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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좌익 공산주의 : 「노동자 그룹」의 선언(강령) 2

러시아 좌익 공산주의 : 러시아 공산당의 「노동자 그룹」의 선언(강령)(2)

국제 평론 2010년 11월 143호, 국제공산주의흐름(ICC)

 

 

 

 우리는 「선언(강령)」의 첫 번째 부분을 국제 평론 지난 호에 실었다. 되짚어보면 「러시아 공산당의 노동자 그룹」은 이 강령을 작성했고, 제3 인터내셔널의 당과 러시아에서의 소비에트 권력의 기회주의적 타락에 대한 반응으로 출현한 좌익 세력들로 구성된, 소위 좌익 공산주의의 일부를 형성했다.

 

 아래 게재된 이 문서의 앞으로의 두 장은 기회주의적인 통일 전선 정책과 노동자 정부 슬로건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하고 있다. 이러한 비판을 역사적 맥락 속에 위치지음으로써, 강령은 역사적인 시기의 변화를 이해하려는 시도로 읽어야 한다. 새로운 시대는 반동적일 뿐인 부르주아지의 여러 분파들과의 동맹 정책을 무효화하고 헛된 것으로 만들었다. 이와 유사하게, 반역자로 드러난 사회 민주주의와 같은 조직들과의 동맹들도 프롤레타리아트를 약화시키는 것일 뿐이었다. 나아가 「강령」은 새로운 시대에서 개혁을 위한 투쟁은 더 이상 화두가 아니라는 것을 명확히 한다. 그러나 이러한 엄청난 역사적 변화가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일어났기 때문에 그 변화가 정확하게 무엇이었는지 그런 혁명가들조차도 충분히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관점을 갖추기 힘들었다. 이것은 「노동자 그룹」도 마찬가지여서, 개혁을 위한 투쟁과 자본의 영구적인 잠식에 직면한 프롤레타리아트의 방어적 경제 투쟁을 구분하지 못했다. 이들은 방어적 경제 투쟁을 거부하지 않았지만, 정치적‧경제적 투쟁이 전부를 형성한다는 사실을 고려하지 않고, 연대 없이 권력을 쟁취하는 것만이 프롤레타리아트를 그 사슬로부터 해방시키는 일이라 믿었다.

 마지막으로, 프롤레타리아트에게 가해진 언론의 자유에 대한 제한에 직면하여, 내전이 끝난 후에도 「강령」은 지도자에게 “당신은 어떻게 사회 경제의 엄청난 조직화 문제를 프롤레타리아트 없이 해결할 수 있는가?”라고 물을 때, 굳건하고 명확하게 답하고 있다.

 

 

 

● 사회주의 통일 전선

 

 이 문제의 본질적인 내용을 보기 전에, 지노비예프 동지의 통일 전선에 대한 테제가 러시아에서 토론되고, 받아들여진 상황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1921년 12월 19-21일에, RCP(러시아 공산당)의 12차 당대회가 있었고, 이 때 통일 전선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었다. 그 때까지 이 문제에 대해 언론에 발표되거나 당 모임에서 토론이 된 적은 없었다. 그러나 당대회에서, 발표된 테제에 대해 조잡한 공격은 있었으나 곧 잠잠해졌고, 당대회는 즉시 거수로 이 테제를 승인하게 되었다는 점은 놀라운 일이다. 우리가 이러한 배경들을 떠올리는 이유는 누군가를 공격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 다음과 같은 사실들에 대해 주의를 기울이고자 하기 때문이다. 첫 째, 통일 전선 전술은 매우 서둘러, 거의 “군대처럼” 이뤄졌다는 점, 둘 째, 러시아에서 이것은 매우 독특한 방식으로 수행되어졌다는 점이다.

 

 볼셰비키는 코민테른1) 내에서 이 전술의 발기인이었다. 그들은 외국 동지들에게 우리 러시아 혁명이 성공했고, 그것은 통일 전선 때문임을 명확히 했다. 또한 통일 전선은 러시아 안에 모든 혁명 전 시기의 경험들과, 특히 볼셰비키의 멘셰비키에 맞선 투쟁의 경험을 바탕으로 구축되어 있었다고 설득했다.

 다른 나라에서 온 동지들은 단순히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가 승리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그들도 그들의 부르주아지에게 승리하길 원했다. 이제 그들은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가 통일 전선 전술 탓으로 승리했다고 납득했다. 그들은 러시아 혁명의 역사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그럴 수 밖에 없었다. 레닌 동지가 이 단순한 이야기를 믿어버린 이들을 심각하게 비난했지만, 그는 누구도 그가 이러한 특별한 단어에 붙들려 있기를 바라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러시아 혁명의 경험으로부터 이끌어낼 수 있는 교훈은 무엇인가?

 

 한 때 볼셰비키는 독재에 반대하는 진보적인 운동을 지지했다.

 “a)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짜리즘에 대항하여 부르주아지가 혁명적이든, 단지 반대파일 뿐이든 그들을 지지해야 한다.

 

 b) 그러므로 사회민주주의자들은 러시아 부르주아지의 정치적 의식의 성장을 반길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 편, 그들은 프롤레타리아트 앞에 부르주아 해방 운동의 제한적이고 부적절한 성격이 스스로 드러날 때마다 그 정체를 밝혀야만 한다.” (「러시아 사회 민주주의 노동당」 2차 당대회 결의문, ‘자유주의자에 대한 태도’, 1903년 8월)

 

 1905년 4월 열린 3차 당대회 결의문은 동지들에게 두 가지 지점을 지적하며 권고했다.

 

 1) 노동자들에게, 많은 지주층과 제조업자들로 대표되는 온건 자유주의자들부터 “해방 연합(Emancipation Union)”과 다양한 자유주의 전문직 그룹들로 알려진 급진적 경향들에 이르기까지 부르주아 민주주의 경향이, 뉘앙스에도 불구하고, 반혁명적, 반 프롤레타리아 본질을 갖고 있음을 설명할 것.

