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자 삽입 이미지1.
작가도 기자도 아닌 사람이 한 주제로 책 세 권을 썼습니다. 그것도 30여 년에 걸쳐서 말입니다. <고해정토(苦海淨土)>(1969~2004) 3부작>. 미나마타병으로 죽어갔던, 고통 받았던 이들에 대한 비가(悲歌). 근대화를 상징하는 자본과 과학기술, 그리고 국가가 결합해 만들어낸 가혹한 폭력에 대한 고발. ‘미나마타’의 인류사 혹은 문명사적 의미에 대한 끈질긴 인문학적 질문을 끈질기게 던졌습니다.
 
2.
구마모토현 미나마타 시(市)에 들어선 질소 공장은 일본의 산업화, 제국주의와 궤를 같이 합니다. 승승장구하던 때엔 조선과 만주에도 공장을 지었고, 압록강에는 발전소까지 만들었습니다. 패전 후에는 공중분해가 되기도 했지만 곧 공장은 다시 가동됐습니다. 폭주하던 제국주의 기차는 멈췄지만 산업화까지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3.
14호, 나카츠 요시오, 일반인과 다를 것이 없다. 어획량도 전업자와 비슷. 야간작업도 하고 있다.
20호, 다가미 카츠요시, 자택에서 빈둥빈둥. 보행이 약간 곤란.
29호, 다나카 미노루코, 자택에서 걷게 되었다.
34호, 에고시타 마스, 가사일 전반을 돌봄. 외견상 아무렇지도 않다.
36호, 이노우에 아사노, 건강. 정상인과 다름없다. 산밭 일을 하고 있다.
43호, 다가미 요시하루, 모리오카쿠미 삼륜차 운전수, 건강체.
51호, 하마모토 츠기노리, 건강, 센쿄운수 근무, 현재 남규슈자동차학교 재학 중.
71호, 시마모토 리키조, 건강체, 2월 26일 사망.
73호, 스기모토 도시, 약간 나쁘다.
88호 스기모토 신, 완쾌라 여겨진다.
74호, 이토 세이하치, 완쾌라 여겨진다.
80호, 이와사카 키쿠에, 자택에서 빈둥빈둥.
87호, 우시지마 나오, 건강체.
(pp.224-5)
 
1964년 짓소공장에서 작성한 <미나마타병 환자 일람표>에는 환자에 대한 세심한 기록이기는커녕 ‘발병으로 비롯된 집안의 고난에 대해, 잃어버린 세월에 대해, 한마디도 말하지 않’(p.227)고 있습니다. 그저 이 기록은 행정당국이 추진했던 ‘위로금’ 개정의 근거였으며, 희생자 말소 수법이었으며, 지역감정을 악용하는 데 사용됐습니다.
 
4.
1956년부터라고 합니다. 혀와 입술이 떨리더니 말하는 게 쉽지 않아졌습니다. 근육은 맘대로 움직이다 마디마디가 꺾여 들어갔습니다. 뇌가 마비되기도 했으며 똑바로 걸을 수조차 없게 됐습니다. 사람뿐이 아니었습니다. 영물(靈物)로 여기던 고양이들은 미친 듯 춤추다 고꾸라져 죽어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바다에는 물고기들이 사라졌습니다.
 
5.
“도시라는 곳에 갔던 이들이 이야깃거리도 만들 겸, 다진 가다랭이라는 걸 먹어보자 싶어 다들 주문해서 먹어봤다는구먼. 별로 맛이 없더라는 거여. 비교를 할 수가 없더라는 거지. 몇십 종류나 있잖여, 이쪽 바다엔, 맛이 있는 물고기가. 혀에 착착 감기게 맛있는. 수은이 들어서 그랬다니까, 틀림없이.” 그리고 와아, 하고 웃음을 터뜨린다.(pp.183-4)
 
