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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노위 실패와 무기로서의 강령

  • 분류
    잡기장
  • 등록일
    2011/09/12 15:02
  • 수정일
    2011/09/12 15:02
  • 글쓴이
    자유로운 영혼
  • 응답 RSS

사노위 실패와 무기로서의 강령

- 이형로

 

 

 

 

사노위는 사회주의노동자당 건설이라는 시대적, 정세적 과제를 부여안고, 당 건설의 첫 단계라 할 수 있는 사회주의노동자당 건설 추진위를 목표로, 1년간의 공동정치활동을 통해 ‘강령상의 통일’을 이룰 것을 목표로 하여 공동실천위원회라는 형식을 갖고 출발하였다.

 

이렇게 출발한 사노위는 “공공연한 사회주의 정치운동과 당 건설운동의 전면화”를 출범정신으로 하여, 당 건설 추진위로의 전환조건으로 1)강령, 전술, 조직의 통일과 2)선진노동자에 대한 실천적 권위확보를 내세운다. 그러나 “선진 노동자에 대한 실천적 권위확보” 문제는 객관적인 근거와 기준을 정하기가 어렵고, 계급의식이 아직 낮은 문제 등이 있어 실질적으로 추진위 전환 조건이 될 수 없다는 점에서, 현실적으로 사노위 안에서 중요한 과제는 강령통일과 조직 활동 문제였다.

 

그 동안 각자의 써클과 활동 공간(사노준, 사노련, 노투련과 개별 활동가)에서 서로 다른 운동 노선과 문화를 기반으로 활동했던 사회주의 활동가들이, 1년이라는 특별하고 한시적인 기간을 정해두고 이론과 실천, 운동과 투쟁의 경험 등 모든 면을 사노위라는 그릇에 녹여내면서, 가장 혁명적인 원칙과 실천의 무기를 창출해내기 위해 사노위 운동에 참여하게 된다. 이러한 시도는 여전히 의미 있는 일이었고, 혁명당 건설 운동의 흐름에서 주체역량의 상황과 객관적 정세를 고려했을 때 적절한 운동노선이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사노위는 가장 혁명적인 원칙을 가진 강령으로의 통일도, 자본가 권력에 실질적인 위협이 될 만한 강력한 실천력을 가진 당 조직도 창출을 못한 채, 공동실천 자체의 한계로 인해 당 추진위 단계로 상승하지 못하고 해산을 맞게 된다.

 

그렇다면 왜 사노위는 강령통일에 실패했고, 당 조직구조를 창출하지 못했는가? 공동실천 자체의 한계는 무엇이었나? 

 

이 글은 강령과 조직은 하나의 유기체라는 입장을 분명히 하며, 강령통일 이전에 조직문제로 파열구가 나기 시작한 공동실천 활동이 왜 강령투쟁 과정에서 더 악화되어 결국 해산에 이르렀나를 살펴보고, 무기로서의 강령은 곧 실천의 지침이라는 교훈을 다시 한 번 환기시키고자 한다.

 

 

 

1. 강령 건설의 원칙과 혁명당 건설

 

사노위에서 건설하려는 당과 강령은 어떤 것이었나? 

 

노동자계급의 당이라면 기본적으로 다수의 노동자를 기반으로 하는 당이어야 한다. 하지만 당의 정치적 성격은 당이 어느 계급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가가 아니라 당이 채택하고 있는 강령으로 판단해야 한다. 즉, 당의 성격은 당의 이름이 말해주는 것이 아니라, 당에서 내건 강령과 실천의 내용이 규정해 준다. 민주노동당이 노동자당을 이름으로 내걸지만 온전한 노동자계급의 정당이 아니듯이,1) 사회당이 사회주의자 당을 내걸지만 전형적인 사민주의 정당이듯이, 사노위에서 건설할 당은 이름만 사회주의노동자당이 아니라 강령과 조직 모두에서 실제 사회주의 혁명정당, 노동자계급 혁명정당이었다.

 

사노위가 혁명정당을 건설하려 한다면 사노위가 만들려는 강령은 당연히 사회주의 혁명 강령이다. 사회주의 혁명 강령은 역사와 생산과 권력의 주체인 노동자계급의 해방을 위해 자본주의 체제를 근본적으로 철폐하고 사회주의 혁명을 실현시키려는 강령이다. 프롤레타리아계급에 대한 착취체제인 자본주의체제의 본질과 현 쇠퇴기의 본질을 밝혀내고, 사회주의 혁명의 필요성과 정당성을 도출해내고, 프롤레타리아 독재-공산주의 사회로의 이행 등 혁명의 전 과정에 대한 혁명적 원칙을 정립하는 강령이다. 그리하여 혁명의 주체인 노동자계급에게 사회주의 혁명, 세계혁명의 전망을 제시하여 현실의 계급투쟁에서 자본가계급에 맞서 싸울 수 있는 무기로서의 역할을 하는 강령이다.

 

하지만 사노위 1년의 공동실천 과정에서 구성원의 다수는 사회주의 혁명정당이 아닌 이름 그대로 사회주의노동자 정당이라는 사회주의 좌파당 정도를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이 점은 3인안 강령에 대부분 반영되었는데, 평화적 이행까지 포함한 수권전략(혁명의 주체인 노동자계급의 물리력을 바탕으로 자본주의를 타도하고 노동자계급의 독재를 수립하는 전략이 아닌)과 자본주의 쇠퇴 불인정, 가짜사회주의 국가에 대한 불분명한 입장, 부문운동의 병렬적 조합으로서 주체형성 전략 등을 내세움으로써 계급투쟁에서의 전략 부재를 드러냈다.

