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72

유럽 정부들은 국회에서 등장하는 자유주의적 궤변이나 거리에서 일으키는 사회주의적 시위는 꽤나 양보하는 척 용납해도 병역 거부나 군비로 쓰일 세금 납부를 거부하는 태도는 절대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병역거부야말로 모든 지배의 폭력적인 성격을 노골화하는 피지배자 해방의 첩경이기 때문이다. 군사 존폐의 문제를 지배자들의 의지에 맡긴다면 전쟁은 더욱 끔찍해지지 끝날 리가 없다. 전쟁을 없애려면 지배자에 대한 공포나 지배자들이 제시하는 이득 몇 푼 때문에 살인자의 대오에 몸을 팔아 자신의 자유와 존엄성을 스스로 짓밟는 자들이 사회의 지탄을 받는 동시에, 모든 박해에도 불구하고 병역거부의 길로 가는 사람들이 선각자의 대접을 받아야 한다!

<평화 회의와 관련해서>, 1899, 톨스토이

 

 p81-83

대회가 개막되자 의장은 개회사에서 플레하노프와 가타야마를 가리켜 "정부들끼리 전쟁을 해도 적국의 사회주의자들은 서로 동지애를 갖고 전세계 무산계급의 평화 지향성을 보여준다" 고 운을 뗐다. ... 바로 다음날 '숙적 러일'의 사회주의 지도자들이 악수, 포옹하는 사진은 전세계의 뉴스거리가 되었다. 이 역사적인 제스처는 지배자들이 일으킨 애국주의와 인종주의의 불길에 찬물을 끼얹었다. 그리고 '평화에의 희망'으로서 사회주의의 의미가 새롭게 부각되었다. 후진 자본주의 국가 러시아와 일본의 민중이 '국가'의 테두리를 벗어나 자아의식을 가진 독자적 계급으로 자리를 잡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그러나 순간의 영광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로부터 10년후 ...  프랑스 사회당 상층부와 밀착했던 플레하노프도 '대세'에 밀려 프랑스 러시아 등 연합국 편을 듦으로써 혁명가로서의 위상을 실추했다. 일제 당국의 박해를 견디지 못해 1914년에 도미한 가타야마는 끝까지 국제주의의 명분에 충실했지만 결국 레닌의 코민테른에 합류해 말년에는 모스크바에서 편안하게 지내면서 스탈린 독재 체제에 눈을 감았다. ... 두 주역, 플레하노프와 가타야마가 사회주의의 이상을 완벽하게 지키지 못한 것은 주어진 시대와 상황에서의 인간의 한계를 잘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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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24 15:56 2009/12/24 15: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