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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5/18
    5월항쟁 29주년(5)
    풀소리
  2. 2009/05/17
    부로농원 풍경 0517(4)
    풀소리
  3. 2009/05/15
    장희빈 친정 묘역(5)
    풀소리

5월항쟁 29주년

오늘이 광주항쟁 29주년이 되는 날이다.

1990년대 말, 2000년대 초반을 거치면서

내 마음 속에서도 꽤 많이 멀어졌던 광주다.

 

어찌됐든 당시 참여했던 주체들의 상당수가

정치적으로든 경제적으로든 그들 스로가 선택한 것이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들의 선택이 나의 생각과 다른 것이었더라도 말이다.

 

광주출정가

휴~

2009년 오늘은 참 마음이 묵직하다.

용산이나 박종태 열사가 아니라도 말이다.

수많은 황석영이 아니라도 말이다.

민주노총, 민주노동당, 진보신당이 아니라도 말이다.

 

무엇이 옳은 것인지 많이 혼란스럽기도 하고,

많은 이들이 선택한 것에 대해

'그건 아니요' 라고 말하고 싶지만,

내 스스로 또 다른 역사의 흐름을 만들고자 하는 패기도 이미 내겐 남아 있지 않다.

아니, 혼란스러운 것은 정작 내 스스로가 이미 5월 광주보단 따뜻하고 난만한 봄날씨에 더 기울어져 있기 때문이고,

스스로 그런 '나'를 '직시'하는 '용기'조차 잃어가서일 것이다.

 

그래도 오늘은

광주에서 살아남은 이들이 아니라

죽은 이들,

그래서 변화된 세태에 아무런 개입도 영향을 받을 수 없이

1980년 오늘에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는 이들을

떠올려야 할 것 같다.

세상을 변화시키진 못하더라도, '나' 자신이라도 더 이상 변하지 않게 말이다.

 

날씨는 미치도록 아름답다.

지금 광주 망월동에도 흰 찔레꽃이 흐드러지게 피고 있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과 행복하게 과거를 추억하고, 미래를 벅차게 기대하면서

망월동 찔레꽃 그늘 아래서 술 한잔 마시는 날이

꼭 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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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로농원 풍경 0517

1.

 

요즘은 아카시아꽃이 한창이나.

 

난 오늘 부로농원에서 아카시아꽃 튀김을 해먹고자 했다.

그런데 오늘따라 사람들이 안 모였고,

같이 텃밭농사를 짓는 후배 태하도 어제 과음으로 오늘은 쉴 분위기다.

결국 아카시아꽃 튀김은 포기했다.

 

작년에 아카시아꽃 사진

 

 

대신 열무와 시금치, 얼갈이 배추를 모두 수확하고, 새 씨앗을 심고, 고구마도 싹을 얻어다가 심고,

청경채, 청상추, 적상추, 쑥갓도 채취하고, 돌미나리도 뜯고,

그래도 시간이 남아 주변의 잡초를 제거하는 작업을 했다.

 

 

2.

 

그러다 발견한 놀이는?

 

연못 배수구에서 나오는 물을 논으로 돌리는 급수장치

 

 

새로 개간하는 논에 물을 채우는 급수시설을 만드는 거였다. ㅋ

 

우선 피티병을 밑을 잘라내고, 

헌 작업용 장갑 손가락 부분을 자르고,

호수를 피티병 안으로 넣고 장갑 손가락 부분을 호수에 감아 피티 주등이에 앉히고,

적당히 속이 빈 나무토막을 구해서 배수구에 위와 같이 자리를 잡아주고,

그리고 남은 줄은 논으로~

 

와~ 대성공이다.

정말 이걸 내가 만들었단 말인가!!! ㅋ

 


 



논으로 향하는 호수와 물줄기

 

 

흠...

담주에는 벼를 얻어다가 심어야지~ ㅎ

사실 벼를 얻을 필요도 없겠더라.

주변 논에 모내기를 하고 남은 모판이 여럿 있으니 그냥 가져다 심어도 되겠더라...

안 되나??? ㅎ

 

 

3.

 

그래도 시간이 남았다.

 

그래 꽃사진이나 찍자.

