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 날, 거진등대와 해맞이 공원을 둘러보다(2010년 5월 21일)

  

연휴에 길을 나서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지만. 고속도로를 빠져 나오자마자 시작된 꼬리에 꼬리를 무는 차들에. 결국 새로 놓은 길을 두고 옛 국도를 이리저리 돌아보아도. 인제를 지나 원통에 들어서자 엉금엉금. 예정치도 않은 휴게소에 잠시 쉬어 보기도 하지만. 밀려드는 차들에 채 10분도 여유가 없고. 승객들도 승객들이지만. 한 번이라도 더 버스를 몰아야 하는 기사아저씨로서는 지체할 시간이 없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래도 진부령과 미시령이 갈리는 길목에 이르니 조금씩 길이 뚫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미시령 터널을 지나니 평소 속도를 되찾는다. 하지만 이미 시간은 계획했던 것과는 어긋나고 있었고. 속초 시외버스터미널에 도착하니 한참 차가 밀릴 때 기사분이 겁을 준 것과는 다르긴 하지만. 역시나 30여분 이상 늦었다. 
 
시간이 늦긴 했지만 일단 요기는 하고 본다. 그리고는 곧장, 시내버스긴 하지만 고성군, 그것도 마차진까지 운행하는 버스를 기다리는데. 운 좋게도. 금방 버스에 오를 수 있다. 바다를 오른쪽으로 끼고 한없이 해안선을 따라 북쪽으로 향하는 1-1번 버스를.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실 지난 번 여행 때 다음 여행의 출발지로는 조금 애매한 화진포에서 멈췄던 데에는. 짧은 겨울 해를 염두에 두지 않고 일정을 짰던 탓도 있었지만. 역시나 별 일도 아닌 것으로 대판 말싸움을 한 탓이 컸다. 무슨 이유였는지 지금도 가뭇가뭇한 걸 보니. 필시 웃기지도 않을 이유였을 테지만. 어쨌든. 그때 거진까지 갔었더라면 속초에서 직행버스를 탈 수도 있고. 홍천에서 시외버스를 탈 수도 있었을 것을.
 
그래도 저번엔 꽃을 볼 수 없었지만. 이번엔 빨갛게 봉오리가 올라온 해당화도 카메라에 담을 수 있고. 황량한 느낌이었던 화진포도 그세 봄옷을 갈아입고 마중하니 오히려 더 낫다. 또 바쁜 시간에 쫓겼다면 그냥 거진읍내로 허겁지겁 들어갔을 터이지만. 지금은 거진등대 해맞이 공원까지 덤으로 걸을 수 있으니. 전화위복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채 세 시간도 안 되게 걸었지만. 오랜만에 참 걷기 좋은 날이 아닐 수 없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둘째 날, 관동별곡 8백리 길을 따라 왕곡마을 입구까지(2010년 5월 22일)
 
어제 읍내 뒷산에 있는 공원 구경을 하지 않고 왔다면. 아침부터 거길 기어오르느라 땀깨나 흘렸을 터인데. 느긋이 해변 길을 따라 거진항을 빠져나오니 발걸음이 무척 가볍다. 그리고 어제 거진에 들어오면서부터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관동별곡 8백리 길> 표지판이 제법 갈림길이며 마을 입구마다 서 있는데.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제주 올레길 광풍에 성수기가 아닌 때에도 비행기 표를 구하기 쉽지 않다는 얘기가 들린다. 걷기를 좋아하는 우리들로서는 때 아닌 걷기 열풍에 한 동안은 많은 동지들이 생긴 것 같아 든든하기도 했는데. 지리산 둘레길도 그렇고. 제주도 올레길도 그렇고. 길을 이어준 사람들 생각, 마음이 지금 길을 걷는 사람들과 얼마나 맞닿아 있는지. 길과 길을 잇고 사람과 사람을 잇는, 그런 걷기를 얼마나 마음에 담고 있는지. 생각해보면. 이것도 한때의 유행처럼 번지는 때잔차질이 애꿎은 4대강 삽질 망패막이로 전락하는 천덕꾸러기가 되는 것 마냥. 우려는 늘 현실이 되고 마는 것일까. 
 
