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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간 차이는 있겠습니다. 하지만 오일정점에 이미 도달했다거나, 지금은 경제성이 떨어져 파내지 못하지만 기술발전을 고려하면 아직은 남았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화석연료가 고갈된다는 점은 바꿀 수 없는 사실입니다. 석유는 물론이고 석탄, 천연가스가 공기나 물과 다른 점은 바로 무한정 퍼낼 수 있는 게 아니란 얘기지요.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런 사실을 알지 못하는 것처럼 또는 애써 외면합니다. 인류 역사상 이처럼 안락하고 쾌적한 삶을 살았던 적이 있었을까요. 이들은 우리 후손들은 물론이거니와 자원을 갖고 있으면서도 정작 쓰지 못하는 동시대 사람들까지. 화석연료를 태움으로써 발생하는 지구온난화 문제 또한 안중에도 없습니다.
 
2.
도시화는 어느 시대, 사회에서나 있어왔습니다. 인류 문명 발상지로부터 시작해 알렉산드리아(이집트), 테오티와칸(마야제국), 캄베이(인도 구자랏 왕국)와 같은 고대 국가 도시들은 물론 베이징(중국), 볼로냐(이탈리아), 페즈(모로코)와 같은 근대 도시들까지 말입니다. 우리나라 역시 멀리 신라의 수도였던 서라벌만 해도 기와집이 18만 여 채가 있었다고도 합니다.
 
하지만 산업화 이후의 인류 문명이 이전과는 확연이 다르듯 산업화 이후의 도시화 역시 이전과는 속도나 규모면서 큰 차이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동로마제국의 중심지였던 콘스탄티노폴리스(보통 ‘콘스탄티노플’이라 부름)는 대략 14㎢(여의도보다 4.8배가 큼)에 40-50만 인구가 있었다고 하니, 지금으로 따지자면 겨우 우리나라의 중.소 도시 정도 쯤 되려나요.
 
3.
어느 도시들이나 안정적인 에너지 공급이 필수적입니다. 가장 기본적인 식량과 물뿐만 아니라 거주할 집과 입을 옷 등을 만들기 위해서이지요. 하지만 산업화 이후 생겨난 거대도시들은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체계가 필요합니다. 자급자족은커녕 가까운 지역에서 조달하는 것조차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즉, 이전과는 달리 소비하는 거의 모든 것들을 다른 곳에서 만들어 가져와야 하는데, 이는 엄청난 양의 화석에너지가 필요합니다. 또한 메트로폴리스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24시간 꺼지지 않는 불빛과 거리마다 빼곡히 들어찬 자동차 역시 화석연료 체계에서나 가능한 얘깁니다.
 
4.
<태양도시, 에너지를 바꿔 삶을 바꾸다>는 일전에 소개했던 <아톰의 시대에서 코난의 시대로>와 같이 글쓴이가 ‘기자’입니다. 그 덕에 ‘화석연료’ 도시의 문제점과 태양도시로의 전환에 대해 쉽게 접근하고 있습니다. 또 세계 각국의 태양도시들, 프라이부르크, 에테보리, 칼룬보르, 기타큐슈 등을 차례로 둘러보며 그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요약하자면 에너지를 바꿔 삶을 바꾸자는 건데요, 매우 실천적으로 접근하고 있습니다. 이 책 역시 맨 뒷머리에 추천 도서들과 웹사이트들을 소개하고 있어 더 깊은 고민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다 합치면 꽤나 많은데요. 모르겠습니다만, 앞서 소개한 책 속의 추천도서와 함께 다 읽고 나면. 두 ‘기자’들을 뛰어넘는 에너지 전문가가 될 것도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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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6/14 16:35 2015/06/14 16:35

1.

‘선’과 ‘악’은 무엇으로 구분될까요. 대게 영화에서는 ‘악당’이 등장하고 이에 맞서는 ‘영웅(들)’이 나옵니다. ‘나니아 연대기’에서와 같이 말입니다. 여기서 ‘선’은 당연 ‘아슬란’ 혹은 나니아에 초대된 네 명의 아이들이며 ‘악’은 ‘하얀마녀’입니다. 하지만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골룸’은 어떤가요. ‘선’과 ‘악’, 쉽게 판단할 수 있습니까. 

 

하나 더. ‘착함’ 또는 ‘나쁨’은 어떻게 나눌 수 있을까요. 물론 사람들마다 이런 때엔 ‘착함’, 저런 경우엔 ‘나쁨’이라고 말하는 어떤 기준들을 갖고 있을 겁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 경우엔 ‘골룸’에서보다 더 ‘착함’과 ‘나쁨’을 구분하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예컨대 ‘나가수’에서 김건모의 탈락에 ‘재도전’ 기회를 말했던 ‘김제동’이 ‘나쁜가?’, ‘착한가?’와 같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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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유, 석탄과 같은 화석연료는 쉽게 ‘나쁜’ 에너지로 분류됩니다. 반면 ‘천연가스’, ‘바이오 에너지’ 등은 ‘착한’ 에너지라며 높이 치는데요. 이때 ‘착한’과 ‘나쁜’을 가르는 기준은, 이산화탄소를 발생시키느냐, 발생시키지 않느냐 또는 많이 발생시키느냐, 적게 발생시키느냐, 일겁니다. 하지만 바이오 연료라고 불리는 팜 오일의 원료를 생산하는 여성노동자 조와 리마의 말을 듣고 있으면. 방금 붙인 이 ‘착한’이란 수식어가 적합한지 의문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난 오래 전에 이혼했어요. 열여덟 살인 큰 아이가 일을 한다고 하지만, 네 명의 아이들 모두 내게 의존하고 살아요. 그래서 난 아파도 안 되고, 다쳐서 병원비가 들어도 안돼요. 그런데 이미 한쪽 눈은 제 구실을 하지 못하고 있고, 등은 무거운 농약 살포기를 견디지 못해 혹이 나기 시작했어요. 매일 하던 기침에 이제는 피까지 섞여 나오고 있구요. 이러다 정말 아이들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게 되는 건 아닐 지 걱정이에요.”(인도네시아 팜 플랜테이션 노동자 ‘조’ p.145)

