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우길 ⑥ 봄이 오는 길목에서 만난 신사임당길(2013년 4월 27일)
 
믿기지가 않을 정도다. 불과 지난주, 아니 어제까지만 해도 비가 오락가락, 바람이 쌩쌩. 한옥학교 가는 길과 학교가 있는 대관령 꼭대기, 진부엔 눈까지 내리고. 도로 겨울이 오나 싶을 만치 쌀쌀한 날씨가 계속됐었는데. 모처럼 걷기를 한다고 소문이라도 났나. 하늘은 맑고 바람은 솔솔. 이게 무슨 조환가 싶다.
 
버스로 한 시간을 달려 도착한 송양초등학교 앞부터 시작된 임도가 죽헌저수지에 이를 때쯤, 막 가파른 길을 걸어 올라와 숨이 가쁘고 땀이 몽글몽글 뒷덜미를 타고 내려올 그때쯤. 이미 시내엔 벚꽃과 개나리가 자취를 감췄건만. 그래서 벼르고 별렀던 왕벚꽃도 구경하지 못했었는데. 솔바람을 타고 흐드러지게 맑은 물 위로 떨어지는 하얗고 빨간 꽃망울들. 모처럼 봄이 오는 길목에서 눈이 호강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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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봄철 날씨가 변덕스러운 거야 원래 그랬거니 싶으며 넘기는 경우가 일쑤다. 예컨대 시베리아기단이니 북태평양기단이니 하며 세력싸움 탓으로 돌리거나. 일사량이니 복사냉각이니 하며 일교차가 큰 이유를 설명하는 것들이 그렇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언제부턴가 봄과 가을은 그 계절을 느끼기도 전에 삼복더위와 동장군에 밀려나고. 최첨단 슈퍼컴퓨터가 있어도 급작스런 폭우와 폭설을 알아내기는 점점 어려워지니. 이만하면 자연적인 현상이라고 말하기엔 다 설명이 되질 않겠다. 물론 이런 이상 현상들에 대해 기후가 변화해 그렇다는 말들도 있지만.
 
일주일 먹을 것을 사기 위해 차를 끌고 대형 마트로 가서. 지구 반대편에서 온 과일이며 생선을 카트에 담고. 이제 막 겨울을 벗어났을 뿐인데도 넘쳐나는 푸른 채소들을 골라내고. 크고 선명한 텔레비전 앞에서 우리 집 텔레비전도 바꿔야 하는데, 잠시 쉬기도 하다. 삼겹살에 갈비살, 닭가슴살 통조림까지 사고 나면. 요동치는 날씨는 그저 애꿎은 기상청 탓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신사임당길 들머리에서 산만한 덩치를 가진 개 때문에 뒤돌아 갈까도 했었는데. 죽헌저수지를 지나 농로로 접어드는데 난데없이 나타난 누렁이 한 마리. 삼십분 넘게 개 사라지길 기다리다 겨우 출발. 헌데 외따로이 떨어진 어떤 집 앞에서 다시 들리는 개소리에 또 멈칫.
 
전에는 마을이 얼른 나오길, 사람 흔적이 보이길 했는데. 요즘은 마을이나 집 근처를 지나게 되면 어디서 개가 나오지나 않을까 걱정이다. 물론 대부분 묶어 놓고 있기는 하나. 워낙 크기도 하거니와 소리도 무진장 커 움찔움찔. 동네 길을 걷는 게 그곳에 사는 사람들에겐 피해를 주는 일이니 조심스레 걷는 게 당연하겠지만. 본의 아니게 소란스럽게 만드는 것 자체가 신경 쓰이는 일이라 걷기가 쉽지 않다. 그래도 어쩌겠나. 조심, 또 조심하는 수밖에.
 
사방 대나무가 있어 그 이름과 걸맞은 죽림사 근처를 지나는데, 푸른 대나무 사이로 검은 오죽이 드문드문 보인다. 근처가 오죽헌이라더니 역시 그 이름값을 하는 가보다. 시간도 시간이거니와 어느새 해도 뉘엿뉘엿. 오늘은 저기까지만 이다, 싶어 발걸음을 재촉하는데. 이런 둔치는 공사 중인데 길 끝엔 굴삭기가 가로막고까지 있다. 게다가 차들은 어찌나 쌩쌩 달리는지. 막바지에 와서 고생이다.
 