 

 2) 노동자 운동을 되돌리려는 일부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시도에 저항해 싸우고, 프롤레타리아트와 그 다양한 그룹의 이름으로 이야기할 것. 1898년 이후 사회 민주주의는 부르주아지와의 “통일 전선”에 대해 호의적이었다. 그러나 이 통일 전선은 세 가지 단계가 있다.

 첫 째, 1901년, 사회 민주주의는 현재 정권에 반대하는 모든 “진보적인 운동들”을 지지했다.

 둘 째, 1903년, 그들은 “부르주아 운동의 한계”를 넘어설 필요를 인식했다.

 셋 째, 1905년 4월, 그들은 “동지들로 하여금 부르주아 민주주의적 경향의 반혁명적, 반 프롤레타리아적 본질과 그 영향력을 비판”하고 그들의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영향에 대해 정력적으로 싸웠다.

 

 부르주아지를 지원하는 것이 어떤 형태가 되었든, 1905년 이전 특정 시기 볼셰비키가 부르주아지와 통일 전선을 형성했었다는 것은 의심할 바 없다.

 

 러시아 경험에 비추어 봤을 때, 오늘날 부르주아지와 통일 전선하는 “혁명가”를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가?

 

 1905년 9월, “Boulyguine 두마”의 문제를 토론하기 위해 소집된 회의에서, 대회는 이 두마의 부르주아지에 대한 태도를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정의했다. “인민의 대표라는 이러한 환상으로, 독재는 노동 운동이 지쳐감에 따라 성장하고 질서를 열망한 부르주아지의 많은 요소들을 부추겼다. 그들의 이해와 지원을 약속하면서, 독재는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혁명적 운동을 박살내려 했다.”

 

 볼셰비키가 1906년 「러시아 사회민주노동자당」(RSDLP) 통일 대회에서 제안한 결의안은 볼셰비키 정책 변화의 비밀을 드러내 준다. 부르주아지를 지원하던 정책이 부르주아지에 대한 투쟁 정책으로 변화한 것이다. “거대한 자본가와 지주들의 계급들이 독재에 대해 반대하다가 혁명을 파괴하기 위해 얼마나 재빨리 독재와 연합하게 되었는지 볼 수 있다.” “민주주의 혁명 시기의 노동자 계급의 주요 임무는 그 혁명의 완수”였기 때문에 그것은 또한 이 혁명의 완수를 원하는 당과의 “통일 전선”을 형성해야만 했다. 이러한 이유로 볼셰비키는 카데츠의 우익과 했던 협정을 폐기하고, 그 좌익인 「사회주의 혁명가당」, 「인민 사회주의자들」과 「트루도빅스」(Trudoviks)와의 협정을 맺었다. 이에 따라 민주주의 혁명의 지속적인 진전을 위한 투쟁에서 “사회주의 통일 전선”이 형성되었다.

 

 이 시기 볼계비키의 전술은 옳았는가? 10월 혁명의 적극적인 투사들 사이에 이러한 전술의 시비에 대해 논쟁하는 이들이 있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러므로 1906년에서 1917년까지 볼셰비키가 「제헌 의회」를 소집하기 위한 「임시 혁명 정부」의 형성으로 완수된 민주주의 혁명의 지속적인 진행을 위한 투쟁에서 “사회주의 통일 전선”을 옹호했다고 본다.

 

 아무도 이 혁명이 프롤레타리아적이거나 사회주의적이라고 생각하지도, 생각할 수도 없었다. 그것은 부르주아 민주주의였음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볼셰비키는 사회주의 혁명가당, 멘셰비키, 인민주의자들과 트루도빅스들과 실질적으로 단결하면서 “사회주의 통일 전선” 전술을 제안하고, 그에 따랐다.

 

 우리는 민주주의 혁명을 위해 투쟁해야 하는가, 아니면 사회주의 혁명을 위해 투쟁해야 하는가라는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 볼셰비키의 전술은 무엇이었는가? 소비에트 권력을 위한 투쟁도 “사회주의 통일 전선”을 필요로 하는가?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사회주의 혁명가당」을 “모호한 사회주의 표현을 하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분파”로 여긴다. 그것은 혁명 동안, 지금까지 그들의 활동을 통해 확인되어 왔다. 부르주아 민주주의 분파로서, 이 당은 사회주의 혁명, 사회주의을 위한 투쟁에서 실질적인 임무를 떠맡을 수 없었다. 대신에 그들은 “모호한 사회주의적”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이 투쟁을 무슨 수를 써서라도 되돌리려 했다. 만일 그러하다면 (그리고 그들은 그러했다) 봉기한 프롤레타리아를 승리로 이끌 전략은 사회주의 통일 전선일 리가 없다. 오히려 부르주아지 분파와 그들의 혼란스런 사회주의 용어들을 상관하지 않는 피튀기는 전투만이 승리로 이끌 전략일 것이다. 오직 이러한 전투만이 승리를 가져올 것이며, 승리는 반드시 그런 방식으로 이뤄져야만 할 것이다.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는 승리했다. 사회주의 혁명가당, 인민주의자들과 멘셰비키들과의 동맹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들에 맞서 싸움으로써 승리했다.

 

 10월이 다가왔을 때 볼셰비키는 사회주의 혁명가당2), 멘셰비키3)의 사회주의적 수사들로부터 노동자 대중을 해방시킴으로써 사회주의 혁명가당과 멘셰비키와의 분리에 성공했다. 그리고 부르주아지 분파와의 통일 전선으로 취급하기 힘든 이러한 분리로부터 그들은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러시아의 경험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은 무엇인가?

 1) 특정 역사적 순간, 부르주아지와의 통일 전선은 1905년 이전의 러시아에 존재했던 상황과 유사한 조건의 지역에서 형성될 수 있다.

 2) 1906년과 1917년 사이의 러시아와 다소 유사한 상황의 나라들에서는 부르주아지와의 통일 전선을 포기하고 “사회주의 통일 전선” 전술을 취하는 것이 필요하다.

