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 날, 코로나가 바꾼 풍경(2020년 10월 9일) 
 
우리 사회에 코로나19 바이러스가 가져다 준 것들이 무었일까. 죽음, 면역력이 약한 이들에게는 치명적인 위협이다. 해고, 역시나 비정규직과 같은 불안정 고용 노동자들에게 가장 먼저 닥쳐왔다. 폐업, 자영노동자의 삶도 피폐해졌다. 마스크, 요일제까지 등장했을 만큼 필수품이 됐다. 비대면, 원격수업과 재택근무가 일상이 된 풍경.
 
이동이 적어졌던 탓일까. 하늘이 맑아졌다. 올 봄, 예전과 달리 미세먼지 경보는 거의 없었다. 사람들 얼굴에 황사마스크는 여전했지만 말이다. 그래서일까. 요즘 동쪽바다는 늘 파랗다. 그것도 짙푸르게 파랗다. 죽변항 앞 바다도 그렇다. 아니, 여긴 파랗다 못해 옥색바다다. 세상 이렇게 맑은 바다가 어데 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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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 먹고 느긋이 커피까지 마셨는데도 이제야 2시다. 찬찬히 두, 세 시간만 걸으면 울진 읍내니 바쁠 이유야 없지만 사람 일은 모르니 슬슬 차비를 한다. 바람이 뒤쪽에서 불어오니 해를 가릴 양산은 소용이 없다. 몇 번 펼쳐보기는 했는데 그때마다 훌러덩. 오가는 사람이 없으니 이럴 때 마스크를 벗어도 좋으련만. 햇빛 가리개로 그건 또 쓰고 있다.
 
겨우 40여 분이나 걸었을까. 결국 온양 2리 마을 쉼터에서 얼굴 가리던 것들 다 벗어던지고 숨을 몰아쉰다. 비대면 시대, 오가고 먹고 마시는 중에만 조심한다면 이만큼 좋은 여행법도 없을 터인데. 내려쬐는 햇볕이 따가워도 어느 정도여야지. 산길도 아니고 푸른 바다 보며 걷는 평지길인데도 힘이 부친다. 숨쉬기가 쉽지 않아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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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어느 해안가 민박집 간판 ‘글랑블루’가 딱 어울리는, 바다가 연이어 펼쳐지니 눈만큼은 호사다. 그것도 바로 길 앞으로 20여 분이 넘게 이어지고 있으니 말이다. 묵호로 이사와 매일 바다를 봤지만 여긴 또 다르다. 조금 가다 바다보고 또 조금 가다 쉬고. 넉넉히 시간 잡아 걷기로 한 게 참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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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와 헤어질 때가 됐다면 이젠 울진 읍내로 들어왔다고 봐야 한다. 그래도 속초나 강릉, 동해와는 다르다. 번잡한 시내를 통과하는 것도 아니니. 초여름이면 연꽃이 한창이었을 연호공원, 남대천을 끼고 걷는 호젓한 둘레길이어서 그렇다. 오늘은 일찍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연호공원에서 멈추기는 했지만.
 
 
둘째 날, 망양정 풍경소리에 머뭇거리다(2021년 1월 16일) 
 
바람이 불기 전부터 예상했던 대로 겨울 대유행이 곳곳을 휩쓸고 있다. 우리도 예외는 아니다. 불과 며칠 전만해도 천명이 넘는 확진자가 나오고 새로운 변이도 들어왔으니. 얼굴 분간이 어려우리만치 필수품이 된 마스크와 길거리에서마저 멀찌감치 떨어져 고개를 돌리는 모습은 더 이상 생경한 풍경이 아니다. 
 
문 닫은 여행사와 항공사가 속출하고 숙박업은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막대한 항공유가내 뿜는 대기오염물질을 생각하면 지구가 신호를 보낸 것은 아닌가도 싶다가. 일자리를 잃고 절망에 내몰리는 이들이 언제나 그랬듯 사회적 약자들임을 보면 이 위기를 어떻게 넘겨야 할지 막막하다. 재난 역시 계급화 되어 있으니 말이다. 
 
