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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과 계급정치학>-1

이 글은 얼마 전에 공부했던 내용을 간략하게 정리해 본 것입니다.

< > 부분은 아래의 책 본문에 나와 있는 내용이고,

화살표(==>)로 된 부분은 제 생각을 간략하게 정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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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과 계급 정치학』(미셀 바렛 외 지음, 신현옥?장미경?정은주 편역, 여성사, 1995)

 

Ⅰ. 미셀 바렛 : 오늘날의 여성 억압

 

■ <맑스주의 페미니스트 분석의 몇 가지 문제점>

 

<“비록 자본가 계급 남성과의 결혼이 여성의 생활수준을 높일 수 있다 해도 그것이 그녀를 부르주아 계급의 일원으로 만들지 못한다. 그녀 자신은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못한다.…부르주아 남성의 부인들은 대부분 임노동자나 월급쟁이처럼 자신의 생계비를 벌기 위한 목적으로 결혼한다. 그래서 사실상 여성들은 (나이나 전문 직종의 훈련 부족이라는 추가적인 불리함과 함께) 본질적으로 존재해 온 프롤레타리아트이다.”(크리스틴 델피, The Main Enemy)>
(28쪽)

⇒가부장적 착취 체계 : 자본가 계급과 결혼한 여성은 자본가 계급의 일원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PT 계급의 일원으로서 PT이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가부장제 개념을 특정한 배경 하에 사용하는 방식은 최근의 이론 작업에서 상대적으로 드물어지고 있다. 오히려 최근에는 현대 자본주의를 ‘가부장제’로 좀더 일반적으로 묘사하려는 시도들이 많다. 이렇게 할 경우에 두 가지 중요한 문제가 생긴다. 첫째, 가부장제는 자본주의 관계의 조직과는 완전히 독립된 지배 체계로 이해되며, 따라서 이런 분석은 앞서 논의했던 생물학주의처럼 보편적?초역사적 양식으로 전락하게 된다. 자본주의 생산양식과의 관계에서 하나의 남성지배 체제로서 가부장제를 구성하려고 할 때, 이 개념은 자율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면서 경직성을 띠게 된다. 이런 문제는 최근에 유물론적 페미니즘에 정신분석학적 전망을 통합해 정식화해 보려는 복잡한 시도들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둘째, 가부장제를 현재 구성되어 있는 것으로 볼 때, 아버지의 지배로서의 가부장제와 남성에 의한 여성지배로서의 가부장제 사이에서 논의가 근본적으로 혼란을 일으키고 있다. 이런 문제들은 모두 가부장제 개념을 맑스주의 분석과 결합하여 사용하려는 최근의 시도들 가운데에서 종종 나타나고 있다.

질라 아이젠슈타인(Zilla Einsenstein)이 편집한 『자본주의 가부장제와 사회주의 페미니스트의 입장』(Capitalist Patriarchy and the Case for Socialist Feminism)은 이런 주제 하에 여성억압과 자본주의에 대한 몇 가지 흥미 있는 글들을 담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도 결국 대립적인 두 이론적 접근 방법을 화해시키는 방안에 대해서는 딜fp마에 봉착하고 있다. 아이젠슈타인 자신은 가부장제란 자본주의에 선행하는 것이며, 오늘날 ‘성역할에 기초한 남성권력’에 의존하고 있고, 또 핵가족 내에 제도화된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식의 정의에서 가부장제는 어느 정도까지 자율적인 체계를 형성하는지 불분명하다. 왜냐하면 아이젠슈타인은 가부장제가 자본에 기능적이라는 관점에서 “자본주의는 가부장제를 이용하며, 가부장제는 자본의 필요에  의해 규정된다”라고 단순히 언급하고 지나가 버리기 때문이다. 이러한 언급은 자본주의가 곧 가부장제이다라는 주장과는 병존할 수 없다. 실제로 아이젠슈타인은 가사노동을 자본에 기능적이라는 관점에 따라 매우 포괄적으로 분석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그녀는 가부장제 개념을 사용하면서도 ‘가부장제’를 자본주의로부터 분석적으로 독립시키는 문제를 여전히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다시 말해 자본주의에 외재적인 남성권력 체계로서 가부장제를 주장하는 쪽과 가부장적 조직관계가 자본에 기능적이라고 주장하는 쪽 사이에서 그녀의 분석은 동요하고 있다.>
(29~31쪽)

