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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두어달 전, 학교에서는 새 선생을 공채하였다.
지원한 사람들 중에 한 명이 나의 과 후배였다.
이력서에 써있는 사항을 보지 않았다면, 내가 졸업한 연도에 입학한 그녀를 나는 몰랐을 것이다.
그 여자는 마지막 심층 면접 순서까지 남았는데 결국 떨어졌다.
아이들에 대해 심드렁했던 그녀 자신도 채용을 별로 원하지 않았었다.
학교에서 며칠 지내신 소감이 어때요,하고 물으면 대부분은 입을 벌려 웃는다.
아이들이 참 이뻐요,란 소리가 보통 나온다.
그런데 그 여자는 그랬다.
저는 사실 아이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아이들을 두려워하는 편이에요.
아이란 존재도 잘 모르겠고, 어떻게 대해야할지도 모르겠어요.
안경을 추스리며, 어깨에 고개를 파묻었다 꺼내며 그녀는 말했다.
몇년 전, 내가 그 면접을 받았을 때, 나는 그랬다.
아이들 뒷통수가 예뻤어요.
나는 사실 아이들이 달려와 나한테 이것저것 묻거나 같이 놀자고 할까봐 겁났었다.
아이들은 낯선 어른한테도 서슴지않고 매달리거나 깔깔 웃으며 말을 걸었었는데, 거기서 난색하는 게 얼굴에 비치면 채용에 불리할 것 같았고, 혹은 잘못 걸려 정말 같이 놀아줘야한다면 귀찮아서 어떡하냐는 걱정이었다. 아이들이 다른 데 애들 같지 않고(?) 순진하다는 생각은 하고 있었다. 나는 쌀을 살 수 있으면서 동시에 퇴근이 이르고 방학이 있어 소설을 쓸 수 있는 그 직업에 군침을 흘리고 있었던 중이었다.(는 생각은 정말 한참 뭘 몰랐던 생각이었지. 왠 이른 퇴근)
저 여자가 저렇게 솔직하게 얘기하는 걸 보니 일단 돈 버는 일로 발등에 불이 붙진 않았나보다.라는 생각 가장 먼저.
며칠 전 고금과도 얘기하고, 그리고 남편과는 주기적으로 하는 얘기인데,
도대체 사람들은 어떻게 돈을 그렇게 버는 걸까.
세상에 돈이 어떤 식으로 돌길래, 그렇게 소비를 해대며 살 수 있는 걸까.
나로서는 불가사의하다.
십여년전 회사를 그만두지 않았다면 나도 그런 생활을 하고 있을까.
그러나 나는 회사를 그만두지 않은 나를 상상할 수 없다.
이래저래 나에게는 불가사의하다, 세상이 돌아가는 것.
그녀의 그 말을 들으며 나는 내가 아이를 이뻐한다는 타평자평의 선생이 된 것을 새삼 생각했다.
그것은, 생각해보니, 이런 것이었다.
아이는, 아이가 아니라, 그냥 한 인간인 것이다. 따라서 매력있는 사람은 당연 좋은.
그런데 말이다, 아이란 보통 매력이 있다는 것이다.
아이는 그의 순수한 의지를 발현하며 살고 있는데, (여기서 '순수한'이란 말에 현혹되지 마시오. 순수라는 것은 그야말로 다른 것이 섞이지 않았음의 말.) 인간으로서 인간의 순수한 의지를 목격하는 것은 곧 내 자신에 대한 발견이요, 인간에 대한 해석이요, 인류에 대한 이해인 것이다.
실제로 나는 학교에 있기 시작하면서, 이곳에서 본 것을 가지고 소설을 쓰기에 좋겠다,란 기대를 품기도 했었다.
그래서 아이(인간)의 순수한 의지를 방해하는 말초적인 모방거리, 곧 테레비전과 컴퓨터, 핸드폰 같은 것들을 더더욱 못마땅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따라서 이런 것들을 매일 먹고 자라는 일반학교 아이들은 물음표다,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 고로 나는 진실되게 아이란 존재를 이뻐하는 선생은 아닌것같다.)
우리반엔 장애아동이 하나 있다.
나이가 한 살 더 많기도 한 그 남자아이는 덩치도 더 크다.
