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게시물에서 찾기풀소리가 세상에 내는 작은 목소리입니다.

130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6/06/19
    안건모(2)
    풀소리
  2. 2006/06/02
    꼬이는 하루(1)
    풀소리
  3. 2006/05/29
    지방선거(3)
    풀소리

안건모

버스노동자 안건모.

글쓰는 노동자 안건모.

작은책의 안건모.

 

참 많은 별칭을 가진 분이다.

 

나하고는 인연도 오래된 편이다.

1990년대 초반이었다.

우리 사무실을 찾아온 건모형.

빼빼 마르고 날카로우면서도 늘 웃음을 잃지 않는 모습.

그로부터 15여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하다.

 

생활글을 쓰기 시작하고,

작은책에서 시작해 한겨레까지 진출하였지만,

글에 대해서는 늘 겸손한 것 같다.

 

운전을 하면서 생각을 다듬고, 신호등 때문에 멈추면 문장을 다듬고...

 

있는 그대로의

사는 그대로의 글을 쓰는 건모형.

이오덕 선생님 가르침대로 참글을 쓴다.

 

건모형이 그동안 썼던 글을 모아 책을 냈다.

요즘 한창 잘나가는 보리출판사에서...

 

내일(20일) 출판기념회를 한다.

존경, 기쁨

뭐 그런 것보다 뭔가가 있는 것 같은데, 적당한 말이 생각나지 않는다.

하여간 기쁘고 존경스럽다.

 




[인터뷰]안건모 씨『거꾸로 가는 버스』펴내 …'생활글'의 힘 발휘

 

버스 기사의 ‘노동의 기록’을 담은 책 『거꾸로 가는 버스』(보리출판사)가 나왔다. 버스 기사가 자신의 노동을 꾸밈없이 진솔하게 담은 글을 발표한 것은 이 책이 처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노동자가 자신의 노동을 글로 서술하는 일이 거의 드물고 꺼려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인지 그래서 이 책은 의미는 남다르다.

▲ 거꾸로 가는 버스 (보리출판사)

『거꾸로 가는 버스』의 저자 안건모 씨(49)는 버스 운전만 꼬박 20년을 한 버스 ‘도사’다. 그는 지난 1984년 스물일곱의 나이에 버스 핸들을 잡기 시작해 지난 2004년 12월 31일까지 서울 도심 곳곳을 버스로 유랑했다. 20년 동안 버스를 운행하면서 틈틈이 월간 『작은 책』과 <한겨레>에 기고한 글들이 한 권의 책으로 엮어졌다.

‘시민의 발’인 버스는 장애인을 제외하고, 비장애인이라면 누구나 출퇴근길에 이용하게 되는 대중교통이지만, 이 공간은 딱딱한 익명성의 공간인 동시에 서민의 공간이다. 10미터 길이 남짓의 버스 공간안에서 빚어지는 서민들의 모습과 그 가운데서 홀로 노동하는 운전수의 만남을 이 책에서 만날 수 있다.

기사들한테 얘기하면 금방 아는 아주머니가 있다. 그 아주머니가 타는 곳은 꼭 정해져 있지 않다...무거운 떡을 가득 담은, 커다란 고무대야를 들고 타기 때문에 시간에 쫒기는 기사들이 그리 반가워하지 않는다. 또 차를 타기만 하면 신발을 벗어 놓고 그 좁은 의자에 책상다리를 하고 꾸벅꾸벅 졸아 떨어질까 불안하다...손님들이 다 내리고 문이 스르릉 닫힐 때에 고무 대야를 들고 나온다. (100쪽)

“아, 근데 그 또라이는 요즘 안 보이네.”
“누구?”
“왜, 거 증산동회에서 타는 놈, 멋쟁이처럼 하고 다니면서 괜히 시비거는 놈.”
얘기하는 걸 보면 그 사람하고 안 싸운 기사들이 없다. 쉰 살도 넘게 보이는 아주 멋쟁이 신사인데 차만 올라타면 기사 뒤에 서서 깐죽깐죽 말을 시켜 시비를 건다. 그래 놓고 ‘불친절’로 신고를 하는 손님이다. 이사를 갔는지 요즘은 보이지가 않는다.(101쪽)

