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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향


귀향(volver)


 

 드디어 여러 사람의 추천으로 '귀향'을 봤다. 황금 시간대에도 여유있는 좌석 덕에.

 

 영화는 '모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감독도 그렇게 말했다니. 3대에 걸쳐 중요한 컨셉이 어머니의 존재이기도 하다. 하지만 나는 영화의 여러 부분에서 '여성들의 연대'를 느끼고, 그것을 강조하고 싶다.

 

 주인공 페넬로페 크루즈(라이문다)의 딸은 부계혈통적 의미에서는 그의 자매이기도 하다. 라이문다의 아버지와 바람을 핀 아구스티나의 관계에선 누가 피해자라고 가해자라고 할 수도 없다. (아마도 이게 한국 드라마였다면 머리를 쥐어뜯고 한바탕 난리법석이 났을 것이다.)

  영화 속에서 여성들은 어려울 때 나타나 서로를 도와준다. 아구스티나는 라이문다의 이모를 돕고, 또 라이문다의 어머니는 아픈 아구스티나를 돌본다. 라이문다는 남편을 죽인 딸을 끌어안지만, 딸은 라이문다의 눈물을 다시 닦아주고 그녀를 어머니에게 다시 돌려보낼 수 있는 매개가 된다. 라이문다의 친구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런 친밀하고 따뜻한 여성들의 '관계'들로 영화는 엮여져있다. 이 영화의 여성들은 일방적 희생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감독(알모도바르)이 갖고 있는 퀴어 감수성은 확실히 영화를 만드는데 엄청난 역할을 미치는 것 같다. 게다가 코믹 감각도 있다. 아무튼 이 영화가 남성 판타지 속의 '위대한 모성'으로만 읽힌다면 그건 참 아쉬운 일이다. 확실히 한국 사회에서는 더욱 그렇게 읽힐 가능성이 많겠지만.

 

 그런데 참 재미있는 것은 이 영화의 스토리 구조가 내 느낌엔 통속적일 정도로 단순하다는 것이다. 앞에서 말한 여성성과는 대립적으로, 이 영화의 남성들은 무능력하고 성욕에 눈이 멀었으며 관계를 파괴하는 폭력성을 드러낸다. 감독은 여성성과 남성성을 대립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폭력적 남성성을 대비시킴으로서 반대로 그 속에서 여성성을 부각시키고 싶었던 것일까 궁금하다. 

 그리고 마지막에서야 어머니(유령이든 아니든)와 라이문다가 털어놓는 이야기는 충분히 예상가능한 이야기였지 않았나? 아구스티나 어머니의 실종과 관련된 미스테리도. (나만 그랬나?) 그래서 이야기가 마치 저 포옹장면을 위한 것처럼 짜여져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아버지만 아니었다면 딸과 어머니가 그렇게 오해 속에서 떨어져있을 일은 없었을텐데. 이런 느낌을 주고자 하는 것 같다. (내가 너무 삐딱한가?)

 

 마지막으로 이 감독이 여성과 모성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을지 궁금해진다.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과는 별개로 그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 그가 귀환하고자 하는 곳 그 곳이 어머니의 품이라면 그도 남성 판타지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은 아닐런지? (정말 내가 삐딱한가??) 영화는 자신에 대한 이야기일수도 있지만, 보는 관객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고려해볼때 정치적일 수도 있다. 이런 삐딱함은 내가 이 감독의 전작 '그녀에게'를 보고 느낀 남성의 시선, 그 불편함 때문이기도 하다. 어쨌든 이 감독과 그가 만들었던 영화가 궁금하다. 시간 날 때 좀 봐야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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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칠이 어록을 보고,

염둥이님의 [미칠이 어록] 에 관련된 글.

며칠전 인터넷에서 '미칠이 대사 또 논란' ,,,뭐 그런 기사를 봤드랬다.

 

참 열받는 건,

미칠이라는 캐릭터에

된장녀의 요소라고 일컬어질만한 것들을 죄다 쏟아붓고는

자기 언니 애인 빼앗고 히스테리에 가까울 정도의 성격 파탄자로 그려놓고는

'할 말은 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면 시청자들은 그렇게 생각한다.

"역시 저런 기집애들은.....쯧쯧..."

 

기사에서 대사를 낱낱이 보면 어느 하나 틀린 말이 없는데도,

나 역시 드라마 상에서 미칠이를 보고 있자면 짜증부터 치밀어 오른다.

