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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자가진단

개토님의 [성격자가진단] 에 관련된 글.

 

생각나는대로 막 찍었는데, 이건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는걸까?

좋은거 나왔다고 해야하나 아닌가

 

인생의 계획이나 사람들과의 교제를 그다지 깊이 파고 들지 않는다니

집착하는 줄 알았는데 ㅋㅋㅋ

 

<다만 인생의 여백과 같은 부분에 대한 감각을 잃게 될 위험이 있죠.

작은 것에 대한 감동을 느낄 수 없게 되고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며 보내는 시간의 느긋하고 편안한 기분도 맛볼 수 없게 됩니다. 본래 이 타입은 출세나 돈을 버는데 혈안이 된 사람들을 무언가에 쫓기며 사는 불쌍한 사람들로 봅니다.>

 

요새 좀 그런 것도 같네-


 

AABAB
일과 놀이를 양립시키는 타입

▷ 성격
일과 놀이 모두 유능한 타입으로 스트레스를 해소하는데 있어서는 교본으로 삼을만한 타입입니다 인생의 계획이나 사람들과의 교제 같은 부분은 그다지 깊이 파고 들지 않기 때문에 당연히 실수도 생기겠지만 그것이 이 타입의 장점이자 인간다운 부분입니다.
물론 여기에 빈틈없는 계획까지 세워 생활한다면 상당한 플러스 알파가 생겨 출세도 하고 돈도 쌓이게 될 것입니다. 다만 인생의 여백과 같은 부분에 대한 감각을 잃게 될 위험이 있죠. 작은 것에 대한 감동을 느낄 수 없게 되고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며 보내는 시간의 느긋하고 편안한 기분도 맛볼 수 없게 됩니다. 본래 이 타입은 출세나 돈을 버는데 혈안이 된 사람들을 무언가에 쫓기며 사는 불쌍한 사람들로 봅니다. 긴 인생을 되도록 여유를 가지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이런 생활방식을 취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사실을 참고로 했으면 합니다.


▷ 대인관계 (상대방이 이 타입일 경우 어떻게 하연 좋을까?)

연인, 배우자-안전한 결혼상대자이자 재미있는 배우자가 될 수 있습니다. 당신에게 그다지 문제가 없다면 함께 잘 해나갈 수 있는 요소를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거래처(고객)-각별히 주의할 것이 없는 무난한 타입입니다.

상사-약간 앞서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리더십도 충분하기 때문에 안심하고 따라도 좋을 상대입니다. 이런 타입의 상사는 인간미가 넘친다는 것이 장점입니다.

동료, 부하직원-장래에 당신의 오른팔이 되어줄지도 모를 사람입니다. 양호한 관계를 유지해가도록 신경 쓰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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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 부담감

요즘 글쓰기에 대한 이런저런 고민을 많이 하고 있다.

진보넷에 블로그를 만들었다가 또 없앴다가 글을 썼다가 또 지웠다가

난 참 심하게 소심한 인간형이다.

왠지 진보넷에 글을 쓸 때는 부담이 생기는 측면이 있다.

가끔은 그냥 지껄이고 싶을 때도 있는데 자유롭게 쓰는 블로거들이 부럽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가 현재 어떤 공부 혹은 활동을 하고 있다는 걸

여러 사람에게 더 적극적으로 알리고 싶다는데..

 

 

그래서 나도 좀 마음을 가볍게 먹고

이런 저런 생각 날 때 블로그에 글을 좀 써야겠다.

다른 블로거들 눈팅만 하지말고, 리플도 좀 달고-

(이 소심한 인간은 리플 다는 사람들은 서로 다 아는 것만 같다)

그래야 소통이 되지...

 

 

요 며칠 머리 속에 떠돌고 있는 생각은 딱 두가지다.

하여튼 나는 한 가지 생각에 지나칠 정도로 집착한다.

 

 

그 중 하나는 지금 쓰고 있는 글의 내용 '여장'에 대한 것이다.