 

3인안은 결과적으로 강령이 사회주의 혁명에 있어 필수적인 무기가 되고, 직접적인 사회주의 정치활동으로 표현되는 것이 아니라 실제 현실에서는 반자본주의 운동, 반신자유주의 투쟁 정도로 후퇴하고, 조합주의 또는 전투적 조합주의에 안주한 가운데 공허하게 사회주의와 사회주의 현장 활동만을 외치는 것 이상이 아닌 것으로 판단되었다. 이것은 결국 사노위의 성원들이 강령을 실천의 지침으로 생각하지 않고 정치적으로 동의만하면 되는 것으로 인식하게 만들었다.

 

그렇다면 사노위의 강령은 누구를 향한 강령이어야 했고, 3인안 강령은 누구를 향했기에 실천의 무기가 되지 못했나?

 

누구를 향한 강령이었나?

 

사노위의 강령은 사회주의 혁명당의 강령이기에, 혁명의 주체인 노동자계급을 위한 강령이어야 하며, 노동자계급에게 공개적으로 제출해야 하는 강령이다. 혁명 강령은 노동자계급의 혁명적인 부위인 사회주의자들에 의해 건설될 강령이다. 또한 계급투쟁의 역사와 혁명적 사회주의 운동의 성과를 온전히 계승하고, 현실의 계급투쟁과 혁명적 실천을 통해 끊임없이 발전하면서 건설되어야 할 강령이다.

 

그런데, 사노위는 강령토론의 과정에서 노동자계급을 향한 공개적이고 외향적인 토론 보다는 내부토론과 내부통일에 우선을 두었기 때문에, 노동자계급과의 상호작용과 검증과정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결국 강령토론 과정에서 나타난 강령적 차이와 쟁점에 대한 첨예한 대립들은 찻잔속의 태풍에 그치고 말았다. 이 때문에 조직 활동과 당 건설 경로에서 강령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른 조건들에 강령이 이용당하는 참담한 결과마저 초래했다. 1년간의 공동실천 과정에서 강령통일을 못 이루어 당연하게 조직을 해산해야 하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조직봉합과 조직보존 논리가 다수를 점해 사노위를 계속 유지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러한 사태는 애초에 강령을 만들 때 노동자계급에게 제출하는 강령을 만든 것이 아니라, 당 건설의 초기 주체들인 사노위 성원들만을 염두 해 둔 것으로 인식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그것은 현실로 나타났고, 사노위 강령토론의 목적은 노동자계급이 아닌 사노위안에서 다수의 지지를 얻는 것으로 전락하였다.

 

그렇다면 과연 사노위의 다수는 노동자계급의 어느 부위를 표현해주고 대표하고 있었을까? 사회주의 전통의 어느 지점을 계승하고 있었을까?

 

결과적인 이야기이지만, 사노위의 다수는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부위를 표현해 주는 것이 아니라 조합주의와 전투적 조합주의를 대표하고 있었다. 그것은 현실운동의 직접적 반영이었다. 또한 정치사상적으로는 자본주의와 적대하는 사회주의 혁명전통을 계승하는 것이 아니라 사민주의 정도와 대당 하는 좌파 급진주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되었다.

 

그래서 이것이 예상되었다면 사노위는 강령 조직의 통일2)을 통한 당 추진위 건설이 아니라 처음부터 강령을 중심으로 사회주의 혁명당 노선과 사회주의 좌파당 노선으로 분화될 것을 상정하고, 내부의 통일이 아닌 노동자계급 지향적이고 외향적인 강령투쟁을 통해 두 개의 당, 또는 강령투쟁에 승리한 세력만이 당 건설을 추진하는 경로를 채택했어야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사노위 과정 자체는 객관적 정세와 주체들의 상황을 반영하여 선택한 역사적 산물이었다. 따라서 주체의 상태에 의해 모든 것이 결정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바로 그 주체의 상태를 진전시켜낼 수 있는 역동적 과정을 창출해 내고자 했던 것이다. 최소한 그럴 수 있는 조건은 존재한다고 봤기 때문이다. 문제는 시작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시작에서부터 제대로 했는가 하는 것이다.

 

먼저 처음부터 강령통일이라는 조건을 내걸 때, 단순히 사노위 성원 다수가 선호하는 강령을 채택하는 것이 아니라, 강령토론과 공동실천을 통해 혁명적 실천을 담보하는 강령만이 당 추진위의 강령이 될 수 있다는 원칙을 세웠어야 했다. 그랬다면 강령과 조직노선이 분리되지 않고 한 가지로 인식되어 강령투쟁과 함께 실천력을 높이려는 노력들이 동시에 이루어졌을 수도 있다.

 

혁명당과 혁명 강령

 

노동자계급의 해방은 노동자계급 스스로의 일이고, 자신들의 연대와 자신들의 의식으로서만 자본주의를 극복할 수 있다. 자본주의를 극복하고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하려는 생각은 노동자계급의 의식 중 혁명적 계급의식이다. 혁명적 계급의식은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라는 과거의 낡은 사상과 현실의 지배적인 관념들을 극복하는 것이다. 이러한 낡은 사상들을 실질적으로 극복한다는 것은 의식개조나 정신적 깨달음이 아니라 낡은 경제적 모순들을 물질적으로 극복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곧 자본주의 모순을 물질적으로 극복하는 일이며, 노동자계급의 혁명을 통해서만 극복이 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혁명적 계급의식은 자본주의를 물질적으로 극복하려는 의식이며, 혁명을 가능케 하는 계급의식이다.