 


자기 주장이 강한 여성은

자기 잘난 맛에 산다

가족은 내팽겨친다

수단과 방법을 안가리고 돈돈돈 한다

자기 마음대로 안되면 히스테리를 부린다

도대체 대화와 소통이란 걸 모르는 아집덩어리이다

라고 사람들 머릿속에 집어넣는 이 드라마 작가가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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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봄을 사지만 우리는 겨울을 판다

 

 

 

 누군가 내가 갖고 다니던 이 책을 보고 '제목이 마음에 닿는다'라고 했는데. 나도 그랬다. 이 책은 탈성매매를 지원하는 부산의 '살림'이라는 곳을 거쳐간, 성매매 여성들의 수기집이다.

 

 그녀들의 아픈 지난 이야기들을 듣는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땅을 살아가는 또 한 명의 여성으로서 나는, 그 글들을 그저 담담하게 객관적으로 내려 읽을 순 없었다. 몇번이나 책을 덮었다 다시 또 열면서 그렇게 한 자, 한 자 읽었다.

 

 성매매를 경험했던(또는 하고 있는) 여성들의 목소리는 너무도 다양하다. 성매매 자체도 단일한 형태가 아니기도 하고. 어떤 이는 감옥과도 같았던 그 곳을 탈출하고 싶어하고, 지난 과거를 지옥처럼 기억한다. 또 어떤 이는 내가 하고 있는 노동을 긍정하며, 그 곳에 대한 사회적 낙인과 '구제'를 거부한다. 그들이 이렇게 다르게 성매매를 경험, 기억하는 것은 당연하다. 성노동이냐 성매매냐, 합법이냐 불법이냐, 자발이냐 강제냐 이런 이분법 속에서, 서로 다른 목소리들이 비난받는 것이 정말로 안타깝다. 민성노련의 한 성노동자는 이 책을 여성부의 홍보책자쯤으로 비난하지만, 그런 방식이 난 참 맘에 안든다. 그 일을 '타락한 것' '더러운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분명 잘못된 사회적 편견이지만, 그것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는/성매매를 아픈 기억으로 갖고 있는 여성들도 분명히 있다. 그런데 지금 우리 사회는 다른 목소리와 차이들의 존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다양한 목소리들 중, 어느 하나만이 진짜라고, 다른 쪽은 진실이 아닐거라고 한다. 설문조사라는 것도 그들이 가진 '입장'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그리고 정부의 정책은 그들 중 어느 하나만을 듣고 있으니, 다른 한 쪽의 여성들이 반발하는 것도 당연한 일일 것이다.

 

 성매매 집결지 이외에도 음성적으로 존재하는 성매매여성들의 다양한 경험이 가시화되어야 하다. 더 많은 목소리들이, 더 다양한 목소리들이 밖으로 드러나고 표출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그녀들의 생존과 안전을 보장할 수 있는 방안도 고민 될 수 있지 않을까.

 

 

 

[관련된 글]

 

한국인권뉴스에 기고된 성노동자의 글(민성노련)

http://go.jinbo.net/commune/view.php?board=cool&id=26329&page=1&s2=subject&s_arg=너희는

 

일다에 실린 ‘살림’의 활동가의 글

http://www.ildaro.com/Scripts/news/index.php?menu=ART&sub=View&idx=2006092600004&art_menu=1&art_sub=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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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네사 아르망



 

드디어 '읽어야하는' 책을 내팽겨쳐두고 '읽고싶은' 책을 읽고 있다.

 

이네사 아르망.

러시아의 여성혁명가가 아닌, '레닌의 연인'으로 기억되는 그녀.

저 대문짝만한 빨간 글씨가 거슬리는 표지.

누군가의 부인, 연인, 엄마가 아닌 여성의 이름은 없는걸까.

 

 

이네사는 부르주아 출신의 계급적 배경을 갖고 있었다. 실은 첫번째 결혼했던 알렉상드르가 공장을 갖고 있는 자본가였다. 둘 사이엔 네 아이가 있었다. 참 신기했던 것은 이네사가 11살이나 어린 알렉상드르의 동생(시동생)과 연인이 되어 함께 살고 애까지 하나 낳았는데, 그 남편이 이를 이해한 것이다. 그리고 이후에 이네사가 곤경에 빠질때마다 알렉상드르가 도와준 걸 보면, 지금 우리네 시각에서 봐도 선뜻 받아들이기 힘들다.

 알렉상드르의 동생, 볼로댜가 병으로 죽고 난 후, 이네사는 레닌을 만난다. 레닌은 이네사를 신뢰했고 그녀에게 많은 중요 업무들을 부탁했다. 이네사와 레닌은 서로를 사랑했고, 나디야(그룹스카야)도 이 관계를 받아들였다한다. 근데, 정말 받아들인걸까? 받아들일수밖에 없었던 걸까.