나는 장애아통합교육을 절대 지지한다고 표명하고 사인하고 학부모들앞에서도 우려 보다 믿으라고 큰소리 꽝꽝 치고 다니는데, 실은 그 아이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 아이는 작년에 우리학교에 편입을 했었는데, 들어오자마자부터 난 어쩔 줄 모르며 그 아이와 자주 싸웠다. 선생이 혼낸 것도 아니고 싸웠다는 표현이 맞겠다. 나랑 걔는 끙끙 밀고 당기며 힘싸움을 했다. 매번 선생이 이겼다. 아이는 아이인 것이고, 선생은 선생인 것이다.
나는 걔를 이쁘게 보고싶다고 기도도 하였지만 어려운 일이었다.
이쁘게 보고싶다고 기도했던 마음도 실은 그래야 일이 잘 풀리기 때문이지 그걸 정말 진심으로 바랬던 것 같지도 않다.
우리반 다른 아이들도 걔랑 많이 싸웠다.
선생한테 혼날 까봐 선생이 없을 때 때렸다.(때렸다지만 한대 툭이 전부다. 똥침을 한 번 주거나)
그러면 애는 울고 나는 달려가고 그래서 어찌된 일인지 묻지만, 실은 다 알고 있다, 처음부터.
애들도 걔가 난감하고 싫다는 것을.
나는, 울고 있는 그 아이를 보면서, 다른 아이들과 같은 내 마음도 좀 해소되는 심정마저 느꼈었다.
(너무 심한 고백인가...)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지금, 그러니까 이 년을 함께 지낸 이 아이들이 서로 엄청 잘 지내고 있다.
그 장애아동이 잘 못하는 것을 알아서 비껴가고 피해가고, 다 잘 못하지만 그중 그 아이가 잘하는 것은 잘 했네,하고 말해주기 까지 한다. 마치 어린 아가에게 엄마가 그러듯. 세상에.. 난 그 소리를 듣고 놀랐다.
"파랑이, 농부 잘 그렸네."
"넌 자동차를 좋아하니까 그럼 농부가 타고가는 경운기도 그릴래?"
아이들이 인형극을 준비하면서, 나뭇가지에 붙일 색종이 인형을 그렸을 때의 일이었다.
인간의 순수한 의지, 그것은 슈타이너가 그랬다는데, 정녕 지혜와 사랑을 지향하나보다.
규민이 지금 다니고 있는 어린이집을 조만간 그만두게 되어, 당분간 인기 인사가 되었다.
여기저기서 밥 한 번 같이 먹자고 대기 중. (회사든 뭐든 그만 둘 때도 이런 적은 없었지. 정작 내가 당사자일 때는 어정쩡한 관계, 어정쩡한 끝맺음인데, 애가 당사자가 되니까 쌍방 친한 척 하기 편하다. 서운해, 아쉬워, 가지마, 가기 싫어, 보고싶어 어떡해.....가 쏟아진다. ) 그거 한 바퀴 돌자치니 수첩에 스케줄이 빡빡하다.
그래서 서둘러 스타트를 끊었다. 엊그제 토요일, 엄마둘이 백세주를 놓고 마주 앉았다.
하여 진탕 벌어진 수다 판.
애엄마들의 수다는 일단 무궁무진 이어진다는 특성.
각자 뒷통수에 무얼 담고 있는지를 까끌까끌하게 느끼지 않아도 통 크게 돌아간다는 특성.
역시 애가 중심이 되어주어 그런가보다.
나를 중심으로 얘기했을 때는..... 어디 그랬나.... 대화는 뚝뚝 끊기기 일쑤였어.
그래도 내 뒷통수에 무얼 담고 있는지 들키지 않아서 뚝뚝 끊기는 대화가 더 좋았다. 아니, 대화를 아예 갖지 않았지.
그 엄마와 나는 서로 애 키운 역사를 일단 꿰었다.
그리고 애 키우기 일반론에 들어갔다.
그러면서 이런 애, 저런 애, 이런 케이스, 저런 케이스를 얘기하다보니, 어느덧 상통하는 진리가 있었던 것인데..... 그것은 feeling secure, 사랑이었다.
아이를 키우면서 모두 벼라별 어려움을 겪는다.
식사습관, 간식습관, 배변습관, 관계맺기,언어,학습,사회성,.... 모두 걱정 한가지씩은 다 하고 있다.
아이가 이런 어려움을 갖고 있을 때...