버스만 타면 혼잣말로 “전두환이는 말이야. 정치를 어떻게 했는데...”라고 중얼거리는, 약간은 ‘정신이상’이 의심스러운 꽃장사 아주머니, 아침이면 맨 정신으로 공사판에 나가서 저녁이면 곤드레만드레 술이 취한 채로 버스에 올라타는 새까만 얼굴의 황소눈 아저씨, 회색교복을 단정히 입고 달님처럼 이쁜 얼굴로 인사하는 청순한 달님이도 ‘거꾸로 가는 버스’의 단골손님이었다.

딘골손님의 인연은 이어져 다음주에는 초등학생 때 만난 꼬마손님 다섯 명이 스물네살의 숙녀가 되어 그를 찾아온다. 병원에 입원했을 때 문병을 오기도 하고, 결혼식이면 달려가 축하를 전하기도 한다. 인스턴트처럼 스치고 지나가는 줄로만 알았던 버스에서도 훈훈한 인연은 맺어지고 있었다.

버스경력 20년의 ‘버스도사’는 어떤 경지에 이르게 되는 것일까. 그 ‘도’를 물어봤다.
“일단 손님하고 안 싸우게 된다. 얼굴만 보고 손님이 대하는 태도만 봐도 대꾸를 해야 되는지, 우격다짐으로 맞짱을 떠야 하는지 척 알 수 있다. 또 운전이 편해지고, 버스정비에 대해 하나도 몰라도 어디쯤에 차가 이상이 있는지 감으로 느낀다.”

물론 버스에서 즐거운 일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교통지옥’ 서울을 ‘곡예운전’으로 누비는 버스 운전은 고된 노동 중에 하나다. 버스 노동자를 괴롭히는 것은 현실을 무시한 도로교통법이기도 하고, 임금체불을 밥 먹듯이 하는 버스운수업체이기도 하다. 그리고 회사와 결탁해 파업을 벌이는 ‘시늉’을 하고 버스요금을 올리는 것을 묵인하는 '어용노조’이기도 하다.

버스바퀴와 인도 턱 사이가 50센터미터가 되어야 한다. 50센티미터가 넘으면 ‘정류장 질서문란’이라고 10만원 세금(?)을 물어야 한다...요즘 은평구청이나 서대문구청은 아주 신이 났다. 그런 정류장에서 인도에서 50센티미터 붙이는 버스들이 있나? 언제라도 나가서 사진만 찍으면 벌금 10만원이니 구청 수입이 여간 짭짤한 게 아니다...지킬 수 없는 법을 만들어 놓고 벌금을 내라고 해야지 이건 뭐 조선시대 ‘삼정의 문란’ 때처럼 뱃속에 있는 애한테까지 받았던 ‘군포’ 같은 세금 걷는 것도 아니고 정말 ‘드러워서’ 못 살겠다 (26~28쪽)

이번 파업은 다시 말하지만 결코 노동자들이 일으킨 파업이 아니다. 기사들이 말한 대로 ‘사업주가 파업한 것’이다....한국노총 밑에 자동차연맹, 그 밑에 서울버스지부로 되어 있는 지금 우리 상급단체는 우리들 조합비로 자기들 이익만 챙기고, 해마다 회사에 겁주는 파업이 아니라 시민들에게 겁주는 ‘파업’을 무기로 ”파업 직전 극적 타결“했다고 연극을 하고 있다...사업주는 올해도 또 어김없이 버스 요금을 인상하기로 약속 받았다니 더 말해 무엇하랴. (150~152쪽)

버스운수 노동자에게 가장 치명적인 피해를 입히는 것은 사고다. 사고가 나서 다치면 병원에 입원해야 하고, 그 만큼 일을 못해 돈을 벌지 못하고, 벌금 내고, 무사고 운전 경력도 깨지고, 벌금 점수가 많으면 운전면허 정지까지 당하게 된다. 그런데 사고의 책임은 버스 노동자에게만 물을 수는 없다.