 사실은 그전에 레닌에게 떠나겠다했지만, 레닌이 붙잡았고 나디야는 이를 받아들였다. 레닌과 나디야의 관계는 사랑하는 부부의 관계라기보단 신뢰하는 동지 사이 정도로 보인다. 사랑이 혁명의 대의에 장애요인이 된다고 생각한 레닌은, 결국 이네사에게도 결별을 선언하고, 이 일로 이네사는 매우 힘들어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에도 둘은 계속 동지적 관계를 유지했고, 파니 카플란이 레닌을 저격했을때 다시 둘은 연인이 된다.

  10월 혁명 이후 이네사는 모스크바 소비에트 인민위원으로, 중앙위원회 여성분과 위원장으로서 많은 활동을 벌였다. 제 1회 국제여성공산주의자대회를 개최한 것도 대표적인 활동이다. 이런 부분에서 이네사와 콜론타이는 '라이벌'이기도 했다. 성격도 많이 달랐던 것 같고. 1920년 일에 지친 그녀가 요양을 떠났다 돌아오는 길 콜레라로 세상을 떠난다. 이네사는 레닌을 울게 한 유일한 여성으로 기억된다.

 

 

물론 책을 읽어보면 그녀의 삶에서 많은 부분을 차지한 레닌 얘기가 많긴 하다.

(저자는 <봉인열차>라는 책을 쓰다가 이네사에 대해 알게된 마이클 피어슨이란 사람인데.

혁명가들과 혁명을 이상적인 혹은 실패한 것으로 보는 '관점'과 '편견'을 감안하더라도

레닌이 정말 성격이 안좋았던 인간이라는 건 진실인 듯하다. 하하.)

하지만 레닌이 없다면 그녀는 기억될 가치가 없는 혁명가였을까. 결코 그렇진 않을텐데.

 

 

콜론타이도 마찬가지이지만. 러시아의 많은 여성혁명가들은 레닌을 비롯한 남성혁명가들의 여성문제에 대한 '무관심'과 '무시'에 대해 외롭게 분투했다. (6호가 나올때까지 여성노동자 신문인 '라보트니차'에 글 한편 안 실었던 레닌에게 어찌 분노하지 않으리오!)

여성주의나 여성문제에 대한 관심은 '저절로' 생기는 것이 결코 아닌 것이다. 다시 그와 같은 역사가 반복되지 않으려면. 지금보다 더 많은 여성들이 더 많이 문제제기 하고, 그들의 '편견'과 맞서싸워야 할 것 같다.

 

 

책을 덮고 나니, 왠지 그녀의 일생이 서글프게 느껴진다. 늘 사랑에 목말랐고 외로워했던 아픔 때문일까. 아니면 평생을 그렇게 치열하게 살고도 잊혀진 안타까움 때문일까.

 

 

 

몇가지 기록해두고 싶은 구절들.

 

<이네사는 레닌이 어떤 남성 동지에게도 하지 못하는 말을 자신에게는 털어놓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개인적 신뢰와는 달리 혁명 과업에서 자신이 수행하는 일들이 과소평가 받고 있다는 느낌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런 느낌은 그녀만의 생각은 아니었다. 로자 룩셈부르크, 알렉산드라 콜론타이 등과 같이 일생을 혁명에 바친 여성들도 그녀와 같은 견해와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여성문제에 관한 모든 논쟁과 연설들이 시사하는 교훈은 법은 바꿀 수 있지만 오랜 세월 자리잡아 온 관습은 쉽게 바꿀 수 없다는 것이다.>

 

<1926년 이후 이네사는 대중의 기억에서 사라졌다. 이것은 부분적으로는 이제 신 같은 이미지로 묘사되는 레닌과 그녀와의 의심스러운 관계 때문이기도 했지만, 젊고 부유한 여성이라는 그녀의 배경 때문이기도 했다. 이런 이력은 프롤레타리아 혁명 이미지와 부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네사가 개선하려고 그처럼 열심히 일했던 여성주의적 진보들은 여전히 가부장제 사회였던 러시아에서 가부장제의 반동으로 이내 사라져버렸다. 엘우드는 "이네사는 '생각으로 들끓는'-스탈린에게는 조금도 필요하지 않았던 지적인 여성 공산주의자-사람 중 한 명이었다."고 썼다. 1930년에는 탁아소와 공공 식당과 세탁소가 사라졌다. 자유이혼법에도 불구하고 많은 여성은 한때 사라져야 할 부르주아 결혼이라고 조롱당하던 기존의 결혼제도로 되돌아가길 강요당했다. 콜론타이의 전기 작가인 베아트리체 판스워스가 논평했듯이 "가족의 소멸은 그저 또 다른 사회주의의 신화가 되어버렸다.">

 

 


 

Inessa Armand

이네사 아르망

그녀의 이름을 기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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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욕망은,

며칠 전 <여성의 근대, 근대의 여성>을 텍스트로 이야기가 오고갔다.

