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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 '반지성적 언론'- 2009.08.06.

[문화로 읽는 세상] 반지성적 언론

 

강의 중에 가끔 대학생은 지성의 끝을 잡고 있다고 말한다. 왜 그런지 묻는 말에 몸은 지성의 세계에 들어와 있지만 그에 맞갖은 성찰적 태도와 책임있는 행동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지성이 지식의 양이나 전문성에 있지 않다는 데는 누구나 동의할 것이다. 지성의 무게에 맞는 자기성찰적 자세와 그에 상응하는 진정성이 부족할 때 그 지식은 껍데기에 지나지 않으며, 심지어 반지성적이기까지 하다. 지성의 진정성과 자기성찰은 자신의 자리, 그가 선 지금 여기의 존재를 근본에서부터 되돌아보고, 때로는 부정하면서 그 과정을 통해 더 높은 존재로 나아가는 데 있다. 이러한 자기부정과 드높임의 과정 없이 존재의 도약은 불가능하다. 모든 지성은 이런 의미에서 자기부정적이며 존재의 도약을 내포하는 자기초월적 존재이다.

이른바 ‘조·중·동’은 언론다운 언론인가. 그 안의 언론인들은 과연 지성인일까. 미디어법이 권력연장책인지, 조·중·동과 대기업에 언론 장악의 계기를 마련하려는 것인지 따위의 논의에 빠진 언론은 결코 지성의 끝자락에도 미치지 못한다. 국회 투표에서의 코미디보다 못한 행태는 물론 일자리 창출, 세계적 언론으로의 도약 따위의 헛소리에 눈감은 그들은 과연 진정성이란 것을 가지고나 있을까? 어떠한 자성의 목소리도 내지 못하는 그들 언론인은 전혀 지성적이지 못하다. 코미디보다도 못한 수많은 이 땅의 현실에 눈감고, 한 줌의 이익과 권력을 향한 언론인에게 반지성적이라고 말하면 그들은 화를 낼까, 아니면 조금이라도 낯뜨거워할까? 참 궁금하다.

이제는 진부해진 말, “언론은 사회의 목탁이다!” 나는 이 말을 중학교 교과서에서 처음 읽었다. 뭔가 있어 보여 기억은 했지만, 그때는 무슨 뜻인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중학생인 아들도 이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그런데 그 이해하지 못함이 전혀 차원이 다르다. 그 아이는 확성기는 알아도 목탁은 모른다. 중학생이 중학생 아들을 두는 동안 목탁이 확성기가 되었기 때문일까?

조·중·동이란 조롱이 싫으면 언론답게 행동하라. 그들에 대한 비판이 정치적 공세에 불과하다면 진정으로 설득해 보라. 정말 미디어법이 필요하다면 정당하게 진행시켜라. 수많은 허구에는 침묵하면서 민생문제가 아니니 곧 잊혀지리라 생각한다면 당신들은 지성은커녕 언론조차도 되지 못한다.

그대 언론인들이여 진정 무엇을 원하는가? 인터넷의 쓰레기 논객이 보기 싫으면 스스로의 진정성과 자기성찰을 회복하라. 나도 그들이 싫다. 장자연 리스트, 삼성 사건들, 동아일보의 OCI주식 매입 의혹 등에 침묵하는 것이 당신들의 진정한 얼굴인가. 이 땅의 이념과잉과 경제만능의 저급함, 그들의 천박함과 흘러넘치는 맹목이 결국 자기이익에 매몰된 껍데기 지성인 때문임을 정녕 모르진 않을 게다.

스스로 학문하지 못할 때 이 땅의 학문이 자기배반적이듯이, 조·중·동이란 말과 파당적 보도, 자사이익이나 권력 문제를 풀지 못하는 언론은 곧 그 끝을 보게 될 것이다. 아니라고 생각할지 모르나, 나는 미디어법 파동에서 반지성적 언론과 이 땅의 기득권이 무너지는 먼 소리를 듣는다. 되돌릴 수 없기 전에 자기성찰과 자기부정을 통한 존재의 도약을 생각하라. 그나마 지성의 끝자락이라도 잡고 싶다면.

<신승환 | 가톨릭대 교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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