 


꽃봉우리를 막 터트리려는 백작약

 

꽃봉우리도 예쁜 홍작약

 


노랑붓꽃

 

둥굴레꽃망울

 


토끼풀

 

이름을 모르는 꽃

 

 

연못에도 수련이 피었다.

어젠 흰 꽃망울이 닫혀 있었는데, 하루 사이에 피었다.

내 카메라는 성능이 좋지 않아 줌으로 당길 수 없다.

고무보트에 바람을 넣고 노를 저어 가까이 가서 찍었다.



올해 처음 핀 흰 수련꽃

 

 

4.

 

한쪽에선 꽃이 피어나고,

한쪽에선 열매가 또 영글어가고 있다.

매실과 앵두와 보리수는 얼마 안 있으면 먹을 수도 있을 것 같다.

 


하루가 다르게 영글어가는 매실

 


달래 열매

 

 

잠자리도 벌써 나왔다.
하늘색 파스텔색조의 예쁜 실잠자리도 나왔는데, 사진을 찍지 못했다.


잠자리

 

 

그리고 작물들도 풀들도 참 빨리 자라더라.

 

그나저나 아카시아꽃은 담주까지 기다려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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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희빈 친정 묘역

1.

 

장희빈.

비록 개인적으로는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고, 남편이 내리는 사약을 마시고 죽어야 했던 비극의 주인공이지만, 그런만큼 참 매력적인 인물이다. 내겐.

 

언젠가 내가 조선 당쟁에 대한 글을 쓴다면 시작은 광해군 등극, 끝은 장희빈의 죽음으로 하고 싶다.

 

내가 장희빈을 매력적이라고 하지만, 그렇다고 장희빈에 대하여 많이 아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단편적인 지식을 모아보아도 그녀는 결코 악인은 아니었던 거 같다.

적어도 라이벌이었던 인현왕후나 정적이었던 노론보다는 말이다.

 

그녀는 나인으로 궁궐에 들어와 왕비의 위치에까지 오른다.

근엄한 조선시대 사관들이 실록에 그녀를 표현하기를

'자못 얼굴이 아름다웠다.' 고 했단다.

이 표현이 조선왕조실록에 나오는 왕비(후궁 포함)들 얼굴에 대한 유일한 것이기도 하단다.

 

어쨌든 장희빈의 무덤도 장희빈 친정의 무덤도 내가 살고 있는 고양시에 있다.

묘지기행이 취미고, 앞으로 묘지기행을 하면서 글도 쓰고 싶고, 더욱이 당쟁에 관한 글을 쓴다면 장희빈의 죽음을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내겐 그들의 무덤이 고양시에 있다는 것은 내겐 행운이다.

 

 

2.

 

장희빈 친정 무덤은 불광동 은혜초등학교 근처에 있었다고 한다.

항공사진으로 봤을 때 은혜초등학교 자리가 무덤들이 있던 중심자리였던 거 같다.

 

서울이 확장되고, 묘역이 개발되면서 1974년 고양시 고봉산 숯고개 자락으로 이장해왔다.

다행스러운 것은 이장하면서 신도비를 비롯한 석물들도 함께 이장했다는 점이다.

 

장희빈의 아버지 옥산부원군 장경(張烱)의 신도비. 밑돌인 귀부의 길이가 거의 4M 20CM에 이른다. 이 거대한 석물을 1974년 이곳으로 옮겨왔다. 비용도 만만찮았을 터인데 후손들이 고맙다.

 


묘역은 이제 그 앞에 커다란 식당이 들어와 있어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잘 보이지도 않는데다, 그 흔한 안내간판 조차 없어 초행자는 찾기 힘들 것만 같다.

 

장희빈은 옥산부원군 장경(張烱)의 유일한 딸이다. 장희빈의 오빠는 드라마에 거의 왈패로 나오는 장희재다.

 

3.

 

위의 신도비를 먼저 보자.

나는 신도비를 아주 많이 봤다고 자부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제법 본 편이다.

그런데 저렇게 큰 귀부를 본적이 없다.

 

조각 또한 훌륭하다.

돌은 또 어떤가. 세워진 해가 아마도 장희빈이 왕비가 된 1690년일 터인데,

최근에 만들어 놓은 것처럼 마모된 흔적이 거의 없다.

 

사진으로는 잘 못 느끼겠지만, 신도비의 비신(몸돌) 또한 매우 좋은 돌이다.