거리를 두고 지역을 천천히 둘러보는 것. 그래서 그곳에 깃든 사람들을 만나고 이야기를 듣는 것. 차창 밖으로 지나는 풍경이 아닌 두 발로, 두 눈으로 만나는 여행. 코로나가 가져다 줄 새로운 비대면 여행은 이런 것이 아닐까. 그런 면에서 보자면 걷기는, 걷기여행은 가장 좋은 여행 방법이다. 심지어 함께 걷는 이와도 적당히 거리를 둘 수 있으니.
 
그래서일까. 지난번부터 은근 마주치는 사람들이 있다. 예전 같았으면야 “안녕하세요. 해파랑길 걸으시나봐요.” 인사를 나눴겠지만. 눈인사는커녕 마스크를 먼저 확인해야하는 안타까움. 그래도 반갑기만 하다. 무거운 배낭을 메고도 씩씩하게 오르막을 오르는 사람들. 좁은 갓길에 한 발씩 이쪽, 저쪽으로 옮기는 사람들.
 
남대천을 따라 이어진 나뭇길을 걸으니 이전 길이 어땠는지는 모르겠으나, 시간도 짧게 걸리고 시야가 트이니 좋긴 하다. 특히 은어다리를 건너며 보이는 파란 바다와 살얼음이 내려앉은 강. 이쪽 바다와 저쪽 강을 넘나들며 한가로이 떠 있는 철새들. 쏟아지는 따스한 햇볕. 겨울은 겨울이라고 사정없이 몰아치는 바람만 아니라면 쉬엄쉬엄 걸을 터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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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인지 세찬 바람을 피할 만한 곳이 금방 나왔다. 엑스포공원과 왕피천생태공원이 제방을 따라 나뉘어 있는 곳. 뜬금없는 동물원에 갇혀 있는, 사막에 있어야 할 여우와 거북이가 있는 엑스포공원은 바람과 햇볕을 피해 잠시 쉴 수 있었고. 바리바리 싸가져 온 감자와 고구마, 귤은 생태공원에서 먹었으니 어느 쪽이든 쉬어가기 좋다.
 
수산교는 26구간이 시작되는 곳이자 25구간이 끝나는 곳이다. 물론 거꾸로 걷는 이들은 끝나는 곳과 시작되는 곳이 반대이긴 하지만, 아무튼 그러하다. 여기서 잠깐 스탬프도 찍고 마트 앞 버스정류장에서 군것질도 하고 쉬어간다. 아무래도 겨울바람이 겨울바람이긴 한가보다. 걷는 속도도 그렇거니와 얼마 걷지도 않았는데 금방 또 쉬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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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양정은 멀리까지, 좌우로 넓게 내려다보이는 바다도 그럴싸하지만 풍경소리길이라는 산책길이 으뜸이다. 양옆으로 난 대죽 숲을 따라 짧지만 오르락내리락. 바람에 실려 오는 풍경소리를 들으며 조용히 걷는 길. 여기선 숨소리도 더 줄여야 하겠다. 해서 발걸음을 더디게 했던 그 세찬 바람이 여기에선 되레 고맙기만 하다.
 
