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노동하는 섹슈얼리티

 

사람이 많은 주말, 큰 서점에 가면 없던 용기도 생긴다. 며칠 전 교보문고에 갔다. 요즘은 또 어떤 책이 나왔는지 두리번 거다가 몇권의 재미있어보이는 책을 잡고 바닥에 쪼그려앉았다. 사고 싶은 책을 마음껏 살수만 있다면 몰라도, 돈없으면 이렇게라도 신간을 봐야지. 하긴 신간이라고 하기엔 두달 쯤 된 책이다;;

 

 

<노동하는 섹슈얼리티>는 제목으로 어느 정도 짐작이 가겠지만, 성매매(혹은 성노동)에 관한 책이다. 조금 특이한 점을 꼽자면, 서구 페미니즘이 넘쳐나는 이 때에 '일본' 책이라는 것이고, 그리고 성노동에 관한 논쟁과 성매매가 일어나게 되는 사회구조적 원인(이론적인)을 잘 설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세미나 용으로도 괜찮을 듯 하다. 뒷부분에는 일본에 들어온 이주 성매매 여성(타이인)들에 대한 이야기도 있다. 여러 저자들의 논문을 묶어놓은 형식의 책이라 그런지, 상당히 겹치는 부분이 많아서 뒤로 갈수록 후다닥 읽었다. 사실 다리가 저려서 뒤에는 다 읽지를 못했다.

 

 

성매매/성노동과 관련된 지금까지의 논쟁은 이분법적 구도를 띄고 있었다. 전자는 성매매=성노예 이므로 금지하여야 하고, 성매매 종사 여성들은 모두 피해자라는 급진주의 페미니즘의 입장, 후자는 그녀들은 수동적인 피해자가 아니며 그녀들의 일을 성노동으로서 인정하고 노동자로서의 권리를 부여해야 한다는 입장. 전자는 탈성매매운동을, 후자는 성노동자운동을 벌여나가고 있다. 표면적으로는 둘다 '성매매여성' (아직 고민이 완전하게 정리되지 않아서, 성매매라고 일단은.) 을 위한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후자의 입장에서도 이른바 인신매매나 강제적 성매매에 대해서는 반대하고 있다.

 

 

사실 내가 성노동자운동을 처음에 접할때는 성노동=성매매 합법화의 논리로 이어질 우려가 있어 반감이 상당히 있었다. 성매매 여성들의 참담한 현실에 대한 글들을 너무나 많이 접했던지라, 정말로 감정적인 거부가 컸던 듯하다. 뭐 어쨌든 민성노련이라는 조직이 출범하고 한국에서도 성노동자 운동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여성주의 내부에서도 성매매/성노동 논쟁이 핫이슈가 되었다.

 

 이 책에서 주장하는 바, 그리고 내가 공감하는 바, 자본주의 내에서 성매매 여성들에게 성매매가 아닌 다른 '대안적인 직업'을 제시할 수 있다는 것이 어불성설인것 같다. 전반적인 사회구조가 변하지 않는 이상, 결혼제도(가족)나 성매매 모두 여성을 억압하는 하나의 제도임에 틀림 없다. 이것을 부르주아 정부가 강제로 금지시키는 법률을 발효시킨다고 한들, 일시적이고도 기만적인 것에 불과하다. 그리고 사실 노동이냐 아니냐의 부분은 성노동자 운동에서 핵심적인 것은 아니다. 그녀들은 그 어떤 이유를 차치하고 "현실적인 이유"-노동자로서의 권리획득을 통한 생존권 보장-때문에 성노동자 운동을 꾸리고 있는 것이니까. 그렇다고 한다면, 성노동자운동의 생존권적 투쟁을 지지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물론 지금 현재 성노동자운동(을 이끌어가는 지도부)과 그 방향성에는 많은 문제가 보이는 듯하다. 이 방향성을 어떻게 만들어갈것인가가 앞으로 핵심적인 문제가 될 것이다. 간단히 말해 합법화/공창제 등의 마초적이고도 포주들의 이익에 부합하는 논리로 가지 않고, 또한 이 운동이 나아가 부르주아 정부와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저항이 되려면 말이다.

