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어제 또 비가 내렸습니다. 처음엔 지나가는 소나기렸거니 했는데. 어째 내리는 폼이 예사롭지 않더군요. 국지성집중호우. 불과 한 시간도 안 됐는데, 내린 양도 양이지만 어찌나 세차게 내리던지. 한달 내내 내린 비로 강바닥에 쌓인 모래를 파놓았던 게 다시 쓸려내려가고. 심지어 보(洑) 아래 깔아뒀던 돌을 다시 놓으려 한쪽에 치워뒀던 것도 굴러떨어지고. 9월까진 이렇게 지역별로 집중호우가 온다고 하던데. 대체 얼마나 더 비가 오려는지 걱정이 이만저만아닙니다. 해서 기상청 홈페이지에 들어가 이것저것 통계를 보니.
 
어허. 이곳 춘천만 하더라도 글쎄. 8월 들어 비가 오지 않은 날이 겨우 4일. 7월 한 달은 11일이었습니다. 강우량은 7월에 무려 930mm가 넘었구요. 이러니 비 피해로 인한 사망 사고나 산사태 또는 침수, 범람 사고와 같은 안타까운 일들이 생기지 않아도 연일 방송에서, 신문에서 떠들어대지 않을 수가 없을 겁니다. 물론 다신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일도 터졌고. 발을 동동 구르고 목을 놓아 자실 이름을 부르는 부모들을 보고 있자니. 왜, 무엇 때문에 이런 일들이 자꾸만 반복되는 지. 정확히 알야야 합니다. 그래야 똑같은 실수나 방심을 방지할 수 있고, 무고한 인명 피해를 줄일 수 있으니까요. 또 아이들 밥 먹이는 데엔 생난리를 치면서도. 그보다 수십 배, 수백 배 많은 돈을 잡아먹는 ‘걸레둥둥’이니 ‘걸레상스’를 밀어붙이는 짓거리를 더 이상 못하게 할 수도 있으니까요.
 
게다가 이런 일이 해가 갈수록 더하면 더해지겠지 줄어들진 않을 터인데도. 보다 근본적인 성찰과 반성을 하기 보단. “방재개념을 재정립하겠다”느니, “방재관련 예산에 최우선 배정하겠다”느니 하면서 사후양박문식 말잔치만 벌이는 일들을 고칠 수 있으니까요. 하기야 홍수 예방이라는 되도 않는 속임수로 수십조 원을 삽질하는 데 쏟아 붇는 걸 보고 있으려면. 그나마 나온 말이라도 제대로 할지 걱정이긴 합니다만.
 
2.
무엇이건 ‘상품’으로 거래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태’까지 ‘상품화’되고 있다면. 뭐, 당연한 일이 아니냐, 며 대수롭지 않게 여겨도 되는 걸까요. 고삐 풀린 망아지인지, ‘역사의 종말’인지는 모르겠지만. 한때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대안으로 현실세계에 존재했던 ‘사회주의’가 몰락한 후, 전세계는 ‘자본화’라는 물결을 더 이상 거스를 수 없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이 무슨 기막힌 우연이었던가요.
 
이념은 달랐어도 ‘성장’과 ‘개발’만큼은 하나였던, 그래서 전지구적 생태 위기를 유발시키는데 일조했던 사회주의가 붕괴하고. 끝 간 데까지 상품관계를 밀고 나가는 자본주의가 최후 승자로 깃발을 꽂자마자. 돌연 ‘생태주의’ 사상이 급속히 퍼져나갔으니. 땅을 정복하고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는 명령에 충실한 인간이 개과천선한 건가요. 아님 명령불복종인가요.
 
아무튼 ‘생태학적’ 사고와 행동이 낯설거나 가당치않은 이념 혹은 사상으로 치부되지 않게 됐으니. 한편으론 이 극적인 반전이 인류 역사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반성에 기반한 새로운 삶에 대한 기대로 반갑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또 다른 ‘성장’과 ‘개발’ 동력이라는 밑받침으로 재반전 되고 있는 걸 보면. 극적인 결말을 기대하기란 아직 이른가 봅니다.
 
3.
하루걸러 내리다시피하는 비를 피해 간간히 밭엘 나갑니다. 할 수 있는 한 석유로부터 먼 농사를 짓겠다고. 농약에 화학비료는 물론 작년부턴 비닐도 쓰지 않고 있으니. 올 해 처음 시작한 잡곡과 콩, 팥, 고구마를 제외하곤. 고추를 시작해 가지, 토마토와 같은 열매채소가 시들시들합니다. 그나마 고추는 예년에 비해 반에 반으로 줄여 심었고, 열매채소도 딱 반만 심어 다행이지요. 그래도 그렇지.
 
