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 날: 구례벌이 내려다보이는 구릿재 넘는 길(2020년 4월 30일)
 
2년 만입니다. 적어도 1년에 한 번씩은 꼭 왔었던 것 같은데. 작년엔 뭐가 그리 바빴을까요. 달력을 보니 연휴가 없었더군요. 한 여름엔 걸을 수 없다는 걸 첫 걷기에서 배웠고. 겨울은 왠지 걷고 싶은 마음이 동하지가 않습니다. 요즘처럼 어린 나뭇잎이 파릇파릇 올라오거나 빨갛고 노란 색색 옷을 입을 때만 기다리려니 그렇게 됐더군요.
 
그래서일까요. 6일 연휴로 좀 잠잠해지려나 싶은 코로나19가 다시 확산되지는 않을까, 질병본부가 신신당부를 해서 가도 될까, 망설여지긴 했지만요. 어느새 주섬주섬 짐 싸고 기차에 시외버스까지 예매하고 있더라니까요. 이틀간 머물 곳 정하고 중간에 어디서 밥 먹을까, 저녁은 뭐 먹지. 참 사람마음 간사합니다. 마스크에 소독제까지 가져가니 괜찮을거야, 좀 더 조심하면 되겠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분명 숙소에서 뭐를 주섬주섬 먹고 나왔는데도 탑동마을에 서니 배가 출출합니다. 꽤 구불구불 돌아 올라가는 길이 길기도 하고, 올라간 만큼은 다시 돌고 돌아 내려가야 밥 먹을 데가 나오니. 배를 든든이 채워야겠습니다. 마을 입구 느티나무 아래 평상에 누워 바람에 손 흔드는 나뭇잎 보다가, 마을 사람들이 다시 세웠다는 삼층석탑도 구경하고 나선 길. 구불구불 구불길입니다.

 
포장된 길도 걷다, 숲길도 걷다, 임도를 따라 조금은 재미없는 오르막도 오르다가 정자에서 잠시 땀도 식히고. 참 많이도 가져왔지 싶은 주전부리도 먹고. 재작년에도 그랬던 것 같은데. 송전탑만 아니면 시원한 편백나무 숲에서 놀다 갔을 텐데 그러지도 못하고. 그렇게 한 시간 반쯤 올랐을까요. 드디어 구릿재입니다. 발아래 구례벌이 펼쳐있어 눈호강을 하고는 싶은데 이런, 여기도 송전선이 머리 위네요.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삼십분은 넘게 투덜투덜 내려왔나요. 그제야 쉴만한 곳이 나옵니다. 고압선도 없구요. 헌데 이번엔 뱃속에서 꼬로록 꼬로록. 밥 먹은 지 얼마나 됐다고 이럴까요. 가파르지 않아 이만하면 오르막도 걸을만하다 했는데. 그래도 힘은 부쳤나봅니다. 지도를 보니 한참은 더 내려가야 마을이 나올 것 같으니 마음이 급합니다. 잠깐 쉬었다가 가파른 포장길을 타박타박 걷습니다.

 
연휴라 문을 열지 않았으면 어쩌나 싶었는데 다행히 맛나게 밥을 먹을 수 있었습니다. 덤으로 한 낮 땡볕도 피할 수 있었구요. 예년 이맘때와는 다르게 기온이 25 가까이 올라 걷는 게 쫌 힘들었거든요. 옷을 가볍게 입는다고는 했지만. 햇빛 가린다고 얼굴에 이것저것 쓰고 가리느라 땀이 목덜미에 송글송글. 화장실이 어디 있을지 몰라 물도 목을 축이는 정도만 마시고. 한참을 쉬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부터는 쉬엄쉬엄 걸어도 됩니다. 머리가 반쯤 남은, 무릎 아래는 또 어떻게 됐는지 알 수 없는 석불상도 둘러보고. 과수원 안쪽을 가로 질러도 가기도 하고. 시원한 대죽 숲길에선 잠깐 쉬어가기도 하고. 방광마을을 지나서는 오랜만에 만난 찻길도 걷고. 둘레길을 걷지 않으면 이렇게 마을 안길을 걸을 수나 있을까. 돌담이 집들을 둘러싸고 있는 방광마을에 도착하니 생각보다 일찍 도착했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생일잔치도 한 달 뒤로 미루기는 했지만 오늘은 석가모니께서 오신 날. 가까운 곳에 샘과 구렁이와 글씨가 어우러져 재미난 이야기를 들려주는 천은사(泉隱寺)가 있으니 가볼까도 싶지만. 축일까지 다음에 하겠다는 곳을 가는 것도 뭐하고. 괜한 차 한 대 놓치고 투덜투덜. 다음 차도 겨우 잡아타고 읍내로 오니 그제야 해가 제 일을 다 했나, 시원하기만 합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24/03/07 10:50 2024/03/07 10:50