하지만 조금 늦은 봄맞이 길이었던 신사임당길. 시내엔 개나리꽃이 지고 벚꽃도 보이질 않았지만 봄을 느끼기에 안성맞춤. 이어지는 길도 더 늦기 전에 걷고 싶게 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열두 번 째 여행에서 걸은 길
바우길 11구간 신사임당길은 위촌로 송양초등학교에서 시작해 허난설헌 생가터까지 이어지는 16.3km 길이인데 이날은 오죽헌까지만 걸었다. 거리로는 9.7km, 시간은 천천히 봄을 만끽하며 걷느라 4시간 조금 넘게 걸렸다.   
 
* 가고, 오고
강릉시내버스 노선(http://www.gangneung.go.kr/sub/bustime/main.jsp?pp=sub01)을 참조.
 
* 잠잘 곳
11구간이 끝나는 곳에서 조금 더 가면 경포해변인데 이곳에 숙박시설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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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9/25 12:00 2013/09/25 12:00
사용자 삽입 이미지바우길 ⑤ 솔향기 솔솔, 심스테파노길(2012년 10월 20일)
 
버스 시간 맞추기가 쉽지 않다. 태백에서 출발한 기차는 강릉역에 13시 05분 도착한다. 그런데 심스테파노길이 시작되는 명주군왕릉을 가는 버스도 13시 05분에 종점에서 출발하니. 버스를 타야하는 곳까진 걸어서 10분 남짓이지만. 이게 참 애매하다. 종점에서 버스가 여까지  얼마나 걸릴지 종잡을 수 없으니 말이다. 아침나절 부지런히 쌌던 김밥을 두고 오는 통에 어디서 먹을 걸 사야긴 사야겠고.
 
하는 수 없어 택시를 집어타고 정류장에 도착, 근처 편의점에서 김밥과 빵 등등을 사고 보니. 어이쿠, 그새 20분이 다 되간다. 버스 놓친 것 아닌가, 발을 동동 구르는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 했나. 하는 줄도 몰랐던 세계무형문화축전 덕에 버스가 늦게 도착, 겨우 탈 수 있다. 뭐, 또 그 덕에 길이 막히기도 했고, 돌아가기도 했지만.
 
그래도 버스를 놓쳤다면 천상 다음 차를 타야 하는데, 그랬다간 해가 꼴딱 다 넘어간 후에야 위촌리에 도착했을 거고. 나오는 버스도 한 시간 넘게 더 기다려야 하고, 줄줄이 시간이 뒤로 밀리기 때문에. 무슨 일이 있어도 탔어야 했으니 참 다행이지, 싶고. 이번도 이번이지만 다음번도 시간 맞추기가 쉽지 않으니. 이래저래 꼼꼼히 준비해야겠단 생각이 다시 든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기차 안에선 흐렸던 날씨가 군왕릉에 도착하니 맑게 개었고. 뒷자리에 앉아 눈치 보며 허겁지겁 먹긴 했어도. 김밥에 빵까지 든든히 먹었더니 힘도 나고. 10구간과 4구간 갈림길부터 시작되는 푹신한 솦 숲길에선 솔솔, 솔향기 그득하고. 땀이 채 나기도 전에 시원한 바람이 뒷목을 간질간질. 아까까지 조마조마했던 마음이 싹 날아간다. 또 강릉휴게소에서 잠깐 쉬었다 다시 시작된 솔 숲 길 임도, 멀리 동해바다와 강릉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솔바위까지 내처 걸으니. 바우길, 참 좋다.
 
4구간처럼 거꾸로 걸었다면 엄두도 나지 못했을 가파른 내리막길을 로프를 잡고 한참을 내려올 땐 이거 만만치 않은데, 하다가도. 법륜사를 지나 다시 시작된 동네 뒷산 길 같은 산길이 다시 이어지고. 심스테파노가 숨어 지냈다던 골아우 마을을 지나는 동안 멀리 바다가 보일 듯 말듯. 길 가에 바짝 붙여 묶어둔 산만한 개 두 마리에 오금이 다 저리다가. 오랜만에 재미없는 아스팔트 길과 눈앞을 가로막고 서 있는 송전탑과 고속도로 교각들을 지나고 난  끝, 송양초교까지 내처 쉬지 않고 걸으니. 다리는 조금 찌릿찌릿, 해는 뉘엿뉘엿, 버스 타는 곳은 또 어딜까 마음은 조마조마.     
 
