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운동과 가난

빈민운동판에서 10년 넘게 자신 또한 빈민이 되어 운동하는 친구가 있다.

박사까지 한 친구인데.. 자신의 신념때문에 오늘도 이 사회 바닥을 전전한다. 

소주 한잔 하면서 그가 내게 건넨 말이다.  

"운동하려면 가난해야 돼요.. 돈을 가지게 되면 운동이 안되게 돼 있거든요."

 

10년전, 서준식이 비슷한 얘기를 한 게 생각난다.

"김규항: 진보적인 의식을 유지하는 데 검약한 생활이 필요하다고 보는가?
서준식: 결정적이다. 이 사회에 가난한 사람이 있는 한 진보적인 사람, 운동하는 사람은 가난해야 한다. 가난하지 않으면 정당하지 않다. 가난한 사람들 말이 액면 그대로가 정당한 건 아니지만 일단 배부르게 사는 사람들의 말은 일단 정당하지 않고 배고픈 사람들의 말은 정당하다는 전제를 가지고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다. 독립군 정신이다."
 

연대사업 하다보면 만나는 단위마다 분위기가 천양지차일 때가 있다.

나는 5천원짜리 된장찌게에 밥을 말아 그걸 안주로 소주 먹는 노동/민중운동 선수들이 가장 예쁘다.

일부긴 하지만, 대학 근처 카페에서 8천원짜리 커피 시켜놓고 몇 시간이나 수다 떠는 특정 부문운동 선수들(알만한 사람들은 안다..)은 못견디게 불편하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김예슬,박지연,천안함 희생자..

간만에 정곡을 꿰뚫는 글이 하나 나왔다. 9일자 프레시안에 실린 “김예슬 vs 故 박지연 vs 천안함 희생자…공통점은?” 제하의 노정태씨 문건이다.

 

그는 ‘세상을 바꾸자’며 진보를 말하는 우리들의 오류에 딴지를 걸었다. 김예슬의 용감한 결의는 그것대로 훌륭한 것이지만, 박지연과 천암함 희생자들에게도 우리의 시선은 공평하게 작동하고 있는가. 그는 아니라고 단정했다. 그리고 진보진영의 단골손님인 우석훈의 등록금 인하책이 대학 변혁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으로 전망했다.

 

<“현재 우리 사회에 통용되는 '20대 담론'이 철저하게 대학생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이보다 더 잘 보여주는 사례가 과연 또 있을까? 명문대에 다니는 대학생은 자퇴만 해도 화제가 되고 저항하는 20대로 승격된다. 고등학교만 나오고 공장에서 일하다가 백혈병으로 죽은 젊은이는 죽어서도 투쟁의 주체가 아닌 산업 재해의 희생자가 될 뿐이다.

.. 가령 이번에 침몰한 천안함 사건을 되짚어보자.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대부분의 남성들은 군대에 간다. 그 군대는 지금 우리가 확인하고 있는 바와 같이 인권의 사각지대이며 누군가가 애꿎은 생명을 잃어도 속 시원한 해명 한마디 내주지 않는다.“>

 

진보진영은 삶의 태도에서 노동자민중들과 더불어 호흡하고 있는가?

진보진영은 실제로 노동자민중들의 편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나는 이 두 가지 질문 앞에 진보진영에서 답할 수 있는 사람은 매우 드물 것이라고 보는 쪽이다. 우리가 진보진영에 속한 사람들이라고 유추하는 다수는 기업대학을 포함해 자본의 과소비 아이템에 깊이 침윤된 채 학벌카스트를 누리는 화이트칼라들이다. 그들이 몸담은 영역이 정당이건 시민사회단체건 개인이건 말이다.

 

해서 그들의 눈빛은 예슬과 지연에게 달리 나타날 수밖에 없다. 특히 천안함 관련 사태(천안함: 사망 2명 실종 44명, 금양호: 사망 2명, 실종 7명)에 대해 촛불시민보다도 더딘 진보진영의 움직임을 보노라면 “참 갈 길이 멀다”는 느낌이다. 이제 '20대 담론'같은.. 부문운동 이벤트 활동가들로 득실거리는 두루뭉실한 진보는 그만 끝장내고, 정확하게 정리된 좌파가 등장해야 한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양심수후원회

구속자들을 돕는 단체중에 양심수후원회라는 곳이 있다. 민가협 소속인 이 단체는 4월 8일 현재 양심수 숫자를 69명으로 올려놓았다. 작년 상반기까지는 '종교적 신념'으로 병역을 거부한 사람들까지 숫자에 포함시켰었는데 이젠 슬그머니 빼버린 상태.


