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를 유지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어서
서로의 삶에 바쁘다보면 그리운 이, 소중한 이들이
소리도 없이 별다른 인사도 없이 잊혀지곤 한다.
그러다가 어느날, 문득 작은 흔적으로부터 그를 기억하게 된다.
예전에 청테이프가 앞에 있기만 하면 조그맣게 자꾸 뜯는 아이가 있었다.
청테이프를 보면 그가 떠오른다.
대학을 졸업한 이후로 청테이프 쓸 일이 많지 않아
대형 마트에서 우연히 지나다 보거나 이사할 때가 되어 테이프 살 일이 생기면
그가 떠오르곤 했다.
유난히 손톱이 작고 손이 통통한 아이가 있었다.
흔치 않은 그런 비슷한 손을 어디선가 만나게 되면 그녀가 떠오른다.

최근에 뉴스를 보는데
한 영화배우가 고속도로를 건너는 고슴도치 가족을 구하려다
반대편에서 오는 차에 치여 죽었다고 한다.
고슴도치 가족 이야기를 듣고 나니
갑자기 예전 내 방 지붕에 살던 두더지 세마리가 떠올랐다.
고슴도치와 두더지는 상당히 다르기도 하지만
왠지 비슷한 느낌이 있는 것이다.
그들은 요새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그 방에서 이사한지 벌써 3년이 훨씬 넘었다.
그들과 함께 살았던 기간은 길어야 6개월남짓이다.
그간 서로 얼굴을 보았던 날은 많아야 열흘 정도 뿐이다.

꽤나 과묵하고 예의발라서
내 삶에 슬쩍 들어앉기보다는
아주 가끔 작은 선물이 되어주었던 그들.

나는 특히 두더지 아가씨를 잊을 수가 없다.
우리는 서로 이름도 알지 못했다.
서로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둘 다 음악을 좋아한다는 것 뿐.

오늘은 그녀와의 세번째 만남을 기억해 보려고 한다.

여름밤이었다.
창문을 모두 열어놓고 모기가 들어올까봐 불은 모두 끄고
존 콜트레인의 블루트레인을 들으면서
달을 보고 있었다.
춤이라도 한판 춰야할 것 같은 분위기였다.
무겁고 느린 바람이 있었다.
하얀 달 둘레에 조금 푸른 공기가 있었다.

누군가가 머리위에 있다는 걸 느꼈을 때
나는 사실 벌거벗은 채 춤을 추고 있었다.
그녀는 일부러 나를 바라보지 않으려 애쓰면서 지붕위에 앉아있었다.
그녀가 나를 바라보지 않으려 한것은
내가 벗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춤을 추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는 두더지이기 때문에 어차피 옷을 입지 않고
따라서 내가 옷을 입고 안입고는 그녀에게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내가 춤을 추고 있는 것은 나의 개인적 즐거움이기 때문에
그녀는 나를 방해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녀가 달을 바라보는 시선을 느꼈다.

조금 힘겹게 숨을 몰아서 짧게 물어야 했다.
'달을 보고 있구나.'
'응'

나도 달을 바라 보았다.
무겁고 느린 바람조차 땀범벅의 나에게는 시원하게 느껴졌다.
달은 산속에 흐르는 개울 속의 하얀 돌처럼 차가와 보였다.
발을 대면 이까지 시릴 것만 같아.

우리는 한참을 그렇게 달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만화속에 나오는 것처럼 검은 그림자같았다.
끝이 뭉툭한 작은 코.
달이 들어있는 작은 눈.
나는 그날의 그녀를 그렇게 기억한다.

콜트레인의 음악이 모두 끝났을 때
그녀는 천천히 몸을 들어서 나를 한번 바라보고는
지붕안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아마도 나에게 인사를 했던 것일 거다.
나는 그녀의 눈에 들어있는 나를 보았었다.

그날 밤은 아름다웠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05/07/19 07:12 2005/07/19 07: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