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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만 봐서는 성이 ‘임’이요 직위나 직책이 ‘계장’인 어떤 한 사람이 쓴 글인 줄 알았습니다. 앞표지를 보면 오히려 갸우뚱합니다. 주변에서 너무나 쉽게 볼 수 있는, 빗자루 쓰레받기를 든 뒷모습이 그려진 그림, 알 수가 없습니다. 뒤표지를 보니, 글쓴이조차 자신이 ‘임계장’이라 불리는 것이 의아했답니다. 성씨를 잘 못 알아서, 배차 계장이라는 직책과는 아무 상관없는 호칭, ‘임계장’.
 
‘임계장’은 ‘고.다.자’로도 불린답니다. 고르기도 다루기도, 자르기도 쉬어서요. 그렇습니다. ‘임계장’은 단순한 호칭이 아니었습니다. 있으나 없으며, 필요하나 필요 없는. 차별과 혐오를 정당화하는. 임시계약직이면서 고령인 노동자 일컫는. 그 ‘임계장’은 숨겨두고만 싶었을 일기를 세상에 내놓았습니다. 얼마만큼은 그럴 거라 생각했었던, 막상 속속들이 알고 나니 부끄러움에 몸 둘 바를 모르겠는 그 이야기들을요.
 
 
어느 이른 새벽에 꽃봉오리를 털어 내는 그의 모습을 봤다. 대빗자루로 사정없이 털어 내자 봉오리들이 힘없이 우수수 떨어졌다. 나중에는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높은 곳에 맺혀 있는 봉오리까지 다 털어 냈다. 꽃봉오리들은 꽃으로 피어나지 못한 원망을 토해 내듯 땅에 부딪히자마자 마지막 힘을 다해 품고 있던 꽃잎들을 토해 냈다. 피지도 못하고 봉오리로 소멸하는 꽃들을 보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p.181
 
잡균과 오물이 묻은 손으로는 밥을 먹을 수 없고, 주민의 심부름도 할 수 없으며, 택배를 다룰 수도 없으니, 하루 평균 손을 씻는 횟수가 서른 번, 어떨 때는 쉰 번이 넘을 때도 있었다. 하루에 몇십 번씩 손을 씻는 이가 경비원 말고 누가 있을까? 우리의 손은 하루 종일 더러운 쓰레기를 만지는 손이지만 그런 이유로 세상에서 제일 깨끗한 손이라고, 감히 자부한다. p.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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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는 자신이 지나왔던 시.공간들을 ‘경계의 시간’이었다고 말합니다. 학교는 다니는 것도, 직장인이라고 말할 수도 없었던 때. 교복 위에 작업복을 입고 다녔던 학교, 군복대신 작업복을 입고 다녔던 공장. 분명 모두가 지나왔지만, 스스로를 소개하는 것조차 버거웠던 그 시절을. 그럼에도 “설명하지 못한 채 뒤로 미뤄두었던 이야기”를 꾹꾹 눌러 써내려갑니다. ‘탁본’을 뜨듯이요.
 
‘청년’이란 곧 공부를 하고 있어야 한다는 편견에 가장 구석진 자리로 밀려난 이. ‘현장실습생’ 또는 ‘산업기능요원’이라 불리는 청년노동자. 그 청년노동자는 “그 누구의 삶도 버려지지 않기를” 바라는 따뜻한, “그들을 외롭게 두지 않을 것”이라는 온기로, 그들로부터 가로채간 언어를, 이야기를, 우리들에게 담담히 돌려주고 있습니다.
 
 
열아홉 할인이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공장에서 일하던 나에게. 수능을 망치고 괴로워하던 H에게. 주량을 한참 넘어 술을 마시던 친구들에게. 어쩌면 학교에 다니지 않고 어른이 되어야 했던 누군가에게도 이 거리가 조금은 더 따뜻하고 위로가 되었다면 좋았을 텐데. 아무도 소외당하지 않는 세상은 없는 건지, 그게 그렇게 어려운 건지 혼자 생각하며, 나는 불빛이 잦아드는 방향으로 한참을 걸었다. pp.85-6
 
몸은 차갑게 식어있는데, 가슴 속에서 자꾸만 뜨거운 게 올라와 헛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나를 지나치는 사람들이 어디로 가고 있는 건지, 나는 왜 여기 서 있는 건지, 무엇하나 알 수 없었다. 내가 할 수 있었던 건 그저 버려진 전단을 줍는 일이었다. 몸을 숙여 마른 낙엽처럼 흩어져 있는, 잊히고 외면되어 왔던 누군가의 삶을 하나씩, 하나씩 주워 모으는 일뿐이었다. pp. 213-4
 