⇒ 맑스주의와 페미니즘의 결합은 단지 기능적 결합이라거나 (서로 독립적으로 병존하면서) 어느 쪽으로 환원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 둘은 동전의 양면처럼 서로 변증법적 관계에 있다(그런데 이것을 애초에 별개의 것으로 분리시켜 버린다면, 환원주의로 나아가는 것을 피할 수 없게 된다). 자본주의의 기초는 (현실적으로) 노동력을 재생산하는, 또는 새로이 생산하는 개별적 여성의 가사노동이다. 이 속에서 개별적 여성의 노동력은 착취되고, 사적인 것으로 타자화된다. 이러한 착취와 타자와의 해체를 통한 여성해방은 곧 자본주의의 기초를 해체하는 것과 직접적으로 연관된다. 즉 여성해방은 곧 노동해방과 직결된다. 이는 (이른바 정통 맑스주의라고 불렸던) 기존의 맑스주의가 노동계급을 남성?정규직 노동자로 암묵적으로 규정하는 것을 넘어서서 노동계급의 외연과 내연의 양 측면 모두에서 그 규정을 새로이 구성하는 문제와 연결된다.

⇒ 기존 맑스주의에서의 노동해방을 통해 여성해방은 이루어질 수 없지만, 여성해방을 통해서는 노동해방이 이루어질 수 있다.

⇒ ① 페미니즘(특히 이리이가레)이 처하고 있는 난점 - 여성과 여성과의 관계(연대)의 출발점을 어디서부터 잡을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별 말이 없다. 이와 관련해서는 학위 논문의 3장 1절에 나오는 상품 관계 도식과 연결하여 생각하는 것이 좋겠다.

⇒ ② 자본주의 생산양식과 질적으로 다른 생산양식을 통한 공동체 형성은 개별적 가족, 개별적 여성의 가사노동의 해체를 통한 여성의 주체화와 그러한 가사노동의 공공화?사회화를 통해 가능하다. 학위 논문 3장 1절에 나오는 상품 관계 도식을 참조해 보면 일단 보편의 자리에 오는 것이다.

 

<그러나 여성억압에 대한 맑스주의 분석에서 좀더 근본적인 문제가 되는 것은 환원주의이다. 환원주의란 여차저차한 현상이 어떤 경우에 나타날 수는 있지만 실제로 그것은 다른 조건에서만 설명될 수 있다는 식으로 주장하는 것이다. ‘여성의 억압은 자본에 기능적’이라는 주장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기능주의라기보다 오히려 환원주의이다. 이 경우에 성별 관계(gender relation)는 자본의 작용 결과로 환원되고 있다.>
(38쪽)

⇒ 환원주의적 설명에 따라 성별 관계가 자본의 운동 결과로 나타난다고 하는 것은 주체로서의 노동자 계급을 타자에 머물도록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이때 노동자의 의식은 ‘사물화된 의식’(즉자적 의식)에 머무르고 만다), 주체로서의 여성을 타자에 머물도록 한다. 이럴 경우 맑스주의 운동은 정체 상태에 빠지게 되고 말며, 결국 자본에 투항할 수밖에 없는 상태가 돼 버리고 만다.

⇒ 노동자의 이중적 모순 : 노동자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임노동자로서의 노동자와 비임노동자로서의 노동자 사이의 모순(이때 노동자는 자기모순에 빠지게 된다)은 → 계급과 젠더 사이의 모순으로 나타나며 → 이는 곧 자본주의의 모순이다.

⇒ 이러한 모순의 지양(해체)(지배와 억압의 지양)이 사회주의로 나아가는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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