 

 프롤레타리아 권력을 위한 직접적인 투쟁이 존재하는 곳에서는, “사회주의 통일 전선” 전술을 폐기하고, 프롤레타리아트에게 “모호한 사회주의적 용어를 쓰는 부르주아 분파”- 그 당시로서는 제2 인터내셔널의 모든 정당들이 해당될 것이다 -가 결정적인 순간 자본주의 체제를 방어하기 위해 무장할 것이라고 경고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세계 자본주의 착취를 전복하려는 목적을 가진 모든 혁명적 인자들의 단결을 위해서는, 그들이 「독일 공산주의 노동자당」(KAPD), 「네덜란드 공산주의 노동자당」과 「제4 인터내셔널」4)에 속한 다른 정당들과의 동맹이 필수적이다. 모든 진정한 프롤레타리아 혁명가들은 그들을 투옥했던 모든 세력들- 제2 인터내셔널의 정당들, 제2 1/2 인터내셔널5)과 그들의 “모호한 사회주의적 용어”- 로부터 스스로 분리할 필요가 있다.  세계 혁명의 승리는 부르주아의 사회주의 캐리커쳐로부터의 원칙적인 분리와 그들에 대항하는 멈추지 않는 투쟁 없이는 불가능하다. 기회주의자들과 사회주의-쇼비니스트들은 부르주아지의 하인들로서, 결과적으로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적들을 지휘했는데, 특히 오늘날, 자본가들과 연결되어, 그들의 나라에서, 해외에서 무장한 억압자가 되었다. (볼셰비키의 강령과 비교해 보라) 이것이 코민테른의 최고 위원회의 테제에 의해 지지된 사회주의 통일 전선 전술의 진실이다. 실제로는 기회주의적 전술이었던 것이다. 자국과 다른 나라들에서 행해진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무장 억압을 수행한 적들과의 합동 전술은 러시아 혁명의 경험에 명백히 대립되는 것이었다. 사회주의 혁명이라는 깃발 아래 남아있기 위해, 우리는 부르주아지와 그 사회주의자 하인들에 대항하는 “통일 전선”을 형성해야 한다.

 

 위에서 지적한 대로, “사회주의 통일 전선” 전술은 프롤레타리아 투쟁이 부르주아지에 의해 지원되는 독재에 대항하여 일어날 때, 부르주아 민주 혁명을 목표로 할 때 그 혁명적인 가치를 갖고 있다.

 

 그리고 프롤레타리아트가 부르주아지도 반대하는 독재에 대해 싸울 때, 부르주아지와의 “통일 전선” 전술을 따라야 한다.

 

 코민테른이 모든 국가들의 공산당에게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사회주의 통일 전선을 쓸 것을 요구한 것은 각 나라의 조건에 상응하도록 해결책을 내놓는 현실적 임무를 방해하고, 의심할 바 없이 프롤레타리아트의 모든 혁명적 운동들에 해를 끼쳤다.

 

 

●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의 집행위원회의 테제에 대하여

 

 이 테제는 프라우다(Pravda)에 게재되었는데, “이론가들”이 “사회주의 통일 전선”의 아이디어를 단 두 단어의 표현으로 이해했음을 명백하게 보여준다. “통일 전선”. 1917년 러시아에서는 모든 나라들에서, 특히 샤이데만, 노스케를 비롯한 사회적 배신자들이 얼마나 “인기 있었는지” 모든 이들이 안다. 볼셰비키의 당원들은 거의 경험이 없었기에, 모든 곳에서 외쳤다. “이 노동자 계급의 배신자들아! 우리는 너희들을 전신주에 목 매달 것이다. 너희들은 모든 나라들의 노동자들을 수장시켜 죽인 그 피의 욕조에 책임을 져야 한다. 너희들은 로자 룩셈부르크와 리프크네히트를 암살했다. 베를린의 거리에서, 너희들의 폭력적인 행동 덕에 착취와 자본주의 억압에 반대에 일어난 노동자들의 붉은 피가 흐른다. 너희들은 베르사유 평화의 저자들이지만 그것을 매번 배신함으로써, 너희들은 국제 프롤레타리아 운동에 셀 수 없는 상처를 입혔다.”

 

 우리는 공산주의 노동자들에게 “사회주의 통일 전선”을 제안하는 것이 정해진 것은 아니었다고 덧붙인다. 그것은 노스케, 샤이데만, 반데벨드, 브란팅 등과의 연합전선을 이야기한다. 그러한 통일 전선은 일방적으로든 다른 방식으로든 위장될 것이며, 이것이 앞으로 일어날 일 들이다. 테제는 단순히 “사회주의 통일 전선”으로 명명되는 것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의 통일 전선에 대한, 그리고 제2 인터내셔널에 속한 노동자들, 「2와 1/2 인터내셔널」과 암스테르담, 유사하게 아나키스트와 생디칼리스트 조직에 속한 노동자들에 대한 태도에 대한 테제”라고 이름 붙여졌다. 왜 이렇게 장황한가? 여러분은 오래지 않은 시간 전에 우리를 제2 인터내셔널의 장례식에 초대한 지노비예프 동지가 이제는 우리를 제2 인터내셔널과의 결혼 축하연에 초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이 왜 그렇게 장황한 제목을 달아야 했는가 그 이유이다. 사실 이 테제는 노동자와의 협정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제2 인터내셔널과 2와 1/2 인터내셔널의 정당들과의 협정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노동자들은 해외에 나가 본 적이 없다고 할지라도 그들의 중앙 위원회에 앉아있는 반데벨데, 브란팅, 샤이데만, 노스케 등에 의해 대표되는 당들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협정이 이뤄지는 것은 그들과 함께이다. 누가 세 개의 인터내셔널의 대회를 위해 베를린에 가겠는가? 공산주의 인터네셔널은 진심에서 우러나는 신뢰를 누구에게 줘야 하는가? 벨스(Wels)파에게, 반데벨테(Vandervelde) 파에게 

 

 그러나 KAPD와 협정을 맺으려 시도한 적이 있던가? 지노비예프 동지가 대부분의 훌륭한 프롤레타리아적 인물들이 있다고 인정한 그곳과? 없다. 그리고 KAPD는 아직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한 권력 쟁취를 위해 싸우고 있다.

