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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13일떡을 드려요~~(마포구 ngo활동가에게)

“4월 13일, 떡을 들고 찾아갑니다”

 KSVRC 생일을 축하하는 찾아가는 사랑의 떡차

 

     

상담소가 18번째 생일을 맞이했습니다. 1991년 4월 13일은 많은 언니, 엄마, 선배들의 열정 속에서 한국성폭력상담소가 씩씩하게 태어난 날입니다. 창립기념일, 개교기념일처럼 상담소 문을 하루 닫는 건 아니고요 ^^ 우리만의 방식으로 이 날을 풍성하게 즐깁니다. 그것은 바로, 떡을 이웃들과 나누는 것! 상담소가 마포구 합정동으로 이사온 이래로 매년 4월 13일이 되면 시루떡 백설기 절편 등을 한 가득 지어서 동네에 있는 주민, 가게, 그리고 마포구 일대에 있는 NGO 단체들, 그리고 우리가 가끔은 싸울 일도 많은 구청과 동사무소 분들에게 배달하고 있습니다.

뜨겁게 김이 나는 떡을 그릇째 드렸을 때, 답례로 얻어먹은 정성과 사랑도 무지 많았고요 상담소가 한해 한해 씩씩하게 활동하고 자라가는 모습을 잘 지켜봐주시니 감사하고요. 덕분에 상담소는 힘을 얻고 또 한해를 건강히 보내고요.

18번째 생일에는 마포구에 계신 회원님들을 찾아갑니다! 전국 곳곳으로 찾아 뵙고 싶지만, 아직은 사정상 ^^ 마포구에! 마포구에 직장이나 집이 계신 회원님들의 호출을 기다립니다. 호호 불면서 떡 한 입 떼어 서로 나누어 먹고, 상담소 생일을 축하하는 사진도 한 장!

호출하실 곳은 ksvrc@korea.com / 상담소 홈페이지 공지란 : 댓글로~ / 문자메세지 : 010-2229-0073 (오매 사무국장) / 전화 : 02-338-2890 입니다! 

미리 알려주실 내용은 이름 / 연락처 / 계신 곳의 위치 / 원하는 방문시간대 (1시~3시 / 3시~5시) / 축하메세지!입니다.  

그럼 4월 13일에 마포구, 떡을 들고 찾아갈게요! 많은 신청, 따뜻한 호출을 기다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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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따뜻한 봄날에

 

모처럼 18개월 다 된 현이와 패밀리 레스토랑에 다녀왔다.

남동생, 여동생, 남편과도~~~

푸훗^^;; 이렇게 즐거울 수가!

나들이는 역시 함께 하는 사람이 많을수록 기억도 오래 남고, 여운이 길게 가는 듯~~

 

이제는 빨대 사용도 능숙한 현이를 보며,

역시 인간은 자연스럽게 배움과 성장의 과정을 거친다는 믿음이 한층 커졌다.

모든 동물들이 그러하듯~

 

 

현아~~ 네가 웃는 모습에 엄마는 언제나 행복하단다.

밝고 명랑하게 그러면서도 섬세하게 자라다오.

엄마는 너와 많은 시간을 함께 하지는 못하지만

짧은 시간이라도 너에게 사랑을 듬뿍 표현하는 사람이 될께!

대신 엄마 외에도 수많은 사람들, 동물들, 자연, 식물, 하늘, 구름들과

더 깊고 풍부한 인연 맺기를 바랄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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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에서의 부딪힘

  내 자식의 성공,

  아들. 딸 고루 낳아 키우고 사는 게 행복인 사람들,

  가정이 서야 사회가 바로선다는 이야기들,

  그리고 악착같이 벌어서 자식 학비에 보탰다는 기쁨으로 사는 사람들...

  사실 주변에 있는 너무나 평범한 사람들이다. 참으로 열심히들 산다.

  그 이야기에 정말 잘 살아왔다고, 애쓰셨다고, 그런 말을 듣고 싶어할 걸 알면서도

  나는 그 사람들의 이야기에 동감은 커녕 화가 난다.

  소화되지 않은 언어처럼 그들의 말들이 나를 괴롭힌다.

 

  하지만 나는 약간 얼굴이 굳으면서도 '그동안 애쓰셨겠어요.'라고 말하고 만다.

