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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 하나,

겨우 하나,

반쪽자리 아르바이트를 구했다.

 

난 정말 사회경험이 부족해서 문제다.

 

물건 값도 못깎고

광고전화도 붙들고만 있고

조그만 일에

전전긍긍.

 

하루종일 난리 법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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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꼭 "어머님" 일까?

오랜만에 일다에 들어가 기사를 몇 개 보다가

노동운동 코너에서 못보고 지나쳤던 한 기사를 보니

며칠 전 발끈 하던 일이 생각 나 퍼온다.

 

사건의 발단은 내가 모 매체에서 '청소 용역 아주머니'를 비롯해

여성노동자를 '아주머니'로 표현한 것을 무려 3번 본 것에서 출발.

 

한동안 잊고 있었던 수많은 매체와 유인물 속의 '아주머니' '어머님'

등등이 다시금 떠올랐던 것이다.

 

"우리 조합원 아줌마들이.." (모 시설관리 위원장의 말)

"5공장 아주머니들의 단식투쟁"(모 사내하청 유인물)

 

몇년전 학내에서 시설관리 투쟁을 할때마다

다른 학생단위에서는 개인적으로는 물론이고 공식적인 집회에서조차

꼭 '어머님'이라고 불렀다.

정작 그들은 학내에서 여성주의적 실천을 선도적으로 한다는 이들이었다.

 

그들은 '동지'라고 부르라는 우리의 제기를 우습게 봤겠지만

나는 '동지'라고 부르는 것이

누군가의 '어머니'나 결혼한 '아주머니'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함께 어깨걸고 투쟁할 사람이라는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고 생각했다.

 

아주 작은 단어 하나지만,

그 단어 속에는 온갖 반여성적 사회 관행, 그리고 편견들이 녹아있다.

 

덧/ 아직도 잊을 수 없는, 모 글에서 본 글귀,

도대체 "비정규직 운동의 처녀지"가 뭐냐구 !!

 



왜 “어머님”일까
     
최저임금집회에 참가한 청소용역 여성노동자들

혜영 기자
2005-07-04 22:09:46

<필자 혜영님은 전국여성노조에서 상근활동가로 일하고 있습니다. - 편집자 주>


호칭은 나와 상대와의 관계를 드러낸다. 그래서 우리는 호칭을 선택적으로 사용한다. 특히 공식적인 자리에서 붙이는 호칭이나 잘 모르는 사람을 최대한 높이는 호칭 등은 더 까다롭게 선택된다. 자칫 실수라도 하게 되면 상대방에게 무례를 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평소 고민하지 않던 호칭에 대해 머리를 굴리게 된 이유는 노동운동 및 집회에서 사용되는 호칭에 문제의식을 느꼈기 때문이다.

“노동형제” vs “어머님”

6월 말은 최저임금 결정을 앞두고 최저임금 관련 집회와 활동이 집중되는 시기다. 올해도 어김없이 6월 27일 밤에 최저임금위원회 앞에서 대규모 집회가 열렸다. 민주노총, 한국노총 조합원을 비롯해서 많은 청소용역 여성노동자들이 집회에 참가했다.

딱 최저임금액 만큼의 임금을 받고 일하는 청소용역 여성노동자들. 집회에 참가해서 자신들의 현실을 이야기하고 당당하게 요구를 밝히는 그들은 멋졌다. 그들은 하루 일과(청소)를 마치고 밤 집회를 참석하기 위해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그 자리에 왔다. 다음날 일을 하기 위해 새벽에 다시 일터로 가야 한다. 최저임금 당사자로서 정당한 일한 대가를 쟁취하고자 하는 이들의 의지와 투쟁에 대한 열정에 대해 집회에 참가한 모든 이들이 공감했을 터다.

집회에서 사회자는 이 훌륭한 “우리의 어머님”들께 박수와 존경의 표시를 했다. 바로 “노동형제들의 어머님”들에게 말이다. 물론 이들의 연배가 적게는 40세, 많게는 60~70세에 이르니 사회자는 조심스러웠을 것이며 공경의 표시도 하고 싶었을 것이다. 즉, 사회자가 “어머님”이란 호칭을 함부로 선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왜 “여성노동자”도 “청소용역 노동자”도 아니고 “어머님”일까?