음... 이것은 말과 글이 다르다.
윗 글을 다시 보면,
'아이가 이런 어려움을 갖고 있을 때'...
평이하고 평이한 문장이다.
그 어떤 뒷말, 부연이 따르지 않는, 따를 필요가 없는.
그런데, 현실에서는 막상 그런 문장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어린이집에서 다른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않는 아이를 말 할 때,
보통은,
'또래와 잘 어울리지 못 하는 아이...' 혹은 '사회 적응이 안되는 아이', '예민한 아이'
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즉, '아이가 또래와 잘 어울리지 못 하는 문제를 갖고 있는 경우'라거나,
'아이가 사회적응의 문제를 갖고 있는 경우'라고 말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른들은, 문제를 보지 않고, 아이를 본다.
아이의 문제를 보지않고, 문제아를 보는 것이다.
그리하여 어른들은 문제를 고쳐보려는 것이 아니라, 아이를 고쳐보려고 한다.
어린이집에 얼마전까지 논쟁의 중심이었던 한 남자아이(만 네살)가 있었다.
걜 두고 뒷얘기도 많았고, 앞얘기도 많았었는데, 어른들은 한참 쿵덕쿵덕 어쩌구 저쩌구 뒷얘기 앞얘기 하는 동안, 아이는 어느새 의젓이가 되어있었다.
매일 자정을 넘겨 퇴근하고, 주말이면 자신의 스트레스를 풀기위해 낚시와 축구를 다녔던 아빠가 변한 것이었다.
때로는 동화책 아홉권을 읽어주었다고 했다.
(동화책 읽기가 얼마나 힘든 노동인지 아시는 분은 안다. 세 권만 읽어도 지친다.)
사실 부모가 변하는 것이 가장 어렵다.
부모는 변하지 않으면서 아이에게 변하라고 하는 일......
아이는, 먹여주고 재워주고, 병에 걸리면 낫게한다고 잘 자라는 것이 아니다.
아이는 잘 자라지 못 하면 어려움을 겪고, 그게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 이것저것 문제거리다.
아이가 잘 자라려면 바로 사랑을 먹고 살아야하는 것이다.
자신이 듬뿍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 feeling secure.
(요즘에는 애를 오냐오냐 키워서 버릇없다는 식의 평이 많지만, 그것은 죄다 사랑이 아닌 듯.
돈으로 대신 때우거나(나도 그런거 가끔하는데, 늦게 퇴근한 날이 많은 주말에 장난감 하나를 큰 거 사준다든지, 몸이 피곤한 날에 아이스크림을 하나 먹여놓는다든지...), 컨디션 좋은 날 무지 잘 받아주었다가 컨디션 나쁜 날엔 내가 짜증을 낸다든가, 식의 왔다갔다...)
이것이 바로 성장의 베이스라는 생각.
이것을 제대로 받지 못하여 그야말로 제대로 성장하지 못 한 경우, 문제는 어른이 되어도 계속 드러난다. 나의 경우가 그럴테고, 당신의 경우가 그럴 것이다.
아이를 어떻게 잘 키울 것인가.
따뜻하게 성장의 베이스를 깔아주는 일.
이라 붙여놓은 유영의 글이 가슴 절절하다.
글의 내용은 사실 가슴 절절과는 거리가 멀고 오히려 담담, 평안, 소탈인데,
그 제목을 달기까지, 사랑을 가지고 뒤흔들고 흔들리고 잡아채고 채이며 내달렸던 그녀의 연애사가 만져지면서, 새삼..... 오래된 기억에 가슴이 절절하다.
그런데, 나는 그렇다, 유영의 기억에는 가슴이 절절한데, 정작 내 과거사에는 그닥 가슴 절절하지 않은 것이다.
여기에는 나의 나름대로 정리가 있다; "모든 연애는 자기애더라,"라고......
결국 내가 한 사랑은 내 그릇 안에서 물튀기기 정도 밖에 되지 못했다는, 내 그릇이 작고 넉넉하지 못하다는 사적 고백이겠지만, 씨실날실 한 올 한 올이 어떻게 끼워졌는지 그 내막을 알고 있는 내 연애사에 관한 한, 아무튼 그것은...... 후에 되돌아봤을 때 가슴 절절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내가 사랑을 믿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이다.