결과적으로, 자신들이 임의적으로 판단한 시국사범만 양심수로 인정하자는 얘기인 듯 한데 이런 식으로 운동해도 되는 건지 고민이 필요하다.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권 실현과 대체복무제 개선을 위한 연대회의」조사 결과에 의하면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를 이유로 구속 수감되어 있는 양심수는 428명인 것으로 밝혀졌다. 작년 2월 데이타다.


필자는 양심수 기준과 관련하여 두 번 정도 양심수후원회에 전화를 통해 종교적 신념(집총거부를 선언한 여호와의 증인이 대표적인 사례)으로 인한 병역거부자들도 당연히 양심수 숫자에 포함시켜야 하는 게 아니냐고 제안한 적이 있다. 그러나 당시 관계자는 자신들의 기준이 어떻다는 등 이해할 수 없는 표현으로 포함시키기를 사실상 거절했다. (좋게 보아) 아마도 구속자들에게 보내는 물질적 후원 리스트에 갇힌 사고가 아닌가 하는데, 아무리 그럴지라도 이런 속좁은 발상은 '조직이기주의'란 비난의 소지를 면하기 어렵다.


이른바 운동한다는 단체에서 조직 중심의 기계적인 사고에 젖어 있는 이들을 본 게 한 두번도 아니지만 이런 경우 늘상 떠오르는 단어가 '밴댕이 소가지' 다. 운동을 해도 참 인색하게 하는구나.. 집총거부가 양심적 병역거부로 이어진 것이 분명함에도 이들을 시국사범에서 배제한다면 수감자와 그의 가족들이 소외로 인해 얼마나 섭섭한 생각이 들 것인지 그런 상식도.. 운동의 저변을 폭넓게 확산시켜야 한다는 당위도 인지하지 못한 것인지.. 한심하기 이를데 없다.


천안함을 도우러 갔다가 아이러니하게도 천안함 군 실종자 이슈(사망 2명, 실종 44명)에 묻혀버린 금양호 선원 9명의 실종자들. 이들이 죽음에서조차 차별받는 역겨운 현실 앞에서, 운동에서조차 구속자를 자신들의 이해가 얽힌 숫자로 차별화 하는 행태가 있다면 이는 크게 잘못된 일이다.


양심수후원회는 지난 2006년 2월 민주성노동자연대(민성노련)가 성노동자들이 생존권과 주거권 사수를 위해 싸우다 감옥에 가면 '양심수'로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해 보낸 공개질의서에 입장표명을 하지 않아 당시 투쟁하던 성노동자들을 실망시킨 바 있다.    


기존의 엔엘이나 피디 개념을 넘어, 사회적 제 현상에서 '차별철폐'는 어떤 경우에도 변혁운동이 지켜나가야 할 가장 중심적 기조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돈오돈수·돈오점수

7일자 한겨레 '유레카'에 돈오돈수(頓悟頓修)·돈오점수(頓悟漸修) 얘기가 실렸다. 

이 글에서 기자는 頓修를 해인사의 성철이 불교계 내부의 각성을 촉구한 불호령으로, 漸修를 송광사의 법정이 외부로 열려 있는 실천을 강조한 자비심으로 각각 자리매김하면서 두 논리의 상충을 보완했다.


널리 알려진대로,  頓修란 단박에 깨치면 더 이상 수행할 것이 없다는 얘기고 漸修는 점진적인 수행을 거쳐야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는 얘기인데, 이와 유사한 상충현상은 변혁운동 공간에서도 종종 일어난다.


이미 맑레 선생께서 모든 역사철학을 頓悟해서 평정하셨기에 그를 따르면 되지 나머지는 죄다 잡설이라는 논리와  맑레 선생 이후 시대상황이 매우 다양하게 전개되고 있으므로 후학들과 함께 이를 미분ㆍ횡단해서 頓悟로 나아가자는 논리가 그것인데 여간 지난한 얘기가 아니다. 그 중에는 본 블로그 내부모순에 올려놓은 국가자본주의 논쟁도 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속내 & 관료

몇년 전 한 여성언론사 토론회에 패널로 참여한 적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모 여성단체 공동대표를 만났다. 토론회 후 그녀로부터 개인적인 뒤풀이 제안이 있어 인근 식당으로 이동해 식사와 함께 대화의 장이 마련됐다.