 

그런데 이러한 계급의식은 혁명시기가 아닌 일상시기에는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지배로 인해 쉽게 깨질 수 있고 일시적이며 결국 소멸해버리기 때문에, 혁명적 계급의식은 노동자계급의 모든 역사적·이론적인 성과들을 온전히 담아내는 강령을 가진 조직인 혁명 정당과 같은 물질적 토대를 갖춰야 한다. 노동자계급의 혁명당은 계급의식의 정치적 표현이며,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노동자계급의 혁명투쟁에 필수불가결하다. 혁명당은 전체 프롤레타리아의 해방이라는 강령을 방어하면서 조직된, 노동자계급 가운데 정치적으로 가장 앞선 부분을 포함한다. 그래서 혁명당은 늘 프롤레타리아의 소수일 것이지만, 혁명당이 방어하는 공산주의 강령은 전체 노동자계급에 의해서만 수행될 수 있다.

 

따라서 강령은 당을 구성하는 소수의 것이 아니라 노동자계급 전체에게 제출되어야 한다. 이 원칙을 지키지 않는 강령은 결국 노동자계급 스스로의 힘으로 자본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무기로서의 강령이 아니라 노동자계급을 수동화 시키고, 노동자계급에게 명령하고, 노동자계급을 지배하는 강령일 수밖에 없다. 앞서 말했듯이 사노위의 일부 강령은 일차적으로는 사노위 성원들을 위한 강령이었다. 그래서 노동자계급에 의한 검증, 승인과는 무관하게 자신들의 조직통일을 위해 인위적으로 강령통일을 시도하는 지경에 이르고야 말았다. 이러한 강령이 노동자계급을 수동화 시킬 가능성은 불을 보듯 뻔하다.

 

강령이 전체 노동자계급에 의해서 수행되는 강령이 되고, 자본주의를 스스로 극복할 수 있는 무기가 되려면 어떤 강령이어야 하는가?

 

혁명 강령은 사회와 노동자계급 투쟁의 궁극적 목적을 이론적으로 진술한 것일 뿐만 아니라 그들에 선행하여 실제 발생한 것에 대한 세세하고 구체적인 분석이아. 그리고 그 분석은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상황을 낳게 한 그 당시의 물질적인 특성들과 반드시 결부시켜 해명되어야 한다. 그래서 혁명 강령에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해방이라는 목적과 사회주의 혁명의 이론을 반드시 담아내야 한다. 또한 자본주의에 대한 분석과 노동자계급의 정치, 경제, 사회적 상황을 그 물질적 토대로부터 분석하여 자본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전망과 투쟁의 무기들을 제시해야 한다.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해방은 궁극적으로는 공산주의 사회의 실현을 통해서만 가능하며 그 과정에는 반드시 이행기가 필요하다. 이행기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로 표현된다. 사회주의 혁명이론은 바로 이행기 사회인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창출하기 위한 혁명이론이다. 혁명이론은 자본주의의 타도와 노동자계급의 권력 장악으로부터 시작하여, 노동자계급의 직접권력인 노동자평의회가 전 사회를 지배하면서 자본주의 잔재를 일소하고 공산주의 사회로 이행하기까지 견지해야 할 원칙과 과정에 대해 수미일관하게 밝힐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일관된 강령의 목적과 이론이 없이 여러 이론들의 조합을 통해 자신들만의 특별한 혁명이론을 만들려는 시도는 결국 강령을 전체 노동자계급의 것이 아닌 소수 정치세력의 전유물로 만든다. 특히 한국과 같이 혁명운동의 단절과 정치사상적 토대가 빈약한 지역에서 건설 할 혁명이론과 강령은 더더욱 혁명운동의 세계적 흐름 속에서의 보편성과 일반성을 가져야만 한다.

 

그런데 3인안은 한국사회의 특수성에 대부분 기반을 두고 있다. 3인안은 강령건설의 원칙과 자신들이 계승하고 있는 혁명적 전통을 밝히지 않음으로 인해, 현재 세계 사회주의 혁명운동진영에서의 위치와, 자신들의 사회주의 운동의 역사적 위치를 알 수 없게 하였다. 이것은 그들의 정치사상이 여러 이론들을 인위적으로 조합하여 그들만의 검증되지 않은 독자적 혁명이론을 만들어냈다는 근거이기도 하다. 하지만 혁명이론은 전 세계 노동자계급에게 보편적이어야 하고 국제적이어야 하기 때문에 반드시 국제적 흐름에 조응해야 한다.

 

결국 이런 문제점들이 3인안의 강령 내용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명시’를 생략3)하고, ‘소련의 사회성격 규정을 유보’하고, 노동자평의회 권력이라는 계급투쟁의 위대한 성과물과 구체적 실체를 ‘대체권력이라는 추상으로 후퇴’시키고, 노동자계급의 국가권력 장악을 위한 집단적 계급행동 동력과 무장력 획득이라는 좀 과격하고 불편하지만 필수적인 강령적 요소를 ‘계급의 주체형성’, ‘경제-정치-사회-일상 삶의 전 영역에서 대체권력을 형성하기 위한 투쟁과 도전’이라는 듣기 좋은 공문구로 바꾸어 놓는 결과를 만들었다.