이런 생각 와중에, 나는 아래의 글을 만났다. 정희진의 <페미니즘의 도전>에 있는 글이라는데, 아직 그 책을 읽지는 못함(빌려주기로 한 사람 잊지않고 빌려주기 바람 ).
가부장제 사회가 작동할 수 있는 근본적인 구조 중의 하나는, 남성이 여성의 친밀성 능력과 감정 노동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남자 ― 지구에서 가장 특이한 종족≫의 저자 디트리히 슈바니츠는 많은 여성들이 남자와 연애할 때 느끼는 사랑의 감정을 남자로부터 유래한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고 말한다. 여성들은 자신 속에 내재된 풍부한 감성과 사랑의 능력을, 상대 남자의 매력으로 오인한다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성과 사랑의 주체는 남성이지만, 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노동은 여성이 한다. 여성이 노동을 그만두는 순간, 대부분의 관계도 끝난다. 대부분의 남성들은 배려, 보살핌, 사랑의 생산을 위해 별다른 노동을 하지 않는다. 이것이 성별 분업인데, 남성들은 주로 공적 영역에서 활동하면서 '사적'인 영역이라고 간주되는 가족이나 연애 관계에서 관계성을 경시 혹은 부정함으로써 여성의 육체 노동, 감정 노동, 정신 노동에 무임승차한다. 관계에서 남성의 '과묵함'이나 모든 면에서 감정적이지 않으려는 심리는 이 때문이다.
솔직히, 나는 연애를 하고 있는, 혹은 연애를 하였다는 여자들/남자들에게서 당신이 사랑한 것은 정말 무엇이(었)냐고 묻고 싶었다. <클로져>에서 내가 나딸리 포트만에게 가장 많은 박수를 보냈던 것은, 그녀만이 인간 연애의 한계인 '자기애'를 벗어난, (그래서 나는 다른 사람들은 모두 인간이고 그녀는 사랑을 가르쳐주려온 천사라고 묘사하였었지.) '사랑'을 하고 있기 때문이었는데, 후에 생각해 볼수록 그녀 역시 '자기애'를 한 것이었다. 다만 그녀는 보다 정확하게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인간에 대해. 자신에 대해.
결코 그녀가 한 것이 '사랑'은 아니었다.
사랑은 무엇일까.
'올 유 니드 이즈 러브'라고 했던 존은 사랑을 알고 죽었을까.
'쉬 게이브 미 모어, 쉬 게이브 미 올.... 알러뷰'라고 했던 폴은 분명 사랑을 모르는 게 틀림없다.
사랑은, 슈타이너(라고 발도르프 교육을 처음 만든 인지학자이다.....)가 제시한 문장에 의하면, 인류의 다음 진화해야할 방향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지금껏 사랑이라하는 것이 건네주는 느낌으로는 참으로 믿지 못할 하나마나한 허접한 소리인 것이다. 그러나 어디 사랑이란 게 그런 것인가. 인류의 진화 운운.....이 그런 것인가.
나는 슈타이너 종교를 막 영접한 상태로 슈타이너가 한 말이라면 일단 감동부터 먹고 보는 상황이라, 그의 이 말로 인해 (이 말은, 역시 굉장히 감동적이었던 닷새짜리 강의 중에 나왔던 한 문장으로서, 그 강의 전체가 무지하게 감동적이어서 강의 전체에 대한 리뷰를 해야 그나마 이 문장으로 전달받은 내 감동의 깊이를 전할 수 있겠지만, 아무튼) '사랑'을 생각하고 있다. 요즘.
인류가 다음 진화해야할 방향.
한 남자는 키가 훌쩍 커서 백 구십 센티미터는 되어 보였다.
색깔이 바랜 보라색 털모자를 쓰고 있었고 헐렁한 검정 스웨터를 입었다.
호리호리한 몸매에 긴 얼굴, 그러니까 뭐든 다 길어보이는 인상, 손가락도 길 것 같고, 그렇다고 무턱대고 예민섬세하기만 한 얼굴은 아닌데, 순정만화과의 극단으로 쏠릴 뻔한 분위기를 잡아주는 것은 나이 같다.
젊게 봐야 삼십대 후반. 마흔이 넘었다고 해도 그럴 법해보이는 연륜이 이 사람의 경우 매력 포인트 몇십점을 가산해주는 것 같다.
