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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도 농사짓고, 올해도 조개잡고, 올해도...

 

다르지 않은 이야기들-올해도 농사짓고, 올해도 조개잡고, 올해도 일을 하자!

 

 

 

"뭐해? 바빠?"


슬슬 하던 일 정리하고 집에가볼까나ㅡ하던 참에 전화가 걸려왔다. 평택 대추리 솔부엉이 도서관장 재연언니다. 지난 2월에 있었던 평택 미군기지 확장반대 평화의 연날리기 행사 이후 또한참 만나지 못했던 언니이기에 퍽이나 반가운 전화였다. 그런데 어째 언니 목소리가 어둡다.

오늘 언니는 평택 평화의 땅 한평지키기 모금을 위해 정읍에 다녀왔다 한다. 그리고 내일은 고창을 간다한다. 평택을 지키는 인간방패가 되기 위해 대추리로 들어간 언니, 정말 온몸으로 평택을 지키고 있구나. 그런데 단지 몸이 지쳐 목소리가 어두운 건 아닌거 같다. 와락 언니가 보고싶고 걱정이 된다.


"언니, 나랑 술한잔 해요. 지금 갈께요."


평택에 가는 길은 꽤 멀다. 1호선으로 갈아탄 후 사무실에서 들고온 <작은 책>을 꺼내읽기 시작했다. 나도 모르게 웃음짓게 만드는 이야기...고개를 끄덕끄덕 하게 만드는 이야기...그러다가 화들짝 놀라게 되었는데, 대학 후배녀석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펼쳐지고 있는 게 아닌가. 이녀석, 카츄사에서 이런 괴로움이 있었더랬구나. 어찌되었든 故 효순이 미선이 투쟁을 우리는 함께 거쳐왔구나. 비록 있는 곳은 달랐지만. 그리고 지금도 있는 곳은 다르지만 이렇게 <작은 책>으로 만나는구나.


신기하고 반가워서 이런저런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그러다 문득 정신을 차리니 평택에 다 와있다. 평택역에서 대추리로 들어가는 밤길은 컴컴하고 조용하다. 후배가 쓴 살아가는 이야기에 대한 생각을 좀더 해본다. 올해로 이라크 전쟁은 4년째 이어지고 있다. 부시, 이제 그만 정신 좀 차려라! 후배녀석은 부시에게 호통을 치고 있다. 그래, 부시가 이제 그만 정신 좀 차렸으면 좋으련만. 그런데 말야, 부시만 정신을 차리면 팔루자에서의 학살은 멈추어질까? 평택을 난도질하는 짓거리는 멈추어질 수 있을까? 글쎄...그건 아닌 거 같다. 왜냐면 꼭 부시가 아니더라도 미국은 헤게모니 국가로서의 자리가 위태롭게 된 이상, 전쟁을 불사하며 그 위기를 모면하려 들테니 말이다. 골목대장 자리를 그렇게 쉽게 포기할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미국이 문제인가? 물론 미국이 문제이지만, 미국이라는 나라와 그 국민들의 문제라고만 할 수도 없다. 그 어떤 나라, 국민이라도 미국과 같이 골목대장 위치에 놓인다면 지금의 미국과 부시처럼 굴지 않으리란 법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질서'를 만드는 일이 될 테다. 부시가 설령 정신을 차린다 하더라도 지금과 같은 질서가 유지되는 한, 이라크 팔루자에서의 학살과 평택에서의 폭력은 중단되기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는 부시를 정신차리게 만드는 동시에 우리가 원하는 세상을 위해 어떠한 새로운 길을 만들 것인지를 궁리해야할 것이다.


대추리에 도착하니 자정이 깜빡 넘어가고 있었다. 솔부엉이 도서관 근처에서 재연언니를 만 고요한 대추리 마을길을 자박자박 걸어서 언니가 사는 숙소로 들어갔다. 언니는 얼마전 포크레인이 황새울 들판을 헤집어 놓았던 일을 이야기해주었다. 전경과 용역깡패들은 포크레인을 앞세우고 대추리로 들어와 사람들을 내몰려 했다고 한다. 포크레인이 땅을 파헤칠 때마다 언니의 마음도 함께 파헤쳐지는 것 같았다고, 언니는 내게 그날 일을 이야기해주었다. 듣는 나도 참으로 속상해진다. 에잇, 술이나 한잔 합시다. 언니와 술잔을 나누고 이번에는 내가 속상했던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오늘 사무실에서 덤프연대 조합원들을 만나고 온 동료가 하는 이야기를 듣고 마음이 많이 안좋아졌더랬다. 새만금 대법원 판정 이후 물막이 공사가 재개되자, 덤프노동자들이 새만금 물막이 공사를 하러 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유류가에 트럭유지비에 이것저것 떼이고 나면 남는게 없어 허덕이고, 너희들이 개인사업자이지 무슨 노동자냐 노동조합은 꿈도 꾸지말라, 비난하는 세상의 질타에 부대끼고, 덤프노동자들은 살기가 너무 힘들다. 온몸이 부서져라 이리뛰고 저리뛰는 그네들이기에 새로 공사가 시작되는 곳으로 달려가는 것이 당연하다. 그렇지만, 새만금이라니.