11km로 비교적 짧은 거리지만, 바우길이 가진 재미를 온전히 다 갖고 있는 솔향기 솔솔, 심스테파노길. 그 길을 어느 가을, 맑고 바람 부는 날 그렇게 온전히 다 걸어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심스테파노길:
바우길을 탐사하던 중 구한말 병인박해 때 심스테파노라는 신자가 포도청 포졸에게 잡혀가 순교한 골아우라는 마을을 찾았다고 합니다. 해서 탐사대는 이 마을을 심스테파노 마을이라 부르고, 길 이름도 심스테파노길이라 지었답니다.  
 
* 열한 번 째 여행에서 걸은 길
바우길 10구간 심스테파노길 11km를 걷는데 3시간 30분 정도 걸렸다.   
 
* 가고, 오고
바우길 어느 구간이나 들머리, 날머리 모두 버스가 있지만 시간 맞추기가 까다롭다. 미리 시간을 확인하는 건 당연하고 10분 정도는 일찍 정류장에 도착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계획을 세워야 한다. 자칫 시간에 못 맞추면 택시를 부르거나 다음 버스가 올 때까지 한참 기다려야 하기 때문이다.   
 
* 잠잘 곳
10구간은 짧은 구간이기 때문에 따로 잠잘 곳을 정하지 않아도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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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7/14 11:00 2013/07/14 11:00

길을 걸어온 사람에게는 끝일런지 모르나(2008년 12월 15일)

 

사용자 삽입 이미지다 왔다, 싶으니 어디서 돌아서야 할지 망설여진다. 첨엔 걸어서 갈 수 있는 곳까진 가본다, 였는데. 생각해보니 다른 이들은 모두 다 거기서 멈췄으나 걸음을 돌리려는 우리에겐 굳이 거기까지 가야할 이유가 딱히 없다. 7번 국도를 따라 긴 바다 길을 걷기로 했으니 이 길과 만나는 대대삼거리가 적당할 듯도 싶다. 헌데 마음 한구석엔 여기까지 왔는데 그래도 화진포니 대진과 거진에 있다는 등대니 이것저것 구경도 하며 가볼 때까진 가보자, 란 마음도 몽실몽실하다.  

 

날이 무척 포근하다. 한겨울 날씨를 생각하고 옷도 여러 겹 껴입고 왔는데 다 소용없다. 아니다. 아예 봄옷으로 갈아입어도 걷기엔 하나도 춥지 않다. 아까 차안에서 그리고 읍내에서 또 싸우느라 출발이 늦긴 하지만 아무래도 오늘은 꽤 많이 걸을 수 있겠다, 싶다.

 

7번 국도와 만나는 대대삼거리를 지나니 바다가 가까운 곳에 있음을 금세 알 수 있다. 유난히 먼 곳까지 둥글게 보이는 하늘이며 이따금 불어오는 바람에 실려 오는 비린내 때문이다. 또 언제 나타났는지 갈매기 무리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머리 위를 빙빙 돈다. 저 보성 득량만에서 마지막으로 눈에 담아뒀던 그 파란 바다를 근 4년 여 만에 다시 보게 된 거다. 발이 몹시도 시리겠지만 당장에라도 뛰어들고프다. 허나 구경은 다음번으로 미뤄두자, 하고 길을 나섰기에 먼발치서만 눈으로만 들여다보고 서둘러, 서둘러 걸음을 재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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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날 같이 햇살이 따사롭기는 한데 겨울은 겨울인가보다. 아니 바다와 가까이 하고 있어 그런가, 조금씩 바람이 차갑게 분다. 그래도 바지 안에 쫄쫄이까지 입으며 준비한 탓에 매섭단 느낌은 아직 아니다. 근처에 대나무와 소나무가 번갈아 보이더니 송죽리라는 이름을 드러낸 조그만 마을을 지나 조그만 모래사장을 갖고 있는 반암해수욕장까지 오랜만에 걷기도 한 탓에 조금 힘도 들지만 바닷바람을 맞으며 사뿐사뿐 걷는다.