고개를 끄덕이며 주로 듣는다. 목소리는 분명 보드럽고 감미로울 것 같아.
옆의 남자도 어디서 빠지지않을 얼굴이지만, 키 큰 남자에 비해 약간 간이 덜 된 느낌이다.
조금 키가 작고, 조금 살집이 있고, 조금 더 젊어보인다.
주로 말을 하고 있고, 눈이 크고 눈빛이 강하다.
멀리서도 그들은 큰 키 때문에 눈에 띄었다.
내가 서있는 방향으로 그들이 걸어오고 있는 사이, 점점 더 눈을 돌릴 수 없었다.
시선을 끌어잡는 무언가 다른 공기가 있었다.
둘은 팔짱을 끼고 있었다.
삼십대 후반, 마흔의 두 (미)남자가 팔짱을 끼고 서로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걷고 있는 그 모습은 아찔할 정도로 고혹적이었다.
여기가 빠리의 거리라면 그렇게나 아찔하지는 않았을 지도..
그 둘이 내 곁을 스쳐지나가는 순간, 나는 내가 특별한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살짝 꽃 냄새와 벌꿀 냄새가 가미된 고농도 순수자연 신선 공기가 대기엔 가득하고, 햇볕은 항상 골든 옐로우이며, 비는 나무와 풀을 어루만져 항상 진초록이고, 사람들은 사랑한다. 항상 서로 사랑한다.
내가 잠깐 천사를 본 것이었다고 해도 그럴 법 했다.
사람들은 왜 남자와 남자, 여자와 여자의 사랑을 갈라놓으려 했던 걸까.
그것이 가장 아름다와, 너무 고혹적이라, 세상이 너무나 평화로와져서 악마질을 한 것 아닐까.
* 이 글은 원래 10월29일 토요일 올렸던 것인데, <연애의 목적> 마지막 부분에 대해서 대충 쓰고 말아버린 감이 있어 10월30일 일요일 다시 씀. 정성이다.
'이처럼 어린 여자가 이처럼 의연하게 사랑의 오고 감을 응시하는 영화를 본 적이 있던가. 사랑의 환상과 현실의 냉정함 사이에서 그 아픔을 자신만의 언어로 풀어내던 소녀. 사랑이 떠난 후, 휠체어를 타고 그녀는 홀로 길을 나선다. 그 슬픈 뒷모습에서 세상을 향해 또 한 걸음 내딛은 여인을 본다. 그 순간, 사랑보다도 빛나던 순간.'
한겨레신문에 어느 평론가가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을 자기가 본 최고의 쿨한 멜로영화로 꼽으며 쓴 평.
이 평이 실렸던 기사는, <너는 내 운명>하고 <사랑니>같은 멜로영화가 다시 유행이라고 하면서, 멜로 영화를 '쿨한 멜로'와 '징한 멜로'로 나누자면, <너는 내 운명>은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류의 '징한 멜로'이고, <사랑니>는 '사랑은 움직이는 거야'류의 '쿨한 멜로'라는 얘길 썼다. 그러면서 어느 평론가와 어느 소설가의 각각 '쿨한 멜로'옹호론과 '징한 멜로'옹호론을 덧붙여 놓았었다.
나는, 이것이 나의 개인적 취향의 문제인지, 개별 영화의 내용이나 재미의 문제인지 모르겠지만, '징한 멜로'보다는 '쿨한 멜로'에 한 표다. '징한 멜로'영화는 나를 잘 설득하지 못한다.
가슴에 악마가 얼음심지를 박아놓았는지, 사랑하는 사이로 설정된 두 사람이 등장할 때 마다, '쟤네 이제 끝나나보다'라는 생각부터 하고 본다. 절절이 사랑한다는 설정이 계속이어질 때마다 나는 번번히 그 근거를 찾으며, 잘 이해하지 못 한다.
(그런데 <굳세어라 금순이>의 구재희의 사랑은 그토록 가슴절절하게 봤으니, 이것은 나의 영화관람자세와 드라마관람자세의 차이인가????) 저 신문 기사에서도 소설가의 '징한 멜로'옹호론은 나에게 설득력 빵이었다.