 

혁명가 조직과 사노위

 

혁명가들의 조직인 혁명당은 처음에는 노동자계급 안의 혁명적인 인자들만을 포함시키는데, 계급투쟁이 전면화 되고 계급의식이 혁명 강령에 가까워질수록 당은 소수의 혁명당이 아닌 프롤레타리아 혁명당으로 확장된다. 그런데 혁명적인 인자들의 소속척도는 사회학적인 것이 아니라 정치적인 것이라서, 당의 강령에 동의하고 그것을 옹호하고 실천할 태세를 갖고 있어야 한다. 그래서 혁명당에는 사회학적으로 노동자계급에 속하지는 않지만 그들의 출신계급과의 단절을 통해서 노동자계급의 역사적 이해관계와 스스로를 동일시하는 지식인 등의 개인들도 속할 수 있는 것이다.

 

불행히도 사노위에서는 1년이라는 공동실천 기간 동안 강령통일을 이루어내지 못해 강령을 채택할 수 없었고, 그 때문에 회원들이 강령을 옹호하고 실천할 태세를 갖추었는지조차 확인할 수 없었다. 그런데 강령 초초안 제출이전에 이미 강령보다 낮은 단계인, 조직의 결정사항과 정치방침 조차도 실천하지 않거나 거부하는 회원들과 운동의 흐름들이 나타났다. 조직문제는 강령이전에 사회주의자로서의 태세 문제를 확인해 주었다. 그래서 이후의 강령토론과 강령투쟁은 조직노선 투쟁의 기반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조직노선 투쟁은 길었으나 강령투쟁은 짧았다. 강령과 실천은 분리되었고, 조직문제는 과잉되어 강령을 뒤로 물러서게 했다. 결국 1년이라는 시한의 문제로 강령은 조직분리의 결정적 근거가 되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남은 세력들은 서로 이질적인 강령을 통합하여 조직문제를 덮어버리고 공생의 길을 가고 있다.  

 

위와 같이 사노위의 조직노선 투쟁의 본질은 가입원서 정도의 멤버쉽 확인 문제가 아니라, 혁명당 구성원으로서의 자격 즉, 강령에 동의하는 사회주의자인지 아닌지, 강령을 옹호하고 실천할 태세를 갖춘 사회주의 활동가(혁명가)인지 아닌지를 명확히 하는 투쟁이었다. 이것은 정치적으로는 사노위를 혁명가조직과 당적 조직으로 만들고자 했던 혁명당 건설노선과, 사노위에만 한정된 공동실천을 통해 정치조직 간의 형식적 통합과 낮은 단계의 강령통일로 단일조직 건설을 목표로 했던 노선과의 피할 수 없는 충돌이었다.

 

 

2. 5인안 강령의 탄생과 쟁점

 

정치노선으로 구성된 강령기초위원회

 

사노위는 계급투쟁과 사회주의 운동의 한국적 상황과 사노위 구성원들의 객관적 조건들에 근거하여 공동실천단계-당 추진위 -당 건설이라는 경로를 상정했다. 그리고 사노위안에는 사회주의 혁명당과 거리가 먼, 사민주의, 스탈린주의, 민족주의자들은 배제한 상태에서, 한국 사회주의 운동내의 대부분 경향들이 다양한 정치노선과 써클 구도 속(일부 써클 불 참여)에서 함께 하였다. 즉, 사노위가 써클 구도에서는 다수를 포함하지 못했지만, 정치경향 속에서는 가장 풍부한 다수의 경향을 참여시키며, 당 건설 운동의 중심에 서게 된 것이다.

 

그래서 강령기초위원회를 처음 구성할 때는 사노위내 양대 정파였던 사노준과 사노련의 정치적 안배가 작용했으나, 강령실무위원까지 포함하는 강령기초위원회 구성을 마무리한 단계에서는 더 이상 사노준 대 사노련의 써클 구도가 아니라, 적어도 4개 이상의 정치적 입장을 명확히 갖고 있는 정치 사상적 결집체4)의 내용과 형식을 갖게 된다.

 

강령기초위원회 초기과정에서 강령 초초안 마련을 위해 강령의 체계와 구성, 작성방법 등을 결정했던 당시에는 독자적인 강령제출이 가능한 정치노선이라면 어느 입장이라도 각자의 강령 초초안을 제출하기로 결정했다. 이것은 사노위가 더 이상 써클 간의 연합이거나 정치적 노선이 없이 공동실천만을 하는 조직이 아니라, 명확한 정치적 입장을 갖는 조직을 추구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따라서 강령 건설 또한 정치사상적 노선을 중심으로 내, 외부 토론과 대중적 검증과정을 거쳐 공개적이고 공식적으로 건설되어야 한다는 것을 공유했다.

 

당시의 이런 상황을 감안할 때 강령 초초안이 적어도 4개 이상으로 제출될 것이 예상되었다. 그리고 여러 개의 초초안이 제출되더라도 토론과정에서 각각의 초초안 내용을 기초로 하여 공통의 지반과 차이점을 확인하고, 쟁점사항은 토론을 심화시켜 공개적인 검증과정을 통한다면 강령통일을 이룰 수 있을 거라 생각했었다. 공통의 지반과 차이점이 명확해질수록 강령통일은 사노위 구성원 전체의 일이 되고, 실천적 검증의 몫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우리가 건설할 강령은 조직원 숫자의 다수의 경향이 아닌, 정치 사상적 원칙의 명료함과 실천에서의 무기가 되는 강령만이 당 추진위의 강령으로 채택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조직문제로 탄생한 5인안 강령

 