 

여기저기 멀쩡한 도로 놔두고 또 땅 파서 길 낸다고 공사하느라 덤프트럭이 쉴 새 없이 질주한다. 하루 종일 있어봐야 고작 몇 백대나 지나갈까 말까한 길옆에 여름 한 철 잠깐 차 좀 밀린다고 뭉텅뭉텅 산 깎고 굴 뚫고 물위에 다리 놓는 일이 도대체 언제까지 계속되려는지. 하긴 어떻게 해서든 운하 만들려고 홍수피해는 조그만 지방 하천에서 더 많이 나는데 4대 강 유역에다 뭔 정비를 한다고 어마어마한 돈을 퍼붓는 나라에서 이까짓 일이야 뭐 그리  일이나 될까. 아무튼 바람은 점점 세지지 덤프트럭 피하느라 길 바깥으로 나갔다 들어왔다, 힘이 부친다.    

 

지도로만 보면 한 걸음이면 될 듯한데, 어째 걸어도, 걸어도 거기서 거길까. 비슷한 오르막길을 두 개나 오르고 이리 굽이 저리 굽이 꼬부랑길을 두 개나 지났는데도 끝이 보이질 않는다. 그러보니 아침에 싸우느라 어디까지 갈 건지 정하질 않았네. 통일전망대는 아니란 것만 이심전심이지 어디서 길을 돌아 나올 건지 확인도 하지 않았던 거네. 에구구. 김밥이랑 건빵이랑 먹으면서 쉬어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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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운동부족인 것 같다. 장딴지며 엉덩이까지 결리는 게. 혹여 바지 속에 입은 쫄쫄이 때문에 혈액순환이 안 되서 그런가, 싶어 벗었는데 그때뿐이다. 별 수 없다. 조금가다 쉬고 또 조금가다 또 쉬고, 자주 쉬어가는 수밖에. 그리고 쉴 때마다 몸을 풀어주는 수밖에. 그래도 대진읍내에 못 미쳐선 논두렁을 걸어 철새 때를 쫓아가기도 하고 바다가 보이는 곳에서는 모래톱을 밟아 보기도 한다. 그리고 그때마다 바다를 향해 지어진 마을 안 정자에 올라 발 뻗고 쉬기도 하고 이름 모를 포구에선 방파제 위에 누워 파란 하늘을 보니 몸이 피곤해도 재미는 제법 쏠쏠하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애당초 처음부터 걷기여행을 어디까지로 하자, 얘기하지도 않았거니와 오늘 아침엔 한바탕 싸우느라 또 정하지 않아 일단 가보자, 나선지라 그저 돌아서면 그만이겠지만 쉽게 돌아서질 못한다. 그렇다고 해질녘까지 걷긴 지금은 괜찮다지만 몸 상태도 그렇거니와 바람이 걱정이어서 아무래도 안 될 듯하다. 길이야 돌아서면 거기가 끝이고 다시 시작이니 어디면 어떻고 어디면 또 어떻겠냐만은 그래도 이왕지사 적당한 곳을 찾아보는데, 그게 쉽지가 않다. 해서 그저 지금 서 있는 이곳에서 다시 길을 돌아서기로 하고 여기가 어딘가 둘러보니, 마차진이란 곳이란다.

 

* 스물다섯 번째 여행에서 걸은 길

거진읍 대대삼거리에서 마차진해수욕장까지 7번 국도를 따라 약 18km를 4시간 30분

 

* 가고, 오고

춘천터미널에서 거진으로 가는 시외버스 첫차는 7시 10분이다. 이 차를 놓치면 다음 오후 차 이외에는 홍천을 경유하거나 속초로 돌아가야 한다. 마차진이나 그 위 명파리까진 속초까지 운행하는 군내버스가 자주 있으니 이 차를 타고 거진이나 속초로 나와 춘천행 시외버스를 이용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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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7/04 13:42 2011/07/04 13:42
끝내 바다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네(2008년 10월 3일)
 
날이 춥다. 불과 일주일 사이라지만 설악산엔 단풍이 들었다, 하고, 대관령엔 첫 서리가 내렸다, 하니, 어느 틈엔가 그렇게 가을은 이만치 다가섰다. 10월이라는 숫자가 주는 것보다 더 무겁게 옷을 걸치고는 그 무슨 급한 일이 있기에, 채 해가 뜨기도 전에 이리도 서둘러 집을 나서는 지. 원통을 거쳐 속초로 향하는 버스 안에는 이른 추위만큼이나 이른 히터가 조용히 소리를 내며 돌아가고, 운전기사 아저씨는 자판기 커피를 홀짝홀짝 넘기다 조용히 표만 받아든다.
 
