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척이다가 벌떡

from 그림 2010/02/18 04:01

잠이 오지 않아서 벌떡 일어났다.

 

 

 

포스터에 표현된 나신으로 손을 펼쳐 날아가는  여성은

하르피아 라는 그리스 신화 속 괴물에서 착안하게 된 모습이다.

하르피아는 여인의 얼굴에 새의 몸을 가진 괴물로 '약탈하는 여자'라는 뜻을 가졌다고 한다.

신화 속에서 좋은 이야기는 하나도 안나오지만 강렬한 인상이 남아있어서

강한 여성의 이미지를 표현하기에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회의 때 투쟁의 분위기 보다는 다양한 이슈들이 산재한 애매한 분위기이며,

발랄하면서도 공격적인 이미지를 표현하는 방향으로 작업을 가져가고 싶다는 설명을 들었다.

처음에는 마녀를 그려볼까 했지만 좀 식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몸에 당당하고 몸의 주인이 되는 게 여성운동의 기본이 아닐까 해서 나신을 재밌게 표현해보았다.

 

지난 주 수요일인가, 3.8 여성대회 관련 행사를 한다고 한 단체에서 내게 포스터를 부탁했다.

설연휴에 귀성난리를 치고나니 작업시간은 겨우 목, 금, 월 3일,

결국 시간을 넘겨 어제까지 4일 작업해서 보냈다.

위 2개가 그 포스터의 시안이다.

그리고 오늘 시안은 정중하게 거절당했다.

 

메일로,

기획의도나 디자인에는 만족하지만, 대중적으로 나가는 포스터이니 다시 해달라는 의견과

의미가 와닿지 않는다는 의견을 받았다.

 

나는,

 

의견잘 받아보았습니다.

하지만 저로서는 잘 이해가 되지 않아 반대의견을 주신 분들의 의견을 다시 한번 명확히 듣고 싶습니다.

 

각 단위들에 제 의견을 전달해주시고, 답을 주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의미가 잘 와닿지 않는다는 의견에 대해서 제 생각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우선, 말씀하신 '의미'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운동권에서 흔히 선전물을 제작할 때 가장 자주 반복하는 실수가 바로 자신의 '의미',

즉, '하고 싶은 말'만 전달하려고 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대안으로 제안해주신 내용을 보면 저는 그러한 비판을 그대로 적용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제가 본 기획만으로는 이번 여성대회의 '구체적인 의미'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각 단위별로 올 해 여성사업의 중요 이슈가 있겠지만 그 모든 것을 아우르는 '의미'라는 게

몇몇 단어들로 구성된 공으로 표현된다는 건 너무 식상하고 유치하다고 생각됩니다.

저는 3.8여성대회는 큰 차원에서의 기본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고

그 '의미'를 통해 각각의 사안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포스터의 목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포스터 한장에 할말을 다 써놓는다고 사람들이 그것을 읽어줄 거라 믿는 것은 너무 단순한 생각입니다.

누군가 지나가면서, '이게 뭐지?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거지?'라는 생각의 여지를 만드는 것이 좋은 디자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저는, 제가 만든 포스터가 충분히 3.8여성대회의 '의미'를 담고 있으며,

그것에 대해 생각해보게 할 수 있는 디자인이라고 생각합니다.

대중적으로 나가는 포스터이다보니, 다시 해야한다는 것도 무슨 뜻인지 이해를 할 수가 없습니다.

전에도 민주노총의 포스터를 만들었을때

'조합원들을 너무 높이 평가하는게 아니냐'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 포스터는 조합원들에게 아주 좋은 평가를 받았다고 들었습니다.

'대중적으로 나가는 포스터이다보니'라는 말은 그때를 떠올리게 합니다.

'대중들'을 왜 미리 평가하시나요? 무슨 기준으로 평가하시는 건가요?

제 포스터 작업이 부족해서 거절당한다면 당연한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보내주신 의견만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깊이 고민하고 즐겁게 작업했고, 그 즐거운 에너지가 사람들에게 전달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디자인을 단순히 '여러분이 말하고 싶은 걸 전달하는 도구'라고만 생각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디자인은 저에게 그 자체로 하나의 운동입니다.

여러분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내용을 가장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서 전문적으로 공부하고 노력해왔습니다.제가 받아들일만한 이유를 알려주세요. 부족한 점을 보완해서 더 좋은 작업을 하겠습니다. 
 

라는 답문을 보냈다.

 

그들이 전달하고자 한 의미라는 게 무엇이었을까?

혹시 '이명박 타도'였을까? 정말 그런것이었을까?

사실 그런것이었다는 느낌이 들어 나는 너무 짜증이 난다.

그들은 전에 '노무현을 타도'했고 그 전에는 '김대중'을 타도했고 다음에는 '박근혜를 타도'할지도 모른다.

그럴꺼면 왜 굳이 새로 포스터를 만들어 불쌍한 나무들을 잘라낼까?

만들어놓은 포스터에 날짜랑 장소만 이름만 바꿔 붙이면 될것을.

 

대중적으로 나가는 포스터라 안되겠다는 건 뭘까?