정철이 걸었다던 <관동별곡 8백리 길>은 아직은 다 이어진 길은 아니다. 우선은 총석정과 삼일포가 더 북쪽에 있는 데다. 옛길을 복원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콘크리트와 시멘트가 발라져 있어. 그리고 무엇보다 바다를 바로 볼 수 없게 막아 선 철책들이. 천안함 사건만 보더라도 언제 걷어질까, 기약 할 수 없으니. 이대로 길을 잇는다손 치더라도 걷는 재미는 떨어질 수밖에 없겠다. 하지만 지금처럼 만이라도 따로 손대지 말고, 삽질하지 말고, 있는 길 살며시 이어 놓기만 해도 걷는 재미는 꽤나 있겠다.
 
거진을 출발해 두 시간을 조금 넘게 걸으니 곧 간성읍인데. 선거철은 선거철인가보다. 때맞은 장날을 맞아 여기저기서 맞춰 입은 형형색색의 사람들이 총출동이다. 1톤 트럭을 개조한 차마다 요란한 음악이 흘러나오고. 둘씩 셋씩 짝지은 운동원들은 가겟집마다 머리를 내민다. 이거야 장 구경을 한 건지 선거운동 구경을 한 건지.
 
어수선한 간성읍을 빠져나와 등나무 아래에서 쪽잠을 달게 자고 나니 시계 바늘이 두시를 향해 간다. 오후에는 가까이에 있는 왕곡마을을 둘러보고 되는 데로 걷다 어제 타고 올라온 1-1번 시내버스를 타는 것인데. 한낮 해를 피하고자 한참을 쉬었더니 일정이 조금 애매하다. 어제 밀리는 차를 보건데 아무래도 일찍 출발을 해야 할 것 같고. 그러려면 왕곡마을까지는 다소 무리인 듯. 그래도 어쩌겠나. 일단은 출발이다.
 
마냥 해안선을 따라, 모래사장을 따라, 철책선을 따라 걸었다면 꽤나 지루했을 텐데. 오늘 아침부터 이정표가 되 준 <8백리 길>을 따라 걸으니. 둔치를 걷기도 하고, 마을길을 걷기도 하고, 잠시 돌아가기도 하지만 작은 항구도 온전히 둘러볼 수 있으니. 어쩌다 마주치는 동네 개들만 아니라면 쉬엄쉬엄 동네 산보하듯 걷기에 참 좋다. 허나 왕곡마을에 이르러서는 급한 마음에, 또 오랜만에 걸어서인지 여기저기 몸이 쑤시는 덕에. 해가 아직 많이 남았지만 이번 걷기는 여기서 멈추기로 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 두 번째 여행에서 걸은 길

첫째 날 약 7km, 그리고 둘째 날 18km 합쳐서 25km쯤 걸었다.
 
* 가고, 오고
춘천에서 고성을 가는 방법은 두 가지다. 춘천에서 진부령을 넘어 곧바로 간성으로 가는 시외버스를 타거나 미시령을 넘어 속초로 간 후 다시 고성으로 가는 시내버스를 타는 것. 앞에 것은 한 번에 간다는 장점이 있는 반면 하루에 단 두 번 있는 차 시간을 잘 맞춰야 한다는 점이 단점이다. 뒤에 것은 비교적 차 시간은 여유가 있는데 비해 속초를 경유해야 한다는 것이 단점이다. 앞에 방법이나 뒤에 방법이나 고성까지 가는 시간은 엇비슷하다.
 
* 잠잘 곳
거진읍내에는 민박과 여관이 꽤 있다. 하지만 연휴나 여름철에는 미리 예약을 해야 한다. 그러니 가진이나, 반암, 공현진과 같은 인근 작은 항구에도 민박집이 많으니 그곳을 이용하는 것도 좋을 듯싶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11/11/07 15:24 2011/11/07 15:24
끝내 바다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네(2008년 10월 3일)
 
날이 춥다. 불과 일주일 사이라지만 설악산엔 단풍이 들었다, 하고, 대관령엔 첫 서리가 내렸다, 하니, 어느 틈엔가 그렇게 가을은 이만치 다가섰다. 10월이라는 숫자가 주는 것보다 더 무겁게 옷을 걸치고는 그 무슨 급한 일이 있기에, 채 해가 뜨기도 전에 이리도 서둘러 집을 나서는 지. 원통을 거쳐 속초로 향하는 버스 안에는 이른 추위만큼이나 이른 히터가 조용히 소리를 내며 돌아가고, 운전기사 아저씨는 자판기 커피를 홀짝홀짝 넘기다 조용히 표만 받아든다.
 