 

나혜석, 윤심덕과 같은 신여성에 대해서는 솔직하게 그동안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냥 이름만, 그리고 그 유명한 동반자살설 정도는 어디서인가 본 정도.

책을 보고

그녀들을 자아분열로 몰고 가게했던 고통과, 사회적 비난들은

단순히 그녀들에게 '부르주아'의 계급적 특권 딱지를 붙이기 전에

다시금 신여성과 근대에 대해 생각하게 만들었다.

근대성 규정에 대한 페미니즘적 제기에 대해선 좀 더 고민해봐야겠지만.

 

문제는 '된장녀'와 관련된 것이었다.

지난 시간, 나는 된장녀 논란에 대해 여성에 대한 비난이라는 측면이 강하지만

요즘 20대가(남/여 할것없이) 미국의 중산층을 모델로 삼고 일종의 신분상승을 꿈꾸며

그들의 옷, 그들의 가방, 그들의 커피까지도 동경하는 현실에 대해 비판적이라고 말했다.

그들 개인에 대한 비난보단, 그렇게 만드는 사회에 대한 이야기였지만 어쨌든.

 

그런데 한 친구는 지난 시간 내 말이 '불편했다'고 털어놓았다.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난 내가 된장녀라고 생각해."

그 순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충격이 있었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 모두, '된장녀'논란을 이야기하면서도

내가 아닌 '타자', '사회적 현상'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했었으니까.

 

친구의 말을 간단하게 요약해보자면, 이러했다.

"난 명품 보면 예쁘고 갖고 싶고, 나중에 돈벌면 갖고 싶은거 다 살꺼야.

예뻐지고 싶어 성형수술 할까도 생각했어. 그런데 그게 왜 잘못됐지?

여성주의하는 사람은 그렇게 하면 안되는거야?

넌 욕망이 없니? 그걸 억누르면서 살아야한다면 고통스럽지 않니?

난 자기 욕망을 긍정하고 실현하는 여성주의자가 되고 싶다"

 

 

자기 욕망이라. 자기 욕망이라.

그 문제에 대해 한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실은 하루에도 몇번씩 생각하고 있는지도.

운동을 하면서는 일종의 '윤리의식'과 '자기검열'로 억눌렀던 부분도 있고.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어떻게 보였을지 모르겠지만)

솔직히 만나면 부담스런 친구들을 끊어가면서, 나 자신을 통제했던 적도 있었다.

견물생심이라고 안보면 욕망도 안생기는게 사람 마음이니까.

나한테는 그게 차라리 맘 편한것이기도 했다.

 

지금도 여전히 개인들의 욕망을 집단적으로 획일적으로 생산하고 부추기는 건

자본주의의 사회적 문제라고 생각하지만

'나의 욕망'에 대해서는 좀 더 생각을 해봐야겠다.

정이현의 소설을 가장 좋아하는 그녀와 나의 '차이'에 대해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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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답답했던 날

로젤루핀님의 [KTX 여승무원 투쟁, 대안은 과연 무엇인가? _1] 에 관련된 글.

돌아와서 내내 우울했던 날.

알바 땜에 끝나기 전에 나가긴 했지만.

그날은 정말이지 나의 어중이떠중이 같은 위치와,

그녀들과 나 사이의 간극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한 날이었다.

 

여성운동 내에서도, 노동운동 내에서도

사각지대처럼 존재하는 여성노동에 대한 고민은 많지만

어디서부터 어떻게 풀어나가야할지.

막 그러면서.

 

아무튼 난 후기를 올릴 엄두도 내지 못했는데.

이 분 글을 보니 다시 그날이 떠오르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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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이야기

까치님의 [결혼이야기 1-여남의 다른 이야기 1] 에 관련된 글.

같은 활동가끼리라고 해도, 여자와 남자로서 느끼는 '감수성'이 다르다는 걸 종종 아니 자주 느낀다. 어떤 상황에서의 남성 동지들의 '무던함' '침착함' 등등의 반응을 보고, '무던하지 못하고, 감정적으로 화를 내고 있는' 내 자신을 비교하곤 했었다. 항상적으로 차별과 폭력에 노출되어 있는 여성들의 감수성을 이해하기 위해선, 그 누구라도 정말로 많은 노력과 대화가 필요한 것 같다.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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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적 가족형태 비판 :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의 현재성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의 현재성>은 지금이 2006년이니까, 정확하게 3년전에 사서 본 책인데. 이제야 다시 본다. 점점 기억력이 떨어지나보다. 봤던 책도 안본거 같고, 안본것도 본 거 같다. 과천연구실 책은 집에 몇권이 있기 하지만, 여러가지 이유로 그동안 들이 보지 않아서. 하나씩 꺼내보고 요약을 해두어야지.