다소(보다는 많이) 의무감에 의해 시작했지만 파고들어갈수록 재미있는 구석이 참 많다.

 

중고등학교때도 그렇고 대학때도 축제때 어김없이 등장했던 여장.

찾아보니 개그프로그램에도 참 많더라-

옛날에 어릴 때는 별 생각없이 웃었고

좀 더 커서는 여성과 여성의 몸에 대한 희화화라는 비판에 고개를 끄덕였는데

여장남자가 웃음으로 이어지는 공식 사이에는 뭔가 더 복잡한 게 더 있는 듯하다.

반대로 여자가 남장을 하면 결코 웃음이 되지 않기 때문에.

 

근데 이걸 글로 잘 표현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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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사회내 성폭력, 다시 묻다

푸른들판님의 [운동사회 성폭력, 아니 여성을 이야기하다] 에 관련된 글.

운동

조직관

연애

의사소통

성폭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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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는 있다?

* 민중언론 참세상[반여성성에 대해 민주노총에 고함] 에 관련된 글

 

 

답답한 마음으로 글을 내려 읽어갔다.

기자가 '변화는 있다'는 소제목을 달아놓았다.

글을 읽다 변화가 과연 있는 것일까? 변화는 가능한 것일까? 이런 질문들을 던지게 된다.

문제제기 하는 이들의 노력을 폄하하고자 하는 것도 아니고, (그많은 여성들 중 한사람으로서) 끝도 없는 회의주의에 빠져든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답답한 건 답답한 거다.

 

 

얼마전에 <민족민주운동과 가부장제>라는 논문을 요약해놓은 '진보적 운동권의 뿌리깊은 성차별'이라는 글을 본 일이 있다. 1995년에 쓰여진 것이니까 거의 10년도 더 된 글이다.

그런데 거기에 쓰여진 내용들은 10년이라는 시간이 무색하리만큼, 변하지 않은 것 같다.

변화가 있다해도 너무나 더디어 감지하기 힘든 것인지도.

 

 



[진보적이면서 동시에 보수적일 것임을 요구받는 자기분열적 상황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여성'이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실제로 운동권 여성들의 많은 수는 자신을 "여자로 생각해본 적이 없다" 운동의 세계에서 살아가기 위해 이들이 택하는 전략 중의 하나는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을 부인하는 것, 그리고 대신 자신을 남성과 동일시하는 것이다. 여성들 스스로 남자들의 언어와 화법, 남자들의 관심사, 그리고 사물에 대한 남성적 관점 습득을 통해 남성과의 동일시를 시도해왔다. 여성 정체성의 거부와 남성과의 동일시, 그리고 '(과잉) 남성화전략'은 운동조직 내에서 존재하는 성희롱과 성폭행의 위험에 자신을 노출시키지 않으려는, 그리고 여성을 비하하고 여성의 능력을 평가절하하려는 사회 일반의 가부장제 문화 속에서 인정받고자 하는 여성들 나름대로의 생존전략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경우 부인이 생계의 주 담당자이다. "나라를 구하는" 일을 하는 남성들에게 있어서 가정을 돌보는 일은 일종의 소시민적 사치일 수 있으며, 가족들을 경제적으로 돌보는 문제에 있어서도 이들은 무관심한 성향을 지닌다. 자연히 남성들은 가족생계부양이라는 전통적 성역할에 따른 책임으로부터 면제받는다. 반면 그 역할과 책임은 여성에게 전가된다. 운동권의 남성들이 가족부양책을 수행하지 않는다고 해서 남성의 권력이나 권리가 침식당하는 것은 아니다. 경제적으로 부인에게 의존하면서도 남성들은 당당하다. 오히려 가족생계책임과 양육노동, 가사노동의 분담으로 운동을 지속하지 못하는 부인을 "가족 이기주의에 빠진" 돈에만 관심이 있는 "속물"이라고 비난한다. 가사, 양육노동의 부담과 함께 생계책임의 부담은 여성들로 하여금 결혼과 더불어 운동의 장을 떠나도록 강요하는 중요 요인 중의 하나이다.]  