그렇게 다시 길 위에 섰다. 천근만근 몸을 이끌고 올랐던 그 진부령 그 꼭대기에. 성큼 다가선 가을 날씨 탓인지, 아님 고갯마루라서인지, 이도 저도 아닌 인적 없는 이른 아침이 주는 황량함 때문인지, 바람이 쌀쌀맞기만 하다. 또 아쉬움에 에둘러 옆길로 많이도 샜는데 이제 끝이 저만치다 생각하니 마음까지 추워진다. 이젠 더도 돌아갈 수도 없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필요 때문에, 다만 지칠 대로 지친 몸으로 걸어갈 때 그 쇠약함이 느껴질 뿐이다.
 
지칠 대로 지친 몸으로 걸어갈 때 그 쇠약함 속에는 가끔 출발할 때 느꼈던 고통을 스르르 녹일 정도의 힘과 아름다움이 감추어져 있는 경우가 있다. 길에 부대껴 말갛게 씻겨지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필요 때문에 침식당한 나머지 고통은 그 날카로움이 무뎌진 것이다. - 『걷기예찬』. 다비드 르 브르통. p.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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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추위도 피할 요량으로 미술관 문을 밀어보는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 내부수리란다. 하는 수 없이 혹여나 하고 준비해온 겉옷을 하나씩 더 걸치고는 신나게 내리막길을 내달으니 몸에서 열이 나는 듯 어느새 추위가 한결 가신다. 이내 발걸음에 맞춰 노랫가락을 흥얼흥얼, 이 얘기 저 얘기를 도란도란 나눈다.
 
돌이켜보니 걷는 내내 싸우기도 참 많이 싸웠지만 그보다는 더 많은 시간을 함께 얘기하며 마음을 나누고 영겁의 인연을 생각했다고밖에 말할 수 없다. 그리고 가끔은 길이 주는 아름다움에 겨워 한참을 나아가지도 못하고 서성거렸다고밖에 말할 수 없다. 또 때때로 자연이 주는 성스러움에 한없는 영적인 충만함에 떨려오는 기쁨을 주체할 수 없었다고밖에 말할 수 없다. 그것이, 그 수많은 겸허가 이렇게 또 걸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일런지. 
 
걷는 사람은 겸허하다. 그는 자신을 지배하는, 그리고 삼켜버릴 수 있는 자연의 가운데에서 스스로가 작다는 것을 느낀다. - 『걷기의 철학』. 크리스토프 라무르. p.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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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갯길을 다 내려왔나 싶으니 오늘은 바다를 볼 수 있을까, 하는 기대로 발걸음이 빨라진다. 중간중간 웃옷을 벗느라, 아침대신 준비한 감자며 옥수수를 먹느라 잠시 서기는 했어도 두 시간 넘게 가방 내려놓고 다리 뻗으며 그렇게 쉬지 않고 걸어왔는데도 말이다. 게다가 갓길마저 좁은데다 이쪽저쪽으로 굽어진 길로 차 또한 조심을 떠느라 온통 신경이 날카로웠는데도 말이다. 어째 이 국도라 불리는 길들을 걸을 때마다 이 모양인지. 차량이 뜸해진 틈을 타 길 가운데로 걸어보기도 하지만 이내 득달같이 달려드는 바퀴를 피하느라 되레 더 피곤하기만 할뿐이다. 포기하고 길 가에 바짝 붙어 열심히 걷는다.
 