부안과 해창 앞바다의 갯벌은 오래전부터 그 지역 주민들의 일터였다. 특히 맨손 말고는 가진 것이 없는 여성어민들에게 갯벌은 그 자체로 고맙디 고마운 삶의 터전이었다. 집안일을 하다가, 텃밭을 일구다가, 아이들을 돌보고 시부모님 시중들다가, 물때가 되면 갯벌로 나가 생합을 캐면서, 어이구 니가 있어 고맙구나, 어이구 너만이 내 마음을 알아주는구나, 두 손을 재게 놀리셨다는 그녀들의 공간, 새만금. 그런데 그 새만금이 얼토당토않은 개발논리로 숨통이 막혀가게 된 것이다. 새만금의 어민들도 포크레인이며 덤프차들이 와서 자갈과 흙을 바다에 쏟아붓는 차르르 소리가 들릴 때마다 갯벌뿐만이 아니라 자신들의 숨통도 막히는 것 같아 미칠 지경이라고 하시던데.


이야기를 하다보니 지금의 세상 돌아가는 꼴이 너무나 안타까워져 언니와 나는 술잔을 거듭 주고받았다. 황새울 들판으로 들어온 포크레인 기사아저씨는 사람들이 포크레인을 막아서자 어찌할 줄 모르고 담배만 뻑뻑 피워대셨다고 한다. 새만금으로 들어갈 덤프 동지들도 새만금 어민들이 덤프차를 막아서면 담배를 몇 대이고 피워 물게 될지도 모르겠다.

세상 돌아가는 꼴이 지금과는 달라질 수는 없을까? 올해도 농사짓고, 올해도 조개잡고, 올해도 일을 하자는 평택 농민과 새만금 어민과 비정규노동자들의 이야기는 서로 다르지 않은 이야기인데, 세상은 그네들의 이야기를 서로 상관없는 일로 만들어버린다. 아니 내 이야기를 위해 다른 이들의 이야기를 짓눌러야만 하게끔 만들어버린다. 재연언니와 나는 그런 세상 돌아가는 꼴 말고 다른 세상 돌아가는 꼴을 상상하며 술잔을 기울였다. 다르지 않은 이야기들을 하는 이들이 함께 모여 더 큰 목소리로 이야기를 할 수는 없을까? 이라크 팔루자에서도, 평택에서도, 새만금에서도, 비정규노동자들이 일하는 일터에서도 모두 행복할 수는 없을까?

이야기도 깊어가고 밤도 깊어갔지만, 답은 쉽게 안나온다. 분명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또한 분명한 것은 그것이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언니나 나나 우리 모두가 지치지 않고 서로의 활동이 만날 수 있도록 노력한다면, 서로 다르지 않은 이야기들이 마주쳐 더 큰 목소리를 내는 것은 현실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올해도 농사짓자! 올해도 조개잡자! 올해도 일을 하자! 소박한 바램들이 비로소 현실이 되는 날을 상상하며 언니와 나는 그간의 고단함을 털어내었다. 대추리에서의 깊은 밤은 그렇게 지나갔다.

 

 

 

 

 

 

 

 

 

지난 4월 밤중에 평택을 찾은 적이 있다. 평택까지 가는 긴긴 길에 사무실에서 들고나온 <작은 책>을 읽어나갔다. 살아가는 이야기들을 읽어나가다가 그런데 화들짝 놀란 것이, 후배녀석 글이 떡하니 있는 것이지 뭔가. +_+

 

신기하고 반가워서 그 친구 글에 이어 떠오르는 생각들을 적어서 <작은 책>으로 보냈고

다음달에 실리게 되었다.

(<작은 책>은 참으로 편한 책이라, 읽기에도 좋고, 읽은 후에 나도 한번 저런 글을 써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게끔 만든다. 또한 독자들에게도 열려있는 구조라 투고를 하면 잘 실리게 되는 듯 하다.)

 

위엣글은 그 글이다.

분량 등의 문제로 정작 글을 쓰게 된 동기부분 (후배녀석의 글을 맞딱뜨린 반가움)은 잘라내고 싣게 되었지만.

 

어쨌거나

평택이든 새만금이든

팔루자든 이라크든

모두 함께 살 수 있으면 안될까.

 

모두들

올해에도 농사짓고

올해에도 조개잡고

올해에도 일을하고

올해에도 살아가면

안되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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