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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11/21
    네 번째 올레길 사전답사 다녀왔어요(5)
    풀소리
  2. 2009/11/12
    1박 2일(15)
    풀소리
  3. 2009/11/06
    일타홍(一朶紅)과 심희수(沈喜壽)의 사랑이야기(4)
    풀소리

네 번째 올레길 사전답사 다녀왔어요

11월 18일(수요일) 고양올레길 네 번째길을 개척하기 위해 심학산과 파주 출판도시 일원에 다녀왔습니다.

이번 개척길에는 채송화님, 이녀비님, 기냥초이님이 함께 했습니다.

 

당초에는 대화역에서 9707번이나 9701번 버스를 타고 가려고 했습니다.

출발지가 그 버스들 종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녀비님이 승용차를 가져와서 그냥 차로 이동하였습니다.

 

9707번 종점에서 심학산 오르는 길목에는 고속도로 공사를 하고 있었고,

공사가 마무리되지 않아 먼지가 나고 좀 어수선했습니다.

 

산에 오르자 하늘이 화창한 게 느낌이 좋았습니다.

기온이 영하5도로 떨어져 춥다고 해서 걱정을 했는데, 바람이 없어서인지 햇살은 따뜻하기까지 했습니다.

우리는 심학산 등산로 초입에 있는 배수지 정자에서 채송화님이 싸오신 고구마랑 간단한 간식을 먹었습니다.

  

심학산 등산로

 

심학산 등산로는 넓고 평탄했습니다.

원래 군사도로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차량도 다닐 수 있다고 합니다.

 

이제 초겨울이라 단풍은 없지만, 대신 시야가 참 좋았습니다.

심학산은 평야지대 한 가운데 솟아난 봉우리라 사방으로 막힘이 없었습니다.

  

등산로 초반에 보이는 산남리 방향의 벌판/ 시야가 뻥 뚤렸습니다.

 

이쪽은 파주입니다. 왼쪽 교하지구와 오른쪽 운정지구가 완전 아파트 숲으로 변해가고 있었습니다.

  

심학산 능선길/ 저 멀리 보이는 봉우리가 정상입니다.

 

 

심학산은 해발고도가 193.6m라고 합니다.

해발고도는 얼마 안 되어도 벌판에 솟아있어 제법 힘들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가장 길고 완만한 코스로 올라가서인지 가파르다는 느낌이 전혀 없었습니다.

 

우리는 정상을 앞두고 남은 귤을 먹으며 담소를 나눴습니다.

정상에는 정자가 있고, 정자 밑으로도 사방을 구경할 수 있도록 시실이 되어 있었습니다.

북쪽을 보니 한강과 임진강이 합류되는 곳이 보였고, 통일전망대와 그 너머 북한 땅이 훤히 보였습니다.

서쪽으로는 김포평야 넘어 문수산성과 강화도의 여러 산들이 바로 보였습니다.

  

전망대에서 본 북쪽방향/ 강끝이 한강이 임진강과 만나는 곳이고, 강으로 삐져나와 있는 봉우리가 통일전망대입니다. 그리고 인물들을 중심으로 곧바로 멀리 보이는 곳이 북한 개성 땅입니다. 개성 송악산은 사진으로는 안 나왔네요...

 

 

파주 출판도시/ 강쪽으로는 습지가 넓게 발달되어 있네요. 이곳은 재두루미의 월동지라고 합니다.

가장 멀리 희미하게 보이는 산들이 강화도입니다. 시야가 좋은 날이면 훨씬 잘 보일 것 같습니다.

 

고양시 방향. 왼쪽에 보이는 낮은 봉우리가 고봉산이고 그 너머로 북한산이 희미하게 보입니다.

 

출판도시옆 돌곶이 꽃축제장 모습/ 채송화님이 인터체인지 앞에 있는 습지가 매립되었다고 적정하셨는데, 예전에 찍어서 전망대에 전시한 사진을 보면 아직은 아닌 거 같습니다.

 

전망대에 전시해놓은 사진/ 7번이 생태습지인데, 이곳은 아직 변형이 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심학산 정상은 전망이 정말 좋았습니다.

우리들은 오래도록 이곳 저곳을 보고 또 보았습니다.

 

내려오는 길은 배밭 쪽과 서패리 방향 두 곳이었습니다.

우리는 당초 계획했던 배밭 쪽으로 내려왔습니다.