기사들은 걷지 않고 말을 탔으며, 자신이 우월하다는 생각으로 말을 탔다. 그들은 터벅터벅 걷는 사람들의 머리 위에 꼿꼿이 앉아 있었다. 말들은 길을 엉망으로 만드는 데 한몫을 했다. 말 때문에 길가로 밀려난 보행자들은 말에게 차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가득 찼다. 말을 탄 사람은 먼지와 오물 속에서 뒤따라오는 보행자들을 앞서 나갔으며, 심지어 그들을 데려다가 자신의 말을 먹이고 돌보는 일을 시키기도 했다. - 『걷기, 인간과 세상의 대화』. 조지프. A. 야마토. p.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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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부령유원지를 지나는 동안 계곡물 흐르는 소리가 들려 쉬는 틈에 잠시 내려 가볼까, 하면 저만치 발아래로 보이는 게 내려가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해서 소똥령마을에서는 때마침 배도 고픈 김에 쉴만한 물가를 찾아 나서는데 물은 많으나 당체 그늘이 보이질 않아 또 그게 쉽지가 않다. 하는 수 없어 마을 입구 호두나무 아래 잘 짜 맞춘 평상에 올라선다. 헌데 꿩 대신 닭이라고 하나. 키 큰 나무 그늘에 시원한 바람이 목덜미를 적시니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

 
오랜만에 양말 벗고 다리까지 쭉 뻗은 채 누워 김밥으로 배도 채우고 쪽잠도 잔다. 또 아침나절 걸었던 길을 끄적끄적 되새김질해본다. 진부령 꼭대기 찬바람, 돌고 돌아가는 46번 국도, 샛노랗게 물들어가는 논, 구름 한 점 없는 높디높은 하늘, 무엇을 적을까 연필을 굴려보지만 역시나 시간만 적어두고는 곧 일어선다. 아마도 언제나처럼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그것들을 말로, 글로 이해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며.
 
말은 길과 같다. 말을 하거나 글을 쓰려면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단번에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서사적 요소 혹은 시간적 요소로 보건대, 쓰기와 걷기는 서로 닮았다. 미술과 걷기가 서로 다른 것처럼 말이다. - 『걷기의 역사』. 레베카 솔닛. p.416
 
사용자 삽입 이미지결국 한낮에 잠깐 평상에 누웠던 것이 마지막으로 쉰 게 됐다. 아침과는 달리 머리 위에 내리쬐는 햇볕이 도로 여름으로 되돌아 간 것처럼 뜨거운데다 쉬면서 아무생각 없이 물을 다 마셔버렸는데 도대체 가게는커녕 인적 없는 집들만 쭉 길가에 서 있었던 게다. 조금만 더 가면 마을이 나오겠지, 조금만 더 가면 물이라도 마실 수 있겠지, 아니 주유소 자판기라도 있지 않을까, 라며 걷고 또 걸었는데 어느새 간성읍까지 오고 말았으니. 끝내 바다는 모습을 보이지 않은 채 한 숨도 돌리지 못하고 걷고 또 걷고, 걷기만 했다.
 
거의 탈진상태로 대대삼거리에 도착한 것도 모자라 거진읍내를 한 바퀴 다 돌고서야 겨우 터미널을 찾았는데, 이런, 춘천행 버스가 분명 있어야 할 텐데, 그게 없다. 더위에 치치고, 물 한모금도 마시지 못한 채 미친 듯이 걷기만 한 건 버스 시간을 맞추려고 한 것도 있는데. 이리 되고 나니 허탈함에 다리에 힘이 쭉 빠진다. 하지만 어쩌겠나. 확실하지 않은 정보만 믿고 길을 나선 게 죄지. 덕분에 시원한 물냉면으로 갈증도 풀고 지친 다리도 주물러 주는 것으로 만족하고, 이제나 올지, 저제나 올지, 승강장에 쭈그리고 앉는다. 건너편 택시 승강장엔 손님 없는 택시들만 줄줄이 서있고 그 너머로 언듯언듯 보이는 설악산 줄기 위로 짧은 가을 하늘이 금세 붉어진다.
 
* 스물네 번째 여행에서 걸은 길
진부령 꼭대기에서 46번 국도를 따라 거진읍 대대삼거리까지 약 23km를 6시간 동안 걸음.
 
