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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2/12/06
    자기를 생산한다는 것 5...
    곰탱이

자기를 생산한다는 것 5...

이순신을 그리는 역사소설 <<불멸의 이순신>>(김탁환 지음,  황금가지, 2004) 중 4권의 내용 중에서 발췌함(270~27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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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인) "예, 큰 스님!" 

(휴정) "나는 널 안다. 네가 원하는 것은 승병이 이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우는 것 정도가 아니지. 너는 이 나라를 불국토로 바꾸고 싶은 게 아니냐? 어쩌면 이번 전쟁을 기회라고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허나 내가 보기에 너는 다만 공맹의 무리들이 싫은 것이다. 정작 네가 원하는 불국토를 위해서는 아직 탑 하나도 쌓지 못하고 있어." 

월인이 목소리를 조금 높였다. 

"오래전부터 꿈꾸어 왔던 일입니다. 이미 탑은 충분히 쌓았습니다." 

휴정이 답을 미루고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월인도 그 눈길을 받자 더 말을 보탤 수가 없었다. 

"어떤 경우를 당해서라도 마음이 흔들리리지 않는 것을 태어나지 않음이라 하고, 태어나지 않는 것을 생각 없음이라 하며, 생각이 없는 것을 해탈이라고 하느니라. 그동안 너를 곁에 둔 것은 네가 이 이치를 깨닫기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한데 이제 보니 넌 바람이 불어오기도 전에 먼저 흔들리는구나. 그렇게 흔들려서야 네가 쌓았다는 탑이 무너지지 않을 도리가 있겠느냐? 앞으로도 아주 오랫동안 너는 네가 쌓았다는 그 탑이 무너지고 또 무너지는 것을 볼 게다. 엉절거리지(작은 소리로 원망스럽게 자꾸만 군소리를 내는 것) 마라. 네가 한 번 성낼 때마다 백만 가지 바람이 불어온단다. 월인아!" 

"예, 큰스님!" 

"서두르지 마라. 손 내미는 자가 있더라도 덥석 쥐지 마라. 가장 늦게까지 서 있어야 한다. 이제 우리 오랜 인연을 접을 때가 가까웠느니라." 

월인이 깜짝 놀라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어인 말씀이시옵니까? 소승에겐 아직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 이 전쟁이 끝날 때까지만이라도 큰스님을 모시고 싶습니다." 

언젠가 헤어질 날이 오리라 생각은 했지만, 너무나 급작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월인은 이미 휴정이 승병을 일으키리라는 밀서를 내리면 그것을 들고 팔도를 돌아다니리라고 결심하고 있었다. 

'큰스님이 전면에 나설 수 없다면 그 수족 노릇을 제대로 할 사람이 필요하다. 맡겨 주시면 성심을 다하리라.' 

의주로 오는 동안 월인은 이 결심을 가슴에 새기고 또 새겼다. 그런데 휴정은 도와달라는 말 대신 인연을 접자고 한다. 승병을 일으키는 일에서 아예 손을 떼라는 것이다. 

"정녕 모르겠느냐? 전쟁이 끝나면 나는 살아남더라도 나를 따른 문하 중 몇은 크게 곤욕을 치를 게다. 더구나 너는 더욱 큰 생각을 품고 있지 않느냐? 내 일을 돕다가 탑을 쌓기도 전에 세상 눈에 띌까 걱정이구나." 

"그래도 전국에 밀서를 보내려면....... 큰스님 뜻을 충분히 아는......." 

"염려를 거두어라. 그 일은 내가 알아서 하겠다. 너는 날이 밝는 대로 떠나라. 전쟁이 이 나라 백성들을 얼마나 참혹하게 만드는지 네 눈으로 직접 보아라. 백성들 곁에 머물며 그 아득한 절망과 눈물과 한숨을 끌어안아라. 싸우고 싶으면 무기를 들고, 달아나고 싶으면 달아나라. 아무도 네 언행에 트집 잡지 않을 게다. 나와 함께 지낸 시절은 잊어라. 누가 묻더라도 내 법명을 내밀지 마라. 월인아! 이제 혼자 힘으로 부딪혀 보는 게다. 가거라. 당장!" 

월인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휴정은 벽을 보며 다시 돌아누웠다. 월인은 휴정을 향해 큰절을 올렸다. 

'큰스님! 

눈 감았다가 뜨면 한 삶이 다 흘러가고 또 눈 감았다 뜨면 겨우 기침 한 번 뱉는 순간이라 하셨지요. 모기가 무쇠로 된 소 엉덩이에 주둥이를 찔러 넣듯 정진하라고도 하셨습니다. 저놈은 늘 달아날 궁리만 하는 놈이라고, 망아지처럼 날뛰다 제 명에 죽지 못할까 염려하여 데리고 있는 것이라고도 하셨습니다. 이제 큰스님께서 스스로 우리 문을 열어 주시니 한 걸음 내딛는 것도 벅찹니다. 달은 지고 오경(五更) 깜깜한 밤입니다. 당신의 가늘고 긴 손 어지러이 움직이는 가락을 따라 어두운 숲도 곧잘 돌아다녔습니다만, 이제 마음만 아지랑이처럼 어지럽고 길은 도무지 보이지 않습니다. 

큰스님! 

그 깊은 뜻을 어렴풋이 느낄 것도 같습니다. 잊고 또 잊으며, 되새시고 또 되새겨, 몸도 마음도 의지할 곳 없는 순간을 찾으라는 것이겠지요. 죽음의 자리에서, 치욕과 번민의 자리에서, 저만의 탑을 쌓아 올리라는 것이겠지요. 첫 마음 잃지 않고 큰스님 가르침 가슴에 깊이 새기겠습니다. 부끄럽지 않은 나날을 쌓아 가겠습니다. 불국토를 이루는 길을 꼭 찾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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