 

 이 글을 옮겨적다보니 다큐<얼굴들>에 나온 시그네틱스 여성노동자들의 인터뷰가 떠오른다. 그녀들은 많은 남성활동가들과는 달리 남편들에게 투쟁을 '허락' 받는 입장이었고, 그래서 투쟁하는 동안 더 집안일과 아이들을 돌보는 것에 '완벽'하고자 했다는.

 

 

[정치적 억압과 경제적 빈곤이라는 '뚜렷한 억압'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여성 문제는 이차적인 문제로 간주되었고, 단결을 해치는 어떠한 문제제기도 허용되기 어려웠다. "단결에 대한 강조, 분열을 가져오는 분파주의에 대한 끊임없는 경계"가 암시하는 바는 운동의 모든 구성원은 하나여야 하며 여기서 개인의 권리나 자율성 등의 문제는 일단 덮어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세계 변혁사 운동을 볼 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사실은 사회주의 운동 내에서 여성문제의 제기는 흔히 운동의 역량을 약화시키는 분파주의자, 분열주의자로 매도되어왔으며 심각하게 논의되어 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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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레닌인가?

NeoScrum님의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레닌인가?]  中 에서, 

 현재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레닌이 아닙니다. 지금 한국은 혁명적 고양기도 아니고, 20세기초 러시아도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에게 던져졌던 레닌은 우리의 착각만 크게 불러 일으켰다고 생각됩니다. 80년대 간절히 혁명을 원하던 우리는 그 시기를 레닌의 눈을 통해 20세기 초 러시아의 혁명적 시기라고 착각했습니다. 아직까지 우리는 민중운동의 성과를 수확하는 시기가 아니라, 아직 젊디 젊은 우리의 운동이 이제 막 던져진 씨앗을 파릇파릇 새싹으로 가꾸어야 할 시기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민중운동의 결과물을 수확하는 레닌이 아니라, 거름을 주고 잡초를 솎아내고 오랜 기간 그 속에서 함께 할 활동가들입니다. 우리는 '맑스주의 러시아 사회민주 노동자당'이 등장하기 이전의 러시아 민중운동을 살펴봐야 합니다. 민중들이 계급정당의 탄생을 요구하게 된 과정을 보아야 합니다. 현재 우리에게 의미가 있는 것은 레닌의 막판 뒤집기가 아니라, 19세기의 러시아 민중운동일 것이며, 차베스 이전의 베네수엘라 민중운동 일 것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동안 가졌던 '혁명적' 착각에서 벗어나 왜곡된 운동 진영의 구조를 개편하고, 새롭게 인식한 상황에 따른 전망과 이에 걸맞는 활동가 재생산 일 것입니다. 현재 우리가 만약 레닌에게 배워올 것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그가 항상 주장했던 "학습하라, 선전하라, 조직하라!" 입니다. 끊임없이 공부하고 연구해서 새로운 이론으로 무장하고, 대중들에게 알리고, 그 선전을 바탕으로 조직하는 것, 그것이 바로 운동입니다.

지금 현재 우리 상황을 한번 돌아보지요. 좌파에게 있어서 가장 큰 비극은 사회과학 서점과 출판사가 문을 닫고, 민중문화 단체가 하나둘 사라져 간다는 것입니다. 이건 새로운 현상도 아닙니다. 이미 10여 년 전부터 진행되어 온 일입니다. 과연 한국에 '좌파'가 존재하기는 하는 건가요? 현재 한국에 좌파가 존재하다면, 그 '소위' 좌파는 생각하지 않고, 공부하지 않고, 토론하지 않고, 고민하지 않고, 재생산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삶과 문화를 포기했습니다. 이는 '싸움'은 있더라도 세상을 바꾸기 위한 '운동'은 사라져버렸다는 이야기입니다. 현재의 투쟁들은 과거의 축적된 운동을 소비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런 상황은 현재의 운동뿐만 아니라, 미래의 투쟁까지도 사라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한노정연이 문을 닫게 될 것이라는 소식은 그래서 더 착잡합니다.