6.
언니는 사세보에서 콩 파는 장사.
일확천금.
차녀는 후쿠오카 탄광.
여동생, 나가사키 탄광.
어머니는, 돈은, 조금도 부족하지 않습니다.
또한 아버지, 3년 전 괴질로 죽었습니다.
돈은 거슬러 올라가 33만 받았습니다. 부자입니다.
(p.78)
 
어촌 마을이었던 미나마타에 들어선 공장은 바다만 망가뜨린 게 아니었습니다. 돈 벌이에 가족들을 이용한다거나 공장이 문을 닫으면 시(市)가 망한다거나 혁명을 노리는 좌익들이 설친다는 말이 흘러나왔습니다. 마을은 ‘질투와 험담과 밀고가 횡행하는’(p.328) 곳으로 변했습니다.
 
7.
29세대가 싸우기로 했습니다. ‘확약서’니 ‘청원서’니 하는 것들을 들이미는 ‘짓소’를 상대로 소송에 나선 겁니다. 이들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주주총회가 열리는 곳으로 순례를 떠납니다. 순례복을 준비합니다. 노랫말을 외우기도 힘들고, 발음이 엇나가 다른 말로 들려지만 영가(靈歌) 연습도 합니다. 이들과 함께 사우겠다고 나서는 이들도 오사카역이 미어질 듯 모여들었습니다.
 
8.
이시무레 미치코는 짓소와 정부를 상대로 한 싸움을 꼼꼼히 기록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한 르포르타주(사회고발 문학)로서의 글이 아닙니다. 과학기술과 자본의 결합이라고 할 수 있는 근대문명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입니다. 인신공양(人身供養), ‘신(神)들의 마을’이야말로 상처를 보듬고 치유할 수 있다는 성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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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6/27 09:03 2017/06/27 09:03
사용자 삽입 이미지도처에 전문가입니다. 입시전문가, 부동산전문가, 투자상담사 같이 ‘합리성’이나 ‘이성’과는 무관한 ‘짝퉁’ 전문가들도 판을 치고. 장 담그는 것조차 대학교수 정도는 돼야 말 빨이 먹히니 말입니다. 어디 토론회나 방송에라도 나설라치면 학위는 기본, 자격증에 학술논문 몇 편은 있어야 하겠지요. 하지만 미국산 쇠고기 수입 때처럼 死대강 사업 때도 그랬듯이. 밀양 송전탑 건설 현장에도 어김없었고, 제주 강정마을 구럼비에도 앞 다퉈 나섰지만.
 
천안함 침몰에 이의를 제기한 과학자가 몇 안됐던 것처럼. 死대강 사업이 재앙이라 경고한 학자들을 손으로 꼽았을 만큼. 돈과 권력으로부터 독립해 있었던, ‘관심을 올바른 방향에 두고, 인식과정에 철저한 비판의 메스’(p.92)를 가하던 전문가는 보기 힘들었습니다.  
 
‘체제 측의 프로젝트에 대항할 수 있는 비판능력을 조직적으로 확립하는 일’(p.109)은커녕 ‘어떠한 조직이나 권위에 대해서도 자신의 독립을 유지하고 모든 문제에 지적 성실성을 가지고 대처’(p.107)하는 과학자가 많지 않았던 겁니다.
 
‘아주 세분화된 자신만의 영역을 만들어 거기에서 전문가가 되려는 그야말로 전형적인 전문가의 길’(p.65)을 갈 뿐인 전문가들이 ‘인식과정에서 철저한 비판의 메스를 가해야만 사회를 더 나은 쪽으로 나가게 할 수 있는 창조적이 힘이 나온다는’(p.92) 사실을 철저히 외면했단 얘깁니다.
 
타까기 진자부로는 폐쇄된 실험실 밖으로 나와 사회와 시민과 함께하는 ‘시민의 과학’을 애기합니다. ‘이런 저런 때마다 침묵하다보면 늘 승인하는 것처럼 되어 결정적인 순간에조차 아무 말도 못하게 되는 이른바 ‘일본형 공동체’의 구조’(p.81) 속에서 벗어나, ‘체제 내의 지위를 버리고 자립적인 과학(학문).기술을 지향(p.88)’하자는 겁니다. 
 