밤재를 넘으니 남도하고도 구례 땅이라 : <주천-산동> 구간 (2018년 5월 19일)

 

멀긴 멉니다. 어제 낮 3시에 출발했는데 남원에 도착하니 밤 10시가 훌쩍 넘었습니다. 대전 언저리에서 조금 막히긴 했지만서도 7시간이라니요. 강릉에서 전라도. 심리적 거리만큼이나 오가는 시간도 참 머네요. 그러니 노는 날이 4일이라도 온전히 걸을 수 있는 건 오늘 하루뿐입니다. 내일은 아침나절 여유 좀 부리며 놀더라도요. 점심 먹고부터는 또 부지런히 집으로 가야하니 그렇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밤재. 옛길을 몰랐던 때 터널을 걸어 넘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긴 터널 속에서 달려들 듯 내달리는 트럭들. 목줄도 없이 사납게 짖어대던 산만한 개들. 추적추적 내리는 비에 길 위로 뛰쳐나온 개구리와 지렁이들. 끝내 터널을 나오자마자 지나는 차를 세워 태워 달라했지요. 다시 생각하기 싫은 기억들입니다. 지금이야 왜 거길 지났을까 이유도 잘 떠오르진 않지만요.

 

주천에서 밤재를 넘어 구례 산동까지 이어지는 길은 꽤나 깁니다. 주천 쪽에서 넘어가는 길은 그래도 한 두 시간만 오르면 산동까지는 쭉 내리막이긴 한데. 산동 쪽에서는 반대로 긴 오르막을 네 시간 이상 걸어야 하니요. 이럴 땐 반대쪽으로 걷기로 한 게 참 다행이다 싶습니다. 하지만 어디서 시작해도 중간에 밥 먹을 곳이 마땅치 않으니까요. 배를 채우는 건 물론이고 간식도 넉넉히 챙겨야 합니다.

 

남원에서 출발한 버스가 주천면사무소를 두고 산 위쪽 마을을 한 바퀴 돌고 내려오더니 주천-운봉 구간 출발점에 사람들을 내려놓습니다. 탈 때 둘레길 간다고 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면사무소라는 방송에 벨을 눌렀는데, 다들 주천, 운봉 구간을 걷는 사람들이었던가 봐요. 기사님도 의례 그렇게 알고 있고. 왔던 길을 돌아 면사무소 앞으로 갈 때야 겨우 겨우 내립니다. 하는 수 없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지난 번 걸었던 길을 10여분 남짓 되짚어오니 다행히 밥 먹을 곳이 꽤 있습니다. 시계를 보니 10시 30분이 조금 넘었네요. 늦은 아침 겸 점심을 든든히 먹어둡니다. 날씨야 어제까지 내렸던 비 때문에 미세먼지도 없는 화창하고. 햇볕이 조금 따갑고 자외선 지수가 높다고는 하지만, 바람은 솔솔 불어오고. 고개를 너머 가는 길이 힘들지만은 않겠다, 생각됩니다.

 

외평마을을 지나 30여분 쯤 지났을까요. 목덜미에 땀이 조금 찹니다. 좀 전에 버스타고 지났던 산 중턱 마을, 장안제라는 저수지네요. 출발할 때 봤던 돌로 된 효열비가 신기해서 한참을 들여다봤었는데. 효자각 앞 배롱나무가 300년 됐다길래 그것도 구경하려는데. 왠 시커먼 개가 요란스럽게 짖어대는 걸까요. 아무리 목줄로 매어있다고 해도 무섭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숲 사이로 난 길을 따라, 계곡물이 흐르는 소리를 따라 줄기차게 오르니 등이 흠뻑 젖습니다. 반소매 옷으로 갈아입고 숨도 고릅니다. 아까부터 꽃망울이 하나, 둘 떨어졌는데 그것도 세어보면서요. 산길이 계속 이어지고는 있지만 쉬고 나니 한결 낫습니다. 오르락 내리락. 숨이 찰만하면 내려가기도 하고 완만하게 이어지기도 하네요. 유스호스텔을 두고 지하도를 두 번 왔다, 갔다 한 것만 빼면요.