 

 지노비예프 동지의 이 테제의 목적이 공산주의 인터내셔널과 제2 인터내셔널의 혼합이 아니라고 확인했던 것은 사실이다. 제2 인터내셔널에 대해, 그는 조직적 자율성의 필요를 일깨워준다. “제2 인터내셔널과 2 1/2 인터내셔널과 이러저러한 협정들을 맺은 각 공산당의 위치는 절대적 자율성과 총체적 독립성이 설명해준다.” 공산주의자들은 실천에 있어서 자기 규율을 스스로 강제하지만, 그들은 노동자 조직의 정치에 대한 예외없는 권리와 가능성을 - 실천의 전후에, 가능하다면 실천하는 가운데 - 유지해야 한다. “자본주의 전선에 대항하는 실천적인 행동에서의 모든 노동자 조직의 최고 수위의 단결”이라는 슬로건을 지지하면서, 공산주의자들은 그들의 입장을 방어하는 것을 포기할 수 없다.(1921년 러시아 공산당 대회에서 제출된 코민테른 중앙위원회의 테제를 보라)

 

 1906년 이전, 「러시아 사회민주노동자당」에서는 위의 코민테른의 테제에서 인용된, 가능한 최대한의 자율성을 갖고 있는 두 분파가 있었다.

 

 협상에서의 규율, 당 내 활동에서의 판단의 자율성은 공식적으로 RCP의 규정에 인정되어 있었다. 다수가 정한 것은 해야만 하며, 개인은 비판의 권리만을 행사할 수 있을 뿐이었다. 명령된 것은 해야만 하지만, 그것이 세계 혁명에 해를 끼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이에 대해 분노했다면, 실천 이전에, 와중에, 그리고 이후에 자유롭게 그 분노를 표현할 수 있었다. 이것은 자율적 행동을 포기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Vandervelde가 베르사유 조약에 사인하고, 스스로 타협했을 때와 같다)

 

 이러한 같은 테제들에서, 집행위원회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대신하는 것임이 분명한 노동자 정부의 슬로건을 제안했다. 노동자의 정부란 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당의 정수인 중앙 위원회로 구성된 정부이다. 이러한 테제의 이상적인 실현은 사회주의자인 에버트(Ebert)가 대통령인, 그의 승인과 함께 정부가 형성된 독일에서 일어났다. 이 공식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공산주의자들은 스웨덴의 브란팅과 독일의 에버트와 같은 사회주의자 수상, 대통령을 지지하는 투표를 해야만 한다.

 

 코민테른의 의장, 지노비예프 동지는 사회민주당의 중앙위원회, 에버트, 노스케, 샤이데만을 만나 주먹을 쥐고 외쳤다. “노동 계급의 배신자, 변절자!” 그들은 친절하게 미소 짓고 그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당신들은 독일 프롤레타리아트의 지도자인 로자 룩셈부르크와 칼 리프크네히트를 살해했다. 우린 당신을 교수대에 목매달 것이다.” 그들은 그를 향해 더욱 친절하게 미소 지으며 더욱 고개를 숙였다.

 

 지노비예프 동지는 그들에게 통일 전선을 제시하고, 공산주의자들과 함께 노동자 정부를 구성할 것을 제안한다. 그러므로 그는 교수대를 수상의 자리와 바꾸어 제안하고 있는 것이다. 노스케, 에버트, 샤이데만, 등등은 노동자 집회에 가서 코민테른이 자신들을 사면했으며, 교수대 대신 수상 자리를 제안했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 조건은 공산주의자들이 수상을 인정하는 것이다 [...]6) 그들은 모든 노동 계급에게 공산주의자들은 사회주의의 실현의 가능성이 오직 자신들과의 단결에 있지, 그들과의 대결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이야기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덧붙인다. 이 사람들을 보라! 그들은 우리를 예전에 교수형에 처해 무덤에 묻었다. 이제 그들은 우리에게 왔다. 우리는, 선의로 그들을 용서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우리를 용서했기 때문이다. 상호 사면인 셈이다.

 

 코민테른은 제2인터내셔널에 그 정치적 성실함의 증거를 보여주었고, 정치적 열등함의 증거를 받았다. 실제 이 변화의 기원은 무엇인가? 지노비예프 동지는 어떻게 에버트, 샤이데만, 노스케에게 교수대 대신 수상 자리를 권할 수 있는가? 얼마 전에 그들은 제2 인터내셔널의 장송곡을 불렀는데, 이제 그들은 삶에 키스를 한다. 왜 그는 그런 노래를 부르는가? 우리는 정말 그 부활을 보고 그 주장을 들어야 하는가?

 

 지노비예프의 테제는 이러한 질문에 효과적으로 대답한다. “세계 경제 위기는 더더욱 첨예해지고, 실업은 늘어만 간다. 자본은 공세로 나아가고, 교묘하게 작전행동을 하고 있다. 노동계급의 조건은 손상되었다.” 그러므로 계급 전쟁은 피할 수 없고, 노동 계급은 더욱 왼쪽으로 나아갈 것이다. 개량주의적 환상은 파괴되었다. 더 많은 노동자들이 공산주의 전위의 용기를 제대로 평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로부터 샤이데만과의 통일 전선은 구성되어야 한다. 극악무도한! 결론은 전제와 일관되지 않다!