 
3.
두 글 모두 각자가 겪은 일들을 속속들이, 꾹꾹 눌러 써내려간 일기장입니다. 동시에 임시계약직, 청년노동자들의 목소리가 생생히 살아있다는 점에서 르포르타주입니다. ‘갑’과 ‘을’이라는 계약관계 속에 숨겨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증언하고 있는 것이지요. 다만 「교복 위에 작업복을 입었다」가 “시가 담긴 수필이고 산문”이라면 「임계장 이야기」는 덜어내거나 보태지 않은 현장보고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두 책이 주는 울림은 형식이 주는 낯설음과 어색함을 가뿐히 넘어섭니다. 보고도 믿기지 못하는 순간들과 맞닥뜨렸을 때의 당혹감과 낯 뜨거움을 감출 수 없다면, 함께 “여기 사람이 있다” 외칠 수 있는 용기를 북돋아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어떤 격식을 차리는, 이론이 넘쳐나는 글들보다도 들이 할 수 없는 일들을 너끈히 해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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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4/01 11:12 2021/04/01 11:12

사용자 삽입 이미지첫 핵발전소는 큰 저항 없이 들어섰습니다. 지금은 이름으로만 남은 ‘고리’. 주민들은 ‘공장’이, ‘전기’를 만드는 ‘공장’이니 하며 되레 기대를 갖기도 했습니다. 물론 터무니없는 헐값에 토지를 넘기고 쫓겨나야 했던 사람들은 그 살벌한 독재체제에서도 ‘물리적 저항’을 했습니다만. 영구 정지되는 마당에까지 ‘경제발전’이라는 담론으로 치장되고 있으니 그 당시엔 오죽했을까요. 무너져 내리고 해체된 건 해당 마을 뿐. ‘조국 근대화’와 ‘산업화’라는 이름아래 순응, 동원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핵무기 개발을 꿈꿨던 박정희가 월성에 중수로 핵발전소를 지으면서 주민들에게 했던 말은 ‘남북대치 상황’과 ‘국익’이었습니다. 경수로에 비해 최고 100배까지 삼중수소(저에너지의 베타선을 방출하며, 외부피폭 위험은 적으나 체내 흡수 시 같은 이유로 모든 방사선이 주변 세포에 즉시 흡수됨)가 만들어진다는 건 알려주지도 않았습니다. 발전소를 가동 하는 중에는 거의 매일 핵연료를 교체해야 한다는 사실은 지금도 아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체르노빌 사고 이후 반핵운동이 일어나자 정부는 의도적으로 ‘낙후된 지역을’ 공략하기 시작합니다. 인근에 도시가 없는 ‘인구가 과소한 지역’이면서 ‘고학력자가 적은 곳’을 핵발전소 부지로 선정하고는 ‘소득향상과 삶의 질 개선’이라며 꼬드기기 시작한 겁니다. 그렇게 ‘트로이 목마’가 울진에도 들어왔습니다. 하지만 목마가 트로이를 집어삼켰듯 ‘돈’이 지역사회를 집어삼키기 시작했습니다. 원래 핵발전소가 들어서 있는 지역에 핵 관련 시설을 짓고 또 짓고. 그렇게 신화리는 송전탑에 포위됐습니다.  

 

주민들은 핵발전소에서 나오는 폭발음에 일상적인 불안을 겪고 있습니다. ‘중고 부품’, ‘짝퉁 부품’, ‘위조된 품질보증서와 시험성적서’가 영광 5, 6호기에 집중적으로 사용됐는데... “이게 폭발을 한 건지, 그냥 트립인지 구분할 수가 없다는 거예요.” 발전소 주변 마을 도로는 고작 2차선입니다. 위급상황에서 주민들은 핵발전소가 정면으로 보이는 곳에 집결해야 한답니다. “사고 나면 피할 길이 뻔한데. 법성까지만 도망가고 홍농 사람들은 다 죽으란 말이나 마찬가지죠.” 

