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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시르와 왈츠를

[영화] 바시르와 왈츠를(Waltz with Bashir)

감독 : 아리 폴먼

 

 

1.

기억이란 우리에게 무엇일까?

현재의 나? 아님 과거의 나?

현재든, 과거든 기억이 '나'라면, 잊어진 기억은 또 무엇일까?

 

 

포스터

 

2.

영화감독 아리 폴먼에게

어느날 친구가 자기가 최근 갑자기 계속해 시달리고 있는 악몽에 대해 상담을 요청한다.

 

그 친구는 매일 밤 개 26마리에게 쫒기는 똑같은 악몽에 시달리고 있다고 했다.

 

친구는 기억한다.

1982년 레바논을 침공했던 이스라엘군 일원이었던 자기 자신과

인가 쪽으로부터 그들을 향해 짖어대던 개때들...

 

 

친구의 악몽에 대해 듣고 있는 아리 폴먼(왼쪽)

 

상관은 사람에겐 총질을 못할 것 같은 그에게

개떼를 사살하라고 명령했고, 그는 26마리의 개들을 사살했다고 한다.

 

그는 죽어간 개 한 마리 한마리에 대해 모두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고 했다.

그러나...

그 개들 이외에 생각이 나는 게 없다고 했다.

 

1982년. 친구의 얘기를 들으면서 아리 폴먼은 생각한다.

1982년. 그때 레바논에서 무슨 일이 있었지?

 

 

친구의 악몽 속에 나타나는 개떼

 

그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분명히 레바논에 있었는데, 기억이 나질 않는다.

레바논 침공 기간에 휴가를 나왔던 기억과 휴가나와 있었던 일은 모두 또렸이 기억이 나는데 말이다.

 

 

3.

아리 폴먼은 당황한다.

왜 기억이 나지 않는 거지?

 

1982년 이스라엘은 끊질기게 레바논을 침공했다.

레바논엔 당시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 임시정부가 있었다.

이스라엘에서 쫒겨난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난민촌도 있었다.

 

이스라엘은 PLO를 쫒아내고, 꼭두각시 정권을 세워 시리아의 입김을 제거하려 했다.

앞도적인 군사력으로 무자비하게 침공한 이스라엘.

그들은 계획대로 기독교 팔랑헤당 당수 바시르 제마엘을 대통령으로 세웠다.

그러나 바시르는 임기 시작 하루 전날 암살당한다.

 

 

팔랑헤 민병대에 겁에 질린 채 끌려나오는 팔레스타인 부녀자와 어린 아이

 

분노한 팔랑헤당 민병대는

이스라엘 점령지역에 있는 팔레스타인 난민촌으로 무장을 하고 들어가

젊은이들 뿐만 아니라 노인, 부녀자, 어린아이 할 것 없이 잔인하게 학살을 자행한다.

역사는 최소 800명, 최대 3,000명의 팔레스타인인이 학살되었다고 기록한다.

 

나도 기억한다. 1982년 레바논을.

보도통제 속의 TV 화면은

하늘을 향해 한없이 소총 쏘아대던 PLO 대원들을 비추고 있었다.

그렇게 그들은 레바논 베이르트를 떠났다.

눈물도, 소리도 없이 울부짖으며...

 

 

4.

아리 폴먼은 도대체 1982년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자 한다.

함께 군 생활을 했던 친구들을 하나씩 하나씩 만난다.

대부분의 친구들도 기억은 온전치 않다.

집단 기억 마비다.

그들은 일종의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 증상을 함께 겪고 있었다.

 

그러나 여러 친구들을 만나면서

기억은 깨진 퍼즐처럼 조금씩 조금씩 실체를 들어낸다.

 

벌집이 되어버린 벤츠/ 평범한 일가족은 영문도 모른 채 차량처럼 벌집이 되었다.

 

 

명령에 따른 것이지만 비무장 민간 차량에 무차별 사격을 가하고,

그 차량에는 평범한 일가족이 타고 있다가 영문도 모르고 죽어가고...

 

팔랑헤 민병대가 난민촌에서 학살을 자행하고 있을 때

외곽을 봉쇄하고 조명탄을 쏘아올리며 학살을 도왔던 어린 병사 아리 폴먼이

거기에 있었다...

 

누가 바시르와 왈츠를 추었나?

누가 바시르에게 왈츠를 추게했나?

 

스스로가 나찌가 되어버린 유대인의 나라 이스라엘...

국가의 명령이라는 이유로 무감각하게 나찌와 같은 만행에 동참했던 어린 병사들...

 

 

기억이 변형되었어도

 

 

기억이 없어졌어도 비극은 사라지지 않는다.

 

 

5.

이 영화는 애니메이션 다큐멘터리다.

영화 속 주인공이기도 한 아리 폴먼은 이 영화의 감독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자신의 실제 경험을 영화화 한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은 실제 영상으로 처리했다.