  그리고 슬그머니 자리를 피한다. 뭔가 뱉어버리지 못한 말들이 쏟아져나올까봐

 

  속에서 이런 말이 들끓고 있어선가? (내 안의 이런 분노 어린 말은 왜 나오는걸까?)

  '당신같은 사람들때문에 이렇게 사회가 황폐해진 걸 알기야 아는 거야??'

 

  '내 가정을 바로 세우기 위해, 얼마나 많은 가정들이 무너져야 했는데...  

   그 무너지는 가정에 손가락질을 할망정 혹여나 연루될까 몸서리를 쳤던

  당신들이 부끄럽지도 않아?!'

  

  '그렇게 잘난 당신들의 딸, 아들이 지금은 무엇을 하고 있지? 그렇게 애지중지 성공을 위해 키운 그들이 겨우겨우 아파트 얻고 차 끌고 사면 그걸로 되는 거야?'

 

   ' 자본주의 사회에 길들여져 나말고는 내 가족말고는 누구의 고통에도 둔감해져버린, 아니 그 고통을 즐기기도 하는  스스로가 너무 비참한 거 아니야?'

 

 

  그런데 정작 나는 그들에게 한 마디 일침도 가하지 못하고

  위선적으로 웃으며 살아간다... 또 내 맘 속의 분노를 잘 설명하기도 어렵다.

  그렇게 웃고나면 한참동안 머릿속이 빙빙 돌고, 나 자신의 비루함과 가식에

  어디론가 숨고만 싶다.

 

  나라는 인간은 그렇게 회색분자처럼 살고 있는 건가, 여전히??

  괴로운 하루가 흘러간다...

 

  적어도 스스로에게는 솔직하고 싶다.

  스스로의 느낌과 감정에 솔직하면서도

  내 의견을 정확히 상대방에게 전달하고 싶다.

  그리고 같이 이렇게 거칠게, 숨이 차게 변한 자본주의 사회를 바꾸자고 호소하고 싶다.   도덕적 우월감에 휩싸인 개인주의자라는 이야기를 들어도 위축되지 않고 싶다.

  결국 너는 편하게 사니까 그런 생각하는 거다라는 이야기를 들어도 쪼그라들고 싶지 않다.
   그냥 내 위치에서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내 감정을 실어 이야기 하고 싶다.

   더이상 가면은 사양~~!~

 

 

   거칠더라도, 그래서 생채기가 나더라도, 그것이 의도치 않게 상대방을  괴롭히더라도

   (정말 왠만하면 서로 상처주고 받고 싶지 않지만, 그걸 제일 두려워해서 이렇게 오랜

시간 견디고 있지만...)

   나를 표현하고, 그래서 실수를 거듭하면서, 싸우고 부딪히면서

   변................화해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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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는다

자뭇 긴장감이 도는 시 한편을 읽었다.

뜨거운 노래를 땅에 깊이 묻는다라...

나는 나의 뜨거움을 어떻게든 들려주고 싶은데, 내가 이리 편하게 생각하는 걸 보면

깊이 묻을 수밖에 없는 시대적 현실은 지나간 것일까?

그렇지 않은 것일까?

 

연예계에 종사하는 한 여성이 생을 마감했다.

그리고 이런 일은 쭈욱 있어왔다.

그리고 소문만 무성한채 시간이 지나면 흐지부지 해졌다.

 

이제는 웅성거림만 존재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문제라면 각자 책임의식을 갖고 현실을 바꿔가면 좋겠다.

이 땅의 언니들이 더이상 생을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들과 손 붙잡고 함께 걸어가고 싶다.

 

 

 

<유치환의 시>

 

고독은 욕이 되지 않으다.

견디는 이의 값진 영광.

 

겨울의 숲으로 오니

그렇게 요조턴 빛갈도

설레이던 몸짓들도

깡그리 거두어 간 기술사의 모자.

앙상한 공허만이

먼 한천 끝가지 잇닿아 있어

차라리

마음 고독한 자의 거닐기에 좋아라.

 

진실로 참되고 옳음이

죽어지고 숨어야 하는 이 계절엔

나의 뜨거운 노래는

여기 언 땅에 깊이 묻으리.

