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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관두기 전에 또.

내년도 수첩을 샀다.

내 뜻과 상관없이 아주 멀쩡한 걸로 샀다.

회사 로고가 찍힌 것은 아니되 최대한 헐값인 걸로 장만하려하였으나, 나의 계획과는 상관없이 아주 삐까하고 고급스러운 수첩이다. 이 수첩에서 칼라프린트 빼고, 양장 겉표지빼고, 빠닥빠닥한 종이 질 빼고하면 내가 원하는 수첩이 되겠는데, 수첩 만든 사람 말로는 만드는 단가는 얼마 안 들었고 후원금이 더 많이 포함된 거라고 한다. 후원금 낼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첩 안에 다달이 적힌 비장한 문구들을 보면서.

 

해마다 새 수첩을 사면서 어떡하면 회사 로고 찍힌 것은 아니되 최대한 싸구려를 살 것인가 궁리한다. 수첩 가격이 만만치 않은 것도 있지만, 그것보다는 내 취향이 싸구려 취향이기 때문이다. 마분지 겉표지에 갱지 속종이면 딱이겠는데, 요즘은 그런 것도 공산품은 없고(2,000원 쯤 하는), 예술인이 만들어 벼룩시장에 내놓고 만오천원을 받는다. 꽥.

 

이런 궁리를 할 때마다 떠오르는 것이 있다.

영화 <청춘스케치(리얼리티 바이츠)>, 위노나 라이더가 두꺼운 수첩(분명히 내용도 이리저리 정신없이 빽빽하게 차여있을 거라 상상이 되는)과 펜을 들고 골몰하는 모습이 사랑스러워 벤 스틸러가 뒤에서 허리에 팔을 두르며 껴안는다. 그러면서 2년 전 수첩을 쓰고있냐고 놀라고(그 영화에서 벤스틸러는 잘나가는 여피였지) 위노나 라이더는 흐흐흐흐 하고 웃음을 터뜨리는데, 당시 영화를 본 모든 x세대 여자들이 위노나 라이더와 자기를 등치시켰던 것처럼, 순간 나도 당장 2년 전 수첩을 찾아써야겠다는 충동이 일었었다.

매번 수첩을 살 때마다 새로 사지 말고 올 해 것 그대로 써볼까,하는 갈등을 25초 쯤은 한다.

 

꼭 위노나 라이더 때문만은 아니더라도, 이대로 올해 수첩은 무용지물이 되는 연말이면 곳곳에 텅빈 수첩이 무척 아깝다. 내년에도 쓴다고 해도 넉넉하게 쓸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새 수첩을 사서 새로 적기 시작하는 기분도 삼삼하지. 핸드폰이 있기 전엔 해마다 주소록에 이름들을 새로 적어가며 그 명단들의 의미를 새삼 되새기곤 했는데, 이젠 핸드폰이 줄줄이 번호를 기억하고 있으니 주소록 명단들의 의미가 시들시들하다. 핸드폰이야말로 깔끔이 관둬버리고 싶은 흉물이다. 나만 없애는 게 아니라, 전 지구상에서 싹 사라져버렸으면 싶은.

얼마전에 <라빠르망>을 다시 보며, 불과 얼마전의 영화인데도 단지 핸드폰이 없다는 차이점 하나로 공중전화를 찾아 뛰어다니고 무지 찾아헤매지만 늘 엇갈리는 걸 보고, 핸드폰 하나만 있으면 쟤네들 금방 다시 만나 사랑의 재회를 했을텐데 싶은 것 보다, 핸드폰 하나만 없어도 저렇게 풍성한 우연과 비밀과 이야기와 로맨스가 나오는데 핸드폰이 다 잡아먹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갓댐 핸드폰.

 

한 해가 가고 새 수첩을 사는 이 즈음이면, 곧 서랍에 쳐박히거나 쓰레기통에 쳐박힐 올 해 수첩을 1월부터 넘기며 '올해 베스트 영화'나 '베스트 액터/액트리스'를 꼽는 행사를 가져줘야하는데, 벌써 몇 년 째 못 하고 있다. 덩달아 이거 하면서 술먹는 재미도 잃고.

내년엔 할 수 있을라나.

 

전수찬 말이, 얼마전 염승주를 만났는데, 그는 여전히 올해 베스트 무비가 어쩌고 베스트 액터가 어쩌고 떠들며 술을 마신다고. 뭐라더라, 귀여운 로맨스물을 하나 꼽으며 올해 베스트 영화라고 했다는 것 같은데, 영화 제목 기억이 안난다. 그가 <도니 다코>를 두고 올해 최고 영화라고 떠들었던 몇 년 전이 기억난다. 그 말에 나도 그 영화를 보았고, 무지하게 재밌어서 나도 올해 베스트 탑 5안에 꼽았었다. 나의 2005 베스트 무비는 본 것이 없어서 꼽기도 어렵지만, 아녜스 자우이의 <룩 앳 미>가 문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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