 

 우리는 지노비예프가 그의 테제에서 통일 전선을 방어하기 위해 내세웠던 주장들에 대해 좀 더 근본적인 것들을 고려하지 않고서는 객관적이라고 이야기할 수 없을 것이다. 지노비예프 동지는 놀라운 발견을 했다. “우리는 단결을 위한 노동 계급의 투쟁을 안다. 샤이데만과의 통일 전선을 통하지 않고서 어떻게 단결할 수 있는가?” 자신의 계급의 이해와 세계 혁명에 대해 생소하지 않은, 모든 의식 있는 노동자들은 이렇게 물을 수 있을 것이다. 노동 계급은 “통일 전선”을 주장할 필요가 생겼을 때에만 단결을 위해 투쟁하는가? 노동 계급이 정치 투쟁에 발을 디뎠을 때부터 노동자와 함께 한 이라면 누구나 모든 노동자를 괴롭히는 의심을 알고 있다. 왜 멘셰비키, 사회주의 혁명가당, 볼셰비키, Trudoviks(인민주의자) 들은 서로 싸우는가? 모두가 민중을 위하고 있으면서도.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서로 싸우게 하는가? 모든 노동자들은 스스로 독립적인 계급으로서 조직화해야 하고, 그 외 모든 계급들에 대해 반대해야 한다. 우리의 쁘띠 부르주아적 편견들은 반드시 극복해야 한다! 그것은 진실이었으며 지금도 여전히 그러하다.

 

 사회주의 혁명에 대해 호의적인 상황에 있는 모든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우리는 노동 계급이 국제적 멘셰비키와 사회주의 혁명가당에 대항하는 무장 투쟁을 준비하도록 해야 한다. 이 경우, 확실히 러시아 혁명의 경험이 고려되어야 한다. 세계 노동 계급은 제2 인터내셔널과 2와 1/2 인터내셔널의 사회주의자들이 반혁명의 선두에 있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사회주의의 배신자들과의 통일 전선에 대한 선전들은 어떤 뉘앙스에 상관없이 그들도 역시 사회주의를 위해 부르주아지와 싸우지, 그 반대가 아니라는 믿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오직 공개적이고 용기있는, 내전을 옹호하고 노동계급에 의한 정치 권력의 획득을 옹호하는 선전들만이 혁명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관심을 끌 수 있다.

 

 노동 계급이 그 자신의 물질적 법적 권리를 파업과 의회를 통해 개량할 수 있는 시기는 이미 지났다. 이것은 밝혀져야 한다. 가장 시급한 투쟁은 권력 투쟁이다. 우리는 우리의 선전을 통해, 많은 경우 파업을 자극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노동자의 조건을 개선시킬 수 없었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아직 옛날 개량주의적 환상을 넘어서지 못하고 스스로를 약화시키는 투쟁을 하고 있다. 우리는 노동자와 파업 동안 연대하지만, 우리는 언제나 이러한 운동은 노동자들을 노예 상태, 착취와 갈증의 고통으로부터 해방시킬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승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노동자의 굳은 살 박힌 손으로 권력을 쟁취하는 것 뿐이다.

 

 그러나 이것이 다가 아니다. 지노비예프 동지의 연대 결정은 통일 전선 전술을 정당화 했다. 우리는 “사회 혁명의 시대”라는 관념을 이해하는 데 익숙하다. 그것은 현재, 사회 혁명이 시대의 화두임을 의미한다. 그러나 실제로, “사회 혁명의 시대는 장기적 관점에서 혁명 과정의 일부”라는 것을 보여줬다. 지노비예프는 우리가 현실에 발을 딛고 노동 대중을 끌어들이라고 충고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멘셰비키와 사회주의 혁명가당과 1903년에서 1917년까지 다른 방식으로 단결함으로써 대중들을 설득했고, 우리가 이미 보았듯이, 우리의 승리로 끝맺었다. 이것이 왜 그가 에버트, 샤이데만, 씨에(Cie)를 극복하라고 하며 그들과 싸우지 말고 단결하라고 주장하는 이유다.

 

 우리는 사회 혁명의 기간이 장기든 단기든, 그 기간이 어느 정도든 여기서 논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논쟁은 천사의 성별에 대한 수도사들의 논쟁이나 대머리가 되려면 몇 개의 머리카락이 없어져야 하는지에 대한 논쟁과 닮아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회 혁명의 시대”라는 개념을 정의하고자 한다. 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먼저 물질적 생산력이 발전하여 소유권과 양립할 수 없게 된 상태이다. 사회 혁명이 필연적인 것이 되는 물질적 조건이 있는가? 그렇다. 무엇이 부족한가? 주체, 인적 조건이 부족하다. 선진 자본주의 국가의 노동 계급은 먼 미래가 아니라 지금 당장 이러한 혁명의 필요를 실현시켜야 한다. 이를 위해서 이미 이를 이뤄낸 선진 노동자들, 다시 말해 전위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경종을 울려야 한다.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공장 폐쇄, 파업, 급박한 전쟁, 생활조건의 추락 등) 내전을 옹호하는 선전을 통해 전투를 요구하고, 이러한 즉각적 투쟁에 대해 노동 계급을 준비시키고 조직해야 한다.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가 승리했다고, 그것이 멘셰비키와 사회주의 혁명가당과 단결했기 때문이라고 누가 이야기할 수 있는가? 그것은 넌센스다.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는 멘셰비키와 사회주의 혁명가당에 대항하는 치열한 싸움을 통해 부르주아지와 지주들에게 승리했다.

 

 통일 전선 전술의 필요에 대해서 트로츠키는 그의 연설에서 우리는 승리했지만 우리가 어떻게 승리했는지 분석해야만 한다고 이야기했다. 그는 우리는 멘셰비키와 사회주의 혁명가당과 통일 전선을 통해 진군했지만, 그것은 우리와 멘셰비키, 그리고 사회주의 혁명가당이 같은 위원회에 앉아 있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만약 통일 전선 전술이 같은 기관에 앉아있는 것이라면, 강제 노동의 우두머리들과 죄인들 또한 통일 전선에 포함된다. 그들은 모두 감옥에 있다.