벗고 있는게 문제가 될 것 같다는 뉘앙스였는데, 회의자리에 없었기 때문에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자기 몸에 대해 당당하지 못한 여성대회라는 게 대체 뭔가?

정말 그게 문제가 되는 거였다면 나는 분노로 돌아버릴지도 모른다.

그게 문제가 되면 오히려 거기에 대해 싸워줄 사람들이 그들이어야하는게 아닌가!

미친 게 아닐까?

 

 

   초상권을 침해했는지 아닌지 모를 이 포스터들도

 

  머리에 새싹을 단 저 알수없는 형체들도

 

되는데, 왜 내 포스터는 안되나.

 

라고 스스로에게 물으면,

저들은 내가 이야기하는게 싫어서 그런거야.

자기들 이야기를 예쁜 그림으로 보기좋게 해주었으면 좋겠는거지.

나는 그저 도구일 뿐이라고.

하지만 나는 스타일리스트가 아니야.

나는 디자이너라고.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이미지는 누구에게도 아무런 감흥을 줄 수 없어.

 

학교에서 배운 것 중에 쓸만한 말들이 좀 있었지.

디자이너는 사람들이 앉는 방식을 만드는 사람이지 의자에 색칠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지.

 

 

저 포스터는 '무섭다'는 이유로 거절당했어.

아니, 인권이 무섭지 않으면 대체 뭐가 무서운 거지?

당신들이 해온 인권 운동은 이런 것이 아니었나?

인권에 꽂혀 가슴에서 검은 피를 흘리면서 몸으로 꽃을 피우고 무지개를 만들어내는 그런 거 아니었나?

인권은 말쑥하고 깔끔한게 아니지 않은가?

그렇게 아파도 웃으며 눈에는 별을 담고 있는 거 아닌가.

나는 인권에 대한 진실을 가장 솔직하게 표현했는데,

그들이 사용한 포스터는,

 

 

 

이 작업을 한 사람에게 아무 감정도 없다 하지만,

대체 나비와 구겨진 편지지가 인권과 무슨 관련이 있다는 말인가.

물론 있을 수도 있겠지만 나는 잘 모르겠다.

 

 

이 포스터는 '조합원들의 수준을 너무 높게 평가한게 아니냐'는 평까지 받았다.

감정을 죽이고 어찌어찌 대중에게 나갈 수 있었지만 나는 속이 많이 상했었다.

소중한 시간을 내서 '관습적'인 시안을 하나 더 만들어 보여주기도 해야했다.

더 나은 시안이 아니라 '일반적'이고 '관습적'인 시안을 만들어달라는 요구가

나를 미치게 했지만 나는 참았다.

 

웹사이트를 만들어 달래서 가장 효율적인 웹이용에 대해 열정을 가지고

몇번의 설명을 반복하고 동의를 얻은 끝에

결국 '관습적'인 형태로 만들어달라는 요청을 받고 좌절한 적도 있었다.

 

사례는 무궁무진하다.

 

언제나 담당자는 말한다. '이 판이 좀 그래요.'

 

내 포스터가 엄청 그림도 예쁘고 출륭한 작품이니 건들지 말라는게 아니다.

내 포스터가 정답이라고 우기는 것도 아니다.

세상에 정답이 어디있나? 좋은 질문이 있는 거지.

 

나는 그저 최선을 다해서 진실을 표현하려고 하는데

왜 기계적으로 생산된 거짓된 작업은 쉽게 된다면서 진실이 담긴 건 안되냐는 말이다.

 

그림이 꾸질하고 허접해도 진실이 중요한게 아니었냐는 말이다.

 

그래, 저 포스터가 진실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럼 그게 왜 진실이 아닌지 납득이 가게 설명해라.

받아들이겠다.

 

그들은 관습을 좋아한다.

새로운 것을 무서워하면서 절대로 그것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어디엔가 '관습적이면서도 새로운 것'이 있는데 내가 그걸 표현하지 못할 뿐인거다.

내 앞에서는 디자인은 좋은데 라고 칭찬하는 척 하면서

결국 '관습적이면서 새로운 무언가'를 표현하지 못한 내게 책임을 전가한다.

 

이봐, 내 눈을 똑바로 바라봐. '관습적이면서 새로운 것'은 없어.

있으면 니가 만들어보라구.

 

관료주의, 관성과 타성에 젖은 사람들. 

내 눈을 마주보고 자신이 그렇다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은 한번도 없었다.

나와 이야기한 담당자들은 늘 이 판은 그래왔고, 자신은 최선을 다했으나 어쩔수 없었노라고 했다.

 

차라리 내 작업이 나쁘다고 말하라. 나는 정말 쉽게 수긍할 수 있다.

입바른 칭찬같은 거 전혀 바라지 않고 그런 걸로 만족안한다.

나는 나 스스로 만족했을때만 만족한다.

너와 내가 다르니 만족도 다르다는 걸 인정할 수 있다.

 

왜 창의적이고 열정적이고 재능있는 사람들이 당신들에게서 떠나는지 생각해 봐라.

답을 못찾겠다면 그게 그들이 당신들을 떠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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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2/18 04:01 2010/02/18 04: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