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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집과 반자본운동

빈집님의 [빈집과 주거운동] 에 관련된 글.

 

전월세 보증금과 이자

목돈 2000만원을 집 소유자에게 전월세 보증금으로 맡겨두는 것은 20만원의 월세를 내는 것과 같은 효과를 갖는다. 즉 2000만원이 매월 20만원을 낳는 것이다. 다시말해 목돈을 집 보증금으로 넣는 행동은 정확히 월 1%, 연 12%의 이자를 낳는 투자행위다. 은행 예금 이자가 대략 4%라 하면 세 배에 달하는 수익률에, 보증금은 법적인 보호를 받는다는 점에서 지극히 안정적이기까지 하다. 서민에게는 이만한 투자가 없다. 하지만 보증금조차 없는 극빈층을 제외하고는 누구나 하고 있다는 점에서, 투자와 이자라고는 도무지 생각되지 않고 있을 뿐이다. 단지 안 하면 손해고 못 하면 서러울 뿐.

하지만 이것은 엄연히 투자다. 다시 말해 자신의 화폐를 부동산시장에 투자함으로써, 자본으로 전화시키고, 거기서 비롯되는 수입을 얻고자 하는 선택이다. 즉, 자본 수익을 얻고자 하는 자본가로서의 행동이다. 월세집, 고시원, 쪽방 등에서 이렇다 할 보증금 하나 없이 사는 사는 사람을 제외한다면... 사실 우리는 누구나 일정정도 자본가인 셈이다. 노동자에게 쇠사슬 말고도 잃을 것이 있어서 혁명이 어렵다면, 그 중 가장 큰 것은 부동산 시장에 묶여있는 그들의 자본일 것이다. 부동산 가격의 하락을 누구도 선뜻 반길 수 없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물론 우리의 이러한 투자행위는 우리 스스로를 옥죄는 결과를 낳는다. 우리의 자본은 수익을 가져다주지만 그 수익은 자본의 시스템이 우리를 착취하고 남은 수익의 부스러기를 던져주는 것에 불과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착취되는 것이 훨씬 더 많기 때문에 전체적으로는 자본가라고는 전혀 얘기할 수 없다. 하지만 그 행위 자체가 자본을 담지한 사람으로서의 행위라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

이것을 도덕적으로 옳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가능하다. 그러나 문제는 화폐를 단지 장농 안에 넣어둘 것이 아니라면, 다른 선택은 없다. 은행에 넣든 부동산에 넣든 그것은 자본이 되어 이자를 만들어 낸다. 자선이나 기부를 한다거나 또는 특별한 반자본주의적인 투자처를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전월세 보증금은 부동산을 구매하는 것도 아니고 상대적으로 정당한 투자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자신이 보증금을 부동산에 투자하고 살아왔다는 것이, 이자를 받아온 것과 같다는 사실을 깨닫고 놀랄 이유는 없다. 빈마을금고에서 출자자에게 돌려주는 최소의 이자를 들고 당황할 필요도 없다. 문제는 그것을 어떻게 쓸 것인가 하는 것이다. 그것을 다시 잘 분배하면 된다. 이자로 얻은 수입을 소비 규모를 높이는 사용하거나, 부동산이든 주식이든 은행이든 재투자함으로써 이자가 또 이자를 낳게 하지 않으면 된다. 만인을 착취한 결과로 생긴 수익, 만인이 생산한 수익, 만인에게 되돌려 주면 된다. 이로써 자본은 자본의 소유자에게 아무런 특별한 보상을 주지 않는 것이 된다. 자본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은 단지 개인의 여러 특성 중에 하나가 된다. 자본이 욕망의 대상이 아니게 된다.

 

빈집, 자본의 소멸

빈집은 무단점거한 집도 아니고 버려진 집도 아니고 월세집도 아니다. 누군가가 출자한 돈, 누군가에게 빌린 돈이 전월세보증금으로 들어가 있다. 그리고 이것은 물론 월세 부담을 줄이기 위한 투자다. 여기까지는 다른 여느 집들과 다를 바가 없다. 빈집의 특이함은 다음의 두가지다.

첫번째는 출자금과 무관하게 동일한 분담금을 낸다는 것이다. 출자자에 대한 보상은 전혀 없다. 출자금에 따른 자본수익은 다른 빈집 식구들과 공유하고, 출자자 역시 그 식구의 일원으로서 공유하는 것이다. 이러한 경제구조는 가족과 유사한 면이 있다. 가족과 같이 사는 사람들이라면 집을 구매하거나 임대하는 데 누가 돈을 냈느냐를 따져서 금전적으로 보상하는 경우는 별로 없다. 물론 같은 분담금을 납부하는 경우도 없다. 동거나 쉐어하우스 같은 주거 형태는 동일한 출자금을 내는 것이 보통이고 출자금이 부족하면 월세로 대신하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가족의 경우 문제는 대신 원한 또는 부채 의식이나 권력 관계로 드러난다.) 결국 빈집은 가족 관계가 아닌 사람들이 가족과  유사한 소유관계를 갖는 셈이다.

첫번째 특징은 물론 대안가족의 형태로서 충분한 의미가 있지만, 한계 또한 분명하다. 다시 말해 출자자가 다른 빈집 식구들을 가족이라고 여긴다면, 빈집이 여느 가족 주거가 다를 바는 없다. 독특한 가족이라는 의미는 있지만, 여전히 가족일 뿐이다. 가족의 외부에서 본다면, 자본 수익은 여전히 발생하고 있고, 그 수익은 여전히 가족 안에 머무르고 있을 뿐이다. 가족 내부에서는 독특한 방식으로 공유되어 있지만, 가족 외부에서는 사유되어 있다. 반대로 얘기하자면, 가족 외부로부터 사유되어 있기 때문에 내부에서의 공유가 가능해진다. 더 나아가자면, 내부의 공유를 위해서 외부로부터 수익을 얻어야 한다.