 

아아 나의 이름은 나의 노래.

목숨보다 귀하고 높은 것.

마침내 비굴한 목숨은

눈을 에이고 땅바닥 옥에

무쇠 연자를 돌릴지라도

 

나의 노래는

비도를 치레하기에 앗기지는 않으리.

 

들어 보라

저 거짓의 거리에서 물결 쳐 오는

뭇 구호와 빈 찬양의 헛된 울림을

모두가 영혼을 팔아 예복을 입고

소리 맞춰 목청 뽑을지라도

 

여기 진실은 고독히

뜨거운 노래를 땅에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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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의 심정

마음이 괴롭다, 혼란스럽다...

누구도 배신하고 싶지 않지만, 어느 순간 나는 누구에게도 만족감을 줄  수 없는,

씁쓸하게 만드는, 포섭될 수 없는 아웃사이더로 남아있다.

그 속에서 난 웅크리고 밑바닥만 쳐다보며 돌멩이를 바닥에 긁어대고 있다.

멍~~하게...

불같이 개입하기를 두려워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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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의 흔적

상관없는, 그러나 알고보면 연관되는

이야기 한마디로 

예전의 상처는 건드려진다.

중얼거림으로 시작되어 분노의 소리로 이어지는...

 

그러나 그 이야기를 듣는 상대방은

이게 무슨 날벼락인가?

왜 논리의 일관성없이 이야기를 전개하는가?

그리고 왜 나를 공격하는가?

라는 벙찐 표정의 화답을 할 뿐...

 

힘든 기억들,

그것을 참고 잊고 산다하지만,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예리한 유리조각같은 말로

순간순간 분풀이를 하나보다, 나란 인간은...

 

머리 속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해결되지 않는

그런 행동을 하는 내 자신이 화가 나는

그런 행동들...

그런 기억들

어느 새 참 많아졌다.

 

내 안의 힘든 기억들, 소화되지 않는 설움이

또 다른 이들을 괴롭히는 이 쳇바귀를

이제는 끊고 싶은데...

 

아직은 시간이 많~~~~~이 필요한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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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친구의 독백을 들으며 시 한편

쓰린 마음 속에 촛불 하나 켠다
어둡다- 춥다-
제대로 보이는 게 없다
.....
조용히 웅크려본다

 

 

쓰라린 마음 속에 촛불 밝힌 벗
그녀가 보인다
눈물이 난다
그리고...
조용히 웃어본다

 

 

온몸이 데인 채 촛불을 켜고 활짝 웃는 벗
그녀도 보인다
같이 웃기가 힘들다
미안하고 아프다
...


 

그녀들이 나를
나를...
내 촛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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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의 울음과 인권 사이

현(14개월된 아가^^)의 울음. 아침부터 자지러지게 우는...

그 이유를 차분히 생각할, 현의 마음을 들여다 볼 여유가 없는 나.

(참고로 현재 남편은 시험공부때문에 집에 안들어오고 있는 상황...

 집에는 나와 현만이 ㅜㅜ)

내 할 일이 우선인 나...

 

나는 그렇게까지 급해야만 했나?

때는 새벽 6시 반

집을 나설 때까지는 1시간 반이 남은 상황.

현의 마음을 먼저 들여다보지 않는 나.

(사실 들여다보려 몇 번 어줍잖은 노력을 했지만, 정말 알다가도 모를 것이 아이의 마음)

내 위주로 생활질서가 잡힌 나.

그 흐름을 깨뜨리는 누구에게라도 나는 으르릉거린다.

하물며 약한 미물인 아이에게도 예외는 없다.

그렇다면 현은 단순한 희생자, 나는 어른의 권력을 함부로 휘두르는 가해자인가?

 

 

 

 



인권의 지평을 넓힌다 할 때

고정된 '인권'이 아닌 가능성, 저항의 언어로서의 '인권'을 지향한다고 할 때

'보편 인권'이라는 틀을 넘어서고자 할 때

당사자 개개인의 '인권' 목소리를 넘어

개개인의 권리를 잠시 양보할 마음을 가진 자들의 만남이 필요하다고 할 때

그 만남에선 우선 나의 역구를 내려놓고

기꺼이 타자(주되게는 소수자)의 위치를 최우선으로 놓아야 한달 때

(인권재단 사람이 주최한 '인권이야기 두 마당'에서 나온 이야기들)

 

다 맞는 이야기고, 내 지향이기도 한 이 이야기들이

내 삶의 현실 속, 현과 나의 관계에서 어떻게 실현되고 있는지 사색에 빠진다.