 

밀양 할매, 할배들은 콘센트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를 정확히 꿰뚫어봤습니다. “그것이 있음으로 해서 송전탑이 생기는 것도 알게 된” 겁니다. 그러다보니 ‘핵마피아 비리, 핵발전소 수출, 신규 핵발전소 건설 계획과 2차 에너지기본계획’은 당연스레 알게 됐습니다. ‘싸움 속에서 국가가 누구를 위해 일하는지 그 정체를 깨달’았으며, 이제는 ‘국가’의 빈자리에 ‘연대’라는 새로운 기반을 채워 넣고 있지요. 이 땅, 고통 받는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하고 있는 것입니다. 

 

<위험한 동거: 강요된 핵발전과 위험경관의 탄생>은 이상헌, 이보아, 이정필, 박배균 네 사람이 전기를 생산하는 핵발전소가 들어선 고리, 월성, 울진, 영광과 전기를 소비하는 대도시, 대공장을 연결하는 송전선로가 지나는 밀양에 사는 이들의 목소리를 담고 있습니다. 지도를 펼쳐놓고 이곳들을 찾아보면 금방 알겠지만. 달리 공통점이라고는 해안가에 있다는 것, 또 서울과 멀리 떨어진 것 외에. 맞습니다. 그들이 들려주는 이야기 역시 엇비슷합니다. 

 

국가가 나서서 전기 만드는 공장을 만든다는 것, 헐값에 토지가 수용되고 사람들은 쫓겨났다는 것. 집단 이주한 마을에서는 원주민의 마찰로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했다는 것, 발전소 건설 초기 반짝 건설 경기로 돈이 풀렸다는 것, 어장은 황폐화되고 농지는 쓸모없게 되면서 다시 핵발전소를, 또 다른 핵산업을 유치하는 악순환에 빠졌다는 것, 정치인들은 문제해결이나 대책 마련보다 자기 자리 지키기 위해 이용만 한다는 것 말입니다. 

 

밀양 송전탑 반대 싸움이 한창일 때 많은 사람들이 이런 이야기들을 했더랬습니다. “당신들은 전기 안 쓰느냐? 전기 없이 살아야 한다.” 그러면서 님비니 어쩌니 손가라질 하기 바빴지요. 하지만 조금만 시간을 내서 찾아보면요. “전력자급률 서울 3%, 경남 210%. 수도권 전기 공급 하느라 지방 사람은 죽어갑니다.”라는 광화문 앞 1인 시위 푯말이 틀린 말이 아니란 걸 알 수 있습니다. 아니요. 누군가의 고통을 대가로 값싼 전기를 쓰고 있다는 사실을 애써 눈감고, 외면하고, 모른 채 하는 겁니다.  

 

글 쓴 이들은 우리가 위험을 담보로 이룬 ‘근대적 발전의 달콤하게 소비할 수 있는 계급에 속하거나 그런 장소에 살고 있기 때문’에 외면하면서 살아가기 쉽다고 말합니다. ‘위험은 울리히 벡이 말하듯 공평하고 민주적으로 우리에게 객관적으로 존재하지만, 물리적으로 드러난 위험경관을 눈으로 확인하지 않는 경우에는 그 사실을 망각하고 살게 되는’ 것이랍니다. 해서 위험경관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확대해 한국 사회에 널리 퍼뜨리는 확성기 역할을 맡고자 이 책을 기획했다고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위험한 동거>는 확성기로써의 역할을 훌륭히 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핵발전으로부터 고통 받고 있는 주민들의 목소리를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듣는 사람이 준비가 돼 있지 않다면, 아니 여전히 듣기를 외면한다면요. 모처럼 열린 탈핵으로 가는 발걸음이 더딜 수 있습니다. 아니요. 핵 문명의 어둔 그림자가 다시 무대 위로 등장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경각심을 갖기 위해서라도 책 곳곳에 새겨 있는 목소리들에 더 귀 기울여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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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3/23 21:11 2018/03/23 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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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도 기자도 아닌 사람이 한 주제로 책 세 권을 썼습니다. 그것도 30여 년에 걸쳐서 말입니다. <고해정토(苦海淨土)>(1969~2004) 3부작>. 미나마타병으로 죽어갔던, 고통 받았던 이들에 대한 비가(悲歌). 근대화를 상징하는 자본과 과학기술, 그리고 국가가 결합해 만들어낸 가혹한 폭력에 대한 고발. ‘미나마타’의 인류사 혹은 문명사적 의미에 대한 끈질긴 인문학적 질문을 끈질기게 던졌습니다.
 
