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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장. 미술의 위기(16세기 후반 유럽) 2

▲ 도메니코스 테오토코풀로스(Domenicos Theotocopoulos : 1541?-1614) ▼

- 이 사람은 “보통” “간략하게 ‘그리스인’이라는 의미의 엘 그레코(El Greco)로” 불렸는데, “그리스 크레타 섬 출신의 화가”로서 “16세기의 화가들 중에서 틴토레토의 화법을 한층 더 밀고 나간 사람”이다. (371쪽)

- 엘 그레코가 베네치아로 갔다가 스페인의 톨레도에 정착한 이후에 “자연적인 형태와 색채를 대담하게 무시하고, 감동적이고 극적인 환상을 강조하는 데 있어서 엘 그레코가 틴토레토를 능가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리스와 마찬가지로 스페인에는 아직도 미술에 관한 중세의 이념들이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373쪽)

- “도판 238(<요한 묵시록의 다섯 번째 봉인의 개봉>, p.372)은 그의 작품 중에서 가장 놀랍고 흥미진진한 것 가운데 하나다.” (373쪽)

- “흥분된 몸짓을 하고 있는 나체의 인물들은 하늘에서 내린 선물인 흰 두루마기를 받기 위해서 무덤에서 일어난 순교자들이다. 제아무리 정확하고 빈틈없는 소묘력을 가진 화가라 할지라도 성인들이 이 세상의 파괴를 요구하는 최후의 심판날의 그 무서운 광경을 이처럼 무시무시하고 실감나게 표현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373쪽)

- “틴토레토의 한 쪽으로 치우친 비정통적인 구성 방법에서 엘 그레코는 많은 것을 배웠을 것이고 또 파르미자니노의 기교를 부린 <마돈나>(도판 234, p.365)에서와 같이 인물을 길쭉하게 그리는 매너리즘을 받아들였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373-4쪽)

- “그의 작품은 믿기 힘들 만큼 매우 ‘현대적’으로 보임에도 불구하고 동시대의 스페인 사람들은…… 반감 같은 것은 가지지 않은 것 같다.” (374쪽)

- “그의 가장 위대한 초상화들(도판 239 <펠릭스 오르텐시오 파라비시노 수사>, p.373)은 티치아노의 초상화(p.333, 도판 212)에 비견될 수 있다.” (374쪽)

 

 

▲ 북쪽(독일, 네덜란드, 영국 등) 미술가들의 위기 ▼

- “남유럽의 미술가들은 새롭고 놀라운 수법으로 그림을 그리는 문제와 씨름하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나 북유럽에서는 회화가 계속해서 존속할 수 있느냐 없느냐는 심각한 문제와 부딪치고 있었다. 이 커다란 위기는 종교 개혁에 의해서 초래되었다. 많은 신교도들은 교회 안에 성인들의 그림과 조각상을 두는 것을 반대하고 그것을 구교의 우상 숭배로 간주했다. 그래서 신교 지역에 사는 화가들은 그들의 가장 큰 수입원, 즉 제단화를 그리는 일을 잃게 되었다.” (374쪽)

- 또한 거대한 제단화나 프레스코화를 그린다는 것은 캘빈 교도들에게는 일종의 사치로 여겨졌다. “그리하여 화가들의 정상적인 수입원으로 남게 된 것은 책의 삽화나 초상화 정도였다. 과연 그것만으로 생계를 꾸려나갈 수 있었을지 의문이다.” (374쪽)

 

 

▲한스 홀바인(아들)(Hans Holbein the Younger : 1497-1543) ▼

- “우리는 이러한 위기의 영향을 이 시기의 가장 위대한 독일 화가인 한스 홀바인(아들)의 생애에서 볼 수 있다.” (374쪽)

- 도판 240(<성모와 마이어 시장의 일가>,p.375)을 살펴보자. “이 그림의 형식은 모든 나라에서 전통적인 것으로서, 우리는 이미 이런 형식이 <윌튼 두폭화>(p.216-17, 도판 143)나 티치아노의 <페사로의 성모>(p.330, 도판 210)에 적용된 것을 보았다. 그러나 홀바인의 그림은 이러한 종류의 그림들 중에서 가장 완벽한 것이라 할 수 있다.” (376쪽) 즉 완벽한 삼각형의 구도(이 삼각형의 구도의 원리는 중세 회화의 가장 기본적인 인물 배치 구도이다 ; 성모와 예수가 무대의 정중앙에 배치되어 있고 동일한 거리 내에 헌납자들의 가족들이 왼쪽에는 남성들로, 오른쪽에는 여성들로 배치되어 있다)를 나타내고 있다는 것이다.