노동운동의 주체로 인정하지 않아

많은 40~60대의 여성들은 누군가의 ‘어머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참석한 “청소용역 여성노동자”들 다수도 누군가의 어머니다. 그러나 이들은 집회에 참석한 “그들의 어머님”이 아니다. 누군가의 ‘어머니’로서 그 자리에 참석한 것도 아니다. ‘어머니가 아닌’ 여성들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집회에서 이들은 모두 “어머님”으로 통칭됐다.

노동자의 단결을 외치며 “노동형제”를 부르짖다가도 투쟁의 현장에서 일하며 여성으로서 권리를 외치는 여성들을 “어머님”이라 칭하는 태도. 이것이 노동운동의 현실이다. “노동형제” 들은 눈에는 아직도 일하는 여성, 자신의 권리를 찾아 투쟁하는 여성이 잘 보이지 않는 모양이다.

한편 “어머님”의 외침 속에는 어머니에 대한 노동형제들의 애틋한 감정이 담겨있는 듯하다. 평생 자신보다 가족들을 위해 헌신해 온 우리 어머니는 자식들에게 가슴 뭉클한 감동을 주는 존재다. 효도 받으며 그간 고된 생을 보상 받아야 할 어머니들이 험한(?) 일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가슴이 시려올 것이다. 그래서 “어머님”에게 보내는 함성과 박수 속에 “노동형제”들의 애틋한 마음이 스며있다. 어머니를 외치며 달려가는 군인들의 모습을 그려내던 텔레비전 프로그램이 떠오르게 한다. 자신의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 애쓰는 일하는 여성들은, “노동형제”들로 인해 애틋한 대상으로 변해버렸다.

투쟁의 현장에서도 일하는 여성의 모습보다는 가족관계 속에 투영되는 여성의 이미지들이 가득하다. 노동자 대 노동자의 연대는 다른 노동자를 그 자체로 인정하고 배려하는 자세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런데 아직도 자신의 권리를 찾아 투쟁하는 일하는 여성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니, 어떤 연대가 가능할까. 지금이라도 노동형제들은 바로 보길 바란다. 청소용역 노동자들은 “어머니”가 아니라 “일하는 여성”으로서 최저임금 집회에 참석했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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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 뒤흔든 열흘

 

 

 

  생일에(그러고보니 벌써 작년이다) 받은 책인데. 그동안 바쁘다는 핑계로 3장까지만 여러차례 시도하다가, 이번에서야 다 읽었다. 많은 잔상들이 머리에 남았다.

 

 인상 깊었던 장면을 기록해두려고 했는데, 너무 많아서 중도 포기다.....귀찮다.

 

- 혁명은 솟구치는 노동 대중의 자발적인 열기로부터 가능하다. 그것은 곧 그들이 스스로 정치의 주체가 된다는 것이다. 정치, 정치적으로. 10월 혁명이 발생했던 당시의 러시아는 배우려는 갈망으로 폭발했다. 야윈 얼굴과 창백한 피부, 누더기가 된 옷을 걸친 병사가 존리드에게 '읽을 것'을 가져왔냐고 묻는 장면이 참으로 인상 깊었다. 사람들이 모이는 곳 어디서라면 논쟁하고 집회하고. 지식인이 아니라, 가난한 노동자들이 사회 경제 이론 서적을 읽고 토론했던 것이다.

 

- <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가 무장봉기를 명령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었다. 봉기를 심각하게 고려한 것은 볼셰비키당 중앙위원회였다. 10일 밤에는 밤샘회의가 있었는데, 여기에는 당의 많은 지식인들과 지도자들, 그리고 페트로그라드 노동자와 수비대 대표들이 참석했다. 지식인들 중에는 오직 레닌과 트로츠키만이 봉기를 지지했다. 심지어 군대 대표들조차도 봉기에 반대했다. 투표 결과, 봉기를 감행하자는 주장은 일단 기각됐다!