2.
구마모토현 미나마타 시(市)에 들어선 질소 공장은 일본의 산업화, 제국주의와 궤를 같이 합니다. 승승장구하던 때엔 조선과 만주에도 공장을 지었고, 압록강에는 발전소까지 만들었습니다. 패전 후에는 공중분해가 되기도 했지만 곧 공장은 다시 가동됐습니다. 폭주하던 제국주의 기차는 멈췄지만 산업화까지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3.
14호, 나카츠 요시오, 일반인과 다를 것이 없다. 어획량도 전업자와 비슷. 야간작업도 하고 있다.
20호, 다가미 카츠요시, 자택에서 빈둥빈둥. 보행이 약간 곤란.
29호, 다나카 미노루코, 자택에서 걷게 되었다.
34호, 에고시타 마스, 가사일 전반을 돌봄. 외견상 아무렇지도 않다.
36호, 이노우에 아사노, 건강. 정상인과 다름없다. 산밭 일을 하고 있다.
43호, 다가미 요시하루, 모리오카쿠미 삼륜차 운전수, 건강체.
51호, 하마모토 츠기노리, 건강, 센쿄운수 근무, 현재 남규슈자동차학교 재학 중.
71호, 시마모토 리키조, 건강체, 2월 26일 사망.
73호, 스기모토 도시, 약간 나쁘다.
88호 스기모토 신, 완쾌라 여겨진다.
74호, 이토 세이하치, 완쾌라 여겨진다.
80호, 이와사카 키쿠에, 자택에서 빈둥빈둥.
87호, 우시지마 나오, 건강체.
(pp.224-5)
 
1964년 짓소공장에서 작성한 <미나마타병 환자 일람표>에는 환자에 대한 세심한 기록이기는커녕 ‘발병으로 비롯된 집안의 고난에 대해, 잃어버린 세월에 대해, 한마디도 말하지 않’(p.227)고 있습니다. 그저 이 기록은 행정당국이 추진했던 ‘위로금’ 개정의 근거였으며, 희생자 말소 수법이었으며, 지역감정을 악용하는 데 사용됐습니다.
 
4.
1956년부터라고 합니다. 혀와 입술이 떨리더니 말하는 게 쉽지 않아졌습니다. 근육은 맘대로 움직이다 마디마디가 꺾여 들어갔습니다. 뇌가 마비되기도 했으며 똑바로 걸을 수조차 없게 됐습니다. 사람뿐이 아니었습니다. 영물(靈物)로 여기던 고양이들은 미친 듯 춤추다 고꾸라져 죽어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바다에는 물고기들이 사라졌습니다.
 
5.
“도시라는 곳에 갔던 이들이 이야깃거리도 만들 겸, 다진 가다랭이라는 걸 먹어보자 싶어 다들 주문해서 먹어봤다는구먼. 별로 맛이 없더라는 거여. 비교를 할 수가 없더라는 거지. 몇십 종류나 있잖여, 이쪽 바다엔, 맛이 있는 물고기가. 혀에 착착 감기게 맛있는. 수은이 들어서 그랬다니까, 틀림없이.” 그리고 와아, 하고 웃음을 터뜨린다.(pp.183-4)
 
6.
언니는 사세보에서 콩 파는 장사.
일확천금.
차녀는 후쿠오카 탄광.
여동생, 나가사키 탄광.
어머니는, 돈은, 조금도 부족하지 않습니다.
또한 아버지, 3년 전 괴질로 죽었습니다.
돈은 거슬러 올라가 33만 받았습니다. 부자입니다.
(p.78)
 
어촌 마을이었던 미나마타에 들어선 공장은 바다만 망가뜨린 게 아니었습니다. 돈 벌이에 가족들을 이용한다거나 공장이 문을 닫으면 시(市)가 망한다거나 혁명을 노리는 좌익들이 설친다는 말이 흘러나왔습니다. 마을은 ‘질투와 험담과 밀고가 횡행하는’(p.328) 곳으로 변했습니다.
 
7.
29세대가 싸우기로 했습니다. ‘확약서’니 ‘청원서’니 하는 것들을 들이미는 ‘짓소’를 상대로 소송에 나선 겁니다. 이들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주주총회가 열리는 곳으로 순례를 떠납니다. 순례복을 준비합니다. 노랫말을 외우기도 힘들고, 발음이 엇나가 다른 말로 들려지만 영가(靈歌) 연습도 합니다. 이들과 함께 사우겠다고 나서는 이들도 오사카역이 미어질 듯 모여들었습니다.
 