내 차만 해도 고장 난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운전석이 고장 나 울퉁불퉁한 길을 가면 의자가 토끼같이 깡충깡충 뛰듯이 올라갔다 내려갔다 해서 정신이 없고...어떤 차는 센터 볼트가 나가서 차 중심을 잡지 못하고 게처럼 삐딱하게 나가기도 한다..버스 바퀴가 다 닳아서 바퀴를 갈 때는 두 짝을 한꺼번에 갈아야 하는데 버스 회사들은 타이어를 아낀다고 한쪽씩 갈아 줄 때가 많다. (165~166쪽)

신문의 한 줄도 차지하지 못하는 버스회사의 내부사정이 노동자에 의해서 낱낱이 밝혀지고 있는 것이다. 버스회사가 비용절감을 이유로 버스정비에 소홀한 사이 사고의 책임은 고스란히 버스 기사에게만 떠넘겨지고, 노동자들은 이중삼중의 고통을 떠안게 된다.

▲ 지난 1995년에 창간된 월간 <작은 책>은 올해

로 창간 11주년을 맞았다.

그런데 그는 어떻게 자신의 노동을 글로 남기게 됐을까. 그가 월간 『작은 책』을 처음 만난 것은 지난 1996년이었다. <한겨레> 신문을 읽다가, 작은 줄 광고 한 줄에 ‘필’이 꽂혔다. “노동자가 글을 써야 세상이 바뀐다. 월간『작은 책』1년 구독료 1만원.”

일단 값이 싸기도 했지만, “노동자가 어떻게 글을 쓰나, 글은 고상하고 품위 있는 사람들만 쓰는 것인데…‘라고 여겼던 그는 호기심에 월간『작은 책』을 정기구독했다. 그리고 그의 삶에 조금씩 변화가 다가왔다. 그리고『작은 책』의 독자 투고를 알리는 글 ”맞춤법이나 띄어쓰기가 틀려도 좋습니다. 글을 보내주세요“라는 글이 다시 그를 사로잡았고, 지금은 고인이 된 이오덕 선생이 주관하는 글쓰기 모임에 나가게 됐다.

글을 쓰게 되면서 작은 변화들이 일어났다. 안 씨는 “회사가 겁을 내게 됐어요. 징계위원회 같은 게 열리면 그전에는 막말도 아무렇게나 하고, 무시하는 말들을 내뱉었는데 회의를 소식지에 기록하면서부터는 태도가 달라지기 시작했죠. ‘저 놈들이 또 기록하면 어쩌나’ 하는 눈초리로 바라보면서 조심스러워하더군요.”

노동자가 ‘생활글’을 쓰기 시작했다는 것은 세상을 향해 고발할 수 있는 ‘펜’을 가지게 되었음을 뜻하고, 그리고 그 글은 한 사람의 고발에 머무르지 않고 공명이 되어 함성으로 울러피지는 힘을 가지고 되었음을 뜻한다. 지금도『작은 책』의 글쓰기 모임은 계속된다. 적게는 10여명에서 많게는 30여명이 모임에 참여해 글쓰는 맛을 배우고 익히고 있다.

안 씨는 버스운수 노동자에서 지난해 1월부터 월간『작은 책』의 발행인 겸 편집인으로 자리를 옮겼다. 요즘은 어떤 글을 쓰시느냐는 질문에 “글 쓰는게 영 시원찮다”며 그는 “몸으로 움직이는 노동이 제격이고, 그래야 글이 나오는데 펜대만 굴리다 보니 시간만 간다”며 푸념했다. 그래도 그가 온 이후로『작은 책』은 창간 11년만에 올 해 두 번이나 흑자를 기록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꼬이는 하루

1.

5월 31일.

투표를 마치고 나는 성북동으로 향했다.

간송미술관 특별대전을 이 때가 아니면 갈 시간이 없다. 그래서 마음 먹고 길을 나섰다.

 

2.