 

 

숲속에서 만난 자작나무의 작은 군락/ 피부가 높은 산처럼 희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반가웠습니다.

 

정상에서 조금 내려온 곳에 있는 이정표

 

 

이정표를 보니 우리가 갔던 능선길 말고도 산 중턱을 이은 둘레길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출발했던 배수지에서 이곳까지 4km 가까이 되네요...

길도 아주 작은 오솔길이었습니다. 거리도 제법 되는 게 한 번 걸을 만 할 것 같습니다.

  

아시아출판문화센터 옆 한옥 서호정사(西湖情舍)

 

 

우리는 배밭으로 내려와 출판단지 쪽 비포장도로로 내려왔습니다.

걷기 좋은 비포장도로인데다 출판단지와 한강이 바로 보여 제법 운치 있는 길입니다.

이쪽으로 내려오면 고양시 쪽 자유로에서 출판단지를 간다면 초입에 해당하는 곳이 나타납니다.

 

우리는 아시아출판문화센터 옆에 있는 한옥을 둘러보았습니다.

이 한옥은 정읍의 김동수씨 작은댁 사랑채를 열화당의 이기웅 사장이 옮겨놓은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서 내로라 하는 건축가들이 저마다 뽑내며 지은 현대건축물들 사이에 있는 한옥은

지금은 주인을 잃어 쓸쓸하지만, 그래도 당당하게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곳에서부터 샛강을 따라 난 도로를 걸어서 출판도시를 가로질렀습니다.

 

 

출판도시를 가로지르는 샛강/ 갈대와 억새가 가득했고, 군데군데 이렇게 샛강을 볼 수 있는 다리가 있습니다.

 

이 샛강에는 원앙을 비롯한 많은 새들과 수서동물들이 살고 있다고 합니다.

 

 샛강 옆으로는 넓은 초지가 있었습니다. 차량이 다니는 길을 그 만큼 샛강에서 밀어낸 것이죠.

저 녹슬은 듯한 다리를 건너면 이체4거리이고, 오른쪽은 헤르만하우스 입구입니다.

 

파주 출판단지는 샛강이 있는 습지를 메워 만든 곳입니다.

이곳은 바닷물이 올라오는 지역이고, 홍수가 나면 아마도 잠겼을 곳일 겁니다.

완전한 육지도, 그렇다도 완전한 하천도 아닌 습지대니 그 식생이 얼마나 풍요로웠을까요.

 

어쨌든 지금 남아 있는 습지라도 잘 보존했으면 좋겠습니다.

  

헤르만하우스/ 왼쪽은 우리 일행입니다. 왼쪽부터 채송화님, 기냥초이님, 이녀비님

/ 가로등도 특수철로 씌어 자연스럽게 꾸몄습니다.

  

헤르만하우스 끝 꽃단지 쪽 하천매립공사장/

자연하천을 그냥 냅두면 좋을 텐데, 토목귀신이 붙었는지 그게 안 되나보네요...

 

 

우리는 헤르만하우스에서 공사중인 곳을 거쳐 점심을 먹기 위해 서패리 콩당보리밥집으로 갔습니다.

공사장을 지나 돌곶이꽃축제를 하는 지역을 지나 마을을 지났습니다.

 

콩당보리밥집

 

 

콩당보리밥집에서 보리밥 2인분, 수제비 2인분과 막걸리 한 동이를 시켜서 맛있게 먹었습니다.

점심을 먹고 근처에서 200번 버스를 타고 돌아왔습니다.

 

이번 답사는 저번에 구상한 길(http://cafe.daum.net/gyolle/G1kl/17)을 따라서 가봤습니다.

그래도 답사를 하고 나니 뭔가 부족한 것 같습니다.

사전답사를 할 적마다 느끼는 건데, 한 번에 제대로 된 길을 개척한다는 것은 정말 힘든 것 같습니다.

조만간 다시 한 번 답사를 가야할 것 같습니다.

 

다음 답사 구상은 따로 글을 적기로 하겠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곳을 겨울코스로 잡았는데, 봄도, 가을도 나름대로 좋을 것 같습니다.

함께 해주신 채송화님, 이녀비님, 기냥초이님 고맙습니다. 

   

고양올레길 찾는 사람들

http://cafe.daum.net/gyol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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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박 2일

1.

 

소비에트가 붕괴되고 나서도

혁명 기념일이 되면 비록 정부의 공식 기념행사는 아니어도

모스크바 붉은광장에는 훈장을 주렁주렁 단 노병들이 혁명을 기념하며 행진을 하였다.