 

비판과 지지, 둘 다 함께 생각해야할 일이겠다. 예전에 성매매 여성들의 수기나 경험 위주로 된 책이나 이런것들만 보다가, 이론적인 책을 보니까 좀 더 다른 고민들이 많이 드는 것 같다. 책을 많이 읽어야지.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그녀들의 反역사 여공 1970


 

-  드디어 다 읽었다. 솔직히 말해 800 쪽에 달하는 두꺼운 책은 또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하하. 역시 책을 읽는 것이든, 읽고 생각하고 또 글을 쓰는 것이든 상당한 인내심과 노력을 요한다. 필자는 서강대 교수 김원이라는 사람이다. 이 책으로 첫번째 김진균상을 수상했다는 것 이외에는 아는 바가 전혀 없다. 김원씨는 산업화 시기 여성노동자의 역사를 추적하는데 '계보학'과 '미시사'라는 방법을 사용한다. 사실 나는 계보학에 대해서 거의 접해보지 않아서, 이런 방식이 낯설고도 재미있었다. 기존의 담론과 연구들을 파헤치면서 지금까지 배제되어온 역사적 사실을 재평가하고 발견한다. 식모 담론에 대한 검토, 기숙사나 소모임을 통한 여성노동자들의 자매애 형성 과정, 등등등 그리고 지배적인 담론에 가려져있던 여성노동자 내부의 차이와 균열. 그녀들의 문화, 가치관, 정치성 등 다양한 주제에 대한 풍부한 자료가 돋보이는 책이었다. 일일이 열거하기는 너무도 많다.

 

-  이 책은 산업화 시기 여성 노동운동에 대한 지배적 해석에 비판의 날을 세운다. 그동안 여성노동운동은 '조합주의' '경제주의' 이상으로 평가되지 못했다. 나 역시도 지배적인 해석에 의문을 품기보다는 당연한 한계 정도로 사고 해왔던 것 같다.

 당시 한국노총을 비롯한 어용노조가 남성인데 반해, 여성노동자들을 중심으로 민주노조를 세운 것에 대해, 기존의 노동사가들은 가족부양의 부담이 없던 미혼이라던가 단순함, 순수성을 이유로 보는 등의 전형적인 남성주의적 시각을 드러내왔다. 또, 작업장에서 여성노동자에게 폭력을 가했던 남성노동자들에 대해 '사측의 사주'로만 해석하고 있는 것도 그러하다. 여성사업장에서의 여성노동자 개인 혹은 집단에 대한 성폭행 위협과 남성중심주의 문화에 의한 통제 등 "성적 통제"는 자본의 보편적인 통제양식이었다. 그럼에도 남성노동운동가들과 노동사가들은 이를 성문제와는 무관한 것으로 사고해왔다. 