 

두 사람은 그동안의 내력에서 운동의 전반적인 흐름 정도는 맥락을 꿰고 있기에 그리 불편한 자리는 아니었다. 단지 각기 상황(성주류화 전략을 기조로 한 여성계의 '성정치')에 대한 입장이 다를 뿐이었다. 그녀가 속내를 솔직하게 털어놨다.  


"(웃으면서) 그만하세요.. 좀 있으면 여성계가 성매매 가지고 그렇게 큰소리 내지 않을 거예요. 여성부에서 여성가족부로 바뀌면 업무도 많아질 거고.. 지금은 한 쪽으로 휘어진 가부장제라는 대나무를 반대편으로 누르는 중이잖아요.."


익히 알고는 있었지만 당사자 입을 통해 들으니 새삼스러웠다. 여성계 권력을 확대하기 위한 수단으로 성매매(특별법)란 아이템을 정치적으로 활용한다는 내 생각이 재확인된 순간이었다. 관료를 향해 질주하는 주류여성계의 비루함에 나는 할 말을 잊었다.  


생뚱맞게 오래 전 잠시 제도권(야당)에서의 특별한 경험이 오버랩 됐다. 수구정당 소속 국회의원 사무실에서 일하는 어떤 보좌관이 내게 토로한 취중진담 장면이다. 난 그 때도 녀석의 지독한 솔직함에 아무런 대꾸를 못했었다.


"난 말이야.. 아니 우리같은 사람은 말이야.. 김일성이가 내려오면 그쪽에 설 거라고(당시엔 김일성이 생존해 있을 때였다.).. 왜냐..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 아냐?.. 그러니 힘 있는 쪽에 서야 될 거 아닌가.. 하지만.. 당신같은 사람은 말야.. 아마 김일성이 내려오면 그 때도 반대편에 있을 걸.. 그치?..안그래?.."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빌헬름 라이히.. 이모저모

 "지도자는 항상 대중 의지, 곧 평균적 인간 구조의 반영이다. 진보적인 동시에 반동적인 구조를 가진 평균적 인간의 모순과 마찬가지로 지도자의 사고와 행동은 자기 모순적이다. 이러한 구조는 가족 속에서 준비되고 국가구조 속에 그 효과가 지속된다.."


이 글은 '파시즘의 대중심리' (빌헬름 라이히 저, 현상과인식/1987년)에 실린 역자 오세철의 논문 중 맺음말 부분이다. MB의 탄생과 파시즘의 부활을 목도하는 사람들이 라이히를 주목하는 건 아마도 이런 연유와 무관하지 않은 듯 하다. 


그러나 노동자민중들이 MB를 만들지 않았다는 조사도 있다. 그들은 자신들을 대변할 정당이 없기에 기권했다는 것이다. 한겨레21 '계급정당, 계급색이 없네' [2010.02.19 제798호] 기사 결론부가 흥미롭다. 이를 보면 요즘 파시즘에 유난히 질린 사람들은 이전 정권의 창출에 기여한.. 아쉬움이 많은.. 당시 유사파시즘과 오늘 파시즘이 사실상 쌍생아란 걸 모르는 노빠/진빠류 사람들이 '주류'가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든다. 

  

"확실한 건 살아남으려면 이겨야 하고, 이기려면 자신들이 누구의 대리인인지 명확히 밝혀야 한다는 점이다. 기러기떼의 선두는 뒤따르던 기러기들이 자기가 가는 방향과 조금 떨어진 방향으로 이동하면 즉시 그 쪽으로 이동해 앞장선다고 한다. ‘20 대 80’ 사회인 이 땅에서 80%가 과연 어디를 보고 있는지, 진보 정당이 다시 살펴야 할 때가 아닐까." 

[전문] http://h21.hani.co.kr/arti/cover/cover_general/26756.html


이와는 별개로 빌헬름 라이히의 저서 '성혁명'은 21세기에 성에 관해 유난히도 진부한 이 사회에 시사하는 바 여전히 크다. 이 책에 실린, 1920년대 당시 '성 개혁을 위한 세계 연맹'의 강령을 보면 대-한-민-국이 그리고 급진적 여성주의가 얼마나 뻘짓을 하고 있는지 잘 보여준다. 자그마치 90년전 얘기다.