- “고전적 형태의 감실(龕室)에 둘러싸인 고요하고 품위 있는 성모 양쪽에 헌납자의 가족들을 별 무리 없이 자연스럽게 배치해 놓은 방법을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조반니 밸리니(p.327, 도판 208)와 라파엘로(p.317, 도판 203)의 작품에서 볼 수 있는 가장 조화로운 구성을 상기시켜 준다. 세부 묘사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는 한편 인습적인 아름다움을 다소 무시하는 것으로 보아, 홀바인은 북유럽에서 화가 수업을 했음을 알 수 있다.” (376쪽)

- 도판 242(<리처드 사우스웰 경>, p.377)를 살펴보자. “홀바인의 이러한 초상화들에는 드라마틱한 것은 하나도 없고 사람의 눈을 끌 만한 것도 없으나 이 그림들을 오랫동안 들여다보면 모델의 마음과 인품이 드러나 보이는 것 같다. 홀바인이 그 인물에 대한 어떤 두려움이나 호의 없이 본대로 충실하게 그린 것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376-9쪽)

- “홀바인이 이 인물을 이 그림에 배치한 방법을 보면…… 전체 구성이 아주 완벽하게 균형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우리들에게는 아주 ‘알기 쉽게’ 보인다. 그러나 바로 그것이 홀바인이 의도한 것이었다.” (379쪽)

- 홀바인은 “그의 초기의 초상화에서는 인물의 배경, 즉 평소에 그 인물이 가까이 했던 것들을 통해서 주인공의 특성을 표현하려고 하였으며 세부를 묘사하는 그의 탁월한 솜씨를 여전히 과시하려고 했다(도판 243<런던의 한 독일 상인 게오르크 기체>, p.378).” (379쪽)

- “그러나 점차 나이가 들고 기법이 완숙해감에 따라서 그러한 트릭은 그다지 필요하지 않게 되었던 모양이다. 그는 자신을 내세우려 하지도 않았으며 또 초상 인물로부터 시선을 다른 데로 돌리게 의도하지도 않았다. 우리가 그의 그림을 높이 사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거장다운 절제 때문이다.” (379쪽)

 

 

▲ 니콜라스 힐리어드(Nicholas Hilliard : 1547-1619) ▼

- 홀바인이 죽자 독일어권과 영국의 회화는 쇠퇴하기 시작했다. 종교개혁 가운데서도 홀바인이 지켜낸 유일한 분야가 초상화인데, 이 초상화 분야에서도 “남유럽의 매너리즘 취향이 나타나고 홀바인 풍의 간결한 양식 대신에 귀족적인 세련과 우아함이 이상시되었다.” (379쪽)

- “이런 새로운 유형의 최고 수준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 “엘리자베스 시대의 젊은 귀족의 초상화(도판 244 <들장미 곁의 젊은이>, p.379)”인데, 이 초상화는 “윌리엄 셰익스피어와 동시대인이었던 유명한 영국의 화가 힐리어드가 그린 ‘세밀화’이다.” (379쪽)

- “아마도 이 세밀화는 청년이 구애를 하고 있는 숙녀에게 선물로 주기 위해서 그린 그림 같다.” (379쪽)

 

 

▲ 16세기 후반 네덜란드 미술의 상황 ▼

- 네덜란드는 해상 무역을 통해 일찌감치 부를 축적하였고, 이러한 부의 축적은 곧바로 상인계급, 즉 부르주아지를 경제적․정치적으로 급성장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급성장은 네덜란드가 다른 유럽 국가들에 비해 중세 가톨릭의 규제를 덜 받고 그만큼 자유로운 활동을 할 수 있게 만들었다. 다른 한편 종교 개혁이 가져왔던 엄청난 역사적 파장도 네덜란드에서는 그닥 큰 파장을 가져오지 않았다. 왜냐하면 종교 개혁은 부르주아지들이 깊숙이 연관된 개혁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역사적․시대적 배경은 네덜란드의 미술, 특히 회화의 영역을 다양하게 넓힐 수 있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 “유럽의 신교 국가 중 종교개혁이 불러일으킨 위기를 무사하게 넘긴 유일한 나라는 네덜란드였다. …… 그들은 초상화에만 매달리지 않고 신교 교회들이 반대하지 않을 주제를 찾아 그러한 모든 유형을 전문화하였다.” 신교 교회의 신도들 대부분은 상인계급, 즉 부르주아지였다. “일찍이 반 에이크의 시대로부터 네덜란드의 미술가들은 자연을 모방하는 데 완벽한 대가들로 정평이 나 있었다.” (380쪽)

- “따라서 더 이상 제단화나 기타 다른 종교적인 그림을 그릴 필요가 없어진 북유럽의 미술가들은 그들의 공인된 전문적 특기를 사줄 수 있는 시장(市場)을 발견하려고 애썼고, 또 사물의 외관을 묘사하는 데 있어서 엄청난 솜씨를 과시하는 것을 주된 목적으로 하는 그런 그림을 그리려고 노력했다.” (381쪽)