 이런 비판들은 상당히 유의미한 지적이라고 생각된다. 또 사회화에 따른 성별 특성-관계지향적-이 작용한 결과이기도 하지만, 여성노조가 가졌던 노동자 민주주의와, 소모임 활동 등 일상에서부터 파고든 탄탄한 현장권력의 기반 등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 한편 이런 방법은 상당한 기본 지식과 자기 관점이 있어야 제대로 평가를 내릴 수 있다. 정말이지 여성노동자 연구에 관련된 수많은 학자들의 이름이 거론되는 것만으로도 벅차다. 그 중에서도 <한국 노동계급의 형성>의 저자인 구해근씨와, <끝나지 않은 시다의 노래>의 저자 전순옥씨에 대한 비판이 있었다. 예를 들어 여공들이 농촌을 떠나 공장으로 오는 것이 '가족을 위한 희생'이었다고 보는 것을 필자는 '희생양-수동적 주체' 담론이라고 비판하며, 오히려 여성노동자들의 정체성 내부를 들여다보면 가족에 대한 지원보다는 개인으로서의 자립과 독립성이 존재했다고 주장한다. 구해근씨는 여성노동자들이 어려운 노동환경 속에서도 버틸 수 있었던 힘을 강고한 가족윤리로 바라보는데 비해, 이 책의 필자는 그러한 담론은 만들어진 것에 불과했고, 궁극적으로 여성노동자들이 장시간 노동을 인내할 수 있었던 이유는 자신의 벌이를 통한 경제적 조건의 개선과 교육 등 자아실현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전순옥씨의 경우는 서구 페미니즘의 제 3세계 여성노동자에 대한 시각-희생자로 개념화-을 비판하면서 여성노동자들의 자율성-헌신적 투쟁과 민주노조운영방식-을 강조하고는 있지만, 그녀의 책에는 남성노동자와 여성노동자 간의 적대적 관계가 빠져있다고 비판한다. 산업발전->계급형성->계급투쟁->계급의식고양->역사진보 라는 고정된 가부장적 도식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1970년대 노조운영에서 남성 지배란 요인을 간과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필자는 '민주 대 어용'의 이분법적 구도가 남성노동자의 문제라던가 교회 및 지식인과 노조와의 관계 등 다양한 균열을 은폐하고, 운동의 주체인 여성노동자들을 중성적 투사의 이미지로 형상화하면서 민주노조운동 일반을 무오류의 신화로 만들어 냈다고 비판한다. 구해근 식의 노동사 서술은 긍정적인 내러티브만을 강조하여, 노동운동의 신화 혹은 민주화운동과 노동운동의 동맹이라는 특정만을 특권화 시킨다는 것이다. 반대로 필자는 동일방직이나 청계천피복노조 등 구체적 사례를 들어가며, 지식인 또는 산업선교회와의 결합과정이 낳은 한계와 노조 내부의 균열을 강조한다.

 

  이런 비판 지점들에 있어서 좀 더 고민을 해봐야겠지만, 동의하기 어려웠다. 미시사나 일상사 자체에 대한 비판적인 생각도 있고. 남성 대 여성의 대립구조를 중심으로 놓는 것이라던가, 내부의 차이를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전체적인 틀을 보지 못한다던지, 정치성에 대한 자의적인 판단들이나 노조의 역할에 대한 것들도. 궁극적으로는 계급과 계급투쟁에 대한 관점의 차이에서 기인하는 것이라고 본다.

 

- 마지막으로 언급하고 싶은 몇 가지. 이 책의 현재성을 찾을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민주노조를 '동지' 관계이자 '무성화된 가부장적 유사가족'으로 서술한 것에 대한 비판 부분. 이런 식의 운동 주체 담론은 여성들을 '동지'라는 집단적 주체로 복속시키는 동시에 여성의 성차만을 제거하는 방식으로 구성된다. 이 점에서 동지적 관계로서 민주노조에서 집단적 주체의 상상적 구조는 표면적인 젠더 중립성에도 불구하고 결국 여성적 차이를 무화시키고 오히려 젠더 경계를 재구축해왔다.

  그리고 현재 여성노동자를 배제하는 지배적 담론과 지식의 기원을 1970년대 여성노동자로부터 탐색할 수 있다. 1970년대 민주노조 운동 이후에도 1987년 그리고 전노협 시기에도 여성 노동자들은 운동의 중심 주체가 아니라 주변부 혹은 부차적인 주체로 간주되어 왔다. 특히 97년 이후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의 일부로 합리화 되었다. 현대차 비정규직 여성노동자 집단해고 사건과 같이 말이다.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의 남성편향적 성격과 이 속에서 국가 자본과 손을 맞잡은 남성중심적 노조 사이에는 여성노동에 대한 '암묵적 배제'가 형성되어 있다. 이러한 지배적 담론은 이미 발전주의 시기에서부터 형성된 것으로, 그러한 노동자 주체형성의 다론, 기제, 매커니즘의 기원이 구조조정 시기에 어떻게 다시 반복되는가와 관련해서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다시

그의 닥달(?)에 못이겨 블로그를 다시 열었다. 모두 비공개로 해놓은 글들을 보면서 안지우길 잘했구나, 짧은 생각이 스쳤다. 힘들었던 환경들과 단절하고 싶은 마음만으로는 다시 출발할 수 없을테니까. 힘들었던 나도, 자랑스러웠던 나도, 숨기고 싶은 나도, 모든 것이 나의 흔적이고, 언젠가 딛고 올라갈 거대한 벽이기도 하다.