1) 여성에 대한 정치적, 경제적, 성적 평등

2) 교회와 국가에 의한 감독으로부터 결혼(특히 이혼)의 자유화

3) 책임 있는 자녀 교육이라는 의미에서의 출산 조절

4) 자녀에 대한 우생학적 영향

5) 미혼모와 그 자녀에 대한 보호

6) 성간의 변이자들, 특히 동성애적 남녀에 대한 올바른 평가

7) 매춘과 성병의 예방

8) 성적인 충동 장애를 지금까지처럼 범죄, 죄, 부도덕으로서가 아니라 다소 병리적인 현상으로 이해

9) 성인들 사이에서 상호 합의에 기반한 성 행위는 처벌하지 않고 두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의 성 자유에 대한 현실적 침해만을 처벌하는 성 형법

10) 계획적인 성 교육과 계몽


[에피소드 하나]  *용산참사 투쟁이 진행 중이던 지난해 어느날 오세철 선생과 뒤풀이에서 자리를 같이 했다. 내가 오 선생께 "라이히 번역도 하셨는데 카타리에게는 관심이 없으십니까?"라고 견해를 물으니 오 선생은 그 쪽은 아니라고 간단히 자른다.. 옆에 있던 고민택 동지가 한 마디 거들었다. "알 건 다 알아야 하지 않습니까.." (오 선생.. 불편한 표정, 이후 분위기 써~얼렁.. 일동.. 조~~용...)


[에피소드 둘]  *4월 4일 진보넷 한 블로그에서 해괴한 일이 일어났다. 라이히 글을 발췌한 한 블로거가 자신의 블로그에 올린 방문객들의 견해성 덧글에 삭제를 요구하고 나선 것. 자신은 블로그를 도서관처럼 깔끔하게 관리한다는 취지인듯 한데.. 이건 어떤 경우에도 넷 예의상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열받은 라이히가 무덤에서 뛰쳐 나오면서 이렇게 말하지 않을른지..

"앵~ 이게 뭥미?.. 이러고서 뭔 네트워크.. 이런 것도 파시즘이란 걸 모르남?..&^%$"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사형제와 성정치

사형제·보호감호제 추진에 '성性정치' 메카니즘 작동 

 

안상수 한나라당 원내대표가 “성폭행 살인범, 신속하게 사형해야”한다고 주장하는 등 사형제 부활이 여권에서 본격 추진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정부는 모든 성폭행 범죄자에 대한 보호감호제 적용도 추진 중이다.  

이번 사형제 부활 조짐과 보호감호제 추진을 변혁운동의 관점에서 그리고 원인제공의 측면에서 들여다 보기로 하자.

여기서 ‘성폭행’ 부분은 각별히 눈여겨 볼 대목이다. 이는 현 정권이 내세우는 ‘성도덕’적 포퓰리즘이 대 국민 선전전에서 우위를 점할 가능성과 이를 통한 사형제 부활과 보호감호제야말로 진보진영의 족쇄를 채우는데 더할 나위 없이 매력적인 포인트이기 때문이다. 즉, 사형제 부활 등 전술의 기저에는 비가시적인 ‘성정치’ 메카니즘이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여권이 사형제 등에까지 끌어들이며 애용하는 성정치에 있어 사실상의 사부는 김대중과 노무현 정권 아래서 정치적으로 대거 약진한 여성계라는 아이러니가 있다. 당시 여성계는 성주류화 전략을 기조로 성매매 특별법을 만들어 냈고 정치권과 일반시민을 불문하고 비도덕적인 성에 노출된 남성이면 가차없이 맹폭해 항복을 받아내곤 했다.

이때 한나라당은 여성계의 끊임없는 성정치 공격에 시달리면서도 역설적으로 성주류화 전략을 학습할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정권이 바뀌었다. 지난 10년을 지우고 싶은 여권은 즉각 여성계의 요술방망이인 성정치를 벤치마킹했고, 성폭행 살인범 사건 등을 통해 성을 부각시키니 그림이 절로 나왔다.