아직도 '커리큘럼'이라는 게 있는 곳들을 뒤져보면, 80년대 만들어진 학습 과정이 버젓이 버티고 있습니다. 80년대에 만들어진 19세기의 이론으로 21세기를 바꾸겠다고 주장하는 건 한마디로 코메디입니다. 이건 '운동'하지 않기 때문에 벌어진 현상입니다. 세상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면서 자기 꿈 속에나 있는 세상을 바꾸겠다고 하면, 그건 활동가가 아니라 몽상가이겠지요.

최소한 30년을 준비하는 좌파의 운동이 필요합니다. 학습하고, 선전하고, 조직하자. 이게 기본입니다. 현재에 매몰되지 말고, 미래를 만들어 나갑시다. 각 조직에서는 헤게모니 싸움에 역량을 소비하기 보다는 2-3년 앞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의견으로 '조직내 조직활동'을 전개해 나갑시다.


우리는 이제 우리의 혁명을 다시 만들어 가야 합니다. 그 혁명은 '우리' 활동가의 혁명이 아니고, 민중과 노동계급의 혁명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다시 시작합시다. 다시 민중 속으로 들어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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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 중심주의에 대하여

  성폭력 사건의 해결과정에서 '피해자 중심주의'는 하나의 원칙이 되어가고 있는 듯하다. 내가 알고 있기로 운동사회에서도 몇몇 단체가 내부 규약을 통해 피해자 중심주의를 원칙으로 공표하기도 했다. 이와 관련해서 얼마전에 양성평등연대라는 데서 노동해방학생연대의 반성폭력 규약을 갖고 논쟁이 붙기도 했다. 물론 양성평등연대인가 하는데가, 도대체 무슨 목적으로 저런 단체를 만들어서 활개를 치는가 의문이 들지만, 어쨌든. 핵심은 '피해자 중심주의'가 객관적이고 과학적이며 공정한가 하는데 있다.

 

 

  새로 알게 된 사실은 미국의 경우에는 'reasonable woman', 한국말로 옮기자면 합리적 여성 혹은 합리적 피해자라는 개념을 쓰고 있다는 것이다. 성폭력 피해자의 대다수가 여성이기 때문에 'woman'이 붙은 것이고. 이 개념은 동일한 사실을 다르게 인식하는 상황에서 무엇을 진실로 인정할 것인가에 대한 판단을 할 때 사용된다. 사실조차 인정하지 않는 상황은 제외하고. 예를 들어 '성기 삽입'이라는 기술에 대해서 잠정적으로 가해자/피해자 측이 모두 인정하는 상황이 있다. 그런데 가해자는 이에 대해 '관계'라고 말하고, 피해자는 '강간'이라고 말한다. 이 때 과연 누구의 말을 기준으로 삼아야 할까? 누구의 말이 더 합리적일까?  이 때 사용되는 '합리적 피해자' 개념은 흔히 '아이의 돌에 맞아 죽는 개구리'에 비유된다. 즉 가해자의 의도에 관계없이 피해를 입는 사람은 피해자 당사자이다. 따라서 피해자의 입장에서 사건을 보는 것이 더욱 많은 것을 볼 수 있게 한다. 대부분 가해자들은 피해자의 이런 감정, 입장을 이해할 수가 없다. 가부장적 사회에서 남성과 여성은 같은 상황도 전혀 다르게 인식하기 때문이다.