그렇게 다시 길 위에 섰다. 천근만근 몸을 이끌고 올랐던 그 진부령 그 꼭대기에. 성큼 다가선 가을 날씨 탓인지, 아님 고갯마루라서인지, 이도 저도 아닌 인적 없는 이른 아침이 주는 황량함 때문인지, 바람이 쌀쌀맞기만 하다. 또 아쉬움에 에둘러 옆길로 많이도 샜는데 이제 끝이 저만치다 생각하니 마음까지 추워진다. 이젠 더도 돌아갈 수도 없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필요 때문에, 다만 지칠 대로 지친 몸으로 걸어갈 때 그 쇠약함이 느껴질 뿐이다.
 
지칠 대로 지친 몸으로 걸어갈 때 그 쇠약함 속에는 가끔 출발할 때 느꼈던 고통을 스르르 녹일 정도의 힘과 아름다움이 감추어져 있는 경우가 있다. 길에 부대껴 말갛게 씻겨지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필요 때문에 침식당한 나머지 고통은 그 날카로움이 무뎌진 것이다. - 『걷기예찬』. 다비드 르 브르통. p.253
 

사용자 삽입 이미지

 

잠시 추위도 피할 요량으로 미술관 문을 밀어보는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 내부수리란다. 하는 수 없이 혹여나 하고 준비해온 겉옷을 하나씩 더 걸치고는 신나게 내리막길을 내달으니 몸에서 열이 나는 듯 어느새 추위가 한결 가신다. 이내 발걸음에 맞춰 노랫가락을 흥얼흥얼, 이 얘기 저 얘기를 도란도란 나눈다.
 
돌이켜보니 걷는 내내 싸우기도 참 많이 싸웠지만 그보다는 더 많은 시간을 함께 얘기하며 마음을 나누고 영겁의 인연을 생각했다고밖에 말할 수 없다. 그리고 가끔은 길이 주는 아름다움에 겨워 한참을 나아가지도 못하고 서성거렸다고밖에 말할 수 없다. 또 때때로 자연이 주는 성스러움에 한없는 영적인 충만함에 떨려오는 기쁨을 주체할 수 없었다고밖에 말할 수 없다. 그것이, 그 수많은 겸허가 이렇게 또 걸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일런지. 
 
걷는 사람은 겸허하다. 그는 자신을 지배하는, 그리고 삼켜버릴 수 있는 자연의 가운데에서 스스로가 작다는 것을 느낀다. - 『걷기의 철학』. 크리스토프 라무르. p.30
 

사용자 삽입 이미지

 

고갯길을 다 내려왔나 싶으니 오늘은 바다를 볼 수 있을까, 하는 기대로 발걸음이 빨라진다. 중간중간 웃옷을 벗느라, 아침대신 준비한 감자며 옥수수를 먹느라 잠시 서기는 했어도 두 시간 넘게 가방 내려놓고 다리 뻗으며 그렇게 쉬지 않고 걸어왔는데도 말이다. 게다가 갓길마저 좁은데다 이쪽저쪽으로 굽어진 길로 차 또한 조심을 떠느라 온통 신경이 날카로웠는데도 말이다. 어째 이 국도라 불리는 길들을 걸을 때마다 이 모양인지. 차량이 뜸해진 틈을 타 길 가운데로 걸어보기도 하지만 이내 득달같이 달려드는 바퀴를 피하느라 되레 더 피곤하기만 할뿐이다. 포기하고 길 가에 바짝 붙어 열심히 걷는다.
 
기사들은 걷지 않고 말을 탔으며, 자신이 우월하다는 생각으로 말을 탔다. 그들은 터벅터벅 걷는 사람들의 머리 위에 꼿꼿이 앉아 있었다. 말들은 길을 엉망으로 만드는 데 한몫을 했다. 말 때문에 길가로 밀려난 보행자들은 말에게 차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가득 찼다. 말을 탄 사람은 먼지와 오물 속에서 뒤따라오는 보행자들을 앞서 나갔으며, 심지어 그들을 데려다가 자신의 말을 먹이고 돌보는 일을 시키기도 했다. - 『걷기, 인간과 세상의 대화』. 조지프. A. 야마토. p.107
 

사용자 삽입 이미지

 