 

 책은 근대적 가족형태 비판과, 쉴라 로보쌈의 자료(마르크스 박사에게 보내는 가상의 편지/마르크스 가족의 가려진 사생활) 두가지 번역이다. 아, 여기에서 말하는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은 네가지 분류에서 mf에 국한되지 않는 넓은 의미로 사용한 것이다.

 

 몇가지만 메모해두고, '근대적 가족형태 비판' 요약.

 

- 프로이트에 대한 해석

- 가족임금체계에 대한 평가

- 알튀쎄 이론이 페미니즘에 미친 영향, 철학적 비판

- 가사노동논쟁의 성과와 한계

- 가족에 대한 역사적 분석의 의미

- 뤼스 이리가레의 '여성권'

 

 



:: 엥겔스의 기여와 한계

<기원>의 의의는 역사적으로 변화해온 가족형태를 분석하여, 기존의 초역사적 분석에 대한 유의미한 비판을 제공했다는 것이다. 엥겔스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여성 억압을 bg 가족에 한정해서 보았는데, 왜냐하면 pt의 경우 남성지배의 물적 토대가 존재하지 않고 여성의 일반적 고용상승이 평등의 조건이 되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여성들의 사회적 생산에로의 완전한 통합을 여성해방의 필수적 조건으로 보았다. 그러나 엥겔스의 예견과는 달리 노동시장에 편입된 여성들은 저임금과 불안정한 고용, 가사노동에의 이중부담으로 노동운동에서도 주변화되었다. 책에서는 이후에 나오지만, 가족임금체계를 통해 오히려 부르주아적 가족 모델을 받아들이게 된다. 한편, 콜론타이는 '새로운 가족형태, 성도덕, 자유연애'와 같은 문제를 제기하기도 했다. 1960년대까지 마르크스주의에 있어 여성문제는 엥겔스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1960년대 여성해방운동의 부흥과 함께 '가사노동 논쟁'이 제기되었다. 논쟁을 통해 여성문제에 대한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의 접근 자체를 재검토 하기 시작, 성과 계급의 인과적 연관성에 대한 논쟁이 일어난다. 이에 대해 독자적 가부장제론을 제기한 급진주의 페미니즘과, 맑스주의와의 조화를 꾀한 사회주의 페미니즘이 등장한다.(가부장제론의 초역사성과, 사회주의 페미니즘의 이론적 공백이 한계로.)

 

 

:: 자본주의적 재생산과 가족형태

 가사노동 논쟁 등에서 인간의 재생산에서 여성이 담당하는 역할에 주목하게 되면서, 재생산의 계기를 간과한 고전 마르크스주의는 남성적 마르크스주의로 비판받는다. 그리고 생산과 재생산의 이분법을 거부하고, 생산의 두 계기들로 이론화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이런 접근들은 대부분 알튀쎄의 영향(재생산, 이데올로기 개념 등)이 크다. 대표적으로 시큼(Seccombe)은 어떤 가족형태도 주어진 생산양식과 분리할 수 없으며,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보았다. 즉, 생산양식은 가족형태를 구성하지만, 가족형태 역시 생산양식의 구성과 발전에 능동적으로 작용하는 요소이다.

 급진주의 페미니즘에서 사용하는 초역사적 가부장제 개념이 아니라, 일 가족 내에서의 가부장적 특권을 볼때, 농민가족에서 노동자가족으로의 이행은 생산수단의 박탈, 즉 가내권력의 상실을 의미한다. 또한 여성, 아동노동의 편입과정은 엥겔스가 예견한 노동자계급 내에서의 성적 평등을 보여주는 듯 했다. 그러나 '가족임금체계'의 확립은 상황을 변화시켰다. (가족임금에 대해서는 하트만과 같은 페미니스트들은 자본가과 남성노동자의 공모로 보고 여성억압적인 것으로 비판한다. 린지저먼의 글에서 알수 있듯이 대부분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노동자계급의 연대와 세대간 연속성을 보장함으로써 노동자 계급 일반의 이익에 봉사하는 것으로 본다.) 결론적으로 자본주의의 이행이 새로운 물적 토대 위에서 자녀관계와 부모-자식 관계를 변화시켰으나, 이것이 가부장제의 최종적 소멸을 가져오지는 못했고, 가족임금체계라는 새로운 토양 위에서 재구성되었다. 임금형태의 개인화는 자본주의 발전의 불가피한 결과였으나, 남성 생계부양자 규범의 승리는 불가피한 것으로 볼 수 없다.