하지만 강령 초초안 작성을 막 시작하려던 시점에 사노위에서는 당 추진위 건설 과정에서 강령만큼이나 중요한 조직문제가 터지고 말았다. 소위 ‘가입원서 사건’이라는 웃지 못 할 사건이었는데, 당시에는 아직 사노위 전체의 문제나 중앙위의 문제로까지 확대되지는 않았지만, 이미 서울지역위원회에서는 가입원서 거부자(정확히 규정하자면 가입원서 작성과 반대에 대한 행동 자체를 거부하고 정치조직의 민주집중제 원리를 공식적으로 부정한 자)에 대한 징계 안이 상정되었다. 물론 가입원서를 둘러싼 여러 문제들 중 가입원서 작성이라는 형식문제와 집행과정에서의 소통부족은 문제를 더욱 부정적인 쪽으로 확산시키는 원인으로 작용 했다. 하지만 처음의 문제는 가입원서 작성 자체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가입원서 거부흐름을 반조직적으로 촉발시킨 중앙상근자의 태도와 그를 비호하는 세력에 있었다. 왜냐하면 그 문제는 정상적이고 일상적인 정치토론을 통해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는 정치조직으로서는 당연한 멤버쉽 확인 문제였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것을 확산시킨 것은 써클주의 운동에서 나오는 온정주의 흐름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 문제에 대한 명확한 입장을 표명하지 않거나 묵인하는 사노준 출신의 3인을 제외한 강령위원 8인은 긴급회합을 갖는다. 이 자리에서는 강령문제 이전에 정치조직의 기본이 되는 조직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그 어떠한 강령토론이나 강령채택 과정에서도 결국 다수파의 논리와 써클주의 정치가 작용하여, 조직보존을 위한 야합이나 실천적 의미가 없는 강령 채택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는 문제의식을 공유한다. 그 후 1인은 독자강령 제출을 위해 그 모임에서 빠지고 나머지 7인은 조직문제에 대한 공유, 강령 원칙의 큰 틀에서의 동의를 기반으로 공동의 강령 초초안을 제출하기로 결정한다. 이것이 5인안이 탄생한 일차적 배경이다. 그리고 이러한 써클주의에 대한 우려는 2차, 3차 총회와 서울 지역위 임시총회, 강령토론의 과정에서 그대로 드러났고, 사노위 실패와 분리의 결정적 원인을 제공 하게 된다.

 

5인안 강령의 원칙

 

5인안은 강령 초초안을 작성하면서, 노동자계급에게 제출할 혁명 강령에서 고수해야할 원칙이 무엇인가를 밝히는 것이 중요했고, 이것으로부터 강령 작성이 시작되었다.

 

그것은 첫째, 혁명 강령에서는 자본주의의 근본모순을 명확히 규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서로 연결된 역사적이고 일반화된 모순과 그것에서 파생한 특수한 모순들의 고리를 찾아내어 구분하고 총체적으로 판단하여, 계급투쟁의 동학, 사회주의 혁명의 주체를 올바르게 인식하게 해주어야 한다는 원칙이었다.

 

둘째, 스탈린주의를 포함한 역사적 그리고 현존하는 사회주의를 참칭하는 국가자본주의, 기형적 사회 등 모든 반 노동자계급적 억압·착취체제를 사회주의로 인정하지 않으며, 오히려 노동자계급의 힘으로 타도해야 할 체제로 인식하는 것이었다.

 

셋째, 공산주의 사회로의 이행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필연성을 인정하며, 사회주의 혁명은 혁명당과 노동자계급의 의식적이고 조직화된 집단행동에 기반 해야 하며, 부르주아 계급의 폭력과 반혁명 책동에 대해 노동자계급의 무장력(계급폭력)으로 맞서야 하며, 부르주아 권력의 타도에서 무장봉기전술의 필요성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넷째, 단계론을 거부하고, 혁명의 첫 단계에서부터 부르주아 권력의 즉각적 타도와 모든 국가기구의 파괴와 노동자평의회 권력을 확립하는 것을 경로로 명시하는 것이었다.

 

다섯째, 세계혁명과 혁명적 인터내셔널의 건설을 노동자국제주의의 당면 실천목표로 설정하는 것이었다.

 

여섯째, 위의 원칙에 입각한 노동자계급 권력 장악을 위한 이행요구(강령) 실천을 원칙으로 하는 것이었다.

 

위와 같은 강령의 원칙들은 이미 강령 초초안의 내용을 대부분 규정해주고 있었다. 따라서 강령 초초안 작성과 강령토론에 있어 가장 중요한 문제는 강령의 원칙에 대한 동의였다. 강령문구와 전체 내용에 대한 동의는 1년이라는 짧은 기간에는 가능하지도 않고, 강제로 설득해서도 안 되는 문제였기 때문에, 토론과 실천을 통해 검증 받아야 할 앞으로의 과제로 상정했다. 그래서 원칙들에 대한 근거 제시와 세부적인 내용상의 불명료함 해소는 반드시 국제적인 흐름과 한국적 상황을 연계하여 풀어나간다는 원칙하에, 많은 부분을 앞으로의 과제로 남겨둔 채 강령 초초안을 제출하게 된다.

 

3인안 강령과의 사상적 차이

 

앞으로 사노위 잔류파의 통합강령이 어떻게 나올지는 모르겠지만, 3차 총회와 강령초안 토론을 거치면서 최종적으로 확인된 3인안과 5인안 강령초안의 사상적 차이는 다음과 같다.