내 집이 있는 고양시 원당에서 성북동까지는 제법 긴 여행이다. 그래도 간송 선생이 평생 모은 문화재 중 국보급의 뛰어난 것들을 전시한다는데 그 정도 수고 쯤이야.

 

일정은 1시 최순우 옛집 -> 1시 30분 간송미술관 이렇게 잡았다.

최순우 옛집은 1시에 해설사가 나와 자세한 설명을 한단다. 옛집에 도착하니 12시 45분 쯤. 120평이라고 하지만 그것보다 좁아보이는 집안에는 사람들이 가득하다. 집안 여기저기를 살펴보고 이제 나갈까 하는 시점에 해설사가 나와 해설을 시작했다. 굉장히 간결하고, 소박한 소개가 취향에 맞았다.

 

3.

1시 30분 쯤 간송미술관에 갔다. 들머리부터 불안하다. 사람들이 바글댄다. 아니나다를까 간송미술관 입구 언덕길에 줄이 길다랐다. 가까이 가니 입구 옆에 있는 학교 안으로 운동장 반바퀴 정도로 길게 줄이 늘어서 있다. 한낯의 햋볕은 여름 그대로인데 대단들 하군!

 

줄을 설 정도의 문화 애호가가 못 되는 난 일단 후퇴. 이웃에 있는 길상사로 향했다.

길상사는 군사정권 시절 권세가들과 돈 많은 재벌 및 그 떨거지들이 밀실 야합의 장소로 주로 이용되던 고급 요정 '대원각'이 있던 자리이다. 어느날 대원각 여주인이 법정스님의 설법을 듣고 감동하여 당시 1000억원대 재산가치가 있는 이곳을 송광사에 기증하여 만들어진 절이라고 한다.

 

난 재벌들이 몰려 사는 성북동에 위치한 옛 고급요정은 어떠했을까 하는 호기심과 간송미술관에 늘어선 줄이 줄어들기를 바라는 마음 반반으로 이곳을 찾았다.

 

들머리부터 공사가 한창이라 '뭐 볼 거 있겠어' 하는 선입견이 맞구나 싶었지만 공사장이 있는 일주문을 지나자 제법 넓은 마당과 당당한 건물과 울창한 숲이 행복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길상사는 호젓한 산사의 맛을 느끼려는 사람들에게는 맞지 않는 것 같다. 절 경내는 제법 넓은 것 같은데, 대부분 스님들의 수행터로 쓰여 금지구역이기 때문이다.

 

4.

내려와 점심을 먹고 이제는 줄이 줄어들었겠지 하고 간송미술관을 다시 찾으니, 왠걸 줄이 더 길어졌네!

 

난 패배를 인정하고 고양시로 향했다. 먼저 선거사무실로 돌아오니 15명 가까이 되는 당원들이 몰려있다. 다들 선거 결과가 궁금해서이겠지. 저녁에 지역위원회 사무실에서 함께 모여 개표방송을 보기로 했다. 난 일단 집으로 돌아왔다. 피곤하기도 해 자리를 깔고 누웠지만 잠이 오질 않는다.

 

5.

내가 지역위원회 사무실에 도착한 것은 저녁 8시 쯤이었다. 그곳에는 이미 30명 쯤 되는 당원들이 모여 있었다. 중앙방송은 개표 현황을 내보내는데, 정작 우리가 궁금해하는 지역의 시의원 선거방송을 하는 케이블 방송은 예고한 시간이 지났는데도 방송을 내보낼 생각조차 하지 않는 것 같다.

 

어찌됐던 출구조사 결과는 민주노동당의 참패다. 더 당혹해하는 당도 있겠지만 거기에 신경을 쓸 여유는 없다.

 

패배를 예고한 방송이 온 도시를 덮었는데도 당원들은 끊임없이 모여든다. 많을 땐 50명 정도, 왔다가 빠져나가고 또 오고... 빠져 나간 이들은 지역위원회 사무실 근처에서 술을 마시고...

 

6.