이이제이(以夷制夷) 전법이었다. 이들은 정적이 지녔던 성정치라는 무기를 이용해 마음에 들지 않는 자들을 일거에 평정할 기회를 잡았다. 사회구조를 논하기보다 단지 생물학적 남성의 성적 문제만 집중적으로 공격하던 급진적 여성주의자들의 성정치 장난질이 파시즘 계절을 맞아 사형제 부활과 보호감호제라는 부메랑으로 되돌아오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 장난질에는 급진적 여성주의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사회주의 여성주의자들도 상당수 포함된다. 정권의 부침과 함께 패닉상태에 빠져버린 급진적 여성주의자들, 급진적 여성운동과 사회운동·사회주의운동 사이에서 샌드위치 신세가 된 채 길을 잃어버린 사회주의 여성주의자들이 이번 사태에서 원인제공의 한 축인 셈이다.  

상황이 이럴진데, 그간 엄중한 정세 앞에서조차 오직 성정치로 좌충우돌 에너지를 소진하며 귀한 세월을 낭비한 이 아마추어들을 변혁운동은 과연 정리할 수 있을 것인가. 변혁운동은 그런 역량이 있는가. 변혁운동에 비해 그들의 기득권이 아직까지도 강고한 건 아닌가. 목전의 혹독한 대가가 보이지 않는가. 
  

 

 [혁사무당파]  ▒ MB들어 적용되고 있는 성정치는 급진여성주의자들의 버전을 본딴 것이지만 진행과정은 가공할 수준으로 발전하는 중이다.  앞으로 정부가 집시법 위반자에게도 전자발찌를 달자고 할 거라는 이호중 교수(서강대)의 예상처럼 사형제나 보호감호제도 역시 부당한 권력에 대한 민의의 저항을 억압하는데 애용될 것은 명약관화하다. 권위주의 국가의 통치기술인 국민들에게 겁주는 방식과 국민들의 기를 꺽는 방법에 성정치가 빛을 발하고 있다. 기존의 성정치가 MB에게 날개를 달아주다니.. 무서운 인과응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전면적인 부대 재편성이 필요하다

역설적이지만 진보운동 중에서 가장 손쉬운 운동은 MB 반대운동이다. 권력의 정체성에서 자본의 모순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그 다음 쉬운 운동은 '착한 자본' 냄새를 살짝 풍기는 DJ와 MH 반대운동쯤 되겠다. 다음으로는 진보적?이라는 민노당과 진보신당에 대한 비판운동이라고 볼 수 있다.

 

DJ와 MH 그리고 진보 양당 사이에는 제도권 예비군들이 득실거리는 시민운동과 이른바 ‘노빠’와 ‘진빠’(중궈니빠)들이 의회주의 범주 내에서 잡다한 소리를 내고 있지만, 사실 얘들은 포퓰리즘성 이벤트 외에는 별로 할 게 없다고 봐야한다.

 

역시, 어려운 운동은 사회운동과 사회주의운동이다. 우파들은 이해관계로 춘추전국시대지만, 이들 좌파들은 논리모드 관계로 형세가 장난 아니다. 좋든 싫든 어쨌든 이들은 역사적 담지자(擔持者)로서 변혁엔진을 만드는 중추이기에, 단체거나 개인이거나 서로 밉거나 곱거나 상관없이 사회변혁을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가장 많은 관심을 쏟을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관계라 할 수 있다.

 

혁사무당파가 진보넷 메인과 [내부모순] 블로그를 통해 방문객이 있건 없건 신경쓰지 않고.. 징~하게 싸움을 거는 까닭도 그런 연유이다. 대오가 형성되지 않으면 오합지졸에 불과하지 않은가. 이 투쟁은 활동가들과 열정적인 진보꾼들을 상대로 논리를 통해 전면적인 부대 재편성을 요구하는 일련의 과정에서 서막쯤에 해당되겠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김예슬과 책상좌파

김예슬(고려대)의 ‘사회적 자퇴운동’을 통한 기업의 하청업체인 대학과의 전쟁이 확산되고 있다.

 

29일 채상원(서울대)도 대자보를 통해 이 운동에 동참할 뜻을 밝혔는데 학내에 남아서 투쟁하겠다는 점이 김과 차이점이다. 고려대 정경대학 담벼락에는 약 10여 개의 지지 대자보가 줄을 잇고 있으며, 누리꾼들이 만든 '김예슬 선언' 온라인 까페도 성황을 이루고 있다.