* 가고, 오고
춘천터미널에서 진부령을 거쳐 거진이나 속초로 가는 시외버스가 있기는 하나 원통에서 한 번 버스를 갈아타고 가는 것이 시간을 절약할 수 있는 방법이다. 거진에서 춘천으로 오는 시외버스는 오후 2시 10분이 막차이므로 부득이 홍천을 경유해야 한다. 홍천으로 가는 시외버스 역시 자주 있는 편이 아닌데다 버스 시간도 최근에 바뀌었으므로 반드시 확인해야 한다. 홍천에서 춘천은 꽤 늦은 시간까지 버스가 다니니 일단 홍천으로만 나오는 게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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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11 08:10 2011/05/11 08:10

사용자 삽입 이미지천근만근 진부령 고갯길에서 멈추다(2008년 9월 27일)

 
정말 천근만근이란 말이 이럴 때 딱 맞는 말이지 싶다. 영동과 영서지방을 연결하는 고갯길 가운데 제일 낮다는 진부령 길을 오르는데 이렇게 몸이 무거워서야. 아무리 갑자기 추워진 날씨 탓에 감기 기운이 있었다고 해도 그렇지 이건 좀 너무한다 싶다. 암만 생각해도 몸도 몸이지만 오늘 걸어온 길이 최악의 길이어서 그런 듯싶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이럴 수 있단 말이냐 말이다.
 
가을 가뭄이 오래 지속되다 겨우 이틀 그것도 아주 쬐끔 비가 왔는데 가뭄 해결은 고사하고 날씨만 갑작스레 추워졌다. 한낮엔 20도 가까이 오른다고는 하지만 산간지방에선 첫 서리가 내린다고 하고 춘천만 하더라도 10도 아래로 기온이 떨어져 쌀쌀함이 이만저만 하지 않다. 물론 아침, 저녁 이외엔 맑은 하늘에 선선한 바람이 딱 가을 날씨를 보여주긴 하지만 밤과 낮 기온차가 심해 감기 걸리기엔 딱인 날씨다. 그래서인지 느닷없이 여행가자 마음먹긴 했지만 출발부터 걱정이 앞선다. 안 그래도 어제 저녁부터 재채기가 슬슬 나오는 게 아무래도 수상하다.
 
어둑어둑한 새벽녘에 출발한 덕에 한계삼거리에 일찍 도착했다. 원래는 중간에 한 번 군내버스로 갈아타야하지만 운전기사 아저씨께 부탁해 정류장도 아닌 곳에서 내릴 수 있어 더 빨리 도착한 게다. 그래봐야 20여분이지만 이 추운 날 표 다시 사고 버스 기다리지 않은 게 어디냐 싶고, 정말 그런 게 버스 바깥은 생각보다 더 춥기만 하다. 서둘러 휴게소로 들어가 인삼차에 생강차를 마셔보지만 잠깐뿐이다. 아무래도 좀 걸어야 몸에서 열이 나려나.
 
헌데, 출발부터 고약하다. 날씨 좋은 주말이라 그런지 웬 차가 이리도 많은지. 것도 순 관광버스다. 거기에 걸으면서 안 거긴 하지만 곳곳에 길을 내느라, 혹은 넓히느라 공사장이 널려 있어 거기서 오고가는 웬 트럭들이 그렇게도 많은지. 것도 순 츄레라에 덤프트럭이다. 또 길은 어찌나 좁은지. 갓길마저 거의 없다시피한 길이라 양쪽으로 트럭이나 버스가 지나칠라면 걷기를 멈추고 길 바깥으로 저만치 물러서야한다. 며칠 전 달리기 하던 이가 여기 이곳 진부령을 넘다 차에 치었다고 하던데 남 일 같지 않다. 신경이 곤두선다.
 
결국 한 시간도 채 걷지도 못하고 가드레일을 넘어 강가 소나무 숲으로 피신하고는 주섬주섬 아침과 점심때 먹을 요량으로 어제 밤 준비해 둔 감자며 김밥을 하나씩 꺼내든다. 날씨는 무쟈게 좋은데 길은 엉망이고, 코스모스에 이름 모를 꽃들이 여기저기서 손을 흔드는데 눈은 함부로 돌릴 수는 없고. 아무리 봐도 미시령과 진부령이 갈라지는 곳까지는 가야 한 숨 돌릴 수 있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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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뒤로 햇볕이 따가워질 무렵까지는 그렇게 질주하는 차들을 피하느라 어기적어기적 걷는데 그 와중에도 길 위에 떨어져 있는 도토리 줍기에, 길가에 피어 있는 해바라기 씨 털기에 할 짓은 다 한다. 또 학교 안에 자그마한 공원까지 갖고 있는 용대초등학교에선 뒤늦은 밤 줍기에 시간가는 줄 모르니 이 재미라도 없었으면 무신 재미로 걸었을까.
 