  이 때 가해자와 피해자가 왜 그렇게 느끼는가를 알기 위해서는 그 상황을 둘러싼 총체적 맥락을 드러내야 한다. 예를 들어 '여자의 no는 yes'라고 오랫동안 교육받아왔던 이 남자는 여자의 동의를 구하지 않고 '관계'를 한 것은 별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여기에는 '극렬한 저항이 수반되지 않은' 관계는 강간이 아니라는 가부장적 전제가 분명하게 깔려 있는 것이기에 문제가 된다. 이런 가정과 전제들은 무수히도 많다. "여자가 남자와 단둘이 있었으니" "여자 옷차림이 그러하니" "여자 혼자 밤늦게 돌아다녔으니" "여자가 나를 좋아하는 줄 알고" 등등등. 그러나 법적 절차나 해결과정은 이런 '맥락'을 문제 삼지는 않는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어떤 맥락에서 그러한 판단을 내리게 되었는지, 내릴 수밖에 없는지를 고려하지 않기 때문에 지금까지의 성폭력 사건의 해결은 '객관성'을 주장하면서도 실은 가해자의 손을 들어주는 결과를 낳았던 것이다.

 

  모든 지식은 항상 부분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성폭력 사건에서도 언제 어디서나 통용될 수 있는 기준이란 없다. 충분히 다른 사회적/문화적 맥락에서는 다른 판단을 내릴 수도 있다. 그래서 맥락이 중요하다. 성폭력이 위계관계 속에서 일어날 때, 그러한 맥락에서 누구의 판단이 덜 왜곡된 것이며 덜 부분적인 것일지를 그 속에 개입된 가치와 이해관계들을 충분히 고려해야만 진정한 의미의 '객관성'이 나올 수 있다. 페미니스트 과학철학자인 산드라 하딩(Sandra Harding)은 이것을 '강한 객관성'(strong objectivity)라고 불렀다. 하딩은 전통적인 과학과 객관성은 가치중립적이라는 신화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오히려 이들은 지배자들의 이익에 도움이 되는 지식과 연구만을 생산해내고 있다고 이를 '약한 객관성'이라 비판하였다. 그리고 한편으로 그녀는 자신이 주장하는 사회적 상황적/맥락적 지식(socially situated knowledge)이 판단과 인식론에 있어서의 상대주의-어떤 주장도 합리적, 과학적 근거가 없다던가 그렇기 때문에 결국엔 모든 주장이 동등한 가치를 지닌다는 식-와 혼동되어서는 곤란하다고 주장한다. 그렇기 때문에 가부장적 위계 속에서 발생하는 성폭력 사건들에서 '합리적 피해자'나 '피해자 중심주의' 개념이 하딩 식으로 말하자면 '강한 객관성'을 드러낼 수 있는 척도가 된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으로 '피해자 중심주의'라는 개념이 너무나 주관적이고 편파적인 것으로 인식된다는 것은 분명 문제다. 심지어 사실관계 확인조차 안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인간들도 있으니. 피해자 + 중심 + 게다가 주의! 라니, 찬찬히 뜯어놓고 보니 그렇게 보일만도 하다. 역시 익숙하던 개념도 조금 떨어져 낯설게 볼 필요가 있다. 실은 어떻게 한국에서 이런 개념이 만들어진 것인지, 사용되게 된 것인지도 불분명하다. (누가 알면 좀 가르쳐주세요-) 과거의 반성폭력 운동, 그 중에서도 여학생운동 쪽에서 만들어지지 않았나 추측만 있었다. 그래서 '피해자 중심주의'가 '합리적 피해자'와 동일한 맥락에서 사용되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명명이 사람들의 인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만큼 다른 식의 용어를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기에 너무 보편화되어 있는 것 같지만, 막상 들여다보면 실은 그렇지도 않다.

 

 그리고 더불어 피해자 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에는 피해 혹은 고통을 '입증'해야만 한다는 것과 사건의 해결과정을 통해 '생존자'로 자리매김하지 못하고 오히려' 피해자화'가 된다는 점도 제기되고 있는데, 이에 대한 고민도 반드시 가져가야 할 것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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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흠

새벽길님의 [간단한 심리테스트] 에 관련된 글.

고진감래 와  동상이몽

 

미치겠네 거참-_-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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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

 

 

미안하다고, 용서를 구하고 싶다고. 