8.
이시무레 미치코는 짓소와 정부를 상대로 한 싸움을 꼼꼼히 기록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한 르포르타주(사회고발 문학)로서의 글이 아닙니다. 과학기술과 자본의 결합이라고 할 수 있는 근대문명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입니다. 인신공양(人身供養), ‘신(神)들의 마을’이야말로 상처를 보듬고 치유할 수 있다는 성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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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6/27 09:03 2017/06/27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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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동군은 일본이 대륙 침략을 위해 만주에 설치한 부대입니다. 1904년 러일전쟁에서 제정러시아를 이긴 후 관동주(러시아가 청나라에게 조차지(租借地)로 빼앗은 랴오둥 반도 남단 지역) 방위를 위해 배치했던 수비대가 그 시초입니다.
 
그 후 일본은 1918년에 이 수비대를 독립부대로 개편 증강하는데요. 이것이 바로 관동군입니다. 당시에는 독립수비대 6개 대대와 일본 본토에서 2년 단위로 교대 파견되는 1개 사단으로 구성했다고 합니다.
 
관동군 병력은 중일전쟁을 거치면서 점차 늘어갑니다. 특히 나치 독일이 소련을 침공한 후에는 일본, 조선, 대만에서 병력을 동원해 75만 여명까지 늘었습니다. 하지만 미국 참전 후 본토와 동남아시아 방어를 위해 관동군 병력을 빼기 시작합니다.
 
결국 소련군 참전이 우려되던 1945년, 만주에 거주하는 일본인 남자 18세에서 45세까지 총 20만 명을 소집합니다. 한때 소련을 정복하기 위한 정예군대로까지 불렸던 관동군이 크게 약화된 겁니다.
 
2.
연합국이 반격을 해오면서 전황이 불리해지자 일제는 1943년 징병제를 실시합니다. '성전(聖戰)'에 참여할 영광스런 기회라는 선전은 총알받이를 위한 강제 동원 수단에 불과했습니다. 결국 1944년과 45년 만 20세가 되는 조선 청년들이 징병으로 끌려가기 시작합니다.
 
신체검사와 짧은 군사훈련을 받은 조선 장정들은 광활한 지역으로 배치됐습니다. '반소매 군복을 입으면 남방으로, 긴소매면 북방으로' 말입니다. 만주도 예외일 수가 없습니다. 수많은 조선인들이 관동군에 편입됐던 겁니다.
 
일본이 항복을 선언하기 직전이던 8월 9일, 대일전(對日戰)에 뛰어든 소련군은 쿠릴열도, 사할린, 만주 등지에서 60여만 명을 포로로 잡았습니다. 물론 그 포로들 속에는 관동군 소속 조선 청년들도 포함됐습니다.
 
이들은 모두 일본 군인으로 간주됐습니다. 군사학교를 졸업하고 장교로 복무했던 제국주의 군인들 말고, 징병으로 끌려온 청년들까지 말입니다. 시베리아 등지로 끌려간 조선인들은 3, 4년간에 걸친 중노동 후에야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3.
'포로'들은 모스크바와 블라디보스토크를 잇는 시베리아 철도를 따라 각처로 흩어졌습니다. 몸이 쇠약해져 있던 사람들이 이 열차 안에서 첫 희생자가 됐습니다. 수용소시설은 열악했으며 혹한, 기아, 중노동이라는 '시베리아 3중주'로 떼죽음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조선 청년들은 일본군 포로에 비해 더욱 고달픈 수용소 생활을 해야만 했습니다. 일본군 계급 질서가 수용소 안에서 그대로 유지됐기 때문입니다. 극소수 장교와 지원병을 제외하고 대부분 말단이었기에 온갖 궂은일을 해야만 했던 겁니다.
 
1948년 12월이 돼서야 조선인 '포로'들은 귀향할 수 있었습니다. 그해 8월과 9월 남쪽과 북쪽에 각기 다른 정부가 차례로 수립됐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일본인 귀환자들이 자국선을 타고 돌아간 것과 달리 조선인들은 소련 화객선을 타야만 했습니다.
 
출항을 알리는 뱃고동 소리가 울리자 생존자들은 '시베리아 대지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시베리아 에니세 물결아 잘 있거라 자작나무 숲아 네 품에 자란 어린이들은 내 본향 찾아 떠나련다 시베리아여 우리들의 자유와 청춘, 보람을 심어주던 정든 고향 시베리아".
 