“그것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
거대한 입을 벌리고 덤벼드는 불도저는 문자 그대로 국가권력 자체였고, 그 앞에 맨 몸으로 농토를 지키려고 싸우는 농민들이 있었다.
그리고 속수무책으로 서 있는 나 자신이 거기에 있었다.
나는 어느 편에 서 있는가.” (p.82) 
 
타까기는 스스로에게 던졌던 질문에 행동으로 답을 합니다. 안정된 대학교수 자리도 마다하고, 촉망받는 연구원 신분도 박차고. ‘농토를 지키려고 싸우는 농민’들 편에 서서 싸우기 시작한 것이지요. ‘시민과학자’로서 말입니다. 
 
이는 ‘인간의 관심을 어디에다 두어야 하는가를 문제 삼고, 그러한 관심을 전제로 인식이 나아가는 과정을 성찰한다. 그러한 성찰 없이 객관성이라는 명분만 가지고 측정 데이터 등을 절대적인 진리라고 강요하는 것은 자연과학의 전형적인 이데올로기이다. 관심을 올바른 방향에 두고, 인식과정에서 철저한 비판의 메스를 가해야만 사회를 더 나은 쪽으로 나가게 할 수 있는 창조적이 힘이 나온다는 것을 하버마스에게 배운 것’(p.92)이라는 고백을 실천한 것이기도 합니다.
 
MB 정권이 물러나기를 손꼽아 기다리기라도 했던 것 같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그 뻔 한 걸 가지고 이제와 새삼스럽게 말하는 것도 눈꼴 시린데. 그것도 토목공학이나 환경학이나 하는 전문가라는 사람들이 그러고들 있으니. 이젠 보(洑)  철거를 두고 한 자리 또 해먹겠다는 심보들인 것만 같아 한숨만 나옵니다. 대체 우린 언제까지 이런 전문가들 입만 바라봐야 하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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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8/09 22:16 2014/08/09 22:16

사용자 삽입 이미지책 제목에 ‘살린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지구가 죽어가고 있다는 얘긴가 싶기도 하고, 죽었다는 말인가도 싶습니다. 매우 도발적으로 제목을 달았는데요. 최근 발표된 IPCC 보고서를 본다면 꼭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지금처럼 나뒀다간 100년도 못 가 인간은커녕 지구가 꼭 죽게 생겼으니 말입니다.

‘살린다’는 말 외에도 책에는 ‘착한 도시’라는 글자도 보입니다. ‘착한 도시’라, 그럼 ‘나쁜 도시’도 있다는 이야기인가요? ‘착한’ 것과  ‘나쁜’ 것은 무엇으로 나눌 수 있으며, ‘착한 도시’와 ‘나쁜 도시’는 어떤 모습들을 갖고 있는 걸까요.
 
책을 쓴 이는 영남일보 기자입니다. 신문에 도시와 에너지 문제에 관한 취재를 하다 도시와 기후변화, 지역사회 등으로 관심영역이 넓어졌다는데요. 3년 만에 관련된 책을 두 번째 펴낸 것이 바로 <착한 도시가 지구를 살린다>입니다.
 
전작 <태양도시: 에너지를 바꿔 삶을 바꾼다> 연장선에서 쓴 이 책은 세계 각지를 돌며 ‘착한 도시’들을 소개합니다. 런던, 암스테르담, 시애틀, 맬버른, 프라이부르크, 꾸리찌바까지. ‘생각은 세계적으로 하고, 행동은 좁게는 지역, 넓게는 세계적으로 하는 양면전술’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지요.
 
또 지은이는 개인이 할 수 있는 ‘착한’ 행동들도 알려줍니다. 다음과 같은 아주 손쉬운 방법들을 말입니다.
 