 

올레길 6구간이라던가요. 모 재벌회장 부인이 길을 막아버렸던 곳이요. 때문에 올레길이 도로 쪽으로 우회하게 됐다던데요. 당연히 같은 이유는 아니겠습니다만. 얼핏 보면요. 유스호스텔을 통과하면 지하도를 한 번만 지날 수 있을 것도 같은데, 아닌가요. 물론 매일 문을 열어야하니 쉽진 않을 겁니다. 그래도 좀은 아쉽습니다. 매점도 있다고 하니 그곳을 거쳐 가면 둘레꾼들에게 도움이 될텐데요.

 

길이 어느새 포장도로에서 임도로 바뀌었습니다. 계속 오르막이긴 하지만 경사가 크지 않아 숨은 가쁘지 않습니다. 좀 전에 지나왔던 거 아닌가 싶게 비슷한 풍경이 이어지고 있지만요. 그늘에 누워 잠깐 쉬기도 하고, 불어오는 바람에 흐드러지게 핀 아카시아 향도 흠뻑 맡아봅니다. 이제 3분의 1쯤 왔습니다. 1시가 조금 넘었으니 이만하면 늦지도 빠르지도 않고 좋습니다.

 

밤재를 코앞에 두고 여느 고갯마루와 같이 오르막이 가파릅니다. 마지막 힘을 내기 위해 숨을 고르고는 힘차게 출발. 2시. 드디어 밤재에 올랐습니다. 올라온 쪽에서 보면 남원이 한 눈에 내려다보입니다. 반대편 내려가는 쪽을 보면 19번 국도가 꼬부랑꼬부랑. 정자에서 고기 구워 먹는 사람들만 아니었으면 한참이고 쉬었다 갔을텐데. 게다가 송전전까지 길을 가로지르고 있어 달음박질을 합니다.

 

산만한 개가 길을 가로막고 있어 어찌하나 난감합니다. 가만 보니 밭둑으로 돌아가면 될 듯합니다. 길을 내준 것만도 고마우니 길 가에 개 키운다고 뭐라 할 수 없지요. 무서우면 잠시 피해가면 되니까요. 하지만 비올 때 돌아가는 길로는 웬만해선 안 가는 게 좋겠습니다. 곧 펼쳐지는 대나무 숲을 볼 수 없으니까요. 또 쭉쭉 뻗은 편백나무가 이어진 시원한 숲도 지날 수 없으니까요.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서억서억 대숲을 지나 계곡을 이리저리 건너뛰기도 합니다. 어제, 그제 비가 와 걱정했지만 물이 많이 빠져서인지 괜찮네요. 계곡물에 땀을 씻어냅니다. 바리바리 싸 온 간식도 챙겨먹고요. 커피향이 물씬 나는 편백나무 사이에서는 조금 가다 쉬고, 또 조금 가다 의자에 퍼질러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기도 합니다. 그렇게 숲길을 다 빠져나오니 아까 개 때문에 돌아가려 했던 길과 만납니다.

 

밤재 정상에서, 아니 주천에서부터 국도를 따라 길게 이어진 송전선이 눈에 자꾸 거슬리네요. 게다가 둘레길 위로 여기저기 지납니다. 산수유 시목지가 있는 계척마을에서도 그렇고. 공사 중이라 어수선한 현천제를 지나 현천마을에서도 그렇고. 우연이겠지만요. 아까부터 머리가 그렇게 아픈데 혹시나 저 고압선 때문인 건가요. 점심 먹을 요량으로 점 찍어둔 식당이 문을 닫아서일까요.

 

사용자 삽입 이미지

 

계천교를 지나 포장도로를 따라 10여분 걸으니 원촌마을입니다. 산동면사무소가 있는 곳이구요. 주천-산동 구간 시작점이자 마침점입니다. 숙소를 탑동마을에 잡았으니 20여분은 더 가야겠는데, 아이쿠 뱃속이 요란합니다. 그도 그럴만합니다. 10시 반에 아침 겸 점심 먹고 11시부터 걷기 시작해서 지금이 다섯 시니. 꼬박 여섯 시간 동안 걸으며 밥 구경을 못했거든요.

 

마침 손수 기른, 채소는 물론 쌀농사까지 지었다고 합니다. 손맛 나는 밥집에서 맞바람에 게 눈 감추듯 허겁지겁, 술도 한 잔 빼놓을 수 없겠지요. 이럴 땐 해가 길어진 게 참 다행이지 싶습니다. 식당을 나와 잠깐 길을 헤매긴 했지만요. 서시천을 따라 효동교를 건너 민박집에 도착하니 아직도 날이 밝습니다. 이제 씻고 푹 자야겠습니다. 여기는 전라남도하고도 구례 땅입니다.

 

* 지리산 둘레길 걷기 여섯 번째 여행에서 걸은 길

주천에서 밤재를 넘어 산동까지 15.9km와 서시천 건너 탑동마을까지 1.4km를 더하면 17.3km를 걸었네요.