그래서 더 중요한 빈집의 두번째 특징은 빈집이 누구든 주인이 될 수 있는 집, 만인에게 열려 있는 집이라는 점이다. 빈집의 식구가 되는 데 아무런 문턱이 없다는 점이다. 이로써 원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자본의 수익을 공유할 수 있어진다. 출자자는 전월세 보증금에서 나오는 12%의 수익을 n명의 사람들과 공유해서 12/n의 수익을 얻을 뿐인데, n이 커지면 커질수록 사실상 그 수익은 0으로 수렴한다. 만인에서 비롯된 자본 수익이 만인에게 돌아간다. 자본 수익은 0으로 떨어진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빈집의 전월세 보증금에 출자한다는 것은 자기가 소유한 자본 수익을 기대하지 않는다는 것, 사실상 자본을 만인과 공유하겠다는 정치적 실천이다. 만인을 가족으로 긍정하는 윤리적 실천이다.

 

반자본적 투자, 빈마을금고

현실은 좀 더 복잡하다. 빈집의 규모에는 한계가 있다. 만인이 함께 살 수는 없다. 빈집에서 살고자 하는 사람이 늘어날수록 문제가 발생한다. 우선은 물리적 한계로 인해서 더 이상 새로운 사람이 올 수 없게 된다면 빈집은 구성원이 고정된 가족과 같은 형태가 된다. 빈집이 비어있지 않다면, 꽉 채워져서 더 들어올 수 없다면 빈집이 아니다. 들어오고자 하는 사람을 제한하거나, 살고 있는 사람을 내보내지 않으면 안된다. 따라서 살던 사람이 그대로 살면서 새로운 사람들이 들어오려면, 빈집은 계속해서 확장되어야만 한다. 빈집을 유지한다는 것은 빈집을 확장한다는 것과 같은 의미다. 빈집에 계속해서 살고 싶은 사람이라면 빈집의 확장 또는 확산에 기여하지 않으면 안된다.

한편, 가족의 범위를 집문턱을 넘어서까지 넓히는 것은 쉽지 않다. 빈집들간의 교통이 활발하지 않으면 회의 때나 볼 수 있는 사람을 가족이라 하기는 어렵다. 여러개의 빈집들을 하나의 경제공동체로 묶기는 쉽지 않다. 전월세 보증금도 집문턱을 넘기 어렵다. 집들간의 가격 차이와 보증금 비율의 차이에 따른 분담금의 차이도 극복하기 어렵다. 부동산 계약의 특징상, 계약 시점에 목돈이 있어야 하고 적어도 2년간은 묶여 있어야 한다. 또한 물가와 전세가가 상승함에 따라서 출자금의 가치는 상대적으로 하락하는데, 정치적으로 올바른 선택을 한 출자자에게 이 부분마저 감당하게 할 수는 없다.

빈마을금고에 관해서는 수많은 논의들이 있었지만, 간단히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빈마을금고는 빈집을 확장, 확산함으로써 조합원의 자본 소득을 만인이 공유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출자금은 빈마을금고 조합원이 빈집을 만드는데 전월세 보증금으로서 대출된다. 해당 빈집 식구들은 대출에 따른 이자를 분담금을 모아 납부한다. 출자자에게는 물가 상승분 정도의 가치보전만을 보장한다. 빈마을금고는 그 차액을 적립하는 한편 추가적인 출자금을 모아 다음 빈집을 준비한다. 정리하자면, 조합원의 출자금을 빈집 전월세 보증금에 투자하고 여기에서 발생한 이자 수익 12%를 해당 빈집 식구들, 빈마을금고, 출자자에게 분배한다. 현재까지 논의된 안은 물가상승률을 3%라 생각할 때 각각 6%, 3%, 3% 이다. 6%는 현재 빈집을 살아가는 투숙객들에 대한 응원에, 3%는 미래에 올 빈집 투숙객들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에, 3%는 빈집에 재투자되어 안정적인 재계약에 기여할 것이다.

 

 

승욱의 말대로 "혁명의 진행과 우리의 전세금/출자금은 반비례 관계 T.T"인 이유는 우리의 전세금/출자금이 자본이기 때문이다. 혁명이 두렵다면 그것은 우리가 어떤 부분에서는 자본가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잃을 것이 쇠사슬 말고도 더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눈물을 흘릴 필요는 없다. 집값이 떨어지고, 월세가 줄어들 것이다. 우리는 여전히 일할 수 있고, 서로 돕고 같이 사는 친구들이 있다. 무엇이 두렵겠는가? 우리가 사는 데는 하등의 문제가 없다. 다만 우리가 가지고 있었던 자본 소득이 없어질 뿐이다. 그런데 이것은 원래 없었어야 할 것이 없어진 것일 뿐이다. 그것 때문에 집값이 높아지고, 전세금을 계속 불렸어야 했고, 임금노동을 했어야 했고, 친구를 잃고 있었던 것이다. 앞서 쇠사슬이 아닌 무엇이라고 했지만, 어쩌면 우리가 가진 자본 이것이야 말로 가장 강고한 쇠사슬일지도 모른다. 자. 다시 한번 되뇌어 보자. "우리가 잃을 것은 오직 쇠사슬이요, 얻을 것은 전 세계이다. 만국의 빈민들이여 단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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