 

“난 집안 일만 하던 가정주부였어요. 그런데 남편이 일하던 목재 공장 주변이 모두 팜 농장으로 변해버렸어요. 남편이 먼저 팜 농장에서 일하기 시작했죠. 그런데 이제는 남편이 벌어오는 것만으로 살림을 꾸려갈 수 가 없었어요. 그래서 저도 팜 농장에서 일하기 시작했죠. 그렇지만 살림은 나아지지 않았어요.”(인도네시아 수마트라 북부의 팜 농장에서 일하는 노동자 ‘리마’ p.146)

 

3.

한국수력원자력(주) 홈페이지에 보니 ‘원자력발전’을 대략 이렇게 소개해놨습니다. ‘지금 지구 환경은 화석연료의 과다한 사용으로 심각한 위기에 처해있는데 원자력발전은 발전원별 온실가스 발생량이 가장 적어 환경친화적 에너지이다.’ 어떻습니까? 이만하면 ‘원자력발전’은 ‘착한’ 에너지로 구분할 수 있겠지요. 어, 아니, 아직은 잘 모르겠다구요? 왜지요? 옆 나라에서 발생한 사고를 보니 꼭 그렇지도 않다구요. 어허, ‘원자력발전은 석유파동(석유공급불안/고유가시대)이나 에너지무기화에 대비할 수 있는 유일한 에너지원’ 인데다가 ‘우라늄을 원자로에 한번 장전하면 12~18개 월 가량은 연료를 교체하지 않아도 되므로 그만큼의 연료 비축효과가 있는 셈’인데, 어찌 ‘선’한 에너지가 아니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4.

‘선’과 ‘악’, ‘착함’과 ‘나쁨’은 결국 ‘정의’의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정의’는 철학과도 연관되는 것이요, 사상, 세계관과도 떼려야 뗄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과 ‘악’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이, 이쪽에 서 있는 이들에겐 ‘선’이요 저쪽에 서 있는 사람들에겐 ‘악’이 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착함’과 ‘나쁨’ 역시 철학, 사상, 세계관을 같이 하는 사람들로 또 달리 하는 사람들로 나눌 수 있을 겁니다. 

 

이렇게 본다면 에너지 문제와 관련한 ‘착한’과 ‘나쁜’의 구분 또한 사상, 세계관, 철학이 기준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쉽게 말해 ‘핵발전’과 ‘팜 오일’을 어떤 철학과 세계관을 가지고 보느냐, 어떤 사상으로 평가하느냐에 따라 ‘정의’로운가, ‘정의’롭지 않은가, 로 나눌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런 면에서 본다면 <착한 에너지 기행>에서 말하는 ‘기후정의’가 가지는 뜻이 무엇인지 알 수 있겠습니다.  

 

5.

모종이며 씨앗을 심은 지 이제 한 달이 다 되어 갑니다. 달력을 보니 6월. 이제 막 자리를 잡기 시작한 모종이며 씨앗들 사이로 풀이 삐죽삐죽 올라오는 시기이기도 하지요. 처음 농사를 지었던 때가 생각납니다. 아니 재작년까지의 기억도 생생합니다. 고추며 토마토 사이로 하나, 둘 보이던 풀을 놔뒀다가 한여름 땡볕에 땀을 흠뻑 뒤집어쓰고 골 사이를 기어 다니던 기억이 말입니다. 처음엔 뭐 이쯤이야 하고 나중에 한 번에 풀을 매야지 했고, 조금 지나선 뭐 낫으로 쓱쓱 베어버리면 되지 했다가. 걷잡을 수 없이 자라는 잡초에 완전 두 손 든 것이었지요.

 

이제 ‘환경위기’, ‘지구위기’에 대해 딴죽 거는 사람은 없어 보입니다. 그만큼 위기가 매우 빨리 다가오고 있고 또 바로 가까이에 있다는 것일 겁니다. 그런데도 캐나다의 몬트리올, 케냐의 나이로비, 인도네시아 발리, 폴란드의 포즈난,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열렸던 기후변화 협약 당사국 총회는 코앞에 닥친 이 위기에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를 논의했다기보다는 책임전가와 발뺌, 생색내기, 위장, 미루기 등등으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아무래도 돈과 권력을 움켜쥔 사람들에겐 이 ‘위기’란 남의 ‘위기’일 뿐이요, 다시 한 번 돈과 권력을 공고히 할 ‘기회’일 뿐인가 봅니다. 하지만 손으로 쓱쓱 지나가면 될 일을, 호미로 긁어내기만 하면 될 일을, 낫으로 쓱쓱 베어버리면 될 일을 멍하니 지켜보다 나중엔 두 손, 두 발 다 들고 말 거라는 걸. 꼭 그들만 모르는 있는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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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01 20:53 2011/06/01 20: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