 

작은 텔리비전에 비친 그네들은 그러나 늙고 추레했으며,

주렁주렁 매달린 훈장은 '자랑스러움' 보다는 '안스러움'의 표식처럼 보였다.

 

그들의 행진을 보면서

'언젠가 내가 저 행렬에 있지 않을까' 하는 두려운 상상을 했었다.

더 이상 다가올 희망은 없고, 단지 기념할 추억만 있는 슬픈 노년을...

 

 

2.

 

노동자대회 전야제에 다녀왔다.

정확히 말한다면 전야제 장소에 있는 주점에 다녀왔다.

 

노조를 떠나고 나서 나는

집회에 참석할 '용기'도 '인내'도 함께 잃어버렸다.

그런 나는 될 수 있으면 집회에 참석하지 않는다.

다만 주변을 맴돌 뿐이다.

 

그리고는 스스로를 주변인으로 규정하고,

조그마한 움직임이 주는 작은 반향에 만족하며 살고 있다.

전야제에 가서도 집회보다는 주점에서 옛사람들을 만나고,

그들과 안부를 나누는 것으로 만족했다.

 

 

3.

 

될 수 있음 집에 가고 싶었다.

그래도 무슨 미련이 있었는지, 지방에서 올라온 이들과 함께 잤다.

 

아침을 먹고, 일행들은 청계천 전태일열사 동상에 가 참배를 하겠다고 했다.

나는 일행 중 몇몇과 독립문에서 경교장을 거쳐 광화문, 청계광장을 지나 열사가 계신 곳으로 갔다.

 

청계천은 전날 온 비를 핑계로 굳게 길이 닫혀 있었다.

난 꼭 천변으로 걷고자 한 건 아니었다.

다만 지방에서 온 이들은 말은 안 해도 천변으로 걷고 싶지 않을까 해서 조금 안타까웠다.

 

뚝 윗길도 나름 괜찮았다.

비는 전날 밤처럼 심하지는 않아도 꾸준하게 내렸다.

작은 빗방울에 키작은 이팝나무 노랑 단풍이 하나 둘 떨어졌다.

바닥에는 물에 불어 빛나는 노랑 단풍잎이 참 예뻤다.

 

뚝 담장 위로는 여러 식물들 사이로 구절초와 쑥부쟁이가 꽃을 피우고 있었다.

아마도 누군가가 심어놓은 것이리라.

어쩌면 흔할 수 있고, 그만큼 심었다고 치켜줄 이 없으련만,

이곳에 이런 꽃들을 심은 이가 있다니, 그에게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태일열사 동상/ 그는 여전히 앳된 얼굴을 하고 있었다.

 

 

4.

 

전태일열사 동상에도 처음 갔다.

동상에는 일본 사람들이 와 있었다.

그들은 전진(前進)이라는 제호가 붙은 그들의 기관지를 우리 일행에게 주었다.

오랬만에 들어보는 이름이다.

 

그곳에 머무르니 그래도 사람들이 쉬임없이 왔다.

동상 앞에서 묵념을 하고, 노래를 부르고...

 

지금 세상을 보면서 옛날 가두투쟁 할 때가 생각났다.

집회를 하다 전경들에게 밀리면 뒤돌아 보지 말고 뛰어야 했다.

설령 우리의 숫자가 많아도 모두가 함께 멈춰 서서 반격을 할 수 있다는 믿음이 없으니,

나 혼자는 설 수 없었다.

그러니 다음 집결지까지 뛰어야 했다.

 

지금 우리들은 아파트니 교육이니 취업이니 등등으로 앞만 보고 뛰어야 한다.

혼자서 '아니오'라고 말했다간 혼자만 낙오될 것 같다.

비록 이런 삶에, 이런 사회에 회의를 하지만 말이다.

 

그런데 말이다. 집회에서는 다음 집결지가 있었지만,

지금 우리들에게는 다음 집결지가 어디인가??

 

...

 

 

5.

 

만주벌판을 넘어 시베리아를 달리던 원대한 꿈을 꾸던 마지막 세대였던 우리,

어쩜 우리는 꿈을 잃은 첫 세대가 되었는 지도 모르겠다.

 

이제는 바람에 날리는 먼지처럼 볼품 없이 훝날리는 꿈들이 되었나...

그래도 언젠가 단단히 뭉쳐 굳건한 대지가 될 날이 있겠지...