 

첫째, 소련 사회의 성격 규정문제에서 3인안이 소련, 중국, 북한 등을 가짜 사회주의가 아닌 모종의 사회주의 국가로 규정하는 것은 과거의 역사적 사회주의에 대한 인식의 차이 정도가 아니었다. 이것은 앞으로 건설할 사회주의 국가의 상에 관한 문제이고, 여전히 3인안이 스탈린주의적 잔재와 노동자국가에 대한 환상(당과 관료가 주도하는 국유화, 계획경제에 대한 잘못된 환상)을 버리지 못해 나타나는 사상적 혼란스러움이기 때문에 결코 타협할 수 없는 문제였다. 우리는 소련사회에 대해 국가자본주의라고 규정하면서, 가치법칙과 계급투쟁의 고려를 통해 소련사회를 분석하려 노력하고 있다. 여기에는 맑스주의 혁명적 전통에 따라 이행기 문제를 판단하겠다는 의지가 담겨있다. 물론 아직까지 명료하지 못한 측면들은 앞서 말했듯이 앞으로의 과제로 남아 있다. 하지만, 혁명 강령의 정체성을 나타내주는 이행기 문제를 퇴보한 노동자국가론이나 사회주의로의 이행에 실패한 모종의 노동자국가로 판단하는 사상들은 우리와는 현실 투쟁에서부터 적대적5) 일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 문제에 대해 적당한 타협이나 강령상의 이견 병기로 넘어가려는 행위는 정치적 야합일 뿐 역사와 노동자계급에게 정직하지 못한 태도이다.

 

소련과 북한, 중국, 그리고 쿠바와 베네수엘라 같은 국가자본주의 착취체제에 대해 명확한 입장이 없거나 그들을 동의해주는 세력들은 결코 노동자국제주의를 온전히 지켜낼 수 없으며, 혁명적 인터내셔널의 건설에서도 당연히 제외될 수밖에 없다. 그들이 강령에서 가짜 사회주의 국가에 대한 입장을 명확히 하지 않아도 현실의 실천운동에서 큰 문제가 없으니 함께 하자고 하는 것은 노동자계급에 대한 기만이자, 강령과 실천을 분리하는 작태이다. 카스트로, 차베스를 묵인하면서 쿠바나 베네수엘라에서 활동 중인 혁명적 공산주의 세력과 연대할 수 없으며, 중국의 국유화 된 산업 체제를 보호하자는 입장을 갖고 있는 한 중국노동자들의 정부와 노조의 극악한 탄압을 넘어선 자립적 투쟁에 대해 지지할 수 없다.     

 

둘째, 자본주의 쇠퇴 규정의 문제는 현재 자본주의 체제의 끝 모를 위기의 본질을 밝혀내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삶의 문제이고, 계급투쟁의 주체들이 처해있는 객관적 조건과 전망에 대한 문제이다. 이것은 결국 노동자계급 미래의 문제, 혁명의 문제이다. 3인안처럼 자본주의의 상승기/쇠퇴기 개념 없이 단순한 주기적 위기론, 공황론 정도로 자본주의 위기상황을 판단한다면, 쇠락해가는 자본주의의 야만성과 반동성, 기생성과 부후성의 근원을 밝혀낼 수 없다. 더욱이 이것을 혁명적으로 극복할 대안(이행 프로그램)을 그 물적 토대로부터 도출해낼 수 없다. 또한 쇠퇴하는 자본주의 하에서 자본의 위기전가 상황을 맞이하여 생존권의 위협과 급격한 생활수준의 하락에 직면한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생존조건이 계급의식과 조직의 상태를 어떻게 움직이는지 분석할 수 없다. 낡아서 소멸하는 운동과 새롭게 창출되는 계급운동의 실체를 파악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끊임없이 분출되고 꺼져버리는 계급투쟁 속에서 혁명적 전망을 찾을 수 없다. 그래서 자본주의 쇠퇴 개념을 무시한 채 이들이 제시한 전망이라는 것은 고작 과거운동의 혁신이나 계급의 재조직화(주체형성)라는 구태의연하고 앙상한 실천적 전망이었다.

 

게다가 이들은 자본주의 쇠퇴개념에 대한 반정립에 치중한 나머지, 자본주의 쇠퇴의 시작 (1914년, 1979년대, 1998년 이후 등)이 정확히 언제부터였는지에 대한 문제제기나, 쇠퇴의 여러 근거에 대한 연관성 부족에 대한 비판을 넘어, 자본주의 쇠퇴 개념 자체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따라서 최근 경제학자들6)과 자본가들까지 자주 사용하고 있는‘자본주의 쇠퇴’라는 개념을 계속 부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이것은 모든 것을 ‘자본주의 위기’라는 말로 치환시키게 되어, 사회주의 혁명의 물적 토대를 스스로 부정한다는 오해를 사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공산주의 혁명은 세계적이어야 하고, 세계적이지 않으면 그 성공을 보장할 수 없다. 또한 세계혁명은 새로운 인터내셔널 즉 세계혁명당이 건설되어야 실현 가능하다. 세계혁명과 세계혁명당 건설의 관점에서 강령은 세계적으로 통일된 강령이 필요하며, 이것은 처음에는 맑스주의 전통을 계승한 혁명적 사회주의자들과 혁명적 계급투쟁을 벌이고 있는 전투적 노동자계급들을 포괄할 수 있는 기준강령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다. 이 기준강령에는 세계적으로 보편적인 혁명적 원칙들이 담겨있어야 한다. 일국의 특수성을 반영한 국가별 지역별 당이 존재하는 한, 처음에는 각 당의 강령이 별개로 존재하겠지만 세계혁명당의 강령과 조직은 하나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일국 혁명당의 강령과 조직은 세계혁명당의 기준강령과 통일되어야 하며 세계혁명당의 건설에 복무해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원칙에서 벗어나 불분명한 자신들만의 사상과 경험으로 일국의 강령을 독자적으로 만들려는 시도들은 세계혁명의 관점을 가질 수 없으며, 노동자국제주의와도 거리가 멀다.  3인안은 강령토론의 과정에서 인터내셔널의 관점이 아닌 일국의 독자적 강령과 당 건설을 상정하고 있음을 드러냈고, 이것은 일국 당들의 연합형태를 인터내셔널로 규정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은 맑스주의를 계승한다고 하면서도 자신들이 계승하는 정치노선을 밝히지 못한 채 정체불명의 혼합된 노선과 다른 노선에 대한 반정립으로 일관해 왔기 때문에 맞이한 당연한 귀결이었다. 이것은 사노위 내에서의 연방주의적 조직관을 인터내셔널 건설에까지 적용한 정체불명의 사상적 표현에 다름 아니었다.