 

어쨌든 그는 내가 공부 많이 해서 이 곳에 차곡차곡 쌓아두길 바라는 것 같다. 난 귀찮아서 싸이에 대충 때우려 했지만, 뭐 결국 그의 말이 맞는 것 같다. 이렇게라도 진보넷 블로그에 한번씩 더 들어오고, 다른 사람들의 생각과 글을 보면, 나와 세상의 통로가 다시 열리는 셈이니까 말이다. 벌써 그렇게 세달이라는 시간이 흐르고. 사실 내 감각은 점점 무뎌지고 있다. 사상과 신념은 실천 속에서, 논쟁 속에서, 조금씩 날카로워지고 또 강해지는 것이기에, 나도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조금씩 무뎌지고 있다. 그도 이런 점을 걱정하는 것이겠지만.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그럴지도 모르지

...그럴지도 모르지, 그렇겠지.

그런 끝도 없는 상상은 싫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버티고 있는 사람에게 문제는 언제든지 나의 신경을 곤두세울 선인장의 가시다

품안에 있는 선인장은 조금만 운신을 잘못해도 예민하게 온몸을 찔러댄다 

가시 하나하나가 여전히 빤히 고개를 쳐들고 응시하고 있으니 피할 수 없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

 잊을 수 없는 것. 결코 잊을 수 없는 나의 아픈 과거. 그는 변하지 않았다. 전혀 변하지 않았다. 나에게 상처를 준 시간만큼, 또다시 가해를 저질렀음을, 나는 오늘 다시 알게 되었다. 난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걸까? 아니면 이건 진짜일까? 막상 그 애가 저지른 짓을 듣고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내가 고통받았던 시간들이 단지 나만의 것이 아니었음을 알게 되었는데. 내가 지금 흘리는 눈물은 무슨 의미인걸까. 그래도 한때나마 달라질거라고 품었던 희망이 무너지는 건지. 아니면 인간이 변하지 않음을 느끼고 한탄하는 건지. 미칠 듯한 기분이다. 미칠 것 같다. 그 애로 인해 날려버린 내 대학생활과 내 인생을 미친듯이 부정하고 싶다. 미친듯이.....

 그리고 또 왜 나에게 계속 이런 일이 반복되고 있는 건지 나는 알 수가 없다. 왜 자꾸 내가 가장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가치가 부정되는 일이 반복되고 있는 건지. 왜 나에게만. 왜 나에게만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난 정말 죽고. 싶다.

 2년전과 지금은 달라진게 없다. 징그럽도록 똑같다. 상황은 사람들은 모두 내편이 아니다. 곱지 않은 시선과 감정 따위로 얼그러진 모든 것들이 똑같다. 똑같다. 정말이지 벗어나고 싶다. 왜 내 사생활이 그따위로 왜곡되고 짓밟혀야 하는지. 그럼에도 난 사과조차 받을 수 없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다. 이런 상황에서 나는 꿋꿋이 이어나갈 수가 없다. 나는 정말 없다. 더 이상은....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왜 이렇게

 무엇 하나 제대로 되는 것이 없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힘만 빠진다. "유독 너에게만"이라고 했던 그 말이 맞아떨어진 것처럼 재수가 옴붙은 것처럼. 자꾸 스스로에게 낙인을 찍고, 어쩔 수 없는 것마냥 힘이 빠지고 있다.

 근 한달을 고심해서 단 1분만에 집에다 메일을 보내버린 걸 보면 나는 참 성의없는 인간이다. 나의 성의없음 때문인지 자신이 원하는 결과가 아니기 때문인지 아버지가 분노하고 있지만. 설득할 힘도 대답할 힘도 나질 않는다. 될 대로 되라지. 날 더러 어쩌라는 거야.