솔직히 백담사는 그닥 둘러보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다른 이들은 어떤 이유에서 백담사를 찾을지 모르겠지만. 광주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학살하고는 되레 그 대가로 대통령까지 지낸데다 아직도 국가원로라고 무슨 일 있을 때마다 신문이며 티비에서 난리를 치는 그 잘난 대머리를 덥석 받아준, 그걸로 마치 이승에서의 죄를 다 속죄 받은 양 고개를 뻗뻗이 쳐들 수 있게 만든, 그놈의 절이 대체 모하는 절이고 어떤 절인가 궁금하긴 했었지만 말이다.
 
백담사로 들어가는 길부터 꼬였다. 입구에서 확인했을 땐 분명 칠백 미터만 가면 셔틀버스를 탈 수 있다고 했는데 한참을 가도 보이질 않는데, 겨우겨우 도착해보니 여기저기 임시 주차장마다 관광버스가 그득그득. 걸어서는 2시간이고 차로는 10분이라는데 버스 값은 1,800원, 또 버스타려는 줄은 끝이 보이질 않네. 이럴 줄 알았다. 아까 입구에 길 물어보고 난 후 별 생각 없이 걸어 들어온 게 잘못이지. 애당초 별 구경할 맘 없다는 걸 이심전심으로 알았다면 여까지 오지도 않았을 텐데. 괜스레 시간만 버리고 배만 잔뜩 고프다. 에라. 배나 채우자.
 
순두부와 콩비지로 맛나게 점심을 먹고 나니 아침에 그렇게 쌀쌀했던 날씨가 언제 그랬냐는 듯 후텁하다. 이제 뭐가 그리 바빠 멀쩡한 길 나두고 산허리를 뚫어내고 또 길을 낸 미시령터널길과 갈라지는 곳까지만 가면 한 시름 놓을 것이니 쉬엄쉬엄 따가운 가을 햇살을 피해 걷는다. 계곡가 바위에서 잠시 쉬기도 하나 누가 버리고 간 것인지 음식물 쓰레기 냄새에 금방 자리를 털고 일어나기도 하고 길 이쪽에서 개 짖는 소리가 들리면 길 저쪽으로 넘어갔다가 다시 길 이쪽에서 ‘컹컹’ 소리가 나면 또 길 저쪽으로 뛰어갔다 하기도 하고, 맑은 가을 하늘을 한참이나 올려다보며 한참을 쉬기도 하고, 그렇게 다문다문 걸으니 어느새 진부령 꼭대기다.
 
출발할 땐 내처 걸어 하룻밤 잔 뒤 간성까지 걷자 했는데 막상 진부령에 오르고 나니 아침 내내 그리고 백담사에서의 헛걸음에 오후엔 덩치가 산만한 개들 때문에 녹초가 됐다. 그야말로 몸과 마음이 천근만근이다. 해서 때 마치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서 있는 원통행 버스에 오른다. 더 걷다가는 제대로 감기에 걸릴 것 같기에. 오늘 하루 종일 씨름하며 걸었던 길이 휙휙 순식간에 차창 밖으로 지나쳐간다. 아, 힘들다.
 
* 스물세 번째 여행에서 걸은 길
한계삼거리에서 진부령까지 44번 국도를 따라 약 23km, 걸은 시간 약 8시간 30분.
 
* 가고, 오고
춘천터미널에서 원통을 거쳐 속초로 가는 시외버스는 한계삼거리에서 정차하지 않지만 맘 좋은 기사분만 만난다면 내릴 수 있으니 시도할 만하다. 아님 원통에서 군내버스로 한 번 갈아타야 하는데 춘천에서 첫차를 타면 곧 한계삼거리를 거쳐 진부령까지 운행하는 군내버스를 탈 수 있다. 시간상으로는 전자가 후자보다 20여분 빨리 도착한다. 진부령에서는 반대로 군내버스를 타고 원통에 와서 다시 춘천으로 가는 시외버스로 갈아타야 한다. 거진에서 춘천으로 운행하는 시외버스가 있긴 한데 진부령에서 정차를 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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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3/10 23:23 2011/03/10 23: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