해맞이공원을 내려와서부터는 지난 번 걸었던 해안도로와 엇비슷하다. 왼편으로 쪽빛 바다가, 오른편으로는 고만고만한 마을이 쭉 이어진다. 산포4리, 2리, 3리. 그러고 보니 4리 다음 마을이 3리가 아니라 2리네. 시간이 쪼매 애매하게 남았긴 하지만, 오늘은 여기 3리에서 버스를 기다리기로 한다. 계속 발걸음을 늦췄던 그 세찬 바람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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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2/03 10:28 2025/12/03 10:28

스물일곱 번째 여행 - 해파랑길 ⑥ 태풍, 27구간(2019년 10월 13일)

 

또 태풍이다. 일본을 통과하고 있다지만 어찌나 큰 것인지 동해안 전역이 파랑주의보다. 버스 안에서 울리는 주의문자, 창밖으로 보이는 흔들리는 나무. 심상치가 않다. 더구나 삼척을 지나면서부터는 여기저기 흙이 밀려 내려왔던 흔적들. 집 안에까지 물이 찼던지 창문까지 다 뜯어내고 청소 중인 집들. 얼마 전 태풍 피해만 해도 아직 가시질 않았는데.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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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구에 내리니 바람이 그새 더 거세졌다. 온갖 쓰레기가 날라 다니고 때 이른 낙엽까지 지고. 핵발전소서부터 이어진 고압송전선이 머리 위에 어수선한데, 굉음까지 내지르고 있으니 이거야 원. 아스팔트 오르막이 아니라도 이런 고역이 또 어디 있을까. 뛰다시피 발길을 재게 놀린다. 어서 여기서 벗어나야겠다는 생각뿐이다.

 

고목1리쯤 왔을 때서야 겨우 버스정류장에서 잠깐 쉰다. 그나마도 가는 날이 장날이던가. 해가 정류장 맞은편에서 내려 보고 있어 앉지는 못한다. 그래도 스트레칭으로 몸도 풀고. “환경이 숨 쉰다”는 되도 않는 말이 쓰여 있는 광고판을 보고 궁시렁도 대고. 겨우 요기밖에 안 왔나, 가야할 길도 짚어보고.

 

재미없고 지루한 길을 근 1시간이 걷다보니 길이 끊긴지도 모르고 지나쳤다. 헌데 그도 그럴 것이 교량 놓는다고 둑길을 다 헤쳐 놨으니 헤매는 게 당연하다. 게다가 길이 저쪽으로 이어졌다고 표시가 됐는데 그걸 또 놓쳤으니 누굴 탓하랴. 조심조심 무너지지 않게 제방으로 올라서야지. 묶어 놓은 개쯤이야 이번엔 놀랄 일도 아니다.

 

후정2리 마을회관 앞을 지나면서부터는 한결 낫다. 바람은 여전하고 찻길이긴 하지만 오가는 차도 없고 송전선도 없다. 비 피해도 태풍이 지난 흔적도 없다. 느닷없이 나타난 활주로에 어안이 벙벙하다가도 곧 두 팔 벌려 누웠으니 쉬어가기 좋다. 사진촬영도 안 된다던데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차만 아니었다면 좋았을 것을.

 

느닷없이 나타난 강릉 어디쯤에서 걸었던 듯한 오솔길을 따라 죽변읍에 들어서니 4시가 살짝 넘었다. 죽변터미널까지만 가면 오늘 일정은 끝이니 여유를 부려본다. 걷기여행을 하면서 중간에 뭘 마시는 건 처음이지 싶다. 혹시나 해서 책을 넣어오긴 했는데 30분 넘게 책장을 넘길 수 있다니.

 

드라마 세트장 이름과 딱 맞아떨어진다. 어찌나 파도가 센지. ‘폭풍 속으로’ 바닷가로 내려가기는커녕 눈에 찔릴까 대숲 사이를 지나기도 쉽지 않다. 여기저기 전망대가 놓여 있지만 여기도 통과. 멀찍이서 눈만 빼꼼 내밀고 까치발만 굴린다. 급기야 해변으로 갈 엄두가 나질 않긴 했지만. 길 중간이 허물어져 내려 앉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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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수 없다. 등대 쪽으로 올랐다 곧장 죽변항으로 내려가야지. 어디선가 본 듯하지만 크기가 커 남다른 항구를 따라 내처 터미널까지 걸었다. 시간상으로야 밥 먹고 차 타야겠지만 어째선지 빨리 집으로 가고 싶은 맘이다. 찬바람에 걸어서일까 오랜만에 걸어서일까. 비, 태풍, 바람 때문인가 돔, 송전선 때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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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물일곱 번째 여행에서 걸은 길
해파랑길 27구간은 부구에서 죽변까지 11km가 조금 넘는 길이다. 아마도 가장 짧은 구간이지 않을까. 빠른 걸음으로 3시간이면 충분하다.
 