 

...

 

나는 집회에 참석할 자신이 없어 노동자대회로 향하는 일행을 뒤로 하고 홀로 집으로 왔다.

 

여의도에 모였던 이들의 건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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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타홍(一朶紅)과 심희수(沈喜壽)의 사랑이야기

심희수(沈喜壽 1548∼1622)는 조선 선조 때 좌의정까지 지낸 분이다.

심희수는 명문가에서 태어났지만 3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엄한 어른이 없이 자라서 벗들과 어울려 노는 것이 일상이었다고 한다.

 

어느날 심희수는 역시 벗들과 함께 재상집 연회에 가서 술 마시고 노니면서 기생을 희롱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때 대부분의 기생들은 인상을 찌푸리고 이들을 피하는데, 이날 모인 기생 중 단연 뛰어난 미모와 가무를 겸비한 일타홍은 오히려 심희수의 희롱을 받아주기도 하고, 화장실을 가는 척 하며 후일 만날 것을 약속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일타홍은 약속한대로 심희수를 찾아가 함께 지내게 된다. 이때 심희수의 나이 15세이고, 일타홍의 나이는 분명치 않지만 17세 전후였는가 보다. 심희수는 아직 결혼 전이었고, 이팔청춘에 일타홍과 꿈결같은 나날을 보냈다고 한다.

 

일타홍은 나이는 어리지만 기생으로는 이미 전국적 이름아 나 금산(錦山)에서 서울의 재상집 연회에까지 초대될 정도였다. 그녀는 미모로도 어우야담 등 여러 기록에 남아 있지만, 이미 시(詩)와 가무로도 한 경지에 올라 있었나 보다.

 

그녀의 시 한 수를 보자.

 

長霖 (장림 : 장마) - 취연(翠蓮, 一朶紅)

 

十日長霖若未晴 십일장림약미청

鄕愁蠟蠟夢魂驚 향수납납몽혼경

中山在眼如千里 중산재안여천리

堞然危欄默數程 첩연위난묵수정

 

열흘 긴 장마 개일 기색 없는데

고향 그리워 꿈결에 달려갔다 놀라 깨이네.

옛 동네 눈앞에 아른거리는데 길은 먼 천리

솟은 난간에 팔 괴고 가만히 고향 가는길 헤아려보네.

 

심희수의 무덤(오른쪽)과 일타홍의 제단

 

 

이러한 일타홍이 심희수를 만나 기생 생활을 청산하고 심희수와 살게 된다. 일타홍은 관상도 잘 보았는데, 심희수의 관상이 재상이 될 관상이었다는 설도 있다. 어찌되었든 일타홍은 심희수에게 글공부에 전념할 것을 요구하였다. 심희수는 공부할 것을 결심하고 아버지의 친구이자 이모부인 노수신의 문하에 들어가 공부를 한다.

 

(놀라운 것은 심희수의 어머니다. 명문가의 자제가 결혼도 전에 기생과 함께 사는 것을 허락했으니, 일타홍의 설득이 아무리 주효했다고 해도 어머니의 마음 씀씀이가 참으로 넓고 열려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심희수는 노수신의 동생의 딸과 결혼을 한다. 일설에는 일타홍이 심희수에게 결혼을 할 것을 재촉하였다고 한다.

 

심희수가 정실부인과 혼인을 한 뒤에도 심희수는 일타홍만을 사랑했다고 한다. 이에 일타홍은 심희수에게 5일을 주기로 4일은 정실부인에게 가서 자고 자신과는 하루만 지내기로 약속을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일타홍을 너무나 사랑한 심희수는 이런 약속을 번번이 깨고 밤이면 밤마다 일타홍을 찾았다고 한다.

 

일타홍은 심희수가 자신에게 너무나 빠져 있어 공부에 방해가 될까봐 ‘과거에 급제한 뒤에 나를 찾으라’는 편지를 두고 집을 나왔다고 한다. 이후 심희수는 공부에 더욱 정진해서 21세에 진사시에 급제하고, 25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일타홍과 다시 만난다.

 

그 후 다시 10년이 흘러 심희수는 35세 되던 해에 죄를 얻은 허균의 형 허봉을 두둔하다가 금산(錦山)군수로 좌천된다. 금산은 일타홍의 고향이다. 그런데 일타홍이 금산에서 미미한 병에 걸리더니 고통도 느끼지 않고 숨을 거두었는데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일설에는 자살하였다고 한다.)