졌다. 당연히 얻을 줄 알았던 비례대표 시의원도 1% 차이로 얻지 못했다. 우리 원당지역 시의원은 9.7% 득표로 0.3%가 모자라 선거비용을 돌려받을 수 없다. 제길! 최악이다. 당연히 당선과 비용보존이 될 줄 알고 빌려 쓴 선거자금도 있는데...

 

사무실 옆에서 맥주 한잔을 마시다 그래도 당원들 챙기겠다고 사무실로 향하는 이홍우 위원장의 뒷모습은 마치 모아논 재산도 없이 어느날 갑자기 실직한 50대 가장의 뒷모습처럼 휘청이는 듯 하다. 슬프다.

 

여전히 꿋꿋한(?) 당원들을 뒤로 하고 난 집으로 왔다. 아침에 출근하는 아내는 '난 1시간밖에 못 잤어.' 한다. 아내는 분회장이고, 우리 지역 시의원 선대본부장이다. 시 비례대표 후보로 일찌감치 거론되었던 적도 있다. 그만큼 책임감도 컸나보다. 안쓰럽다.

 

7.

패배의 원인은 많을 것이다.

겸허하게 짚어보고 싶다. 그리고 여러 동지들의 얘기를 듣고 싶다.

물론 나름대로의 판단은 있다. 그렇지만 모든 걸 유보하고 싶다. 며칠 아무 생각없이 지나다가 멍함도 아품도 제대로 가늠이 될 때 그때 듣고, 판단하고 싶다.

 

참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고생하는 것 같다.

참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노력하는 것 같다.

결과와 관계 없이 말이다.

 

고맙다. 그리고 아무런 말 없이 위로해주고 싶다.



1. 최순우 옛집

 

최순우는 국립박물관장을 했던 분이다.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 서서'란 멋진 제목의 책을 낸 분이다. 물론 사후이지만 말이다. 이분의 옛집을 우리 문화.자연 유산을 지키는 단체인 '내셔널트러스트'에서 매입해 관리하고 있다.

 

 

> 옛집 입구

 

> 안채

 

> 선생이 거쳐하던 오수당(午睡堂) '문을 닫으니 이 곳이 깊은 산 속이구나'라는 뜻은 현판.

 

> 오수당 방 안

 

> 뒤 뜰에서 본 오수당 현판

 

> 매심사(梅心舍) 현판

 

> 앞마당의 매화



> 앞마당의 수련



> 앞마당의 향나무

 

> 앞마당에서 본 집 뒤 풍경

 

> 앞마당 소나무

 

> 뒷마당 소품/ 옛 무덤의 향로대로 보이는데, 상당히 품격있어 보이는 게 귀족의 무덤에 있던 것 같다. 박물관장의 엤집에 이런 소품이 있으니 오히려 느낌이 껄끄러워진다.

 

> 뒷뜰의 정원/ 예쁘다.


2. 간송미술관

 

> 사람들이 늘어선 간송미술관

 

 

3. 길상사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지방선거

열린우리당 선거행태가 갈수록 가관이다.

아니면 뒤늦게 커밍아웃!

 

내가 사는 고양시 원당지역에서는

열린우리당 후보들 공약이 '뉴타운 건설'이다.

어제는 우리 집중유세 하는 곳에 와서

성능 좋은 방송차로 연실 방송을 해댄다.

여전히 '개혁세력' '개혁세력' 외치면서 하는 말

 

'원당 주민 여러분! 집값 안 올라 속상하시죠?~~'

 

그래 집값 다 올려라 이놈들아.

그래서 서민 살림살이 다 날려 먹어라 이놈들아.

 

국민소득 2만불을 육박한다는데, 아직도 집 때문에 청춘을, 평생을 꼬박 바친다는 게 말이 되냐 이놈들아.

 

그러다 한 친구가 다가온다.

같은 시민회 회원이기도 한 친구다.

 

'선거가 아니면 함께 해야 될퇸데요. 열심히 하세요.'

 

쓴 웃음이 나온다. 함께 하긴 뭘 함께 해. 선거가 아니면 한대 패주고 싶구만~~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