 

 

:: 가족형태와 젠더 이데올로기

 바렛(Barrtte)은 가족임금의 도입과정에서 '젠더 이데올로기'의 역할 강조. 가족임금은 이데올로기 차원에서 부르주아가 확립한 가족에 관한 헤게모니적 정의들을 노동계급이 수용한 결과로 본다. 이러한 젠더 이데올로기는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에 의해 자동적으로 생산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구성되는 것이다. 그러나 정작 가족 안에서 진행되는 젠더이데올로기 과정에 대해 분석하지 못함.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 입장에서 정신분석학을 재평가하는 계기가 된 것이 알튀세의 이데올로기 이론이다. 대표적으로 미첼(Mitchell)은 여성의 지위가 생산과 더불어 재생산, 성욕, 사회화에 의해 중층결정된다고 주장. 가족은 경제적 기능 뿐 아니라 이데올로기적 기능과, 사회적 생물학적 기능을 수행하기 때문에, 사회주의가 경제적 단위로서 가족을 종말시킨다 하더라도 이데올로기적 기능과 사회적 생물학적 단위로서 가족을 폐지시킬 수 없다. 미첼은 기존 페미니스트들의 비판과 달리, 라캉의 재해석에 근거하여 프로이트를 긍정적으로 파악했다. 이에 대해 이리가레는 정신분석학이 무의식적 환상들이 현존하는 가부장적 사회질서를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가부장적인 것으로 파악했다.

 

 

:: 근대적 가족형태의 역사 

 빅토리아적 가족에서 아메리카적 핵가족으로.

 

빅토리아적 가족 : 자본주의의 발흥과 함께 부르주아는 새로운 가족 구조를 확립시킨다. 남녀간의 엄격한 역할 배분이 특징이다. 여성성과 남성성, 그리고 아내의 역할이 가정을 중심으로 재정의. 부모-자식 관계에서도 감정적 친밀성이 중요해지며, 아동기가 새롭게 발명되면서 모성이데올로기가 형성. 결혼은 낭만적 사랑이라는 새로운 관념.

 

아메리카적 핵가족 : 자본주의 초기 출현한 가족에 대한 부르주아적 관념은, 가족임금체계를통해 노동계급에게 이식되기 시작한다. 빅토리아 가족이 이상화한 낭만적 사랑을 동반자적 사랑으로 대체하고, 성애적 부부관계를 중심으로 구성된다. 1960년대말 아메리카 법인자본주의의 위기와 더불어 가족임금 체계가 위협받게 되면서, 남성 생계부양자 가족은 더이상 지배적 가족 형태일 수 없게 되었다. 동반자적 결혼이 안고 있는 모순(남녀간의 성적 일치라는 이상) 역시 아메리카적 핵가족을 유지하게 어렵게 만들었다.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스트들의 분석은 근대적 가족형태의 딜레마들이 경제적, 사회적 재생산의 일반적 위기로부터 발생한 것임을 보여준다. 현재 진행중인 가족의 위기는 가족관계를 넘어서는 사회경제적 구조의 총체적 위기의 일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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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을 팝니다

새벽길님의 [체 게바라의 사진] 에 관련된 글.

 

새벽길님의 글을 보니, 일전에 읽었던 <혁명을 팝니다>라는 책이 생각난다. 스타벅스 컵 안에 체게바라의 얼굴 그려진 커버의 책.

 

책의 저자들의 관점 자체는 나의 것과 일치하지 않았지만,(다원주의의 불가피한 결과가 시장경제 체제이고, 사회주의는 다원주의와 양립할 수 없다고 생각하며, 체제 내의 재분배에 대한 기대등) 반문화에 대한 비판만큼은 괜찮고 커트코베인, 버켄스탁, 바디샵 등의 다양한 예가 재미있는 책이었다. 반세계화 운동에 대해서도 관점은 다르지만 시사하는 바도 있었고.

 

재미있는 구절이 있었는데,

"지난 50년간 불온한 것으로 취급받은 항목들을 들어보자. 담배 피기, 남자의 장발, 여자의 짧은 커트머리, 턱수염, 미니스커트, 비키니, 헤로인, 재즈, 록, 레게, 펑크, 문신, 낙서, 서핑, 스쿠터, 피어싱, 얇은 넥타이, 노브라, 동성애, 대마초, 찢어진 옷, 피임, 포스트모더니즘, 군화, 인종간 섹스. 지금은 브리트니 스피어스의 뮤직비디오에서 모두 볼 수 있는 것들이다."