쓰고보니 이것은 실제로 나의 '애정관'과 연관이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의 애정관이 '사랑은 움직이는 거야'식이라는 소리는 아니다. 사랑이란 그 과정에 있다는 생각이다. 감정에의 응시. 사랑이란 무엇인가,라는 성찰. 무엇인지 끝까지 알지 못해도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
끝없는 질문.
한겨레에 평을 올린 평론가만큼 나도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이 재미있었다. 내가 본 최고의 멜로영화 탑 화이브 안에 꼽겠다. 사랑영화는, 내 애정관에 맞는 사랑영화는 결국 자기얘기로 돌아올 수 밖에 없다. 생선을 굽는 조제의 의연한 얼굴. 식탁에 놓을 생선접시를 향해 뻗어올린 조제의 의연한 팔. '그 순간, 사랑보다도 빛나던 순간.'
일본어 영화를 볼때마다 그 익숙하지 않은 인토네이션에, 배우들이 지금 연기를 잘 하고 있는 건지, 좀 느끼하거나 오바인건지 아리송하며 불편하곤 하는데, 이번에도 그랬다.
특히 남자주인공이 너무 이쁘게 생겨서 싫었다. 저렇게 잘생긴 남자애가 애인이라면 금새 토라져, 흥, 나 장애인애인 안할거야,하고 삐칠까봐 영화보는 내내 조마조마했다. (이쁘장한 남자애는 잘 삐친다는 선입견?)
반면 <연애의 목적>.
그냥 호감가고 좋으면 같이 자는 거지, 쿨하게. 사랑이란 감정은 어차피 3개월짜리인데 사랑은 왜 따져. 라며 추근대는 남자. 여기에서 이 영화는, '사랑은 할인쿠폰이라는' 쿨한멜로처럼 보였다.
때로는 '너를 진심으로 사랑해' 보다 '너 졸라 맛있다'라는 말이 더 정확한 사랑의 고백일 수 있다. 나도 니가 졸라 맛있어,하고 맞붙는 사랑에 무슨 걸림돌이 있겠는가.
둘은 그래서 불같은, 뜨거운, 멋진 사랑이 될 수 있었다. 이제부터 결국 감독이 원했던 건 징한멜로였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사랑이 할인쿠폰같은 세상에서 이런 징한 사랑이 있단다,라고 감독은 말하고 싶었던 거다. 애타게 부르짖는 남자 목소리의 '우리의 불같은 사랑' 어쩌구란 노래는 노골적으로 반복된다.
그러나 결말에, 최홍이 학원강사 유림을 다시 만나는 순간부터 확 깼다.
앗, 저것은....
저것은 무엇인가.
최홍은, 유림에게 있어 이제 그녀 자신이 '손발을 잘라버리고 그의 아내도 죽여버리고 죄없는 애새끼까지 죽여버리고 싶'던 그 가해자가 되었으면서, 유림 앞에 다시 나타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지금까지 한껏 감정이입했던 주인공의 새 사랑이기에?
더구나 한 번 당했던 피해자였으니 동종 범죄에 있어서는 면책특권을 주자는?
(강간당한 여자들은 강간하면서 상처를 치유할 수 있다는 새로운 논리?)
(나 이제 잘자,하는 최홍의 대사는, 순간 이 영화가 호러영화였나 싶게, 소름이 좍 끼쳤다.)
여관 앞에 쌓인 첫 눈을 처음 밟았다며, 우리 관계는 이렇게 깨끗하게 새 시작이야,라는 넉살좋은 표정을 짓고 '사랑이란 이름으로' 모든 걸 덮어버린다는 그 투는, 오히려 이 영화의 최고의 순정이었던 최홍을 더럽히는 결과이다.
영화는 공들여 최홍을 사랑의 유일한, 따라서 빛나는 실천자로 만들어왔다(<클로저>의 나탈리 포트만같은, 조제같은, 내가 좋아하는 <멘>의 숀 영같은). 사랑이 무엇인지 묻기를 포기하지 않고 사랑을 실천하려하는, 그럼으로써 막 움트는 사랑의 감정과 그것에 기대고 싶은 자기가 있었으나, 그것이 설혹 후에 진짜 사랑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할지라도 서슴없이 포기되는 사랑은 단호히 부정하는, 정직하게 실천하는 용기있고 아름다운 그녀.
이렇게 고귀한 캐릭터를 애써 만들어놓고는 팔짱을 끼며 배시시 싸구려 웃음을 흘리게 만드는 건 무언가.