4.
류학구는 일제 패망을 닷새 앞둔 1945년 8월 10일 관동군에 입대했다가 소련군에 '포로'가 됐습니다. 사회주의 사상에 공명한 그는 조국으로 돌아오지 않고 소련 잔류를 택했습니다. 비록 고향에 있는 어머니 안부가 마음에 걸렸지만요.
 
오웅근은 1925년 젠다오間島 지방 쉬시엔石峴 부근에서 태어났습니다. 8월 초 소집 영장을 받고 하이라얼로 갔던 그는 세 군데나 총상을 입고 포로가 됩니다. 시베리아 포로 생활이 끝난 후 북으로 돌아와 부친과 만났으나 모친이 남아 있는 쉬시엔으로 돌아갔습니다.
 
흥남여고에 임시 수용됐던 억류자들은 고향 땅으로 돌아갔습니다. 먼저 옌변延邊 등 만주 출신 수백 명이 풀려났고, 이어 북쪽에 연고지가 있는 사람들이 돌아갔습니다. 남쪽 출신 귀환자들은 거리에 따른 여비를 지급 받고 제일 마지막에 떠났습니다.
 
이창석은 1944년 1월 10일 만주에서 입대했다 '포로'가 됐습니다. 이후 수용소에서 도망쳐 나왔으나 붙잡혀 15년 중노동형을 받았습니다. 8년간 억류생활을 마친 이창석이 도착한 곳은 한반도가 아니라 일본 땅이었습니다.
 
5.
흥남여고에 머물러 있던 귀환자들은 곧 고향에 돌아가도록 허용됐습니다. 먼저 옌벤 등 만주 출신 수백여 명이 풀려났고 이어 북쪽에 연고를 둔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물론 부친이 인민위원회 간부였던 사람은 이보다 전에 나올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임시 숙소를 떠난 사람들은 남쪽 출신들이었습니다. 신현택의 증언에 따르면 고향으로 가는 거리에 따라 북쪽 정부로부터 여비를 받았다고 합니다. 또 다른 생존자들 말에 따르면 출신 지역별로 묶어 38선을 넘었다고 합니다.
 
정읍 출신 정용환은 포로용 방한복을 바꿔 입은 바람에 공작원 의심을 받게 되고 급기야 전기 고문까지 당했습니다. 평양이 고향이었던 이병주는 가족이 모두 포항으로 내려갔다는 얘기를 전해 듣고 남으로 내려왔으나 특별한 지령을 받은 게 아니냐는 추궁을 받았습니다.
 
월경 후 연행된 사람들은 인천 귀환자들은 송현동에 있는 전재민(戰災民)수용소로 옮겨졌습니다. 이때 귀환자들은 정용환과 이병주처럼 경찰서 혹은 미군 극동군 사령부에서 조사를 받아야만 했습니다. 때론 북쪽에서 받은 여비가 문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6.
소설이 아닙니다. 한마디로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란 겁니다. 영화에서나 나올법한 삶. '파란만장', '격동', '비극'이란 말들이 결코 은유가 아닌 삶, 직접 겪어보지 않았다면 감히 상상할 수조차 없는 삶들이 말입니다.
 
남쪽으로 귀환한 사람들이나 북쪽에 남은 사람들. 혹은 남도 북도 아닌 일본, 만주, 소련으로 간 사람들. 이들은 귀환 이후에도 순탄한 삶을 살수 없었습니다. 물론 지금까지도 일본, 소련 어느 곳에서 '배상'은커녕 '사고'도 받지 못했습니다.
 
일본이 항복을 선언한 지도 65년이 넘었습니다. 한국전쟁은 끝난 지 55년이 지났습니다. 반세기도 넘게, 세 세대가 돼서야 이들이 겪은 모진 삶들이 겨우 세상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것도 역사 연구자도 아닌 한 현직 기자로부터 말입니다.
 
일본에선 평화헌법을 개정하겠다는 사람이 총리로 있습니다. 우리는 만주군관학교와 일본육사를 졸업 한 관동군 출신 아버지 후광을 업은 딸이 대를 이어 대통령입니다. '자학사관'을 극복하자는 일본, '올바른 역사'를 가르쳐야 한다며 국정교과서를 만드는 한국.
 