 

강령토론의 원칙과 실천적 강령채택의 실패

 

우리는 강령을 토론하고 비판할 때 원칙과 사상적 근거를 중심으로 토론을 진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계급투쟁의 위대한 역사와 혁명적 사회주의 사상의 집약인 강령의 문구들은 그 만큼 함축적이고 최선의 원칙만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선 강령을 건설하는데 있어 고수한 원칙과 역사적 전통을 밝혀내고, 그것으로부터 작성된 강령의 내용과 현실운동에의 적용 등을 토론하는 것으로 강령토론이 진행되어야 했다.  

 

혁명적 사회주의 원칙과 전통에 동의 한다는 것은 바로 강령의 원칙에 동의한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강령토론은 강령의 사상적 근원을 밝히고 현실 적용에서의 원칙을 토론하는 방식이어야 한다. 그런데 사노위에서의 강령토론은 원칙의 토론이 아닌 강령의 문구나 주제별 토론이 되고 말았다. 실천의 적용에 대한 토론이 아니라 현재의 운동에 대한 유용성에 대한 토론이었다. 

 

다시 강조하지만 강령은 절대불변의 진리가 아니라서 그 원칙의 동의에서부터 시작하여 실천의 무기로 작용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래서 강령의 문구 하나하나는 계급투쟁의 발전과 함께 끊임없이 검증되고 창조되어야 할 과제이지 진리의 담지서가 아니다. 실천을 강제하는 것은 강령의 명료한 원칙과 그에 입각한 풍부한 전술과 지침이지, 강령의 친절함과 좋은 글귀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노위 강령토론 5개월은 강령의 사상적 원칙에 충실한 토론도, 각 쟁점의 해소를 위한 심화토론도, 현실 운동의 무기가 될 수 있는 실천적 토론도 되지 않은 채, 그저 일정을 채우기 급급하거나 사상적으로 전혀 다른 강령 안을 조직보존을 위한 여러 가지 압력으로 통일시키는 것에만 혈안이 되어 있었다.

 

게다가 당시의 사노위 조직 상태는 단일 강령이 만들어지고 강령이 채택된다하더라도, 회원들의 강령적 실천이 담보되지 않는다면, 강령도 당 건설도 앙상한 형식만이 남을 것이 분명했다. 따라서 강령의 채택은 강령의 내용에 대한 동의만이 아니라 강령을 실천적으로 결의하고 강령에 입각해 활동할 진정한 당원의 자격을 부여하는 채택이어야 했다. 강령과 규약을 승인하는 순간, 현재의 사노위보다 2~3배 이상의 정치의식 상승과 활동력이 필요할 것이며 강령적 실천과 규약 준수가 조직의 모든 규율을 담보해주는 것이어야 했다. 왜냐하면 사노위가 8개월을 넘어서면서는 출범초기에 보여준 회원들의 활동력과 결합도는 현저히 떨어져 있었고,  그나마 남아있던 이질적인 조직문화 사이의 건강함 긴장감도 서로에 대한 불신과 불만으로 바뀌어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조직을 살리는 길은 오직 강령의 실천적 채택 뿐 이었다.

 

하지만 다수파는 상당한 고통과 출혈이 따르겠지만 당 건설을 위해 감내해야만 하는 강령의 실천적 채택(복수의 안이 나올 경우 각자의 강령 안을 실천적으로 승인하는 것)이라는 정도를 걸은 것이 아니라, 강령의 인위적 통일을 통한 형식적 채택과 조직보존에 중심을 두면서 우리들 자신과 노동자계급에게 약속한 당 건설 경로를 아무렇지 않게 바꾸어 버렸다.

 

다수파는 처음부터 실천적 강령의 채택이나 조직의 질적 전환을 통한 당 추진위 건설은 염두 해 두지 않았거나 중도에 포기한 것이 확실하다. 그래서 강령 초초안 작성이전 가입 원서 건을 필두로 하여 연쇄적으로 조직문제가 발생했을 때 적극적으로 문제해결을 위해 나서거나 희생을 감수한 것이 아니라 정치적 책임을 방기한 채 무마하거나 통합하려고만 했던 것이다. 이런 태도는 사상적 불명료함과 부분적 실천의 나열과 조직과 투쟁에서의 연방주의적 사고들로 이루어진 3인안 강령에 그대로 반영되어 나타났다.

 

3. 결론

 

강력한 정치조직은 합력의 정치, 통합지도부의 건설이 아닌 강령적 통일, 강령적 행동일치에 있다. 강령의 수준을 낮추어 통일을 꾀하는 것은 혁명적 전통과 현실의 혁명적 사회주의운동을 져버리는 일이다. 그런데 사노위 다수파는 조직유지를 위해 강령의 원칙, 강령토론의 원칙, 강령채택의 원칙, 혁명당 건설의 원칙 모두를 헌신짝처럼 버리고 오로지 조직유지와 형식적 당 추진위 전환을 위해 혁명적 사회주의 진영을 배제7)시켰다.