 

* 가고, 오고

강릉에서 전라도 쪽으로 오고가는 길은 시간이 많이 걸립니다. 지도를 대각선으로 쭉 그어도 꽤 긴 거리인데다 고속도로나 기차마저 이리저리 돌고 돌아오니 그렇습니다. 승용차로도 5시간은 넘게 걸릴 것 같고, 대중교통으로는 짧게 잡아도 7시간은 걸립니다.

 

* 잠잘 곳

주천에도 밥 먹고 숙박할 곳이 여럿 있는데 남원에서 숙박을 했습니다. 오후 일찍 출발했는데도 밤 늦게서야 겨우 남원까지밖에 못 왔으니까요. 주천을 지나 밤재, 산동까지 유스호스텔에 있는 듯한 매점을 빼고는 밥집은커녕 물 사마실 곳도 없습니다. 그러니 도시락을 준비하거나 간식을 충분히 싸 가져와야겠습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21/09/15 11:37 2021/09/15 11:37

첫째 날, 조계산을 넘어 송광사로(2006년 4월 7일)

 

순천 터미널에 도착하니 흐드러지게 핀 벚꽃이 우리를 반기고 있다. 여의도 윤중로 벚꽃축제가 내일부터니 지천에 벚꽃일터인데 이 먼 곳까지 와서야 볼 수 있다니. 도시 생활이란 게 얼마나 숨가쁜 것인지.

 

강남터미널에서 6시 40분 순천행 고속버스 첫차, 11시 순천 도착해 송광사행 버스, 잠깐 터미널 앞에서 벚꽃 구경한 것 말고는 지체한 것도 없는데도 송광사에 도착하니 그새 12시다. 오늘은 조계산을 넘어 송광사까지 산행 아닌 산행을 해야 하므로 아쉽지만 선암사 구경은 지난번으로 만족하고 서둘러 산길로 접어든다.

 

선암사 굴목재를 넘고 다시 송광사 굴목재를 넘어 송광사까지 이어지는 등산로는 완연한 봄기운을 여기저기서 느낄 수 있다. 흐르는 계곡 물이 그렇고, 파릇파릇 올라오는 새순이 그렇고, 진달래가 활짝 얼굴을 내밀고 있는 것이 그렇다. 또 몸에 찰랑찰랑 부딪쳐 떨어지는 풀잎 하나 하나에서도 봄 향기가 묻어난다. 다만 만만치 않은 오르막 산길로 조금은 숨이 가빴고, 어중간한 시간 때문에 그 유명한 보리밥 맛도 못보고 그냥 지나친 것이 아쉽다. 봄 계곡의 맑은 물에 손도 담가보지 못한 건 해가 지기 전에 산을 내려가야 한다는 핑계로 돌리지만 못내 아쉽다.

 

  <선암사와 송광사를 이어주는 굴목재>

 

다행이 해가 떨어지기 전에 당도했는데 송광사는 선암사와는 또 다른 느낌이다. 왕대 숲을 지나 만나게 되는 이 절은 통도사, 해인사와 함께 3보(三寶) 사찰의 하나인 승보사찰(僧寶寺刹)인 만큼 규모 면에서는 꽤 크지만 큰 가운데 아기자기하고 적당한 법당들이 여기저기 제 자리를 잡고 있어 선암사에서와 같이 마음을 푸근하게 한다. 또 이곳의 지형이 바람이 불면 함께 흔들거리는 형상이라 ‘불일보조국사감로탑’ 하나만을 제외하고는 돌로 된 건물이 하나도 없다는데 이 또한 색다른 맛이다.

 

둘째 날, 벚꽃 70리 길을 걷다(2006년 4월 8일)

 

송광사 입구에서부터 시작되는 벚꽃나무에 정신이 어질어질하다. 순천터미널 앞 벚꽃은 맛보기였던 모양이다. 주암호를 끼고 도는 18번 국도 변은 그야말로 벚꽃행렬이고 지나는 차마저 없어 우리들만의 벚꽃 놀이에 시간가는 줄 모른다. 조금 걷다 꽃구경하고, 조금 걷다 주암호 구경하고, 발걸음이 더디기만 하다. 30분 걷고는 아예 아침도 먹을 겸 벚꽃과 주암호를 함께 볼 수 있는 곳에 자리를 잡아본다.