일본 탓만 하기에는 되레 '민족주의'라는 덫에 갇힐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전후 천황제를 유지하면서까지 전범 처리에 소극적이었던 미국 탓을 해야 할까요. 아니면 일본 침략 전쟁에 협력한 추축국 진영으로 치부해 조선인들을 억류한 소련 탓을 할까요.
 
맞습니다. 독립군을 토벌하던 간도특설대 장교였던 이가 국군 원로로 받들어지고 있습니다. 일본 군함은 군국주의이자 제국주의의 상징인 '욱일승천기'를 버젓이 달고 우리 항구에 들어옵니다. 여태껏 청산하지 못한 '잔재'들을 안고 있는 우리 탓이 더 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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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6/28 11:56 2016/06/28 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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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간 차이는 있겠습니다. 하지만 오일정점에 이미 도달했다거나, 지금은 경제성이 떨어져 파내지 못하지만 기술발전을 고려하면 아직은 남았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화석연료가 고갈된다는 점은 바꿀 수 없는 사실입니다. 석유는 물론이고 석탄, 천연가스가 공기나 물과 다른 점은 바로 무한정 퍼낼 수 있는 게 아니란 얘기지요.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런 사실을 알지 못하는 것처럼 또는 애써 외면합니다. 인류 역사상 이처럼 안락하고 쾌적한 삶을 살았던 적이 있었을까요. 이들은 우리 후손들은 물론이거니와 자원을 갖고 있으면서도 정작 쓰지 못하는 동시대 사람들까지. 화석연료를 태움으로써 발생하는 지구온난화 문제 또한 안중에도 없습니다.
 
2.
도시화는 어느 시대, 사회에서나 있어왔습니다. 인류 문명 발상지로부터 시작해 알렉산드리아(이집트), 테오티와칸(마야제국), 캄베이(인도 구자랏 왕국)와 같은 고대 국가 도시들은 물론 베이징(중국), 볼로냐(이탈리아), 페즈(모로코)와 같은 근대 도시들까지 말입니다. 우리나라 역시 멀리 신라의 수도였던 서라벌만 해도 기와집이 18만 여 채가 있었다고도 합니다.
 
하지만 산업화 이후의 인류 문명이 이전과는 확연이 다르듯 산업화 이후의 도시화 역시 이전과는 속도나 규모면서 큰 차이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동로마제국의 중심지였던 콘스탄티노폴리스(보통 ‘콘스탄티노플’이라 부름)는 대략 14㎢(여의도보다 4.8배가 큼)에 40-50만 인구가 있었다고 하니, 지금으로 따지자면 겨우 우리나라의 중.소 도시 정도 쯤 되려나요.
 
3.
어느 도시들이나 안정적인 에너지 공급이 필수적입니다. 가장 기본적인 식량과 물뿐만 아니라 거주할 집과 입을 옷 등을 만들기 위해서이지요. 하지만 산업화 이후 생겨난 거대도시들은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체계가 필요합니다. 자급자족은커녕 가까운 지역에서 조달하는 것조차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즉, 이전과는 달리 소비하는 거의 모든 것들을 다른 곳에서 만들어 가져와야 하는데, 이는 엄청난 양의 화석에너지가 필요합니다. 또한 메트로폴리스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24시간 꺼지지 않는 불빛과 거리마다 빼곡히 들어찬 자동차 역시 화석연료 체계에서나 가능한 얘깁니다.
 
4.
<태양도시, 에너지를 바꿔 삶을 바꾸다>는 일전에 소개했던 <아톰의 시대에서 코난의 시대로>와 같이 글쓴이가 ‘기자’입니다. 그 덕에 ‘화석연료’ 도시의 문제점과 태양도시로의 전환에 대해 쉽게 접근하고 있습니다. 또 세계 각국의 태양도시들, 프라이부르크, 에테보리, 칼룬보르, 기타큐슈 등을 차례로 둘러보며 그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요약하자면 에너지를 바꿔 삶을 바꾸자는 건데요, 매우 실천적으로 접근하고 있습니다. 이 책 역시 맨 뒷머리에 추천 도서들과 웹사이트들을 소개하고 있어 더 깊은 고민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다 합치면 꽤나 많은데요. 모르겠습니다만, 앞서 소개한 책 속의 추천도서와 함께 다 읽고 나면. 두 ‘기자’들을 뛰어넘는 에너지 전문가가 될 것도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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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6/14 16:35 2015/06/14 16: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