  그 때 한 노동자가 일어났다. 그의 얼굴은 분노로 떨고 있었다. 그는 거칠게 말했다. "페트로그라드 노동자를 대표해서 한마디 하겠습니다. 우리는 봉기에 찬성합니다. 여러분은 마음대로 해도 좋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소비에트가 파괴되는 것을 보고만 있겠다면, 우리와의 관계는 끝날 것입니다!" 몇몇 병사들이 그에 합세했다. 그래서 투표가 다시 이뤄졌고, 결국 무장봉기를 감행하자는 주장이 통과됐다. >

 

- 혁명의 규율. 혁명적 규율. 언젠가 <<카탈로니아 찬가>>에서 군대조차도 설득과 자발적 규율로 이루어진 것이라 들었을때. 러시아 혁명에서 그것들을 생생히 볼 수 있었다. 트로츠키가 통행증이 없어 스몰니 회관을 통과하지 못했던 부분이라던가, ^^ 동궁에 들어갔을 때 굶주린 병사들의 약탈이 발생하자 스스로를 통제하며 "혁명의 규율과 민중의 재산"을 외쳤던 부분. 볼셰비키에 대한 온갖 왜곡과 비난에도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을 존 리드는 생생히 증언하고 있다. (하지만 동궁에 남아 있던 여성대대에 대한 강간과 살육에 대한 소문이 무성히 퍼졌을때, 실은 살육한 적이 없고 몇몇에 대한 강간이 있었을 뿐이라는 대목에서는, 소름이 돋았다. 단 몇...)



- 케렌스키는 도망가고 의외로 볼셰비키는 쉽게 진입했지만. 반혁명은 그 때부터가 시작이었다. 케렌스키의 무장도발과 함께, 소위 조국과 혁명 구제위원회-그들은 노동자 농민, 병사들이 아니라 기자들과 학생, 지식인, 멘키 등등이었다-가 온갖 반발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혁명은 곧 전쟁이었다. 전쟁이 시작되었다. 수많은 사람이 피를 흘리고 죽어갔다. "예상하던 모습으로, 지식인들이 기대하던 모습으로 찾아온 것이 아니라 거칠고 강렬하게, 정해진 공식을 무시하고 감상주의를 비웃으며 찾아왔다. 적나라한 현실의 모습으로."

 제대로된 지휘관도 없는 오합지졸의 적군이, 백군을 물리친 것은 말 그대로 기적이었다. "이것은 그 누구도 아닌 그들의 전투였고, 그들의 세상을 위한 전투"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기나긴 전쟁을 거쳐 혁명은 성공할 수 있었다.

 

- 크렘린에서 있는 장례식 장면은,,,말로 표현할 수 없는,,,그런 느낌이었다. 짜르의 무덤이 있는 크렘린에 짜르에 반대하고 자본주의에 반대한 민중들이 잠드는 장면. 저자인 존 리드 역시 미국인으로는 유일하게 크렘린에 묻힌 사람이기도 하다. "이제 이 신앙심 깊던 러시아인들에게 자신들을 천국으로 보내 달라고 기도해줄 성직자가 더는 필요하지 않게 된 것이다. 이들은 그 어떤 천국보다도 밝게 빛나는, 그것을 위한 죽음을 영광으로 생각할 수 있는 나라를 지상 위에 세우려 하고 있었다."

 수많은 이들의 자발적 의지를 통해서 결국 혁명은 성공했고, 그것은 말그대로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어떤 것인가를 생생히 보여주는 것이었다. 왜 볼셰비키만이, 끝까지 혁명적 세력으로 대중의 지지를 받을 수 있었는지도 말이다. 농민대회 장면은 예전에 정권에 의해 삭제된 부분이라던데,,,역시 재미있었다.

 

- 마지막으로,,,, 인상 깊었던 한 일화.