* 가고, 오고
해파랑길 홈페이지(http://www.haeparanggil.org/?main)를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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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3/13 15:21 2025/03/13 15:21

스물여섯 번째 여행 - 영화제를 사수하라!(2018년 9월 1일)

 

어쩌다보니, 아니 낮에 영화제를 가려니 땡볕에 걷을 수밖에 없다. 느긋이 점심까지 먹고 차를 탔다면 좀 늦게 돌아와서 그렇지 땀은 덜 흘릴텐데. 1년에 한번, 영화제라고는 정동진에서 하는 것 빼곤 이번 기회를 놓치면 영영 없으니. 하기야 극장이라야 멀티플렉스빼곤 독립영화전문극장이 전부니 언감생심 영화제는 무슨. 그러니 10년 넘게 장애인인권영화제를 여는 것만도 대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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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처럼 맞은 한가한 휴일 아침이 해서 소란하다. 눈뜨자마자 빵 한 조각 집어먹고 머리감고 옷 갈아입고. 평소 1시간도 넘게 걸리던 일들이 30분 만에 끝. 그래도 그 부산함 덕에 일찍 호산에 도착했다. 11시. 마음이 급하니 밥 먹는 것도 서두른다. 눈에 보이는 데로 중국집으로 직행. 허겁지겁. 먹는 게 아니라 우겨넣고 있다.

 

날이 너무 좋은 게 문제라면 문제랄까. 파란 하늘과 솜사탕 같은 구름은 보기엔 좋지만 피부엔 쥐약. 썬크림 잔득 바르고 모자로는 모자라 수건으로 얼굴을 꽁꽁 싸매니 이 좋은 날에 뭐하는 짓인가 싶지만. 햇살에 반짝반짝, 호산천과 기곡천을 잇달아 건너고, 파랗다 못해 옥빛으로 빛나는 바다를 옆에 끼고 걸으니. 강도 바다도 이리 좋을 수가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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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해파랑길이 바닷길로만 쭉 이어진 것이 아닌 탓에 이번에도 절반만 해파랑길을 따라 걷게 돼 아쉽다. 하지만 예쁜 월천해수욕장도 만나고 미역으로 이름 난 고포항도 오롯이 둘러보고. 이것도 꽤 괜찮다. 그리고 돌이켜보면 동해안 걷기는 해파랑길이 생기기 전부터 시작했던 것이니. 온전히 다 걷는다는 것도 큰 의미는 없다.

 

하얀 담길에 아기자기한 그림이 예쁜 고포마을에서는 버스정류장 그늘에서 한참을 쉬어간다. 늦어도 3시전에는 부구에 도착해야 영화제 끝부분이라도 볼 수 있으니 마음은 급하지만. 지도를 보니 예서부터는 오르막길이기도 하고 여태 해를 보고 걸었더니 땀도 나서다. 목도 축이고 마을이며 해변까지 두루두루 둘러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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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막길 끝 어수선한 쓰레기 처리장까지 뛰다시피 지나고나니 곧 내리막이다. 거꾸로 자전거로 올라오는 이들이 있어 갓길을 내줘야 하니 차를 피해 섰다 가다 할 수밖에 없는데. 자전거 일주 도로와 걷는 길이 겹치는 부분은 꼭 이렇다. 다행이 갓길도 넓고 차도 많지 않아 빗겨가기 쉽지. 꼬부랑길이라도 되면 그게 또 여간 신경 쓰이는 곳이 아닐 수 없다.