그 애는 나에게 말했다.

 

그래, 그 일이 아니었다면 나는 지금쯤 너무도 다른 삶을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여전히 이것저것 짜증내며 어린애처럼 징징대고 있었겠지만

그 징징댐 이상의 결의로 다잡아가며 살아가고 있을런지도 모른다.

적어도 지금처럼 패배감에 젖어 휘청대고 있지는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결국 포기했다.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고 하면 변명일까?

극복하고 꿋꿋하게 활동하며 살아갈 자신이 없었다.

지금으로서는 시간을 다시 돌린다해도 그럴 자신이 없다.

나에게 필요한 것은 내가 맺고 있던 모든 것으로부터의 분리, 단절이었으니까.

공간의 분리, 인간관계의 분리, 나를 보는 시선들, 나에 대해 떠드는 소리들

그 모든 악몽같은 일들을 잊어버리고 싶다는 간절한 욕구.

그것뿐이었으니까.

 

그래서 너를 더이상 원망하지 않는다고, 너를 마음 속에서 용서했다고

쉽게 말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지난 시간 내가 정말로 원망하고 미워하며 부정하고 싶었던 건

그도, 그녀도, 어느 누구도 아닌 내 자신이었는데.

 

아직은 누군가를 용서할 자격이

아니 용서한다고 말할 수 있는 그만큼의 마음이 없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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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는 사람

난 지금까지 내가 꽤나 눈치가 빠르다고 생각해왔는데, 오늘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오히려 난 남들이 공공연하게 느껴왔던 것들을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라오면서 쭉, 대부분의 시간들 동안 나는 나의 겉모습으로 인해 어디에서나 좀 튀었다. 그렇게 되고 싶어하는 사람이 모르겠지만 (자기 의도와 관계없이) 늘 눈에 띄는 인간으로 산다는 건 피곤하고 힘든 일이다. '평범'하게 다른 사람들 틈 속에서 조용하게 묻어가고 싶을 때가 정말로 많다. 내가 다른 외형적 모습을 가졌다면 내 성격도 지금과는 정말 다르지 않았을까. 해봤자 도움이 안되는 생각을 한다. 좋게 얘기하면 주목을 받는다는 것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쉽게 공격과 표적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그래서 받은 상처들이 많다. 그리고 상처들이 사람들에게 자꾸만 거리두기를 하게 만든다. 너무 많은 것을 털어놓고 나를 드러내고 의지한다는 것이 나이가 들면 들수록 점점 겁이 난다. 

 

나라는 인간이 오늘따라 참 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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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솔: 1950년대 중국의 가정부녀와 가사노동에 대한 국가 담론


 

 지난 목요일에 이대 아시아 여성학센터에서 주최하는 국제 컨퍼런스 "신여성/모던걸의 재현과 동아시아의 식민지 근대성"이 있었다. (저 사진은 자료집을 찍은 것이다.) 시간 상 오전에 있었던 젊은 여성학자들의 pre-conference밖에 듣지 못했는데, 모던걸의 프롤레타리아 형태로서 베이핑의 웨이트리스의 문제라던가, 일본의 첩과 관련된 논의들 등의 흥미로운 주제들이 많이 있었다.

 

 그 중에서도 기록해두고 싶은 발표는 중국 인민대 조교수 송 샤오펑의 <가솔: 1950년대 중국의 가정부녀와 가사노동에 대한 국가 담론>이다.

 

 가정부녀(가정주부)는 '가솔' '가사관리자'라는 신분을 통해 소비에트 정권 하에서 독립적 사회신분이 되게 된다. 가솔은 주로 도시남성노동자의 아내를 가리킨다. 이들은 농촌여성이나 여성노동자와는 달리 직접적으로 생산활동에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직접적으로 논의대상이 된적이 거의 없다. 송 샤오펑은 국가와 당의 목소리를 대표하는 '인민일보'에 대한 분석을 통해 가사노동에 대한 국가담론을 추적한다.

