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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열하광인 1>>(김탁환 지음, 민음사)에서 발췌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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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를 읽던 순간이 서책을 넘기듯 차례차례 떠올랐다.
순간은 여럿이지만 놀라움은 결국 하나다. 아무리 설명해도 이 책을 읽어 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지족하고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난폭하다. 스스로 활활 타올라 읽는 사람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까지 단숨에 삼키는 책이여!
긴 여정만큼이나 여행의 기록도 다양한 크기와 두께로 나뉘었다. 처음에는 여정을 따라 각 편을 차례차례 독파하려 했지만 이내 시간순으로 읽는 것이 무의미해졌다. 이 책은 위에서 아래로 흘러내리는 계곡물처럼 질서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 책은 혼돈을 일으키는 불꽃이다. 어느 대목을 읽든지 처음에는 뜻밖의 온기에 휘감겨 허리를 숙이고 콧잔등을 책에 댄다. 그러나 곧 두 눈과 열 손가락과 단 하나의 심장의 타들어 가듯 뜨거워진다. 허리를 젖히며 고개를 치켜들고 긴 숨을 몰아쉰다. 이것은 다르다. 지금까지 읽어 온 적당히 단정하고 감당할 만큼만 느낌을 담은 책이 아니다. 이 책은 읽는 이에게 어떤 배려도 하지 않고 성난 사자처럼 단숨에 목덜미를 깨문다. 그 참혹한 상흔을 입기 전과 입은 후가 어찌 같을 수 있으리.
책을 읽다가 문득 고개를 드니, 세상이 너무 평온하다. 평온한 세상을 살다가 이 책을 집으니 육중한 바위가 뼈마디마디를 찍어 누룬다. 불호령이 쏟아진다. 세상이 얼마나 혼돈에 휩싸였는데 감히 정리하려고 드느냐. 이미 정리되었다고 주장하는 이들부터 의심하고 침 뱉고 돌 던져라.
이 책에 담긴 사람, 사건, 사물 어느 것 하나도 지금까지 조선에서 의논한 적이 없다. 책을 덮으면 계속 자족을 이어 갈 수 있다. 그러나 각 편의 한 귀퉁이 몇 글자만 눈에 넣더라도 자족은 부끄러움으로 바뀐다. 열하까지 다녀오는 동안 보고 듣고 만지고 핥은 것들을 책에서 배우는 순간순간마다 가슴에 구멍이 뻥뻥 뚫린다. 답답함이 사라진 자리에 끝모를 허허로움이 밀려든다. 내 곁에는 아무도 없다. 있는 사람이라곤 책을 읽는 나 자신뿐이다. 지금까지 책을 읽는 내가 이렇듯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외로워 보였던 적이 없다. 슬퍼 보였던 적이 없다.
이 책은 거대한 파도처럼 혼돈을 만들어 나를 흔든다. 하늘과 땅의 광분을 멈추기 위해 눈을 질끈 감고 책을 덮지만 고요는 순간이다. 그 다음 대목을 읽지 않고는 잠도 오지 않고 밥도 먹을 수 없다. 책장 구석에 그 책을 쑤셔 넣고 도성 밖을 배회해도 혼돈에 끌리는 마음을 다독이기 힘들다. 행여 위로가 있을까 혼돈을 가라앉히는 비법이 있을까 읽고 또 읽지만, 이 책은 철저하게 혼돈만 이어간다. 그 혼돈은 쇠종처럼 무겁다가도 깃털처럼 가볍다. 웃음 한 송이를 꽃처럼 피워 문다. 각 편 말리에 닿아서 여백을 우두커니 보고 있노라면, 책이 묻는다. 이 다음 혼돈은 네 몫이야. 어떻게 할래?
그 물음이 무서워 다시 책을 펼친다. 악순환이다. 업보다. 시작도 끝도 없고 옳고 그름도 없다. 내 손에 잡힌 책과 그 책을 읽는 나만 있을 뿐이다. 그 사이엔 아무 것도 없다. 이것은 여행을 기록한 책이자 여행을 부추기는 책이다. 책이 다시 묻는다. 넌 이미 알고 있지? 나는 글자나 문장이 아니야. 서책이 아니야. 너와 나 사이에 정말 아무 것도 없다면, 너는 곧 나고 나는 곧 너야. 그러니 내 속으로 들어와. 한 글자 한 글자를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디며 여행을 시작해. 그것이 이 책을 읽는 네가 짊어질 몫이야. 넌 이미 알고 있지? 혼돈 여행은 벌써 시작되었다는 것을. 어차피 여기까지 왔으니 웃어. 웃으면서 가자고. 비유가 아니라 정말 책이 사람이 되는 건 웃긴 일이니까.
(83~8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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