 

가까이 핵발전소 돔이 보이는 곳인데도 바다에서 뭘 잡는 사람도 있고 아이들도 물장구를 치고 있다. 괜한 걱정을 하는 걸까. 그 모습이 하등 좋아보이질 않는다. 곳곳에 서 있는 송전탑으로도 늘어선 콘크리트 건물들로도 위험은 감지되지 않는 듯. 눈에 보이지 않고 냄새도 없으니 그럴 터인데 따뜻한 수온 덕에 낚시만 잘 되는 걸까.

 

터미널에 도착하니 강릉 가는 버스는 5시가 넘어서야 있다. 하는 수 없다. 시내버스타고 울진가서 갈아타야한다. 그래도 시간이 딱딱 맞았고 동해는 무슨 일인지 서지도 않아 늦진 않을 듯. 하지만 오랜만에 걸어서일까, 땡볕에 걸어서일까. 차에서 내내 곯아떨어졌는데도 피곤하다. 아무래도 오늘은 영 틀린 것 같다. 아침부터 그리 부산을 떨었건만. 영화제 사수는 물 건너갔다.

 

* 스물여섯 번째 여행에서 걸은 길

호산터미널에서 핵발전소가 있는 부구까지 바닷길을 따라 약 10km.  

 

* 가고, 오고

부구에서 강릉은 오후 시간에 차가 별로 없으니 꼭 확인해야 한다. 안 그러면 울진을 거쳐 오는 수밖에 없다.

 

* 잠잘 곳, 먹을 곳

출발지와 도착지를 빼곤 여름 한 철 장사하는 곳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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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25 13:26 2024/06/25 13:26
첫째 날: 구례벌이 내려다보이는 구릿재 넘는 길(2020년 4월 30일)
 
2년 만입니다. 적어도 1년에 한 번씩은 꼭 왔었던 것 같은데. 작년엔 뭐가 그리 바빴을까요. 달력을 보니 연휴가 없었더군요. 한 여름엔 걸을 수 없다는 걸 첫 걷기에서 배웠고. 겨울은 왠지 걷고 싶은 마음이 동하지가 않습니다. 요즘처럼 어린 나뭇잎이 파릇파릇 올라오거나 빨갛고 노란 색색 옷을 입을 때만 기다리려니 그렇게 됐더군요.
 
그래서일까요. 6일 연휴로 좀 잠잠해지려나 싶은 코로나19가 다시 확산되지는 않을까, 질병본부가 신신당부를 해서 가도 될까, 망설여지긴 했지만요. 어느새 주섬주섬 짐 싸고 기차에 시외버스까지 예매하고 있더라니까요. 이틀간 머물 곳 정하고 중간에 어디서 밥 먹을까, 저녁은 뭐 먹지. 참 사람마음 간사합니다. 마스크에 소독제까지 가져가니 괜찮을거야, 좀 더 조심하면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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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숙소에서 뭐를 주섬주섬 먹고 나왔는데도 탑동마을에 서니 배가 출출합니다. 꽤 구불구불 돌아 올라가는 길이 길기도 하고, 올라간 만큼은 다시 돌고 돌아 내려가야 밥 먹을 데가 나오니. 배를 든든이 채워야겠습니다. 마을 입구 느티나무 아래 평상에 누워 바람에 손 흔드는 나뭇잎 보다가, 마을 사람들이 다시 세웠다는 삼층석탑도 구경하고 나선 길. 구불구불 구불길입니다.