 

 

<송광사 입구에서 시작된 벚꽃이 구례까지 이어진다>

 

창촌마을에서 죽곡면까지의 길은 다소 지루하게 느껴지는 길이다. 남도의 푸근함을 느끼기에는 충분한데, 어째 특색이라 할 만한 것도 없고 고만고만한 마을들과 들과 산이 이어지고 있을 뿐이다. 그래도 죽곡에서부터는 대황강이라고도 불리는 보성강을 오른편으로 두고 걷는, 곡성 군 길 벚나무들이 다시 우리를 기다리고 있어 즐겁기만 하다. 게다가 넓은 갓길에 쉬어가기 좋은 원두막들이 있어 벚꽃 70리 길이 힘든 줄 모른다.

 

압록은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그리 번잡스럽지는 않았으나 특별히 볼만한 것도, 마땅히 쉴만한 곳도 없어 오히려 썰렁한 느낌마저 준다. 여름철 피서지로는 적격일지 모르겠지만 보성강과 섬진강이 만나는 곳이라는 것 이외에는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아 추천하고 싶지 않다. 그래도 식당이며, 민박집에서의 푸근한 동네 인심에 편안히 쉬어간다.

 

셋째 날, 섬진강을 따라 지리산 관문 구례로(2006년 4월 9일)

 

오늘은 섬진강을 왼편으로 두고 지리산의 관문이라 할 수 있는 구례까지 걸어야 한다. 다만 일요일 오후 늦게 출발했다가는 봄맞이 구경나온 사람들과 뒤엉켜 늦을 수 있다. 해서 아침도 거른 채 일찍부터 길을 나선다.

 

구례로 가는 길은 섬진강을 사이에 두고 17번 국도와 10번 군도가 있는데 10번 군도를 따라 걷는 것이 나을 듯하다. 어제 70리 길에 이어 벚나무가 또 있는 것도 그렇고 오가는 차가 없는 것도 그렇고 쉬엄쉬엄 쉬어갈 만한 곳이 많기 때문이다. 그래도 우리가 걷고 있는 17번 국도변에도 심심지 않게 벚나무를 만날 수 있으며, 식물도감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이름 모를 들풀들과 철 이른 야생화들이 반기고 있으니 어떤 길이 더 나은지는 알 수 없다.

 

<섬진강을 따라 걷는 길가에서 만난 들꽃>

 

어제오늘 섬진강과 함께 했으니 재첩국 맛은 봐야겠는데 구례구역 앞 꽤 오래 전부터 있었던 것처럼 보이는 식당이 바로 그곳이다. 섬진강 물빛을 닮은 재첩국을 시켜놓고 지도를 펼쳐보니 ‘이제야 땅 안쪽으로 조금씩 들어오고 있구나’라는 느낌이 든다. 다음은 지리산을 넘어야 한다. 둘 다 지리산을 다녀온 지 몇 년씩은 지났으니 아무래도 단단히 준비해야 할 듯하다. 잘 포장된 일주도로라 등산하는 맛은 없겠지만.

 

* 여섯 번째 여행에서 걸은 길

- 첫째 날 : 선암사에서 조계산을 넘어 송광사로. 산길 7km를 약 5시간 동안 걷다.

- 둘째 날 : 송광사에서 압록까지 18번 국도 벚꽃 70리 길을 걷다. 걸은 시간 약 8시간.

- 셋째 날 : 여전히 18번 국도. 압록에서 지리산 아래 구례까지 섬진강을 왼편으로 두고 약 4시간 동안 15km를 걷다.

 

* 가고, 오고

선암사까지 내려가는 것은 다섯 번째 여행 때와 반대방향으로, 즉 순천을 경유해서 쉽게 갈 수 있었는데, 구례에서 서울로 올라올 때 문제가 있었다. 우리는 구례에서 서울로 직접 가는 시외버스 시간을 놓쳐 시간을 절약해보고자 남원을 경유해서 올라왔는데 실제 시간상으로는 구례에서 다음 차편을 기다리는 것이 남원을 거쳐 서울로 오는 것보다 나은 듯하다. 구례에서 남원까지 이동하는 시간도 그렇고 남원에 도착해서 다시 고속버스터미널로 움직여 서울행 버스시간표를 맞추는 것도 그렇고 만만치 않은 시간이 소요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비용도 엇비슷하게 든다.

 

* 잠잘 곳

송광사 인근은 관광지라 그런지 숙박시설이 다양하게 구비되어 있고 음식점도 여느 관광지와 같이 매우 요란스럽다. 둘째 날 머물렀던 압록은 이름만 요란했지 부담 없이 쉴 수 있는 숙박시설이나 음식점이 별로 없다. 가까운 구례나 곡성은 음식점도 많고 숙박시설도 잘 갖춰져 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09/05/26 10:50 2009/05/26 10: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