▣ 수도 사용법
□ 욕탕의 물을 이용하여 몸과 머리를 씻고, 샤워기를 사용하지 않는다. 371g
□ 샤워 시간을 1일 1분 짧게 한다. 74g
□ 욕탕의 따뜻한 물을 세탁에 사용한다. 7g
□ 가족간 입욕은 간격을 두지 않고 한다. 86g
p.215 ‘한 사람 하루 이산화탄소 1kg 감축 국민운동’ 중 일부분
 
기자가 쓴 책이라 그런지 읽기 편합니다. 어려운 용어들도 심심찮게 나오고, 설명이 길게 필요한 부분들도 많지만 전혀 막힘이 없거든요. 또 여러 곳을 들르다보니 다소 어수선 할 수 있을 법 한데 그렇지도 않습니다.
 
그러니 ‘착한 도시’는 어떤 모습인지, ‘살린다’는 말이 무엇을 뜻하지 책을 다 덮고 나면 머릿속에 분명하게 그려질 겁니다. 눈부시게 파란 별, 우리 ‘지구’와 함께 말입니다. 글쓴이도 지적을 했지만. 제1세계 도시들과 서울 강남에 자칫 면죄부가 되지나 않을까, 긍정적인 면이 너무 부각된 점만 빼곤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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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0/10 15:29 2013/10/10 15:29
사용자 삽입 이미지귀농(歸農) 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일찌감치 일자리에서 밀려난 사람들이 새로운 돈 벌이를 위해 하는 것이든. 은퇴 후 전원생활을 위한 것이든 말입니다. 그래서인지 많은 지자체가 귀농 지원 사업들을 합니다. 빈집 찾아주기, 정착 지원금 지원, 농지 구입 지원 등등. 어떤 곳에서는 꽤 좋은 성과를 내기도 합니다. 상반기에만 150세대 300여 가구를 정착시킨 곳도 있으니까요. WTO와 FTA가 거스를 수 없는 대세인 것을 염두에 둔다면 참으로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셈인데요. 왜 지금, 귀농일까요? 혹 텔레비전에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억대 농부(農副)들 때문일까요?. 아님 농사야말로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어떤 가치가 있기 때문일까요?
 
농업전문가이면서 농사꾼인 글쓴이는 차분하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소농(小農)이야말로 인류 생존의 기초인 땅을 지키는 사람들이라고 말합니다. 본래의 자연인 ‘무위자연’이 하는 일을 대신하는 이 소농들이야말로 ‘누가 지구를 지켜왔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이라는 것이지요.  끊임없이 땅을 갈고 유기물을 넣으며 표토를 지키는, 비록 그것들이 자신과 가족들을 먹여 살리기 위한 일이었다 할지라도 말입니다. 하지만 인간이 지구에 뿌리를 내린 이후 가장 많은 풍요를 가져다 줬다고 칭송받는 근대화는 어떻습니까요. 맞습니다. ‘대우주의 의지’를 묵묵히 대행해왔던, 지구를 지켜왔고 지켜나갈 소농들을 밀어내고 있습니다. 그것도 아주 가혹하게 말이지요. 규모 확대와 단위 면적당 수확량 증가라는 ‘자본주의적 발전’만이 유일한 길이라고 강요하면서 말입니다.
 
