의 근원되신 아버지와 그의 아들이시오 창조자이신 그리스도를 아는 자는 이 말씀을 안다면 이를 지키면 은혜와 유익이 있을 것이요, 아버지와 아들을 모르는 자는 말씀에 자신의 생명이 있으니 이 은혜를 입는 것이 유익하다.
영원 전부터 영원까지 스스로 계시며 오직 홀로 한 분 신으로서 모든 생명의 근원되신 아버지의 독생자이신 그리스도께서는 태초부터 아버지의 품에 함께 계셨으니 완전한 하나님이셨다. 동시에 에덴에서 둘째사람의 육과 마음을 지으시고 그 깨끗한 마음 안에 생기를 불어넣어주신 후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들을 자신의 십자가로 거룩케 하여 아버지의 거룩한 자녀가 되는 그 부활의 생명을 주시고자 우리와 같은 육체를 입고 이 땅에 오셨으니 완전한 사람이셨다.
그러나 아버지의 뜻과 아버지의 그 기쁘신 뜻을 이루는 십자가의 길이 그리스도께 참으로 고난스러운 것이었음은 아버지의 품에서 낳으신 아들이시라도 연약한 육을 입고 계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이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십자가의 길을 자기 혼자서 걷거나 혹은 자기가 원하는 대로 걷지 않으시고 오직 창세전에 유대인과 이방인을 위해 그 십자가의 길을 정하신 아버지의 계획에 따르며 자신의 안에 계신 거룩하신 영의 인도하심에 이끌려 그 순종의 길을 끝까지 걸어 결국에는 부활로 온전하게 되셨다.
그런데 초대교회 시대와 모든 일곱 교회시대에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르며 그 고난의 길을 걸은 자들이 있었다. 또한 이 마지막 때에도 있다. 그러므로 그 고난의 길을 걸으신 그리스도를 인도하셨던 거룩하신 영께서는 지금도 십자가의 길을 걷는 자들을 인도하시며 도우신다.
하지만 그들이 비록 아버지의 뜻을 이루어드리며 아버지의 그 기쁘신 뜻에 이르고자 십자가의 길을 걷는다 할지라도 그리스도처럼 연약한 육을 입고 있다. 그러므로 그 연약함으로 인하여 그들은 오늘 영육간의 일들을 염려하며 그 십자가의 길에서 내일 있을 일들도 염려한다. 그러나 십자가에 담긴 세 면의 비밀을 깨닫는 자는 모든 염려를 이기고 끝까지 그 마지막으로 나갈 수 있다.
우선 그리스도께서는 세 개의 십자가에서 가운데에 달리셨으니 그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요 이 세상을 위한 십자가이다. 그러므로 아버지께서는 아들의 그 십자가를 통해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 가운데서 셋째하늘의 온전케 된 의로운 백성이나 혹은 자신의 거룩한 자녀들로 삼으신다.
한편 오른편의 강도가 달렸던 것은 십자가의 길을 걷는 자들을 위한 십자가이니 그리스도의 피로 거듭난 후 십자가의 첫사랑을 잊지 않고 살고자하는 마음을 가지고 거룩에 이르고자 하는 자들도 오로지 그 십자가의 희생만을 생각하며 나아가야 한다.
반면 왼편의 십자가는 오로지 이 세상의 십자가이니 그 십자가를 지는 자는 사망에 이를 것이요 오직 원수와 함께 영원한 고통가운데 거하게 된다. 그러므로 누가 그 세상의 십자가를 지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십자가가 사람의 눈에는 매우 영광스럽게 보이니 많은 자들이 그 길로 가며 또한 사람은 누구나 오른쪽이나 왼쪽의 십자가를 지게 되어 있으나 많은 자들이 그것을 진다.
하지만 거룩하신 영께서는 거룩에 이르기 원하는 영혼들을 인도하시며 도우시는 보혜사이시니 고난과 영광으로 향하는 그 길을 걷는 자들이 늘 그리스도의 오른편에 있기를 원하신다. 또한 마지막에 그 십자가의 희생만을 생각하며 나가기를 원하시되 아버지께서 이미 모든 것을 예비하셨으니 오늘의 염려를 하지 말고 내일의 은혜를 구하길 원하신다. 그러므로 오직 믿음으로 모든 것을 아버지께 맡기는 것이 오늘의 걱정을 이기며 내일의 은혜 즉 그 기쁘신 뜻에 이르는 길이다.
그러나 육의 연약함과 믿음의 부족함으로 인하여 오늘의 염려를 이기지 못하며 내일 있을 일들을 자신이 계획하는 자들이 있다. 하지만 깨달아야 할 것은 사람은 그 길에서 내일 있을 일을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내일 일을 계획하지도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일의 일을 사람인 자신이 계획한다면 그것은 어리석은 것이요 잘못된 것이 되어버린다. 그리하여 사람은 오로지 아버지의 은혜만을 구하되 오늘의 은혜를 구하지 말고 내일의 그 은혜를 구하는 것이 옳다.
또한 어린아이는 오늘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어디로 갈까를 고민하지 아니함은 이미 계획을 세워놓은 그의 부모로 인함이다. 그러므로 어린아이는 오히려 ‘내가 내일 무엇이 되겠노라. 미래에 무엇을 하겠노라.’고 말한다. 그리하여 어리석은 자들은 매일 매일 그날의 은혜를 구하되 아버지를 믿고 그리스도를 따르며 거룩하신 영께로 이끌리는 자들은 내일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그 꿈을 위하여 거룩에 애쓰며 오로지 그리스도의 안에 있는 그 은혜만을 구한다.
그러면 아버지께서는 누구든지 오른쪽의 십자가를 지고 그 꿈을 품은 자들에게는 늘 은혜를 베푸시니 그 고난의 길이 오히려 즐겁고 형통하게 된다. 또한 자기의 마음도 원하되 연약한 육도 그것을 자원하게 된다. 그리하여 마음도 육도 자신이 원하는 그 고난의 길을 즐겁고 형통하게 걸은 자들이 자신의 안에 있는 원수의 죄와 이 세상을 이기므로 오늘 이 땅에서 그의 몸이 성전이 되어 마음의 천국을 이루고 내일 아버지의 나라에서 그 거룩한 육체의 생명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만일 그들 가운데 첫사랑은 잊지 않고 있으나 참으로 육의 연약함을 이기지 못하며 또한 믿음이 없다 하는 자들은 살고자하는 마음을 가지고 말씀의 능력과 십자가의 능력을 통해 믿음을 키우며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바라보되 오직 한 몸으로 나아가고자 애씀이 옳음은 거룩하고 약한 다른 지체들의 도움을 받아 함께 그 고난과 생명의 길을 걸을 수 있는 기회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
생명의 근원되신 아버지와 그의 아들이시오 창조자이신 그리스도를 아는 자는 이 말씀을 안다면 이를 지키면 은혜와 유익이 있을 것이요, 아버지와 아들을 모르는 자는 말씀에 자신의 생명이 있으니 이 은혜를 입는 것이 유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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