 

‘학벌카스트’ 혁파운동이 변혁운동에서도 가장 주변부에 위치했던 점을 돌이켜 보면, 김예슬과 채상원 등으로 이어지는 이 운동이 향후 좌파에서 어떤 반향을 불러일으킬지 주목된다.

 

거칠게 말해 ‘학벌카스트’는 그간 진보진영 내에서도 하청기업의 논리 그대로 '책상좌파' 등을 통해 매우 유효하게 작동했다고 볼 수 있는데, 이번 김예슬 등의 충격파가 일반사회는 차치하더라도 우선 변혁운동의 전위라 할 수 있는 좌파들의 계급적 모순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것인가.

(* 내부모순에 누락된 학벌카스트 추가함.) 

 

[ 위 본문에 대한 zzz님의 덧글반론] ---------

zzz  2010/03/31    #

별 영향없으니까 신경 꺼도 될 듯. 왜냐고? 당신부터 책상좌파니까. 화면 옆구리에 써놓은 글들 보니 누워서 침뱉는 듯. 너같은 넘이 더 역겨워. 고대서울대 들어갈 머리가 있는 김예슬채상원은 책상좌파 아니고 그럼 기계앞 좌파가 될 것 같나 보지? 꿈 깨라. 강남좌파가 책상좌파라는 것 자체가 큰 허상이고 현실이 아닌 책상 앞에서만 상상하는 못된 버릇이지. 그렇게 따지면 맑스는 기계앞 좌파였냐? 강남좌파는 책상좌파라는 말 자체가 현장을 전혀 모르는, 그야말로 네가 말하는 책상좌파적 발언이란다. 정신차려라. 강남에 가서 활동 한번 해봐라.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비정규직 철폐 슬로건

이전 블로거 토론에서 이어 전개된 '비정규직 철폐' 슬로건과 관련한 논의를 좀 더 발전시키고자 큰붓님의 게재 문건을 새로운 논제로 옮깁니다. 큰붓님은 현재 서울지역 비정규노조 연대회의 의장직을 맡고 있습니다. (혁사무당파) 

 

큰붓  2010/03/29  삭제 덧글 #

암담 님 글 읽어보니 “짤린 손가락”노래가 생각이 나서 그 노래를 틀고 이 글을 씁니다.
뭐 일하다보면 담담하게 손가락쯤 잘릴 수도 있습니다.
까잇거 그게 대수입니까?
죽는 사람도 있는데 손가락 쯤이야 하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이것은 아주 첨예한 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오해 마시길.........
저도 작년에 용산참사 1달 문화제에 참석했다가 집에 가는 길에 버스에 치여 왼쪽 발이 버스 뒷바퀴에 뭉겨졌습니다.
그런 와중에도 제 마음은 항상 투쟁현장에 있었습니다.
문병 온 동지들에게 투쟁현황 물어보고(제가 서울지역 비정규노조 연대회의 의장이다 보니까) 가고 싶어서 함께 투쟁하고 싶어서 안달이 났었습니다.
이런 사고는 노동현장에서는 매일매일 일어나는 일이잖습니까?
개인의 일로 일희일비 할게 아니라 큰 그림을 그리자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서울지역비정규연대회의 대표자회의를 했습니다.
뒷풀이자리에서 저는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비정규직 철폐라는 구호는 안맞다.
왜냐하면 비정규직 철폐투쟁으로 매진해서 부끄럽지만 무기계약직으로 내지는 그나마 정규직으로 전환되면 투쟁현장에 나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른바 “특채”라는 이름표가 붙습니다.
남들은 시험 봐서 들어왔는데 너희들은 노조가 올려놓지 않았냐 하는 암묵적인 억압에 도저히 투쟁에 참석하기 힘들다고 합니다.
그러나 동지, 비정규직 철폐 뒤에 정규직화 쟁취라는 이야기는 빠진 것 같습니다.
이것은 전략적 구호입니다.
전술적구호는 비정규직 차별철폐입니다.
이것이 맞습니다.
이렇게 몰아부쳐야만 무슨 수가 보일수 있는 것이지요.
예전에 제가 1999년에 노조 만들었을 때 어떻게 보면 저는 이런 상황이 벌어지리라고 알았습니다.
건방지지만 저는 알았거든요.
그것이 논리적이건 감각적이건 하여튼 이런 상황이 오리라 가늠했었습니다.
지금 상황에서 비정규직 철폐 정규직화 쟁취! 하~ 이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