 

결국 그들이 간과한 가장 큰 오류는 당과 강령은 하나이고 유기체와도 같다는 사실을 부정한 것이다. 이 점을 무시하고 강령의 인위적, 기술적 통합을 시도한 것은 강령과 실천을 분리하는 결과를 초래할 뿐이다. 과거부터 지금까지 존재했던 모든 혁명당 조직에서 강령은 실천의 지침이자, 당원들과 노동자계급에게 무기로 인식되어왔다.

 

강령에 사회주의혁명이 목표로 설정되어있다면 그 강령을 옹호하는 모든 당원들은 현실운동에서 실제 사회주의 혁명을 위한 운동을 해야 한다. 조합주의, 관료주의 운동을 넘어서는 운동을 강령에서 제시하고 있다면 반드시 조합주의와 관료주의를 타도하고 새로운 운동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 강령에 입각한 활동인 것이다. 이런 태세와 이런 조직구조가 갖추어지지 않은 조직은 사회주의자 조직도, 혁명가조직도 아니며, 더욱이 노동자계급의 당이라는 이름을 절대 붙여서는 안 될 후진적 정치 써클일 뿐이다.

 

혁명당 건설은 바로 이러한 강령과 조직이 하나로 결합하는 조직을 만들어 나가는 과정이자, 강령이 노동자계급과 상호작용하며 계급투쟁의 무기가 되는 과정이다.

 

혁명당 건설은 결코 먼 곳에 있지 않다. 계급의 앞선 부위 ,혁명적 부분이라 자임하는 우리가 먼저 강령을 건설하고 강령에 입각한 활동을 통해 혁명당의 조직체계를 하나하나 튼튼하게 세워나간다면, 그것이 노동자계급에 깊이 뿌리 내린다면, 당은 노동자계급에게 바쳐져 노동자계급의 당이 될 것이다.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에 부르주아 계급에게 실질적 위협이 되는 프롤레타리아 혁명당이 되는 일은 우리의 명확한 정치적 입장과 전망이 정세의 고양과 결부된 대대적인 계급투쟁과 만날 때이다. 혁명을 향한 모든 행동은 프롤레타리아 혁명당의 강령과 그것을 행동에 옮길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혁명적 계급의식에 달려있다.

 

쇠락해가는 자본주의, 야만이냐 혁명이냐의 시대, 노동자계급의 시대적 필요에 부응하는 혁명당 건설에 즉각 착수하자!

 

노동자계급에겐 무기가 되고 자본가계급에겐 실질적 위협이 되는 공산주의 혁명 강령을 건설하자!

 

 

각주)

1) 민주노동당은 최근의 ‘사회주의 가치 삭제’라는 강령개정을 통해 사회주의적인 요소도 제거했지만, 원래부터 사회주의 혁명정당과는 거리가 먼 정치적으로는 좌파민족주의, 사민주의 정당이었다.

2) 사노위는 당 건설 추진위 조건으로 강령, 전술, 조직상의 통일을 내걸었다. 하지만 전술은 강령의 원칙에 복무하는 것이기 때문에 강령통일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공동전술에 불과하다.

3) 초초안 단계에서 생략되어 있던 프롤레타리아 독재 개념은, 초안단계에서는 내용이 관철된 것이 아니라 형식상의 외삽 형태로 포함되었다.

4) 강령기초위원회는 강령기초위원과 강령실무위원으로 구성되었는데 총 11명이었다. 강령위원회 구성은 사노준 출신 3명, 사노련 출신 3명,개별 활동가 5명으로 이루어 졌는데, 두 써클 소속이 아닌 5명은 레닌주의, 좌익공산주의, 트로츠키주의, IBT(트로츠키주의 일부) 등 다양한 정치 노선을 갖는 개인들로 구성되었다. 따라서 다함께(전지윤, 사노위 실패가 좌파에게 보여 주는 것, <마르크스21>, 10호, 2011년 여름)에서 규정한 사노련파 대 사노준파의 구도는 강령기초위원회에서는 이미 존재하지 않은 것이다.

 

5) 사노위 신문에서는 리비아 사태를 두고 이미 두 가지의 적대적 경향이 동등하게 게재되었다. 이것이 자국 상황이라면 둘의 입장은 피할 수 없는 적대적인 입장인데도 같은 조직을 유지한다는 것은 부르주아 정치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게다가 여기서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세계혁명과 인터내셔널의 건설이라는 관점에서 서로 적대적인 입장이 자기 일이 아니라서 자국중심으로 아무렇지 않게 동거를 하면서도 인터내셔널을 외친다는 것은 인터내셔널조차 희화화 시키는 일이다.

 

6) 맑스주의 경제학자인 김수행 교수조차도 자본주의 쇠퇴라는 용어를 직설적으로 사용한다. <경향신문> (2011년 5월24일) 김수행 칼럼 -쇠퇴하는 자본주의에서 “이제 자본주의는 빈부격차와 계급대립의 심화, 국제협력의 붕괴, 제국주의에 대한 제3세계 인민의 저항, 민주주의의 약화 등으로 쇠퇴하지 않을 수 없다.” 고 주장했다. "

7) 혁명적 사회주의 진영(사노위 내 의견그룹)은 사노위의 해산을 선언했으므로 사노위 출범정신을 지켰고, 잔류파들은 해산을 받아들이지 않고 사노위를 유지시켰으므로, 사노위의 공과 실에서 혁명적 사회주의 진영을 배제시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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