사랑의 고갱이에 애써 다다라 놓고는 똥을 한 바가지 퍼 싸지르고 이게 사랑이야,하는 꼴이다.
사실, 똥 한 바가지 퍼 싸지르는 게 필남필부의 사랑일지도 모른다. 고갱이 같은 사랑을 실천하는 빛나는 실천자는 천사 밖에 없는 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 궁색맞고 저열하지만 모두가 끄덕이는 우리의 냄새나는 사랑, 그것을 영화는 이야기하려 했던 것인가.
그러나 그것이기에는, 감독은 홍상수도 아니고,
더구나 최홍을 음해하는 인터넷때문에 꼭지가 돌아 애들을 패대는 이유림과 당시 아무것도 모르고 이유림이 좋아하는 닭강정 도시락을 싸서 둘만의 아지트에서 행복하게 님을 기다리는 최홍의 교차편집이 사건의 절정에서 숨막히게 펼쳐지며, 이 천상의 연인들에의 연민을 최대한으로 호소했던 감독이, 막판에 인간의 너절한 사랑을 난데없이 메인주제로 떠올렸을 리는 없을 것 같다.
영화는 거기서 끝나야했다. 이유림이 경찰차에 태워지고(왠 경찰차? 여자의 '저 남자가 성추행한거에요.'란 말 한 마디에 경찰차 오는 나라였던가, 여기가? 그렇게 되면 좋겠지만, 학교홈페이지가 야동익명게시판 같은 모양새나, 경찰차 출동이나 좀 오바다, 감독이.), 최홍은 설겆이를 하다가 설겆이통에서 불어터진 닭강정을 보며 오열하고, 약혼자와의 대화, 좋아하는 남자가 있어, 잤어? 그럼.하고 끝. 딱 거기가 좋았는데. 마지막 강혜정의 표정도.
<연애의 목적>이란 제목은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에게 더 어울렸었을...
하여간에 박해일은 여전 멋졌음.
특히, 그 부분, 최홍이 무단결근하자 집으로 다짜고짜 찾아가 창문을 간신히 여는 장면.
창문이 신통찮게 열리자, 차에서 거울을 떼어와 창문에 대고 이리저리 비추며 "아, 저기 있네. 거기 그러고 있으면 못 찾을 줄 알았지?"하는 그 장면. 으하하.
술은 왜 그렇게 많이 마시는거야? 저렇게 술을 막 퍼먹어본 것이 정말 오래전 일 같다.
그렇게 마구 퍼마시고 필름도 확 끊기고 그래보고 싶었다. (저 사진봐라, 정말 맛있겠지.)
(그러나 숙취는 여전히 무서워.)
란 범주의 영화가 꽤 많을 텐데, 내가 좋아하는 배우를 남녀주인공으로해서, 이 범주의 영화가 또 나올 것이라는 소식을 보았다. 황정민과 전도연 주연의 <너는 내 운명>.
내가 좋아하는 배우가 둘씩이나 나오니 꼭 보고 싶은데(그러고보니 <마지막늑대>와 <인어공주>를 여태 안보고 있구나), 포스터를 보니 이 둘은 결혼하나보다. 결국 사랑의 줄다리기 로맨틱 코메디인가, 사랑을 믿지 않았던 여자는 남자의 진심에 감동...어쩌구...흥미가 확 떨어진다. (그러나 볼 것이다,아마)
이 범주에 속하는 영화 중에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봄날은 간다>이다. 말하지 않아도 남자의 가슴과 여자의 가슴이 절절하게 내 가슴을 쳤었다. 남자에겐 눈 앞의 사랑이 해발 구만리의 암벽이었고, 그런 남자를 전형적인 순간으로 바라보는 여자에겐 인생이 이미 해저 구만리의 심연이었다. 그들의 사랑과 인생, 나의 사랑과 인생을 감당 못 하고 나는 영화를 보며 무지하게 울었다.
그 둘이 끝까지 헤어져서 좋았다. 이영애가 우리 다시 만날까?라고 말을 할 수 있게되고, 유지태가 받은 화분을 돌려주고 뒤돌아 갈 수 있게 되어서 다행이었다. 인생에 대해 해피엔딩이어서.
<비포 선셋>도 좋았음.