 작은 시선조차도 민감하게 느껴진다. 넌 왜 날 보고 있지, 왜 그런 눈으로 보는 거지,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 뭐 때문인데. 피해의식에 사로잡혀서 멍하니 땅만 쳐다보다가. 할 말도 의욕도 사라졌다. 열심히 해도 의미가 없다는게, 그 한마디가 나를 털썩 주저앉게 하였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North Country

영어 자막에 보기 힘들었지만 어쨌든 집착하면서 다봤다. 한국 개봉날짜가 확정되지도 않아서 기다리긴 넘 궁금했다. 개봉하면 다시 한번 봐야겠다.

 

 몬스터의 주인공 샤를리즈 테론이 주연을 맡은 는 직장내 성희롱에 대한 미국내 첫번째 소송이라고 전해지는 1984년도의 '젠슨 대 에벨레스 광산(Jenson vs. Eveleth Mines)' 케이스를 영화로 만든거라고 한다.

 

 두 아이를 키우기 위해, 돈을 벌기 위해 광산 노동자가 된 조시가 처음으로 겪는 관문은 소위 '밑' 검사이다. 그게 시작이었다. 광산에서의 일은 남성이 되길 요구했고, 그보다 더 힘들었던 건 주변 남성 노동자들로부터 매일같이 듣는 모욕적인 성희롱이었다. 입만 열면 나오는 여성비하적 욕설들. 그리고 그녀가 불만을 갖고 입을 열면 열수록 거세지는 보복들. 해고의 위협들...너무도 끔찍했다. 벽에 그려진 오랄 섹스 장면과 한 여성 노동자의 락커 안에 뿌려진 정액, 도시락 안에 들어있던 성기 모양의 물체......비난을 퍼붓는 남성노동자들. 그러나 그의 아들도, 그의 아버지도, 그녀의 편이 아니었다. 세상은 모두 그녀를 비난하고 있었다.

 

 그러나 더욱 끔찍했던 것은 소송과정이었다. 아들의 아빠가 누구인지, 숱한 남자들과 부적절한 관계를 가져왔지 않냐고 묻는 법정에서의 폭력적 상황들. 심지어 그녀가 고등학교 선생으로부터 강간당한 것조차 부인되며 '성적 관계'의 증거로 제출되는 상황이 정말 보기 힘들었다. 남성 동료들로부터 겪은 성희롱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문제가 계속 이야기 되고 있었다.

 

 이 영화는 한국 영화, <<단지 그대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를 떠올리게 했다. 80년대 반성폭력 운동을 유발시켰던 많은 사건들이 있었지만 그 중에서 강간을 당할뻔한 여성이 혀를 깨물어 논란이 된 '변월수 사건'을 영화로 만든 것이다. 이 영화에서도 똑같은 상황이 반복된다. 피해자의 성경험 여부와 피해자의 성격, 인간관계까지 들먹이며 성폭력을 부인하려는 그 상황 말이다. 아, <<피고인>>도 있다.

 

 아마도 세계 곳곳에서 수많은 여성들이 그런 과정을 겪었을 것이다. 그리고 또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너는 성경험이 있어, 너는 성적으로 문란해, 니가 남자를 먼저 유혹한 거야, 니 옷차림이 문제야, 니가 조심하고 다녔어야지.......그러니 넌 성폭력 피해자가 아니야." 라고.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뮌헨

 

 

-집에 틀어박혀 뮌헨을 봤다. 여러 사람들의 평대로 스필버그가 시온주의자에서 휴머니스트로 돌변한 느낌이 드는 뮌헨. "폭력은 폭력을, 피는 피를 부른다."는 내용이 이 영화의 핵심인듯하다. 그러나 중립이란 있을 수가 없다.  또한 뮌헨의 저변에 깔려 있는 것은 여전히 '가족주의'이다.

 스필버그로서는 용기를 낸 영화일지 몰라도. 적어도 이 문제나 스필버그 영화에 관점이 있는 사람이라면 만족시켜줄 영화는 아닌듯 하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또 누군가를

괴롭히고 있는 것 같다.

 

나를 위해서

누군가를 괴롭히는 걸까.

 

그런 위치가 있다고

합리화하는 걸까.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