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여섯 번째 여행 - 영화제를 사수하라!(2018년 9월 1일)
어쩌다보니, 아니 낮에 영화제를 가려니 땡볕에 걷을 수밖에 없다. 느긋이 점심까지 먹고 차를 탔다면 좀 늦게 돌아와서 그렇지 땀은 덜 흘릴텐데. 1년에 한번, 영화제라고는 정동진에서 하는 것 빼곤 이번 기회를 놓치면 영영 없으니. 하기야 극장이라야 멀티플렉스빼곤 독립영화전문극장이 전부니 언감생심 영화제는 무슨. 그러니 10년 넘게 장애인인권영화제를 여는 것만도 대단하다.
모처럼 맞은 한가한 휴일 아침이 해서 소란하다. 눈뜨자마자 빵 한 조각 집어먹고 머리감고 옷 갈아입고. 평소 1시간도 넘게 걸리던 일들이 30분 만에 끝. 그래도 그 부산함 덕에 일찍 호산에 도착했다. 11시. 마음이 급하니 밥 먹는 것도 서두른다. 눈에 보이는 데로 중국집으로 직행. 허겁지겁. 먹는 게 아니라 우겨넣고 있다.
날이 너무 좋은 게 문제라면 문제랄까. 파란 하늘과 솜사탕 같은 구름은 보기엔 좋지만 피부엔 쥐약. 썬크림 잔득 바르고 모자로는 모자라 수건으로 얼굴을 꽁꽁 싸매니 이 좋은 날에 뭐하는 짓인가 싶지만. 햇살에 반짝반짝, 호산천과 기곡천을 잇달아 건너고, 파랗다 못해 옥빛으로 빛나는 바다를 옆에 끼고 걸으니. 강도 바다도 이리 좋을 수가 없네.
다만 해파랑길이 바닷길로만 쭉 이어진 것이 아닌 탓에 이번에도 절반만 해파랑길을 따라 걷게 돼 아쉽다. 하지만 예쁜 월천해수욕장도 만나고 미역으로 이름 난 고포항도 오롯이 둘러보고. 이것도 꽤 괜찮다. 그리고 돌이켜보면 동해안 걷기는 해파랑길이 생기기 전부터 시작했던 것이니. 온전히 다 걷는다는 것도 큰 의미는 없다.
하얀 담길에 아기자기한 그림이 예쁜 고포마을에서는 버스정류장 그늘에서 한참을 쉬어간다. 늦어도 3시전에는 부구에 도착해야 영화제 끝부분이라도 볼 수 있으니 마음은 급하지만. 지도를 보니 예서부터는 오르막길이기도 하고 여태 해를 보고 걸었더니 땀도 나서다. 목도 축이고 마을이며 해변까지 두루두루 둘러본다.
오르막길 끝 어수선한 쓰레기 처리장까지 뛰다시피 지나고나니 곧 내리막이다. 거꾸로 자전거로 올라오는 이들이 있어 갓길을 내줘야 하니 차를 피해 섰다 가다 할 수밖에 없는데. 자전거 일주 도로와 걷는 길이 겹치는 부분은 꼭 이렇다. 다행이 갓길도 넓고 차도 많지 않아 빗겨가기 쉽지. 꼬부랑길이라도 되면 그게 또 여간 신경 쓰이는 곳이 아닐 수 없다.
가까이 핵발전소 돔이 보이는 곳인데도 바다에서 뭘 잡는 사람도 있고 아이들도 물장구를 치고 있다. 괜한 걱정을 하는 걸까. 그 모습이 하등 좋아보이질 않는다. 곳곳에 서 있는 송전탑으로도 늘어선 콘크리트 건물들로도 위험은 감지되지 않는 듯. 눈에 보이지 않고 냄새도 없으니 그럴 터인데 따뜻한 수온 덕에 낚시만 잘 되는 걸까.
터미널에 도착하니 강릉 가는 버스는 5시가 넘어서야 있다. 하는 수 없다. 시내버스타고 울진가서 갈아타야한다. 그래도 시간이 딱딱 맞았고 동해는 무슨 일인지 서지도 않아 늦진 않을 듯. 하지만 오랜만에 걸어서일까, 땡볕에 걸어서일까. 차에서 내내 곯아떨어졌는데도 피곤하다. 아무래도 오늘은 영 틀린 것 같다. 아침부터 그리 부산을 떨었건만. 영화제 사수는 물 건너갔다.
* 스물여섯 번째 여행에서 걸은 길
호산터미널에서 핵발전소가 있는 부구까지 바닷길을 따라 약 10km.
* 가고, 오고
부구에서 강릉은 오후 시간에 차가 별로 없으니 꼭 확인해야 한다. 안 그러면 울진을 거쳐 오는 수밖에 없다.
* 잠잘 곳, 먹을 곳
출발지와 도착지를 빼곤 여름 한 철 장사하는 곳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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