일본은 여전히 소농이 많다고 합니다. 우리와 그다지 다를 바 없는 환경일 터인데 말입니다. 규모 확대와 단위 면적당 수확량 증가라는 ‘자본주의적 발전’만이 유일한 길이라고 강요하는 상황들 말이지요. 그런 면에서 본다면 일본은 아직 희망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분명 부러운 일이지요. 물론 그것이 예전 소농과는 다른, 다양한 형태의 겸업이라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아니요. 귀농을 지속적으로 유지할 방법 중 하나라는 점에서 더 관심 있게 봐야합니다. 지금 사는 사회가 자본주의인 만큼 먹고 사는 문제에 대해 더 이상 금욕적 삶을 강요할 필요는 없으니까요. 부부 중 한 사람은 고정적인 수입이 있거나 자급적 소농이더라도 일정한 수입이 있는 겸업농가라면 오래도록 땅을 지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책을 펴낸 녹색평론사 대표는 편집자 후기에 ‘문명사회의 지속적인 생존 여부를 결정하는 사활적인 문제’로 소농의 존재를 되살리느냐 마느냐를 얘기합니다. ‘문명사회’라는 말이 거슬리기는 하나 이 말을 지구와 인간으로 바꾼다면 글을 쓴 쓰노 유킨도가 가진 고민을 온전히 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소농을 ‘환경위기’나 ‘식량문제’로만 한정시키는 것이 아니라 인류 생존의 기초인 땅을 지키기 위한 유일한 방법으로 보는 것 말입니다. 더불어 편집자는 저자가 소개했던 일화 속에서 소농과 민주주의에 대해서도 문제를 제기합니다. ‘소농은 참다운 의미에서 민주주의 초석이 된다는, 흔히 간과되고 있지만, 결정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할 필요가 있다.’고 말이지요. 사실 정확하게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는 다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인과관계가 명확치 않았거든요. 하지만 대략적인 뜻은 책을 다 읽은 사람들이라면 짐작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니 이 부분은 굳이 더 설명하지 않더라도 좋을 듯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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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7/30 20:49 2013/07/30 20:49

사용자 삽입 이미지1. 

일본에서 발생한 핵발전소 사고 여파가 1천 킬로미터 밖에 있는 사람들의 일상생활까지 뒤흔들고 있습니다. 비라도 내릴라치면 비옷과 긴 우산 판매량이 늘어나고, 굳이 황사 때문만은 아니겠지요. 마스크에 방독면까지 사가는 사람이 많아졌다고 합니다. 아이를 가진 엄마들은 며칠 째인가요, 집밖을 나서기가 두렵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일본 정부는 아직까지도 그 피해 정도와 방사능 유출량을 정확하게 또 신속하게 알리지 않고 있습니다. 여기에 우리 정부는 ‘괜찮다’는 말만 반복하더니 정수장에 천막을 두루는 어처구니없는 일만 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여기까진 봐줄만 합니다. 국민들은 불안해 죽겠다고 아우성인데 한나라당과 보수언론들은 예의 그 ‘빨강색’ 카드를 또 꺼내들고 있으니. 참 어처구니 없습니다. 

 

2.

물가가 고공행진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경제를 살리겠다고 747이라는 허황된 숫자놀음으로 대통령에 당선된 사람은 얼마나 다급했는지. ‘기름 값이 묘하다’는 말로 정유사를 압박했습니다. 사실 기름으로 먹고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사회에서 석유 값 폭등은 그 파급력이 무시무시하기 때문이지요. 자동차 굴리는 건 세발에 피. 하다못해 농사짓는데도 석유가 없으면 가능하기나 한 건가 싶으니. 그런 면에서 본다면 영, 감이 없는 건 아닌 것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독과점으로 매년 수천억 원씩 이익을 내고 있는 이 정유사들이 마지못해 찔끔 값을 내리기는 했는데. 2MB 대통령, 그거로는 치솟는 물가 잡기 쉽지 않다, 싶었는지. 아니 자신이라고는 통 없는지, 결국 속내를 드러냅니다. ‘기업소비, 가계소비, 소비를 줄이는 게 극복하는 길’이라고.

 

3.

공식적으로 우리나라엔 핵발전소가 없습니다. 다만 원자력발전소가 있을 뿐이지요. 또 원자력 공학 기술자는 텔레비전만 틀면 여기저기서 얼굴을 들이대는 데, 핵 공학 기술자는 눈을 씻고 찾아보기 힘듭니다. 분명 원자력이라는 게 핵분열을 이용하는 것임이 틀림없는 일인데도 말이지요. 아마도 그들은 핵폭탄과 핵전쟁이라는 끔찍한 이미지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공포를 감추고 싶은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애써 눈감습니다. 아니 이 파괴적인 기술이 만들어내는 풍요와 소비를 더 누리기 위해 거짓말을 참말로 바꿔 세뇌합니다. “다 괜찮을 거야. 그리고 그런 일은 결코 내게 일어나지 않아”  

 

4.