 

이 책의 저자들은 소위 반(反)문화 운동이 오히려 지난 40년간 소비 자본주의를 추진해온 주요 동력 가운데 하나였다고 비판한다. 반문화 운동에 따르면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비판은 피상적인 것이며, 전통적인 좌익정치 역시 제도에 불과하다. 그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일상을 파고든 문화, 제도 그자체이다. 의식화를 강조한다는 점에서 페미니스트 운동이나, 한편으로는 무정부주의와도 맞닿아있다.

 

"소비주의에 대한 반문화 비판, 소비의식을 날조된 순응의 형태로 분석하고 따라서 지위 재화와 구별에 대한 추구가 소비자본주의의 추동력이라는 사실을 완전히 간과한다. 그래서 그들이 내놓은 해결책-개인의 복장 및 스타일을 통한 반란-은 새로운 반란 소비자들의 경쟁목표가 될 완전히 새로운 일련의 지위 재화를 창출함으로써 오히려 상황을 더 부추긴다. 지위를 얻기 위한 투쟁이 쿨에 대한 추구로 대체되었지만 경쟁의 기본 구조만큼은 그대로다."

 

체게바라가 불티나게 팔려나갈 때, 참 자본주의는 웃기는 구나, 뭐 그런 생각을 했다. 자본주의 체제의 심장부를 겨누지 않는 이상, 자본은 저항도 혁명도 반란도 반문화도 새로운 상품으로 새로운 시장으로 개척해나가는 것이다. 어제의 대안을 오늘의 주류로 포섭하는 것, 무서운 자본주의의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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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력을 노래한다?

  plsong.com의 민중가요 감상실에는 Deadly TaeKwonDo bOi 라는 밴드의 곡, 8곡이 올라와있다. 그런데 그 노래를 클릭하는 순간 나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이지 이렇게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떨리고 있다. 노래의 가사를 보고 싶은 분들은 아래 '계속보기'를 누르셔도 좋다. 공개된 포스트라 단지 제목을 보고 클릭했다는 이유로, 저런 온 가사가 성폭력적이고 여성비하적인 노래를 봐야만 하는 것도 또다른 폭력일테니까, 보기 싫은 분들은 보지 않으셔도 좋다.

 

 더 기가 막힌 것은 이런 노래가 마초들을 비꼬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것으로 정당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후배가 하는 원맨밴드인데요.. 마초이즘에 물든 극우펑크밴드(를 포함한 모든 마초들;)를 비꼬는 노래라고 하더라구요;; 곡조의 우울함으로 가사를 반어적으로 해석이 어쩌고... 사실 진짜 녀석의 생각은 저도 잘 모릅니다만...ㅡㅡ;

-답글 중

 

노래의 참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순간 당신들도 그토록 싫어했던 꼰대가 됩니다. 단어에 집착하지 맙시다. 단어는 기호에 불과한데..

-답글 중


마초들을 비꼬기 위해서 이런 성폭력으로 가득찬 노래를 불러야만 한다는 것인가? 그것이 표현의 자유와 가사의 반어적 의미로 정당화 될 수 있는 것인가?


그리고 이 노래가 올라온 이후, 감상평에는 많은 사람들의 문제제기가 이어지고 있다. 감상평에도 여러 답글을 통해 여성동지들이 '불쾌감'을 토로하며 삭제를 요청하고 있고, 요청게시판에도 삭제요청 글이 올라와있다.


Deadly TaeKwonDo bOi 노래를 삭제해주시기 바랍니다.

앞에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노래 제목과 가사가 성폭력적입니다.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는 노래 제목,여성을 비하하는 욕설로 가득찬 노래 가사. 민중가요 감상실을 클릭할 때마다 마주쳐야 한다는 것이 정말 불쾌합니다. 이 노래 속에서 쏟아져 나오는 가사들을 듣고 모멸감을 느끼게 될 지도 모르는 여성 동지들은 생각도 안 하십니까?

-김재영 님의 글 중


그러나 피엘송닷컴의 운영자는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이번은 쉽지가 않군요. 삭제하지 않는 쪽으로 마음이 굳혀진 것은 창작의도에 더 많은 비중을 두었기 때문입니다.저를 반여성주의자, 마초 라고 비난하셔도 어쩔 수 없습니다.여성주의에 입각하여 해석하면 들을만한 노래가 별로 없을 것입니다. 많은 노래들이 가사를 수정하여 재녹음되지 않은 노래들이 많으니까요.물론 정도의 차이, 노골적인 가사 등의 차이가 있지만요.님이 예로 드신...'노동형제'라는 단어가 들어간 노래들이 '노동동지'로 바뀌어 불리우고 있을지는 모르나, 바뀌어 녹음된 노래는 없습니다.오래된 음원이기 때문이죠.문제제기를 하시려면 과거 음원들까지 모두 문제제기 하셔야 하는 것이 맞다고 말한다면 제가 오버하는 것일까요? 운영자 입장에서는 그렇습니다.과거 음원에 대해서도 분명 같은 문제제기가 가능하고, 그것을 삭제하는 기준을 세우는 것은 매우 주관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다행히 PLSong.com에서는 창작자의 요청 또는 창작자와의 협의를 제외하고는 노래를 삭제한 적이 없습니다.이번의 경우에도 그런 맥락을 이어가려고 합니다.불쾌해 하는 많은 분들이 계시다는 것이 미루어 짐작되지만, 운영자의 입장을 이해해 주시길 부탁드리겠습니다.