 
포장된 길도 걷다, 숲길도 걷다, 임도를 따라 조금은 재미없는 오르막도 오르다가 정자에서 잠시 땀도 식히고. 참 많이도 가져왔지 싶은 주전부리도 먹고. 재작년에도 그랬던 것 같은데. 송전탑만 아니면 시원한 편백나무 숲에서 놀다 갔을 텐데 그러지도 못하고. 그렇게 한 시간 반쯤 올랐을까요. 드디어 구릿재입니다. 발아래 구례벌이 펼쳐있어 눈호강을 하고는 싶은데 이런, 여기도 송전선이 머리 위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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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십분은 넘게 투덜투덜 내려왔나요. 그제야 쉴만한 곳이 나옵니다. 고압선도 없구요. 헌데 이번엔 뱃속에서 꼬로록 꼬로록. 밥 먹은 지 얼마나 됐다고 이럴까요. 가파르지 않아 이만하면 오르막도 걸을만하다 했는데. 그래도 힘은 부쳤나봅니다. 지도를 보니 한참은 더 내려가야 마을이 나올 것 같으니 마음이 급합니다. 잠깐 쉬었다가 가파른 포장길을 타박타박 걷습니다.

 
연휴라 문을 열지 않았으면 어쩌나 싶었는데 다행히 맛나게 밥을 먹을 수 있었습니다. 덤으로 한 낮 땡볕도 피할 수 있었구요. 예년 이맘때와는 다르게 기온이 25 가까이 올라 걷는 게 쫌 힘들었거든요. 옷을 가볍게 입는다고는 했지만. 햇빛 가린다고 얼굴에 이것저것 쓰고 가리느라 땀이 목덜미에 송글송글. 화장실이 어디 있을지 몰라 물도 목을 축이는 정도만 마시고. 한참을 쉬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부터는 쉬엄쉬엄 걸어도 됩니다. 머리가 반쯤 남은, 무릎 아래는 또 어떻게 됐는지 알 수 없는 석불상도 둘러보고. 과수원 안쪽을 가로 질러도 가기도 하고. 시원한 대죽 숲길에선 잠깐 쉬어가기도 하고. 방광마을을 지나서는 오랜만에 만난 찻길도 걷고. 둘레길을 걷지 않으면 이렇게 마을 안길을 걸을 수나 있을까. 돌담이 집들을 둘러싸고 있는 방광마을에 도착하니 생각보다 일찍 도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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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일잔치도 한 달 뒤로 미루기는 했지만 오늘은 석가모니께서 오신 날. 가까운 곳에 샘과 구렁이와 글씨가 어우러져 재미난 이야기를 들려주는 천은사(泉隱寺)가 있으니 가볼까도 싶지만. 축일까지 다음에 하겠다는 곳을 가는 것도 뭐하고. 괜한 차 한 대 놓치고 투덜투덜. 다음 차도 겨우 잡아타고 읍내로 오니 그제야 해가 제 일을 다 했나, 시원하기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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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3/07 10:50 2024/03/07 10:50
스물다섯 번째 여행 - 포장길 따라 타박타박, 임원항에서 호산항까지(2018년 4월 28일)
 
가을과 겨울을 다 보내고 봄을 맞아서야 겨우 길을 나선다. 매서운 바람과 눈발이 흩날리더니 금세 황사가 뒤를 이은 날들을 다 보낸 셈인데. 한반도를 둘러싼 정세도 만만치 않았더랬다. 막말까지 오가는 게 곧 무슨 일이 나도 이상하지 않을 가을과 겨울. 하지만 개나리와 진달래가 어김없이 꽃망울을 터뜨리고 봄바람이 콧구멍을 간질간질. 경계를 사뿐히 넘나든 두 사람의 발걸음이 꽁꽁 얼어붙었던 남북관계를 간단히 녹여버렸다. 오지 않을 것 같던 ‘봄’은 그렇게 우리 곁에 왔던 것이다.
 