 

 우리 공산당은 의회에 앉아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들이 모든 대표들과 함께 통일 전선을 형성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트로츠키, 지노비예프 동지는 전 세계의 공산주의자에게, 다소 의심스런, 볼계비키, 멘셰비키, 그리고 사회주의 혁명가당의 소위 통일 전선에 대해 이야기하기보다, 볼셰비키가 1917년 8월 「사회 혁명적 케렌스키」가 소환한 “전-의회”나 사회주의자에 의해 주도된 임시 정부(유용한 교훈이었던)에 참가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밝혀야만 한다.

 

 우리는 볼셰비키가 부르주아지와 통일 전선을 꾸렸던 시기에 대해 언급했다. 그러나 이것은 언제인가? 1905년 전이다. 그렇다. 볼셰비키는 사회주의자들과의 통일 전선을 옹호했다. 이것은 언제인가? 1917년 전이다. 1917년, 노동계급의 권력을 위해 싸울 때, 볼셰비키는 사회주의 혁명가당 좌익에서부터 모든 종류의 아나키스트에 이르기까지 모든 혁명적 집단과 함께 무기를 들고 소위 “민주주의”라고 불리는 통일 전선을 형성한 멘셰비키와 사회주의 혁명가당,  그리고 부르주아지와 지주들과 싸웠다. 1917년,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가, 선진 자본주의 국가의 프롤레타리아트가 있는, “사회 혁명의 시대” 최전선에 나섰다. 1917년 러시아의 프롤레타리아트의 승리 전술은 뒤이은 나날들의 교훈을 설명해 준다. 부르주아지 분파들, 사회주의 혁명가당, 그리고 멘셰비키의의 격렬한 저항에 권력을 쟁취한 노동 계급은 직면하게 된 것이다. 선진 자본주의 국가의 노동계급을 단결시키는 것은 이 전술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은 아직 “개량주의적 환상을 제거”하는 과정에 있기 때문이다. 이 전술은 제2인터내셔널이나 2와 1/2 인터내셔널과의 통일 전선이 아니라 그들과의 전쟁일 것이다. 이것이 세계 사회 혁명의 슬로건이다.

 

 

프롤레타리아트가 권력을 쥔(노동자 민주주의) 국가에서의 통일 전선에 대한 문제

 

 이미 사회주의의 공격으로 프롤레타리아트가 지배 계급이 된 모든 나라들에서는 각 시기 다른 접근이 필요하다. 물론 각각의 다른 나라들에서 혁명 과정의 모든 단계에 유효한 전략을 개발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같은 단계에 대한 정책 또한 마찬가지다.

 

 우리의 (그렇게 오래지 않은) 투쟁의 역사를 기억해 본다면, 적과의 싸움에 있어서 우리는 매우 다른 과정들을 겪어왔음을 알 수 있다.

 

 1906년과 그 후 몇 년동안은, “세 개의 기둥”이 있었다. 8시간 노동, 토지의 소유, 그리고 민주 공화국이 그것이다. 이러한 세 기둥은 언론과 집회, 파업, 노동조합 결성의 자유를 포함하고 있었다.

 

 1917년 2월에는 어떠했는가? “독재 정치는 끝났다! 제헌 의회 만세!” 이것이 볼셰비키의 외침이었다.

 

 그러나 4-5월, 모든 것이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집회, 언론의 자유는 있었지만 토지의 소유는 그대로였고, 노동자들은 권력을 잡지 못했다. 그래서 볼셰비키는 다시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슬로건을 걸었다.

 

 이 시기, 우리의 입을 다물게 하기 위한 부르주아지의 시도들은 격렬한 저항에 부딪혔다. “언론, 집회, 결사, 파업, 양심의 자유 만세! 토지를 몰수하라! 생산의 노동자 통제! 평화! 빵! 자유! 내전 만세!”

 

 그리고 10월의 승리. 노동 계급이 권력을 잡았다. 국가 억압의 오랜 작동원리는 완전히 파괴되었고, 해방의 새로운 작동원리가 노동자, 군인 대표 평의회 속에 구조화되었다.

 

 이 시기에 와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언론, 결사의 자유는 주장되어야 했던 것일가? 군국주의자부터 멘셰비키, 사회주의 혁명가당이 내전을 지지하도록 허락해 줄 수 있지 않았을까? 무엇보다도, 지배계급으로서 내전을 옹호하는 동지들에게 언론의 자유를 줄 수 있지 않았을까? 아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아니다!

 

 프롤레타리아 권력에 반대하는 어떤 내전에 대한 조직된 선전도 착취자, 억압자를 불러들일 수 있는 반혁명적 행위였다. 선전이 더욱 “사회주의”적일수록, 더욱 해악적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같은 프롤레타리아 가족의 이러한 선전들에 대한 가장 엄격하고 무자비한 제거”가 진행되어야만 했다.

 

 그래서 착취자들의 저항을 억압할 수 있고, 스스로 조직하여 유일하게 권력을 쥐며, 모든 자본주의 정부들도 인정할 수 밖에 없는 국가를 건설한 프롤레타리아트가 나타났다. 이들에게 부여된 새로운 임무는 다음과 같았다. 국가 경제를 조직하고 가능한 한 많은 물질을 창조하는 것. 그리고 이 임무는 권력의 쟁취와 착취자들의 억압 만큼이나 엄청난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권려의 쟁취와 착취자에 대한 억압은 그것 자체로 목적이 아니었다. 그러나 사회주의로의 길은, 자본주의보다, 한 계급에 의한 다른 계급의 지배와 억압 하에서보다 더 나은 삶과 자유로의 길은 그것 자체로 목표였다.

 

 이전의 억압자들을 제거하기 위한 조직의 형태와 실천의 수단들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새로운 접근이 필요했다.

 우리가 자원이 부족하다는 관점에서, 제국주의 전쟁과 내전으로 인한 끔찍한 황폐를 경험하고 있다는 점에서 노동 계급과 동맹 그룹들에게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해 만들어진 사회주의 사회의 매력적인 힘들을 보여주기 위해 물품을 창조하는 임무가 우리에게 부과되었다. 더 이상 부르주아지, 경찰과 다른 기생충이 없을 뿐만 아니라 프롤레타리아트가 주인이 되고 자유로우며, 모든 가치, 모든 상품, 모든 노동이 자본주의 아래에서의 가난한 자, 억압받는 자, 그리고 굴욕받던 자의 삶을 개선시키는 데 도움이 된다는 이유로 이것을 보여주는 것은 좋은 일이다. 이것은 굶주림의 왕국이 아니며 오히려 전에 없던 풍요의 왕국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은 좋은 일이다. 이것이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에게 남겨진 임무이며, 선행된 것들을 능가해야할 임무이다.