진부령유원지를 지나는 동안 계곡물 흐르는 소리가 들려 쉬는 틈에 잠시 내려 가볼까, 하면 저만치 발아래로 보이는 게 내려가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해서 소똥령마을에서는 때마침 배도 고픈 김에 쉴만한 물가를 찾아 나서는데 물은 많으나 당체 그늘이 보이질 않아 또 그게 쉽지가 않다. 하는 수 없어 마을 입구 호두나무 아래 잘 짜 맞춘 평상에 올라선다. 헌데 꿩 대신 닭이라고 하나. 키 큰 나무 그늘에 시원한 바람이 목덜미를 적시니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

 
오랜만에 양말 벗고 다리까지 쭉 뻗은 채 누워 김밥으로 배도 채우고 쪽잠도 잔다. 또 아침나절 걸었던 길을 끄적끄적 되새김질해본다. 진부령 꼭대기 찬바람, 돌고 돌아가는 46번 국도, 샛노랗게 물들어가는 논, 구름 한 점 없는 높디높은 하늘, 무엇을 적을까 연필을 굴려보지만 역시나 시간만 적어두고는 곧 일어선다. 아마도 언제나처럼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그것들을 말로, 글로 이해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며.
 
말은 길과 같다. 말을 하거나 글을 쓰려면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단번에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서사적 요소 혹은 시간적 요소로 보건대, 쓰기와 걷기는 서로 닮았다. 미술과 걷기가 서로 다른 것처럼 말이다. - 『걷기의 역사』. 레베카 솔닛. p.416
 
사용자 삽입 이미지결국 한낮에 잠깐 평상에 누웠던 것이 마지막으로 쉰 게 됐다. 아침과는 달리 머리 위에 내리쬐는 햇볕이 도로 여름으로 되돌아 간 것처럼 뜨거운데다 쉬면서 아무생각 없이 물을 다 마셔버렸는데 도대체 가게는커녕 인적 없는 집들만 쭉 길가에 서 있었던 게다. 조금만 더 가면 마을이 나오겠지, 조금만 더 가면 물이라도 마실 수 있겠지, 아니 주유소 자판기라도 있지 않을까, 라며 걷고 또 걸었는데 어느새 간성읍까지 오고 말았으니. 끝내 바다는 모습을 보이지 않은 채 한 숨도 돌리지 못하고 걷고 또 걷고, 걷기만 했다.
 
거의 탈진상태로 대대삼거리에 도착한 것도 모자라 거진읍내를 한 바퀴 다 돌고서야 겨우 터미널을 찾았는데, 이런, 춘천행 버스가 분명 있어야 할 텐데, 그게 없다. 더위에 치치고, 물 한모금도 마시지 못한 채 미친 듯이 걷기만 한 건 버스 시간을 맞추려고 한 것도 있는데. 이리 되고 나니 허탈함에 다리에 힘이 쭉 빠진다. 하지만 어쩌겠나. 확실하지 않은 정보만 믿고 길을 나선 게 죄지. 덕분에 시원한 물냉면으로 갈증도 풀고 지친 다리도 주물러 주는 것으로 만족하고, 이제나 올지, 저제나 올지, 승강장에 쭈그리고 앉는다. 건너편 택시 승강장엔 손님 없는 택시들만 줄줄이 서있고 그 너머로 언듯언듯 보이는 설악산 줄기 위로 짧은 가을 하늘이 금세 붉어진다.
 
* 스물네 번째 여행에서 걸은 길
진부령 꼭대기에서 46번 국도를 따라 거진읍 대대삼거리까지 약 23km를 6시간 동안 걸음.
 
* 가고, 오고
춘천터미널에서 진부령을 거쳐 거진이나 속초로 가는 시외버스가 있기는 하나 원통에서 한 번 버스를 갈아타고 가는 것이 시간을 절약할 수 있는 방법이다. 거진에서 춘천으로 오는 시외버스는 오후 2시 10분이 막차이므로 부득이 홍천을 경유해야 한다. 홍천으로 가는 시외버스 역시 자주 있는 편이 아닌데다 버스 시간도 최근에 바뀌었으므로 반드시 확인해야 한다. 홍천에서 춘천은 꽤 늦은 시간까지 버스가 다니니 일단 홍천으로만 나오는 게 중요하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11/05/11 08:10 2011/05/11 08: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