그 부분부턴 말하자면 애니메이션이 사라져버린 말 그대로 다큐멘터리다.

되살아난 기억처럼 말이다.

 

잊지말아야 할 기억이 날 것으로 강렬하게 밀려온다.

마지막 영상은 바로 그날 레바논 난민촌 학살의 현장에 대한 기록이다.

여인의, 아이의 참혹한 주검이 켜켜히 쌓여있다...

 

 

오직 평화가 깃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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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2 - 어리석음이...

남은 이들에게 보내는 위로2 - 어리석음이 앎의 최고 형태입니다. 1. 논어는 총 20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중 공야장은 제5편이다. 논어의 핵심은 주로 앞 10편이라고 하니 공야장도 핵심 중 하나이다. 공야장 20장엔 이런 말이 있다. 子曰 甯武子邦有道則知하고 邦無道則愚하니 其知는 可及也어니와 其愚는 不可及也니라 영무자는 나라에 도(道)가 있으면 지혜로웠고 나라에 도가 없으면 어리석었다. 그 지혜로움은 따를 수 있지만 그 어리석음은 따를 수 없다. 나는 이 대목을 공부할 때 도대체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물론 나의 공부가 간신히 진도를 따라가는 정도였기 때문에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일 수도 있었겠다. 어쨌거나 신영복 선생은 자신의 책 [강의]에서 이 대목을 인용하면서 소제목을 '어리석음이 앎의 최고 형태입니다.' 라고 붙였다. 뜻을 새기고 다시 읽으니 신영복 선생의 소제목이 너무나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2. 영무자는 춘추시대 위나라 대부였다. 위나라 문공시절엔 정치가 잘 이루어졌었다.(도가 있음) 이 때 세상(딴 나라) 사람들은 영무자 대부가 있는지조차 잘 몰랐다. 그러나 문공이 죽고 그 아들 성공(成公)이 임금이 되어서는 정치를 잘 못해(도가 없음) 진나라에 의해 성공이 임금 자리에서 쫒겨나는 신세가 되었다. 성공은 포로가 되기도 하고, 망명을 하기도 했다. 그때 항상 옆에 있었던 사람이 영무자였다. 영무자의 천신만고 노력 끝에 성공은 다시 위나라 임금으로 복귀하게 되었다. 공자가 이 일을 가지고 위와 같이 말한 것이다. 3. 평화롭고 정치가 훌륭한 시기엔 누구나 재능만 꽃피우면 된다. 그러나 나라가 망하거나 희망이 안 보이는 시절엔 대부분 재능있는 이들은 뜻을 굽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재능을 쓴다. 반면 그 재능을 자기 자신만이 아니라 나라를 위해서, 또는 희망을 위해서 오로지 쏟는 이들도 드믈지만 있다. 영무자처럼 말이다. 세상 사람들은 이런 이들을 어리석다고 여기기도 한다. 좋고 나쁨을 떠나 이러한 어리석음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내게 단파 라디오 하나만 있었으면 나도 변절하지 않았을 거" 라는 세칭 조선의 천재 이광수의 초라한 변명을 보라. 이른바 전국적인 천재의 두뇌로도 따를 수 없는 것이 공자가 말한 '어리석음'이다. 우리는 지금 희망이 보이지 않는 사회에 살고 있다. 더욱이 희망을 만들어 나갈 핵심 조직인 민주노총이 희망을 만들어 나가기 보단 자기혁신을 해야 할 대상이 되었다는 것도 우리의 현실이다. 그럼에도 자신의 몸과 마음을 깎아가며, 견디면서 희망을 만들고자 하는 이들이 있다. 그들에게 조그만 위로의 글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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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의 2008년 마무리 인사

고난을 피할 길은 없다. 우리는 이제 경건한 마음으로 가난한 날들을 맞아야 한다. 2009년을 기다리며 김훈 김훈의 2008년 마무리 인사 영풍문고에 들렸다가 소설코너에 있는 김훈의 인사를 봤다. 옆에 있는 다른 이와 다르게 김훈은 영풍문고의 의도와 다르게 힘들 우리의 미래를 얘기했다. 시대의 아품과 함께 아파하고, 그 속에서 시대정신을 찾아나가는 게 작가라면 당연히 해야 할 것 같은 말들을 옆에 있는 작가는 외면했다. 물론 김훈의 말에 모두 공감하는 건 아니다. 우리가 맞아야 할 것이 단순한 '가난'이라면, 우리가 소속돼 있는 사회 구성원 모두가 함께 해야 할 가난이라면, 나도 경건하게 맞을 것이며, 주변에도 그렇게 권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맞이해야 할 가난은 그냥 '가난'이 아니라 '희망을 상실한 가난'이다. 그렇다면 경건 이상의 무엇을 해야 하는 것 아닐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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