당시 새겨진 글씨가 지금도 매우 선명하다.

무덤답사를 많이 해본 이들은 알 것이다. 저런 좋은 재질의 돌은 거의 왕릉이 아니면 찾아보기 힘든 돌이다.

 

그런데 비석 몸돌에 비해 귀부가 부자연스러울 만큼 크다.

왜 그럴까?

 

신도비는 비문이 4면을 빼곡이 채우는 게 보통이다.

그런데 장형의 신도비는 비문이 앞면밖에 없다.

그만큼 기록할 것이 별로 없었다는 증거이기도 하고, 장희빈의 가문이 다른 사대부 가문에 비해서 보잘 것 없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비문은 당대 대제학을 지낸 민암이 지었으니 글을 못 지어서 비문이 짧았다고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비문을 기록하는 몸돌을 무작정 키울 수는 없었을 것이다.

대신 귀부를 크게 하여 권위를 실어준 것 같다.

 

 

4.

 

신도비 위로 눈에 보이는 묘역 위에 곡장을 두른 당당한 무덤이 옥산부원군 장경의 무덤이다.

 


저 위에 곡장(담장)에 둘러싸인 무덤이 옥산부원군 장경의 무덤이다. 장경 무덤 뒤로는 장희빈의 증조 할아버지 장수(張壽)의 무덤이 있다. 나중에 우의정에 추증되었다.

 

옥산부원군 무덤에 서있는 문인석. 돌의 재질도 좋고, 조각도 좋은 명품이다.

 

 

전면에서 보면 옥산부원군 무덤 왼쪽 커다란 나무들이 자란 곳으로 들어가면 장희빈의 오빠 장희재의 영혼무덤이 있다.

 


장희재의 영혼무덤. 외로이 홀로 숨어있다. 사형당한 트라우마가 후손들에게까지 대물림 한 것일까?

 

 

장희재(張希載). 그는 무과에 급제하여 동생 장희빈의 후광을 입고 종2품 총융사(摠戎使)에까지 오른다.

그리고 장희빈과 함께 사형을 당하였는데 시신을 미쳐 수습하지 못했는지 이곳에 있는 무덤은 영혼무덤이란다.

 

영혼무덤. 몸이 없는 무덤이다.

과연 그럴까?

나는 상상한다. 실제로는 후손들이 시신을 수습하여 무덤을 만들고는

후환이나 훼손이 두려워 영혼무덤으로 가장했을 거라고...

 

장희빈 친정이 장희빈의 죽음과 함께 완전히 몰락했을 거 같은데, 사실은 그렇지 않았나보다.

정치적으로는 몰락했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경제적으로는 상당한 재력을 가지고 있었던 듯 하다.

장희빈 친정이 당시 재력을 모으기 쉬운 역관 집안이었는데다, 숙종 임금은 무덤을 지키는데다 쓰라고 20결의 토지를 하사했다.

 

결이라는 단위는 넓이 기준이 아니라 토지 생산량을 기준으로 한 단위므로, 가장 넓이가 적은 최고 좋은 토지를 기준으로 할 때 약 3,000평이다. 그러니까 최소한 6만평의 토지를 하사한 것이다.

내가 과문해서인지 몰라도 장희빈과 장희재의 사형 이후 토지를 몰수했다는 기록을 보지 못했다. 그러니 그 후손들은 상당한 재력을 소유했을 것이다.

실제로 묘역은 1974년 이곳으로 이전되기 전까지 불광동에 매우 잘 보존되어 있었다고 한다.

재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예나 지금이나 상당한 재력을 가진 집안이 비록 사형을 당했다고 하나 시신을 수습하지 못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믿기 어려운 일이다.

그러니 이곳이 영혼무덤이 아닌 실제 장희재의 몸이 묻힌 무덤이라고 나는 상상하는 것이다.


 

5.

 

나중에 항공사진을 보니 산 위쪽으로 이 집안의 무덤이 더 있다.

아래 무덤 안내 비석에 15기의 무덤이 있다고 했으니 증조할아버지 장응인(張應仁)을 비롯한 장희빈 친정 무덤이 더 있을 것이다.

 

그부분은 다음 기회에 찾아봐야겠다.

그곳을 가 보면 아마도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장희빈 친정묘역 항공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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