2MB이 모처럼 정곡을 찔렀습니다. ‘소비를 줄여라.’ 맞습니다. 언제까지 이렇게 흥청망청 쓸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땅에서 퍼 올리는 석유도, 우라늄도 언젠가는 끝을 볼 수밖에 없으니까요. 뭐, 상황을 낙관적으로 보는 과학자들은 아직 우리가 발견하지 못한 유전도 많고 또 과학기술이 발전하면 경제성이 낮은 기름도 끌어올릴 수 있다고도 하고. 핵분열 대신 핵융합을 이용하면 방사능도 없는 깨끗한 에너지를 얻을 수 있으니. 지금 이 잔치를 지속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단언합니다. 하지만 이 모든 노력이 결국은 해결책이 될 수 없다는 걸 그들도 잘 알고 있을 겁니다. 석유도, 우라늄도 자연이 품고 있는 한도 내에서만 인간이 가져다 쓸 수 있을 뿐이고. 핵융합이니 하는 것도 단 0.0001%의 확률에 의한 사고 하나로 상상조차 못할 일들이 생기게 되리라는 것을 말이지요. 그러니 끝이 보이기 전, 탈출구를 만들기 위한 밑천으로라도 쓰려면 지금부터 아끼고 또 아껴야 합니다. 정말 필요할 때 이마저도 없다면 대체 어찌하겠습니까.   

 

5.

이필렬 교수는 책머리에 다음과 같은 구절로 얘기를 시작합니다. 

 

“석유가격이 또다시 요동치기 시작했다. 전세계 주식시장도 깊은 침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페르시아만에 또다시 전운이 돌기 시작한 탓이다”(p.3)  

 

그리고는 이 휘황찬란한 산업문명사회를 떠받치는 석유를 둘러싼 논란들과 석유를 대신할 새로운 에너지원으로 추앙받는 핵기술이 가진 반(反)생명성을 파헤칩니다. 석유시대와 핵시대가 가져다 준 축복을 영원불멸의 것으로 여기고, 그 달콤함을 놓지 않으려는 인간의 탐욕이 지금 무엇을 만들어내고 있는 지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는 겁니다.

 

“석유시대는 필연적으로 종말을 맞게 되어 있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 사실을 믿지 않으려 한다. 석유 자동차를 타고, 석유 난방을 하고, 석유 전기를 쓰는 이 생활을 포기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p.23)

 

“핵기술은 자연의 아주 미세한 원자핵이라는 부분까지 침투해서 건드리고 조작하고 파괴한다. 이 기술로써 인간은 물질적 자연을 거의 정복한 셈이다. 즉, 물질적 자연에 대해 신적인 존재가 되어 원자핵이라는 물질적 자연의 가장 내열한 곳까지 ‘희롱’할 수 있게 된 것이다”(p.201)

 

이필렬 교수는 대안으로 풀뿌리 에너지 자립운동과 전력구조의 분산적 구조 개편을 얘기합니다. 어찌 보면 너무 뻔한 결론으로 가는 거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이 길로 가는 것이야말로 파국을 막는 길임에도 가지 않으려, 잘못된 길이라는 거짓 선동에 내심 찬성하고 있는 건. 또 지금까지 위기다, 라는 말은 많았지만 지금까지 잘 되어 왔기에, 그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해도 그때 가서 어떻게 되겠지, 하는 태도는. 그렇습니다. 말 그대로 ‘될 대로 되라’는 자포자기일 뿐입니다. 그러니 이제 우리, 이 뻔한 결론. 뻔한 길. 뻔하다고 귀 닫지 말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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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4/17 16:18 2011/04/17 16: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