 

‘인생의 생사장단은 한가지이며 군자에게 은혜와 사랑을 받아 한이 없다. 낭군의 옆에 뼈가 묻혀 지하에서 다시 만나 모시는 게 소원이다.’

 

그리고 시 한 수를 남겼으니 유명한 상월(賞月-달구경)이라는 절명시이다. 이때 심희수의 나이가 36세이니 일타홍의 나이는 아마도 38세 쯤 되었을 것이다.

 

일타홍과 심희수의 시가 새겨져 있는 일타홍의 제단비석 뒷면

 

 

상월(賞月) - 일타홍(一朶紅)의 절명시

 

靜靜新月最分明 정정신월최분명

一片金光萬古淸 일편금광만고청

無限世間今夜望 무한세간금야망

百年憂樂幾人情 백년우락기인정

 

맑고 고요한 초승달 또렷하기도 한데

한 줄기 달빛은 천년만년 푸르렀겠지.

넓디넓은 세상에 오늘 밤 달을 보며

백년의 즐거움과 슬픔 느끼는 이 몇이나 될까.

 

 

심희수는 일타홍의 시신은 손수 염하여 첩을 귀장하는 예는 없으나 다른 연고를 대어 말미를 얻고 고양의 선영 안에 장사 지냈다. (일설에는 군수직을 사직하고 장례를 치뤘다고 한다.)

 

심희수가 일타홍의 시신을 상여수레(輀車)에 싣고 금강나루에 다다랐을 때 마침 봄비가 내렸다고 한다. 봄비가 부슬부슬 내려 일타홍의 관을 덮은 붉은 명정이 젖는 모습을 보면서 심희수는 시 한 수를 읊는다. 그 시가 유명한 ‘이별눈물(有倬)’이다.

 

이별눈물(有倬) - 沈喜壽

 

一朶芙蓉載柳車 일타부용재유거

香魂何處去躊躇 향혼하처거주저

錦江春雨丹旌濕 금강춘우단정습

疑是佳人別淚餘 의시가인별루여

 

한 떨기 연꽃은 버들상여에 실려 있는데

향기로운 영혼(香魂)은 어딜 가려 머뭇거리나.

비단강(錦江) 봄비에 붉은 명정(銘旌) 젖어드니

아마도 고운 우리 님 이별 눈물인가 보다.

 

 

심희수(沈喜壽 1548∼1622)는 조선 선조 때 좌의정을 지낸 이다.

심희수는 조선개국공신인 심덕부, 세종의 장인이며 영의정을 지낸 심온, 성종 때 영의정 심회가 모두 직계 조상이며, 명종의 비인 인선왕후가 6촌 누나가 되는 그야말로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심희수의 아버지는 심건(沈鍵 1519(중종 14)∼1550(명종 5))인데, 이분 또한 어려서부터 남달리 총명하여 뭇 사람들로부터 기대를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 분은 나의 32세에 충청도 어사로 나갔다가 공주에서 갑자기 사망한다. 이 때 심희수의 나이 불과 3세였다.

 

심희수의 어머니는 광주(廣州) 이씨인데, 이분은 중종 때 조광조와 친분이 두터웠던 유명한 학사(學士) 이연경(李延慶)(1484 - 1548)의 따님이시다.

심희수의 어머니는 다정할 뿐 모질지 못한 성품을 지녔던 것 같다. 심희수가 어려서부터 아버지 없이 커서 공부나 출세에 꿈을 두지 않고 벗들과 휩쓸려 다녔지만, 어머니는 다만 조언만 했지 모질게 대하지 않았다고 한다.

 

심희수가 일타홍을 만나고 나서 일타홍의 권유로 공부에 뜻을 두는데, 이 때 스승으로 모신 이가 노수신(盧守愼 1515∼1590)이다. 노수신은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분으로 심희수의 아버지인 심건과는 동문수학한 벗이며, 동서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노수신은 심희수에게는 이모부이면서 처삼촌이 되기도 하다.

 

심희수는 관직에 있으면서 정여립(鄭汝立 1546 - 1589)의 옥사를 관대히 처분하도록 노력하기도 하였고, 영창대군의 신원을 주장하다 사형을 당하게 된 남인 계열의 저명한 학자 정온(鄭蘊 1569 - 1641)을 구원하기도 하였다. 

 

심희수의 묘는 고양시 덕양구 원흥동 산89번지에 있고, 고양시 사적 37호로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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