 

 그렇다. 첫 번째 두 임무, 권력을 쟁취하고 억압자들의 저항을 제거했다는 점에서 프롤레타리아트는 앞선 이들을 뛰어넘었고(이것은 지주와 부르주아지에 대한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들의 강한 오를 설명한다) 그것은 위대한 일이지만 세 번째 목표보다는 중요하지 않다. 그리고 오늘날, 모든 노동자들은 질문해야 한다. 왜 이 모든 것을 해야 하는가? 이것이 그렇게 중요한가? 그토록 많은 피를 흘려야 했는가? 끝없는 고통을 겪어야 했는가? 이 문제를 어떻게 풀 수 있을까? 우리 운명을 누가 결정하는가? 어떤 조직이 그것을 할 것인가?

 

 최고의 구세주는 없다.

 

 신도, 카이사르도, 호민관도 아니다.

 

 생산자, 우리 스스로를 구원하라!

 

 공통의 구권을 선포하라!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는 전체 프롤레타리아트의 단결된 의지를 대표하는 조직이 필요하다. 우리는 부르주아지로부터 빼앗은 (국유화된), 그에 속한 거대한 계층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기업이 속한 산업 조직 뿐만 아니라 노동자 대표의 평의회도 필요하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평의회는 무엇인가? 그들은 노동자 대표의 평의회, 다시 말해 “농장과 공장에서의 국가 권력의 핵심”을 조금이라도 닮았는가? 그들은 단결된 의지를 표현하는 프롤레타리아트의 평의회를 닮기는 했는가? 지금의 평의회는 그 의미와 산업 기반을 잃었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압제자에 대한 저항과 그들의 파괴를 향한 목표에의 관심을 동원했던 오랜 내전은 연기되고 모든 다른 업무들을 제거하고 - 프롤레타리아트가 눈치채기도 전에 - 그 조직, 평의회를 변화시켰다. 공장의 노동자 대표의 평의회는 죽었다. 노동자 대표 평의회 만세!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도 보편적으로 이와 같지 않은가? 우리는 프롤레타리아트를 위해 언론의 자유에 대해 격렬한 내전과 노예 감독자의 봉기 때와 유사한 태도가 필요한 것이 아닌가? 권력을 차지한 프롤레타리아트는 스스로를 끔찍한 적으로부터 방어할 수 있게 되어, 이제 그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것, 스스로 엄청난 생산의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조직하고 생산과 전체 나라를 지도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고 있지 않은가?

 

 부르주아지는 확실히 침묵하고 있다. 그러나 그 누가 권력을 방어한 프롤레타리아트의 언론의 자유를, 자신의 피를 흘리지 않고 논할 것인가?

 

 우리에게 언론의 자유는 무엇인가? 신인가 미신인가?

 

 우리는 우리를 위한 우상을 만들지 않는다.

 

 땅에서도, 하늘에서도 아니다.

 

 우리는 누구 앞에서도 복종하지 않는다.

 

 우리에게는, 진정한 민주주의, 절대적인 자유, 물적 숭배나 우상, 진정한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 따위는 없다.

 

 민주주의는 전에도 그러했고 미래에도 모든 나라의 반혁명, 부르주아지, 지주, 성직자, 사회주의 혁명가당, 그리고 멘셰비키 등을 의미하는 미신이 될 수 없다. 그들에게는 그것이 그들의 계급적 목표를 달성하는 유일한 수단일 뿐이다.

 

 1917년 이전, 모든 시민의 언론의 자유는 우리의 진보적인 요구였다. 1917년에는, 우리는 이러한 자유를 쟁취하여 프롤레타리아트와 그를 따르는 지식인들과 농민들의 조직화와 선전에 썼다. 부르주아지를 이길 수 있는 조직을 만든 후, 우리 프롤레타리아트는 전쟁으로 나아가 권력을 쟁취했다. 부르주아지가 언론의 자유를 우리를 반대하는 내전을 일으키는데 쓰는 것을 막기 위해, 우리는 적 계급 뿐만 아니라 프롤레타리아트의 일부와 그를 따르는 이들에게도 러시아의 부르주아지의 저항이 완전히 무너질 때까지 언론의 자유를 주기를 거부한다.

 

 그러나 다수 노동자의 지원으로, 우리는 부르주아지의 저항을 분쇄했다. 이제 우리는 우리 프롤레타리아에게 말하도록 허락할 수 있지 않은가?

 

 1917년 이전과 1917년의 언론의 자유, 그리고 1918년에서 20년까지의 것과 1921년에서 1922년까지의 문제에 대한 우리 당의 태도는 필요하다.

 

 그러나 소비에트 권력의 적들이 이 자유를 소비에트를 전복시키기 위해 사용할 수 있지 않은가? 아마도 이 자유는 독일, 프랑스, 영국 등에서 이들이 혁명 과정의 같은 단계에 있다면 유용하고 필수적일 것이다. 왜냐하면 노동계급은 있지만 농민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전쟁과 경제적 재앙으로부터 살아남은 소수의 프롤레타리아가 춥고 배고픈 채로 피흘리며 지쳐 있다. 여기서는 그 자유가 소비에트 권력을 전복시키는 길의 첨단으로 몰고 가기는 힘들지 않을까? 프롤레타리아트에 더해 러시아에는 부유함과는 거리가 먼 대다수의 농민들이 간신히 삶을 연명하고 있다. 이 농민들에게 언론의 자유가 반혁명 군대를 형성하는데 쓰이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이 어디 있는가? 없다. 우리가 노동자들을 농민들에게 주어진 것으로 조금이라도 먹이기라도 하면 우리는 그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다른 길은 없다. 이것이 마음이 올바른 공산주의자들의 추론이다.