 

 흥미로운 것은 국가에 의한 가사노동 담론이 시기에 따라 '변화과정'을 겪는다는 점이다.

 

 건국 초기에 가사노동은 폄하되고 가정부녀는 '기생충'으로 비난받는다. 왜냐하면 가사노동은 생산적 '노동'이 아니기 때문이다. 정권은 생산노동에의 참여를 통해 부녀해방을 부르짖는다. 그러나 가사노동이 사회화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는 오히려 정권에게 큰 경제적 부담이 되었고, 여성들을 다시 가정으로 돌려보내게 된다. 그리고 국가는 이들 여성에 대해 새로운 해석을 내놓는다.  그리하여 50년대 중기에 가사노동은 국가에 의해 사회주의 노동의 일부분으로 인정되고 국가에 의해 장려되는 모범 모델 중의 하나가 된다. 특히 5호라 하여, 이웃단결이 좋고, 자녀교육을 훌륭히 하는 등의 덕목을 따져 표창을 내리기도 한다. 이는 가사노동에 대한 정치적 긍정과 가정주부의 정치적 지위에 대한 긍정이며, 또 한편으로는 가사노동의 성별분업이 국가의 긍정을 받은 것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1958년부터 국가는 '대약진'을 통해 부녀들을 생산노동에 투입시키기 위하여 가사노동의 역할에 대해 거의 언급을 하지 않는다. 이 시기에 위에서 언급한 '5호' 선정활동도 진행되지 않았다. 대약진이 끝난 난 후, 1960년 국가경제조성시기가 되면 모범가솔은 또 다시 장려의 대상이 되며, 1964년 이후 가사노동은 국가담론 속에서 사라진다. 그리고 시장화 개혁 이후 여성의 가내노동은 '전통미덕'으로 국가에 의해 장려된다. 이런 가사노동에 대한 국가담론의 변화는 내가 보기에 러시아에서의 논의와도 상당한 유사성을 가진다.

 

 송 샤오펑은 여성의 생산노동에의 참여에도 불구하고 여성들이 여전히 가사노동에 대한 부담을 지고 있었던 것에 주목하며, 맑스주의 이론이 '성별분업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인식한 데서 근거를 찾는다. (맑스주의에서 초기 성별분업은 자연스러운 것으로 간주된다. 내가 봤을 때는 성별분업을 '초기'에 국한되어 '불가피한 것'으로 인식하는 것 자체가, 여성억압적인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어쨌거나 철저하게 '역사적' 관점에서 보아야 할 주장이, 어처구니 없게도 '몰역사적'으로 맑스주의자임을 자처하는 이들에게서 반복되는 것은 참으로 모순적인 대목이다.) 대부분의 공산당 간부들과 모택동 역시 '가사노동의 사회화'가 문제의 해결이라고 주장하면서도, 실제로 사회가 공적양육을 제공할 수 없는 단계이자 이에 대한 의무를 모두 '여성'에게 부과했던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중국은 더이상 사회주의라 할수도 없지만, 어쨌든 전통적 성별규범은 중화민족의 전통적 미덕으로서 여전히 국가의 찬양을 받고 있다.

 

 <만약 우리가 여성노동과 여성의 가정 내에서의 성역할의 변화를 더 큰 거시적인 노동질서와 성별질서에 놓고 보면, 우리는 건국 이래로 한 번도 남성들을 향해 성별질서영역에서의 변혁과 요구를 제기한 바 없고 남성의 가정내 가정외 성역할에 대해 질문을 제기한 적이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성별질서의 변화요구는 모두 부녀를 향해 제기되었던 것이다.>

 

 성별분업과 그것의 여성억압적 성격에 대한 분석/비판, 그리고 이에 대한 대중적 인식의 변화 없이 하나의 '당위'로서 주장되는 생산노동에의 참여와 가사노동의 사회화는 반쪽에 불과한것이 아니겠는가, 하는 나의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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