 

나는

어제 아침 소리지르며 우는 현을 때린 나는

현에게

그 현장에서는 억압자, 소리를 막는 자였다. 부인할 수 없다.

그 시간, 그 현장에서 나는

울어대는 현과 만남의 자리를 갖기 위해

나 자신의 질서, 편안함, 욕구를 접지 못했다.

현의 공감받고자 하는 감정을 무시했다.

이 공간에선 난 가해자였다.... ㅜㅜㅜ

 

그런데 모두들 알겠지만,

인간사회는

이 둘만 사는 공간으로만 형성되어 있지 않다.

어제 아침의 그 순간에는 가해자였지만

나를 가해자인 그 상황으로 몰고간 것을 100% 내 탓으로 돌릴 수 있는가?

 

현이를 혼자 돌봐야 하는 현재 상황...

퇴근하고 와도 여전히 남아있는 빨래, 청소, 현이 목욕시키기, 재우기,

자다 우는 아이 달래서 다시 재우기, 아침에 우유 먹이고, 옷입히기...

밤에 두 세번은 기본으로 뒤척이고 깨서 우는 현이와 살다보면

과연 쉼이라는 것이 나에게 어떻게 존재하는지 묻게 된다.

한 달이 지나도 여전히 감기를 달고 사는 나...

나를 지지해줄 체계는 가족밖에 없는 현실...

그나마 그 가족(남편, 시부모 등등)조차 각자의 이유로 바쁘고...

 

 

인권의 지평을 넓힌다는 이야기...

뭔가 동의는 되는데, 제대로 잡히지가 않는다...

우선 수면부족으로 머리가 제대로 안돌아간다...

졸린다... 그래도 글을 쓴다... 이게 살아있는 내가 할 수 있는 몇 안되는 일이니까...

 

솔직히 얘기해서

우선 먹고, 자고, 입는 문제만이라도

모든 사람들에게 제대로 해결되었음 한다.

 

경제적으로 어렵다고 한다, 요즘...

그래서 다른 이들에게 후원하는 일도 줄어들고 있다.

나 살기 힘들다고...

지구에 사는 수많은 인간들속에서

그나마 한국의 삶은 풍요롭지 않았던가?

그 풍요로움을 조금 깎였다고 내 돈 아끼기에 급급한 건 아닐까?

나의 풍요로움 아니 현재의 적당함을 나눠서

내 주변 다른 이들의 배고픔을 함께 하는 일

그 일부터 나는 해야겠다.

 

잠이 부족하다, 지지체계가 없단 말

그 말도 수많은 다른 여성들의 상황과 비교하면

너무나 풍요로운 수다에 지나지 않을지도...

 

허허허 오늘도 수다가 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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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개입양가족의 적응이라...

양육, 육아의 고통을 너무나 뼈저리게 경험한, 경험하고 있는 나로서는

감히 엄두도 못 낼 주제인 '입양'

 

'입양'을 하는 이유는 다양하겠고,

많은 부분 '불임'이라는 상황 속에 피할 수 없는 대안이기도 하겠지만...

소위 혈연 중심의 가족을 당연시하는 한국사회에서

'입양'을 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사회적 소수자가 될 수 있다는 이야기.

그 안에서 차별과 배제를 경험하면서 당하는 고통들...

그러나 그 고통을 통과하면서(입양사실을 알리고, 입양 가족 안에서 적응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전통가족제도와 문화에 균열을 내고 있는 그들.

 

그들은 특별히 더 선한 사람들도 아니다.

단지 자신들의 필요와 이유에 따라

입양이라는 선택을 했을 뿐이다.

 

단지 입양가족을 바라보는 사회 전체의 고정된 시선, 반응이 차별적이라 문제인 것이지...

 

그런데 그런 입양의 특수성과 대비해 나는 어떤가?