하지만 연일 미세먼지를 넘어 초미세먼지니 하는 것들로 봄이 왔건만 바깥나들이가 쉽지 않았듯이. 전 세계가 박수치며 올바른 길로 가고 있다고 해도. “두 번 속으면 바보, 세 번 속으면 공범”이라며 혼자 앵돌아져 있는 이가 있으니. 아니 기어이 선거에서 쓸 구호로 “나라를 통째로 넘기시겠습니까”라며 생떼를 부리는 이가 있으니. 다가오는 초여름까지는 뭐든 조심조심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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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오늘만큼은 이런저런 걱정 다 털어버리고 사뿐사뿐 길을 나서야겠는데. 지난번에는 해파랑길이 산으로 향하는 바람에 바닷가 쪽 길을 따라 쭉 걸어내려 왔는데. 오늘 시작하는 곳이 해파랑길과 다시 만난다. 오랜만에 걷는 거라 시간은 짧게 잡았고. 점심까지 다 챙겨 먹고 느지막이 나왔다. 비화항, 노곡항, 작진항을 다 둘러볼 거 아니라면 암만 찬찬히 걸어도 2시간 반이면 충분하니까.
 
임원항에는 신라 가요 ‘해가(海歌)’와 관련된 수로부인 헌화공원이 있으나 멀찍이서 힐긋 보기만 한다. 전망이 좋다고는 하지만 여까지 오는 동안 실컷 봤기도 했고. 굳이 엘리베이터까지 타고 올라가서 볼 만한 곳일까 싶어서다. 뭐 전망 말고도 조각이며 그림도 있다고는 하지만. 편견이라고 하기에는 또 여까지 오면서 봐왔던 그런저런 공원들. 오르막길 때문이라 핑계 대며 서둘러 발걸음을 옮긴다.
 
비화항과 노곡항을 지나는 길이 오르막 내리막, 이리 저리 구불구불하다. 덕분에 땡볕에서만 걷는 게 아니라 좀 낫긴 한데. 곧게 새로 난 국도보다 뜸한 길이라 차들은 되레 과속에 중앙선 넘기를 밥 먹듯 한다. 거기다 내리막에선 자전거까지 무지막지한 속도들을 내고 있다. 자전거길과 해파랑길이 겹치는 구간은 늘 그러니 조심 또 조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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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시 조금 못 돼서 출발해 남부발전에 여섯시 조금 넘어 도착했으니 쉬엄쉬엄 걸어도 되겠건만. 여기선 이리저리 내뻗어 있는 송전선이 머리 위를 따라다니니. 웅웅~~ 빨라 가라 내몬다. 여기저기 발전소에 기댄 마을들이 더 발걸음을 재촉하는데. 사택과 원룸 건물들뿐인, ‘발전’이라고 하기엔 왠지 처량한 느낌 때문에 그렇다.
 
호산 입구 옥원교부터는 둑방길로 이어진다. 반짝반짝 호산천 물결이 옆에 있으니 잠시 쉬면서 눈 호강하고 싶지만, 아까부터 배꼽시계가 요란하다. 밥 먹을 시간이 됐기도 했지만, 한 시간 반이라도 걸었으니 이젠 먹어야 한다는 신호인가. 다행히 버스 놓치지 않게 딱 맞춰 밥도 먹고 술도 한잔. 동해 쪽 바다인데도 저만치 빨간 노을이 진다.
 
* 스물다섯 번째 여행에서 걸은 길
해파랑길 29구간이 임원항에서 만난다. 호산항까지 가는 길 동안 비화항, 노곡항, 작진항을 만나지만 들고나는 길이 한 곳뿐인데다 가파른 고갯길이라 선뜻 구경하기가 어렵다. 덕분에 재미없는 포장길을 2시간 정도 걸어야만 했다.
 
* 가고, 오고
임원항, 호산항은 장호항과 마찬가지로 시외버스를 타는 게 빠르고 편하다.
 
* 잠잘 곳, 먹을 곳
임원항과 장호항에는 꽤 맛있는 음식을 내놓는 식당들이 있다. 숙박시설은 아직까진 당일치기로도 충분해 어떤지 잘 모르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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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9/19 13:34 2023/09/19 13: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