 

 <  다음 날 페트로그라드에서 반볼셰비키 신문들이 '플레하노프 고열 상태!!'라는 소식을 대서특필했다. 차르코스예 셀로에 있던 플레하노프는 병상에 누워 있었는데, 적위병들이 그의 무기를 수색하고 그를 심문했다.

  그들은 "당신은 어느 계급에 속하는 가요?" 하고 그에게 물었다.

  "나는 혁명가요." 플레하노프가 대답했다. "40년 동안 자유를 위해 목숨 바쳐 투쟁해온 혁명가요!"

  "아무튼," 한 노동자가 말했다. "이제 당신은 자신을 부르주아지에게 팔아 넘겼잖소!"

  노동자들에게 러시아 사회민주당의 선구자 플레하노프는 잊혀진 이름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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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 트로이카

 

 

내 영혼 떠나버린 빈 껍질

활활 불태워

한 점 재라도 남기기 싫은 심정이지만

이 세상 어디에라도

쓰일 데가 있다면

꼭 쓰일 데가 있다면

주저없이 바치리라

먼 젊음이 이미 다짐해둔

마음의 약속이었느니

 


- 이효정, <약속>

 

 

 경성트로이카의 유일한 생존자였던 이효정의 시로 시작되는 이 책은, 상당히 재미있었다. 서울로 올라오는 기차시간이 지루할 것 같아 샀는데. 단숨에 읽었다. 이전에 여러 사회주의 매체에서 평론을 써놓은 것을 제목만 보았는데, (영화든 책이든 평론을 미리 읽으면 재미가 뚝 떨어진다) 다시 찾아서 어떤 부분을 지적하고 있는지 한 번 봐야겠다. 나름대로 몇 가지 흥미로웠던 부분들만 메모 해두어야지. 발췌는 포기다. (세계를 뒤흔든 열흘은 아직도 발췌 중이다;;)

 

- 첫번째로는 이재유를 비롯한 혁명가의 삶에 대해서. 특히 박진홍, 이순금, 이효정 등의 여성혁명가들의 삶에 많은 관심이 갔다. 일제 시대 끊임없는 감시와 체포,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규율을 지키고 동지를 지키려고 한 그들의 삶에 한없는 존경심을 느꼈다. 자살하려고 독약을 마신 사람을 위세척까지 시켜서 고문하는 일제의 잔혹함이란. 그리고 계속해서 조직이 와해되는 데도 혁명운동에 조직운동이 없어도 되는 시기가 어디있느냐며, 제 2의 경성트로이카,,,경성 꼼그룹까지 끈질기게 다시 처음부터 운동을 시작하는 혁명가의 태도를 보았다.

 

 

- 현장에 기반한 조직이 없는 조선의 노동운동 상황과 지금의 현실의 유사성. 이재유의 말이뼈 속 깊이 와닿는다. 

 

  "지금 조선 땅에는 사회주의가 유행처럼 번지고 있습니다. 사회주의자가 아니면 지식인 축에도 끼지도 못하는 형편이지요. 일본에 유학 갔다 오면 누구나 사회주의자요. 마르크스나 레닌의 저서 한 두권만 읽으면 누구나 사회주의자를 자처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사회주의자는 머릿 속에서 이뤄지는 것이 아닙니다. 철저한 자기 희생과 불굴의 의지를 통한 실천 속에서 완성 됩니다. 백수건달처럼 놀고 먹으며 관념적이고 교조적인 이론이나 떠볼리는 얼치기 사회주의자들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조선의 사상운동은 그런 관념적 인텔리를 중심으로 한 파벌 운동에 불과했기 때문에 완전한 조직이 가능하지 않았습니다. 조선의 사상운동이 바로 일어서려면 러시아처럼 노동자와 농민을 기초로 해야 합니다. 다만 현재 조선의 노동자 농민의 의식 수준은 낮기 때문에 혁명적 의식과 실천 의지가 있는 지식인들이 전국적으로 널리 퍼져갈때 비로소 조선의 당조직은 진정한 혁명 조직으로 세워질 것입니다"

 

 - 해방 그리고 이어진 분단 상황에서. 북한의 김일성 정권으로부터 숙청당하는 박헌영 등 조선공산당의 주역들. 그리고 남한에서 대중으로부터 외면받은 사회주의자들과, 남에서도 북에서도 환영받지 못했던 마지막 빨치산 이현상. 오래 전 읽었던 손석춘의 <<아름다운 집>>이 다시 한 번 생각났다.