결국 많은 여성들이 이 가사를 보는 것만으로도 불쾌감과 모멸감을 느끼고 있는데도, 그래서 삭제 요청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첫번째로 창작의 의도가 마초들을 비꼬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그리고 여성주의에 입각하여 해석하면 들을만한 노래가 별로 없기 때문에, 이 노래는 여전히 민중가요 감상실에 떡하니 버티고 있다. 그리고 지금 이순간에도 클릭하고 성폭력적 가사에 놀라는 사람들이 또 생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노래와 그를 둘러싼 반응들을 보면 나는 두가지 사건이 떠오른다. 첫번째는 잘 알려진 고 윤금이씨의 사진전시와 관련된 논의이며. 두번째는 잘 알려지지 않았기에 조금 길게 서술해보겠다. 학내 강의실 성폭력(교수들의 언어 성폭력)에 대해 반대한다는 한 진보단체의 학생들이, 교내 곳곳에 교수들의 언어성폭력 문구만을 피씨로 써서 거는 일이 있었다. 두가지 사건의 공통된 점은 바로 이것이다.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 좀 더 '자극적인' '적나라한' 사진/문구를 사용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진보를 자처하는 그들이 한 행동은, 그러나 동시에 수많은 여성들에게 사진/피씨를 보는 것만으로도 불쾌감을 불러일으킴으로서 또다른 성폭력을 재생산하고 있었다. 

 

피엘송닷컴의 노래 역시 마찬가지이다. 나는 그 밴드가 성폭력에 반대하는 사람들인지조차 의심스럽지만, 여성을 성적으로 비하하고 대상화하며, 온갖 욕설이 난무하는 이런 노래는 어떤 식으로 어떤 위대한 목적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 또한 지금 그 노래가 민중가요 감상실에 등록이 되어있다는 것만으로도, 많은 여성들에게 불쾌감과 성폭력의 공포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 노래는 즉각 삭제되어야 한다. 그것이 더이상의 성폭력의 재생산을 막아내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리고 공식적으로 사과를 요청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더하자면, 피엘송 운영자가 이야기했던 것처럼 기존의 민중가요는 反여성적인 내용들로 가득하다. 비단 '노동형제'로 상징되는 여성배제적인 가사 뿐만이 아니라, 여성은 오직 모성이데올로기를 상징하며 전형적인 성별분업을 반영하는 노래들을 곳곳에서 볼수 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노래가사를 바꾸어 부르는 작은 실천으로부터, 반여성적인 가사와 그것을 부르는 민중가수에 대한 문제제기를 끊임없이 해온 동지들이 있었다. 지금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그러한 문제의식을 확장시키는 실천이지, 그것을 '과거의 것'으로 묵인하는 것이 아니다.



지랄 떨어봤자 너넨모두 병신
빨간옷 입은 새끼들은 모두병신
친북좌익 새끼들도 모두모두 병신
레즈비언 썅년들도 모두모두 병신
씨발년 너 말이야 너

-국가폭력 기념일

 

남들이 나를 섹스머신이라 부르지
하지만 난 여자 가슴도 만져보질 못했네
남자가 되려면 사창가에 가야해
그전에 사람이 되려면 군대도 가야하지
사실 난 엠티가면 떼씹한다길래 대학도 갔어
하지만 떼씹은커녕 가슴도 못 만졌지
-사나이 여자 가슴도 못 만졌네

 

나는 남자라네 나는 한다면 하는 사나이 강간을 하고 도망간다네 하면 된다 배추란 포기를 셀때나 하는 말이다 나는 남자라네 강간을 하고 도망간다네 나는 존나 강한 사나이 나는야 진짜 사나이 강간을 하고 도망간다네 나는 남자라네 나는 한다면 하는 사나이 강간을 하고 도망간다네 하면 된다 배추란 포기를 셀때나 하는 말이다 (chrous) 나레이션: 사나이 대장부 이땅에 태어나서 못할게 그 무얼쏘냐 무지한

-나는야 한다면 하는 사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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