- 그림을 살 수 있는 부를 가지고 있는 계급이 부르주아지였고, 부르주아지는 자신들의 일상을 대상으로 그린 그림들을 선호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러한 “일상 생활의 장면들을 묘사한 그림들을 뒤에 가서 소위 ‘풍속화(genre painting)’라고 부르게 되었다. (381쪽)

 

 

▲ 피터 브뢰헬(Pieter Bruegel the Elder : 1525?-69, 아버지) ▼

- 브뢰헬은 “16세기 플랑드르 최대의 풍속화가”였다. (381쪽)

- 도판 245(<화가와 고객>, p.380)를 보면, 브뢰헬은 “뒤러나 첼리니에게”서처럼 “미술과 미술가의 존엄성을 중요”시했던 것처럼 보인다. 이 그림에서 화가의 뒤에서 “지갑을 만지작거리는” 고객(부르주아지)에 아랑곳하지 않고 붓을 들고 그림 작업을 하고 있는 화가를 묘사하고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381쪽)

- “브뢰헬이 주로 그렸던 그림의 ‘종류’는 농민들의 생활 장면이었다. 그는 농부들이 떠들썩하게 술잔치나 축제를 벌이고 일하는 모습을 즐겨 그렸다.” (381쪽)

- “브뢰헬이 그린” 풍속화 중에서 “가장 완벽한 것으로 시골의 결혼을 다룬 유명한 작품”은 도판 246(<시골의 결혼 잔치>, p.382)이다. (382쪽)

- 이 그림에서 “넘치는 기지와 뛰어난 관찰력으로 묘사된 이처럼 많은 일화들보다 더 감탄스러운 것은 브뢰헬이 비좁다거나 번잡스러운 인상이 전혀 들지 않게 그림을 구성하고 있다는 점이다. 틴토레토라 하더라도 이렇게 수많은 인물들이 가득 들어찬 공간을 브뢰헬만큼 교묘한 수단으로 더 실감나게 표현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383쪽)

- “식탁은 원근법에 의해서 뒤로 후퇴하고 있고, 인물들의 움직임을 배경에 있는 헛간 입구의 군중들로부터 시작해서 전경의 음식을 나르는 두 사람을 거쳐 음식을 받아 상 위에 올려놓는 사람을 통해서 다시 배경으로 돌아간다. 그런데 바로 이 음식을 옮겨 놓는 사람 때문에 우리의 시선은 곧장 조그맣게 그려졌지만 회면의 중앙을 차지하고 있는 흐뭇한 표정의 신부에게로 향하게 된다.” (383쪽)

- “이 유쾌한, 그러나 결코 단순하다고 할 수 없는 그림들에서 브뢰헬은 풍속화라는 미술의 새로운 왕국을 발견했다. 그 이후의 네덜란드 화가들은 이 왕국을 더 완벽하게 개척해 나갔다.” (383쪽)

 

▲ 16세기 후반 프랑스 미술의 상황 ▼

- “프랑스에서는 이러한 미술의 위기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다. 이탈리아와 북유럽 사이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프랑스는 양쪽의 영향을 모두 받았다. 프랑스 중세 미술의 굳건한 전통이 처음에는 이탈리아 미술의 유입으로 위협을 받았다. 프랑스 화가들은 네덜란드 화가들(p.357, 도판 228)과 마찬가지로 이탈리아 미술을 받아들이는 것이 대단히 어렵다는 것을 알았다. 프랑스 상류 계급이 마침내 받아들인 이탈리아 양식은 첼리니 유형(도판 233)의 세련되고 우아한 매너리즘 화가들의 양식이었다.” (383-4쪽)

 

 

▲ 장 구종(Jean Goujon : 1566? 사망) ▼

- “이탈리아 미술의 이러한 영향을 우리는 프랑스 조각가 구종이 만든 분수의 부조에서 찾아볼 수 있다(도판 248 <님프>). 이들 흠 잡을 데 없이 우아한 인물상들과 좁고 긴 면적에 인물을 적절하게 짜맞추어 넣는 방법에서 우리는 파르미자니노의 까다로운 우아함과 잠볼로냐의 절묘한 기교를 함께 엿볼 수 있다.” (384쪽)

 

 

▲ 자크 칼로(Jacques Callot : 1592-1635) ▼

- 칼로는 “틴토레토, 더 나아가 엘 그레코와 같이” “키가 크고 비쩍 마른 인물들과 예기치 않은 광경을 아주 놀라운 방식으로 결합하기를 좋아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수법을 구사하여 브뢰헬처럼 부랑자, 군인, 병신, 거지, 떠돌이 악사들의 생활 정경(도판 249 <두 이탈리아 광대>, p.385)을” 그렸다. (38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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