 

   

 




지난 주에 현이(아기 이름)를 어린이집에 보내는 중에

두 분의 여성(60대 정도로 보이는)들이 하는 이야기를 듣고 말았다.

 

"저렇게 어린애를(현재 현이는 만으로 14개월) 어린이집에 보내다니.. 애도  불쌍하고 엄마도 불쌍하다

 엄마는 돈 벌러 일하러 가야되고, 애하고 떨어져 있어야 하다니..." 

 

입양이라는 상황과 동일하다고 볼 수는 없지만

아기가 어릴 때(통상 만 세 살 전)에는 엄마하고 떨어져 있으면 안된다는 주변의 시선으로

나는 죄많은, 그러면서도 불쌍한 엄마가 되고 만다.

나는 죄 많지도, 불쌍하지도 않다.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는 것이고,

당연히 어떤 상황에서도 사회적으로 일이 필요한 사람이다.

여자는 가정, 남자는 바깥일이라는 이분법은 나에게 통용되지 않는다.

돈이 없어서 억지로 떠밀려 일하는 불쌍한 사람 취급받고 싶지 않고,

엄마하고만 아이가 있다고 행복하지 않다는 사실을 직접 깨닫기도 한 사람이다.

(지난 6개월 아이와 단 둘이 있으면서 우리는 서로 행복했던가? no!! 나는 나대로 내 일을 못해

스트레스 받았고, 아이는 나밖에 의존할 사람없어서 괴로웠다, 어떻게 아냐규? 엄청 많이 울어댔으니까!)

 

 

그날 그 사람들에게 직접 이야기는 하지 않았지만,(바로바로 이야기 못하는 나의 한계여!)

지금이라도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

 

"지금 우리 아기는 어린이집에서 다른 친구들 사귀면서 사회생활 잘 배우고, 건강하게 지내고 있거든요.

저도 일 시작하면서 더 행복하고, 아기에게도 짧은 시간이지만 둘만 있을 때보다 즐겁게 지내구요,

쓸데없는 걱정은 하지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그래,

바로 그거다.

뭔가 세상은 이래야 한다는 고루한 관념으로

자신이 맞다는 고정된 시선으로

타인들의 상황을 재단하고 판단하지 말라는 거다.

 

입양가족들에 대해서도, 일하는 엄마와 어린이집에서 낮시간을 보내는 영아에 대해서도

동성애 커플에 대해서도, 성폭력피해생존자에 대해서도, 이주노동자들에 대해서도

기존에 가진 색안경으로

불쌍해하거나 혐오하거나 무시하는 그런 태도들...

 

그게 참 무섭단 생각이 든다....

 

권지성씨가 쓴 '공개입양가족의 적응'은 나에게 이렇게 읽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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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희망의 정수박이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적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든 옛 맹서는 차디찬 티끌이 되야서 한숨의 미풍에 날어 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 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 하얐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한용운 [님의 침묵]

 

내가 가끔 찾아가는 조이여울 기자의 블로그에 한용운 님의 시를 보고,

문득 가슴 뭉클하여 글을 쓴다.

 

최근 상담소의 한 회원을 만나 인터뷰를 하는 와중에

사람을 다루는 업을 하다보니 인간에 대한 절망, 좌절, 운동 혹은 변화가능성의 부질없음을

토로하는 회원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한 사람이 느끼는 절망의 수위는 어디까지 일까?

절망이 아닌 희망이라고 이야기하는 나는 과연 절망을 알고 있을까?

그 때는 내가 가진 희망들은 과연 어떤 희망일지, 회원의 절망감의 깊이는 어느 정도일지

잘 알지도 못하면서 무슨 이야기를 꺼낸다는 것 자체가 괴로웠다.

 

그런데, 한용운시인의 '님의 침묵'을 다시 읽으면서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란 구절을 깊이 음미하게 된다.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을 눈물로 쏟아내버리지 않고, 그 안에 머물지 않고,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붇는다는 말...

 

그것은 또 얼마나 고되고, 고통스럽고, 쓰라린 일일까?

 

있는 표현, 없는 표현 하는데 익숙해버린 나의 운동, 나의 일상적 삶과는 사뭇 다른

시인의 삶이 자꾸만 내 마음을 파고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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