연일 내리는 비에 밭 한쪽은 여전히 물이 빠지지 않은 채 작은 웅덩이까지 생겼고. 풀이 무릎까지 올라왔는데도 발이 푹푹 빠지는 바람에 낫질 한 번 제대로 하지 못한 곳도 있으니. 가을 수확이 걱정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도 지금은 그저 우리 먹는 것만 농사짓고 있다는 걸 다행이라고 여겨야 하나.
 
빨리 찾아오는 추석도 추석이거니와 한 달 내내 계속되는 비 때문에. 여기저기 농사짓는 사람들 한숨소리가 깊어지는 걸 보면. 과연 앞으로 버텨낼 수 있을지 걱정이 이만저만 아닙니다. 둘 중 하나라도 돈을 버는 게 대책이라면 대책인데 말이지요. 하지만 무슨 일만 터지면 대책이라곤 그저 농산물 수입량만 늘리는 정부만 처다 보고 있으려니. 솔직히 농사를 제대로 지어볼까 하는 마음이 생기다가도 그냥저냥 중국산 배추며 미국산 쌀 사먹게 낫질 않나 싶기도 합니다. 몸은 망가질지 몰라도 당장 마음은 편하니까요.
 
4.
대표적인 인터넷 서점 Y사이트 검색창에 ‘생태학’을 치니. 국내서적이 모두 179권이네요. 또 다른 온.오프라인 서점 ㄱ문고에선 이보다 조금 많은 215권이 검색됐는데요. 가만보니 대학 교재 수준인 이론서부터 아이들 동화책에 이르기까지. 이거 생각했던 것만큼이나 꽤나 다양한 책들이 보입니다. 또 책값이 3만원 훌쩍 넘는 양장본 번역서부터 6, 7천원으로 사 볼 수 있는 입문서에, 환경부 선정 우수환경도서, 문화관광부 추천 우수학술도서까지. 그야말로 <인간해방을 위한 생태학>(스테판 크롤 원작, 공해추방운동청년협의회 번역. 온누리. 1988)이란 책이 나오던 때하곤 격세지감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많은 책들이 나왔다는 건.
 
그만큼이나 ‘생태학’이란 ‘주의’, ‘이념’, ‘사상’, ‘철학’이 더 풍부하고 폭넓게 됐다는 걸 뜻하는 것일 터이고. 또 20세기를 지배해왔던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에 대한 성찰적 태도와 행동이 활발해졌다는 것이니. 쌍수들고 환영할만한 일이지요. 하지만 ‘나’ 수준에서, ‘지역’ 또는 ‘국가’ 수준에서, 크롤이 던지는 다음 물음에 올바른 답을 찾을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뭐, 누구, 누군가에겐 물어보나마나 빤한 답을 내놓겠지만 말입니다.
 
아, 그리고 또. 아무리 책이 처음 나왔던 때를 감안해도 말이죠. 또 책 자체가 ‘생태학’에 처음 접하는 이들에게 생태주의 자연관과 사회인식, 그리고 그와 관련된 용어를 이해하기 쉬운 삽화를 곁들여 소개하는 입문서라 하더라도 말이죠. 아직까지도 이런 질문에 명확한 답을 찾지 못하고 있다면 말입니다. 아니, 우리 사회 여기저기서 벌어지고 있는 이해하지 못할 일들을 보고 있으면 말입니다. 여전히 이런 책들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지고 또 읽혀져야 할 것만 같으니. 그저 헌책방에서만, 도서관에서만 겨우 찾을 수 있다는 게 아쉬울 따름입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내가 하고 있는 일이 진정 쓸모 있는 것인가 그리고 필요한 것인가?

내가 하는 일이 더욱 나아질 수 있는가?

나의 작업장에서 설비나 서비스의 부족은 없는가?

생산이 어떻게 하여 재조직화될 수 있는가?

작업환경의 개선이 필요한가? 작업 그 자체가 보다 즐겁게 이루어질 수 있는가?

내가 속한 노동조합은 이러한 질문에 관심이 있는가?

내가 속한 정당은 환경에 관하여 어떤 정책을 가지고 있는가?

내가 속한 환경그룹은 바른 실천을 하고 있는가?

나는 교통수단을 자전거로 대체할 수 있는가?

나는 친구, 이웃, 직장동료와 함께 자동차를 공동 이용할 수 있는가?

내가 구입하는 모든 물건들이 진정 필요한 것인가?

누군가 자원을 낭비하고 환경을 파괴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누군가 다국적 농기업에 이익을 주고 있는 것은 아닌가?

누군가 제3세계를 착취하고 있지는 않은가?

내가 구입할 만한 다른 더 좋은 상품이 있는가?

내가 지역단체를 도와줄 입장에 있는가?

내가 대안을 가진 소비자일 수 있도록 품목구입서를 작성할 수 있는가?

내가 스스로 경작할 수 있는 땅이 있는가?

그 외에 또 다른 할 일이 있는가?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11/08/24 13:11 2011/08/24 13: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