 

 우리들은 질문을 던진다. 당신은 어떻게 프롤레타리아트 없이 사회 경제의 조직화라는 엄청난 임무를 해결할 것인가? 당신은 언제나 예, 아멘이라고 이야기하는 신의 어린양인 프롤레타리아트와 함께 이 문제를 해결하길 원하는가? 그럴 필요가 있는가?

 

 “당신들 노동자들과 농민들은 조용히 있어라. 저항하지도, 생각하지도 마라. 왜냐하면 우리가 노동자와 농민들 중에서 용기 있는 이들에게 권력을 주어 그들로 하여금 당신들이 믿을 수 없는 방식으로 쓰도록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다보면 당신은 어느날 갑자기 사회주의 천국에 있을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이야기하는 것은 개인, 영웅에 대한 믿음을 의미하지 계급에 대한 믿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회색 대중과 그들의 평범한 생각들(적어도 지도자들은 그렇게 생각한다)은 우리의 영웅들, 공산주의 공무원들이 공산주의 천국을 건설하는데 필요한 재료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영웅을 믿지 않으며 모든 프롤레타리아에게 그렇게 하지 말라고 호소한다. 노동자의 해방은 노동자 자신의 몫이다.

 

 그렇다. 우리 프롤레타리아트는 지치고, 배고프고, 춥고, 기진맥진해 있다. 그러나 우리 앞에 있는 문제는 어떤 계급도, 어떤 특수한 그룹도 우리를 대신해 풀어줄 수 없는 문제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이를 해결해야 한다. 당신이 우리들에게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임무를 지식인들, 공산주의 지식인들이 풀어줄 것이라고 보여줄 수 있다면, 우리는 우리 프롤레타리아트의 운명을 당신에게 맡기는 데 동의할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그것을 보여줄 수 없다. 이런 이유로 프롤레타리아트가 지쳤고, 따라서 그 무엇을 알 필요도, 결정할 필요도 없다는 주장은 절대 옳지 않다.

 

 만약 1918년에서 20년까지 러시아의 상황이 달랐다면, 우리의 이 문제에 대한 태도 또한 달랐을 것이다.

 

 올바른 마음의 공산주의자 동지인 당신이 부르주아지의 얼굴을 후려갈기고 싶다면, 좋다. 그러나 문제는 손을 드는 것은 당신이고, 그들의 갈비뼈를 부수고 한 바가지의 피를 쏟아내도록 하는 것은 우리 프롤레타리아라는 것이다.

 

 러시아에서, 공산주의자 노동자 계급은 존재하지 않는다. 볼셰비키, 아나키스트, 사회주의 혁명가당, 그리고 다른 이들(이러한 당에는 속하지 않지만 그들의 기원을 여기서 찾을 수 있는 이들) 속에 노동 계급이 있을 뿐이다. 어떻게 그들을 공산주의에 연결시키는가? 부르주아 “카데츠”(헌정 민주주의자들), 교수들, 변호사들, 의사들과의 협상은 없다. 그들에게는 한 가지 처방이 있을 뿐이다. 몽둥이. 그러나 노동 계급은 전혀 다르다. 우리는 그들을 협박할 것이 아니라 영향을 주고 지적으로 이끌어야 한다. 폭력으로서가 아니라, 우리의 법과 행진의 진로를 명확히 함으로써.

 

 그렇다. 법은 법이지만 모두를 위한 법은 아니다. 마지막 당대회의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와의 투쟁에 대한 논쟁에서 모스크바와 페트로그라드에는 180개의 부르주아지 출판사가 있었고, 지노비예프의 선언에 따라, 이들과 폭력적인 방법이 아니라 90% 열린 이데올로기적 설득력으로 싸울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어떻게 우리를 “설득”할 수 있는가? 지노비예프는 우리 중 일부를 설득하려하는지 안다. 부르주아지가 누리는 자유의 10분의 1만이라도 가질 수 있다면!

 

 노동자 동지들이여, 당신을 무엇을 생각하는가? 전혀 나쁘지 않다. 그렇지 않은가? 그러므로 1906년에서 1917년까지 첫 번째 전술, 1917년 10월까지 두 번째, 1917년 10월에서 1920년 후반까지 세 번째, 그리고 1921년 초부터 네 번째... [...]

 

 

각주

1) 편집자 주 ; 코민테른. 제3인터내셔널의 러시아 이름이다.

 

2) 편집자 주 ; 사회적 혁명가당 좌익. 이들은 소비에트에 우호적이었고, 사회주의 혁명가당으로부터 1917년 9월, 분리되어 나왔다.

 

3) 1917년 10월 25차 소비에트 대회에서, 110명의 멘셰비키 대표들은 소수였고(673명 중), 10월 혁명의 비준의 순간, “볼셰비키 쿠데타”라며 이를 비난하며 자리를 떠났다.

 

4) 편집자 주 ; KAI(공산주의 노동자 인터내셔널)는 1922년에서 24년동안, KAPD의 제안에 의해 설립되었다. 트로츠키주의자들의 제4 인터내셔널과 혼돈하지 않길 바란다.

 

5) 편집자 주 ; 사회주의 당 국제 연합(the International Union of Socialist parties)의 별명은 제2와 1/2 인터내셔널이었다. “왜냐하면 제2 인터내셔널과 제3 인터내셔널 사이에 자신을 위치 지었기 때문이다.” 레닌의 글, ‘베를린에서의 제3 인터내셔널의 대표들’이 수록된 알프레드 로즈머(Alfred Rosmer)의 책, 「레닌의 모스크바」(Lenin’s Moscow)에서 이러한 재편성에 대한 비판을 보라(Pluto Press, 1971).

 

6) 편집자 주 ; 여기, 그리고 이 글의 다른 곳에서 [...]은 우리가 번역하지 못한 짧은 문구들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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