<비포 선라이즈>의 후속편 소식을 들었을땐 소재 하나 잘 뽑아서 9년만에 또 울궈먹는구나, 싶었으나, 막상 보니 후속편 만들기를 아주 잘 했단 생각이 들었다.
전작이 단지 잘 뽑은 '소재'에 대한 영화였다면, 후편은 비로소 관계와 사랑과 인생에 대한 영화다운 영화같다는 느낌. 할 일이라곤 9년만에 만나 서로에게 자기 이야기를 쏟아붓는 것이니, 그럴 수 밖에 없기도 하겠지만.
그런데 왜 그러냔말이지. 왜 9년 후, 여자의 사랑관은 냉담해지고, 남자의 사랑관은 오히려 더 순애보에 가까워졌느냐고.
그러나 여자는 냉정한 자신의 사랑관은 자신의 아파트로 올라간 후부터 책상서랍에 꾸겨넣어버렸다는 양, 남자 앞에서 그를 처음 만났던 9년 전의 스물셋 소녀가 된다.
(남자야 9년 전의 스물---몇이더라-- 소년이 될 필요가 없다. 그는 지금도 너만을 사랑해, 일편단심 순정이니.)
그러니까 이 결말은 사실 논리적이지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지만, 그런 게 뭔 상관이냐, 보는 이로 하여금 '희망'을 품게한다. 제이(에단 호크)가 비행기 타러 그냥 가버리지는 않을 것이라는 희망, 9년을 기다린 사랑이 이제 행복해질 수 있다는 희망. 그러나 이건 냉정한 사랑관에 수혈을 해보자는 의미까지는 아닐테고, 단지 촉박한 비행기 출발시각 때문에 불안했던 심리가 비행기 따위는 아무렇게나 해버릴 수 있다는 안도감을 얻을 수 있게 되어서 일 것이다. 즉 사랑보다 상황.
9년 전 둘은 알고보니 섹스도 했었다. 그것도 두번이나 했었다. 그렇다면 무엇이 남겠는가. 돌이켜 생각하면, 9년만에 만나는 그 순간 각각의 표정이 정말 전형적이었다. 남자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나, 여자는 태연하다. 나는 처음에 내숭이라고 생각했다. 영화상 셋팅된 내숭이 아니라 동서양 지구 전체를 지배하는 문화에 굴복해온 호흡과 같은 내숭. 남자는 6개월 후 약속된 장소에 가고, 여자는 못 가는 설정처럼. 왜 하필 여자 할머니가 돌아가셔서 못 가는가 말이다. 남자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여자는 약속장소에 갔다가 맴돌며 밤을 새며 기다리다 실망하는 설정은 왜 아닌가 말이다. 이런 설정은 정말 눈 씻고 찾아봐도 없다. 나 같으면 할머니가 돌아가셨어도 뭔 핑계(스스로에게, 가족에게)를 대서라도 뛰쳐나가 그곳으로 갔을텐데, 나 같은 여자는 어떻게 해석되어야하고 어떻게 인생을 설계해야하는지 어떤 텍스트에도 나오지 않아 가끔 난감하다.
하여간에 둘에게 무엇이 남겠는가. 9년 후의 둘의 모습은 그래서 전형적이라고 할 수 밖에. 그러나 그 전형적인 현상 심도깊게 파헤치기를 이 영화에서 기대하기엔 전작의 그림자가 너무도 뚜렷하다. 둘의 끊임없는 수다가 그 경계를 왔다갔다 하면서 이 쪽과 저 쪽의 기대치를 다 만족시키는 것 같았으나, 결국 마지막엔 저 쪽으로 넘어가버렸다. 그래서 다음 속편엔 그 전형적인 형상을 심도깊게 파헤치는 쪽으로..
에단 호크 얼굴이 뭉개졌으나, 거리 모습이 너무 멋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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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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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잔형이 <뿡뿡이>에서 쫓겨났잖아요. 어제 kbs 오후 어린이프로에서 우연히 발견했는데...거기 장애아동이 한 명 있더군요. 자폐 성향이 있는 것같던데...이 글 보니까 갑자기 생각나네요. ^^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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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비에스에서도 그렇게하는군요. 뿡뿡이에서 전에 몇번 다운증후군 같은 아이를 본 적 있었는데.짜잔형은 여전히 잘 지내는가보네요. 다행.. 그 짜잔형 내가 좋아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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