 

- 이재유의 일생에, 빈틈이 있었던 적이 몇 차례 있었는데. 특히 박진홍과 결혼하면서 자신의 아이를 갖게 된 후 흔들리는 개인적 감정이, 결국 문제를 낳았다. 결혼과 아이는 역시 무섭고도 경계해야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순금과의 삼각관계에서, 물론 그들은 혁명가답게 치정관계로 완전히 틀어지진 않았지만, 어쨌든 그런 깔끔하지 못한 관계를 만든건 이재유의 잘못이다.

  아, 그리고 한편으로 당시 조선의 혁명가들은 자유 연애 사상을 상당히 실천하고 있었던 것 같다. 이재유의 아이까지 낳은 박진홍과 그리고 이재유가 죽고 난 후에 다시 김태준과 결혼하는 모습이라던가. 다양한 여성의 모습들이,,봉건적 인습에 찌들어있던 당시로서는 혁명적이었음이 분명하다.

 

 

음, 이재유 그룹과 국제선의 관계라던가. 당시 그룹들 간의 논쟁이라던가 그런 것들이 궁금한데, 언제 시간나면 <<이재유 연구>>도 한 번 읽어봐야겠다. 정말이지, 맨날 러시아 혁명에 대한 건 읽어도 조선 노동운동사를 너무 몰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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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남자에 대한 두려움

어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난 별다른 생각 없이 승강장에 서 있었다.

그 때 어떤 술취한 아저씨가 나에게 다가와서 말을 거는 건지, 소리를 질렀다.

난 정말 그자리에서 까무라치는 줄 알았다.

 

뭐, 술취한 사람의 꼬장이군. 이 정도로 넘어갈 사람들이 많을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매일 밤마다 따라오는 발자국 소리에 몇번이고 뒤를 돌아보는 나로서는

정말로 까무라칠 일인 것이다.

 

사실 난 겁이 굉장이 많은 편이다. 무엇보다도 '사람'에. '남자 사람'에.

 

난 굉장히 사회적으로 말해, 드세고, 괄괄한 여자라고 생각하고 살아왔기에.

겁이 많다는 걸 인정하기까지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왜냐하면 그것은 내 속의 아픔을 드러내야만 하는 과정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아주 어린 날의 기억에.

아버지가 엄마에게 휘둘렀던 폭력사건.

마치 끔찍한 악몽에 시달린 것처럼.

그 날의 기억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그 때 나는 깨달았던 것이다.

 

"아, 말로 하다가 안되면 때릴 수도 있구나. 저 사람은.

 아니, 저 사람에게는 그럴 능력이 있어."

 

내가 두려워하는 낯선 남자사람들은 그럴 능력을 가지고 있다.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으면 물리력을 행사할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 사실로 인해, 나는 늘 두려움과 겁을 먹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한편 남자들 일부의 마음 한 켠에게는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가진자의 여유와도 같은 심리가 있다. 어두운 골목, 뒤에 가는 자신의 발자국 소리 때문에 예민하게 걸어가는 앞의 여성이 우스워보였는지더욱 걸음을 빨리 하는  낯선 남자. 자기가 맘에 든다면 언제 어디서든 미친듯이 따라가서 말을 거는 낯선 남자. 대화가 통하지 않고 화가 끝까지 치밀어오르면 위협적으로 소리를 지르고 가지고 있던 물건을 던져버리는 남자.

 

그럴 때 나는.

그래, 당신에게는 그럴 능력이 있어.

라고. 되뇌이며. 눈물을 참아본다.

 

조금 더 적극적으로 반응하기엔, 난 아직 겁이 너무 많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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