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자 삽입 이미지열아홉 번 째 여행 - 해파랑길 걷기 ① 동네 개들 다 나왔나보네: 옥계에서 묵호까지 34구간(2015년 6월 21일)
 
메르스와 가뭄으로 곳곳이 난리다. 텅 빈 도심과 쩍쩍 갈라진 논밭이 국민들 마음일까. 세월호 참사 때와 마찬가지 이번에도 무능(無能)만을 보여주는 정부. 또 그걸 바라보는 국민들 마음 말이다. ‘살려야 한다’는 문구 앞에서 전화기를 붙들고, 마른 논을 향해 소방호수를 부여잡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인기가요 순위만큼이나 자주 발표되는 여론조사 지지도?
 
강화도와 경기북부, 강원도 지역은 예년에 비해 강수량이 절반이란다. MB와 새누리당은 4대강 사업을 밀어붙이면서 분명 가뭄에 도움이 될 거라 했지만. 이제와 또 천문학적인 돈을 들여 수로를 놔야한다고 하면 그건 분명 사기다. 하기야 약속은 자기가 해놓고 보상보육 이행은 지방정부가, 교육청이 하라고 하는 마당이니 아니라 해도 별 탈 없을 듯.
 
다행인지 지난주에 소나기가 몇 번 왔다. 그래서일까. 군데군데 가뭄피해로 보이는 메마른 밭이 보이기는 했지만. 옥계를 벗어나 작은 고개 하나를 넘고 만난 들녘엔 초록색 벼들이 씩씩하다. 해갈에는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하는 얘기들이 있어 걱정을 했더랬는데. 가뭄 속에 걷는 시골길, 그나마 마음이 좀은 덜 무겁다.
 
하지만 산길로 접어드는 길가 밭은 푸석푸석하다. 그 가운데 고추며 옥수수는 그나마 잘 버티고 있는 것 같아 보인다. 대신 감자 꽃은 제대로 피지도 못한 것처럼 꽃대가 축 늘어져 있다. 고구마도 한창 줄기를 뻗어야 할 터인데 그렇지 못하고. 하우스에 토마토만 주렁주렁 매달렸다. 그렇다. 가뭄이 끝나기엔 아직 멀었으니, 오늘은 조심조심 걸어야겠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지난 번 <헌화로 산책길>을 마지막으로 바우길이 끝났다. 2012년 5월에 13구간 <향호 바람의 길>을 시작했으니 꼭 3년 만이다. 처음 바우길을 걸었을 땐 13구간이었는데 그 동안 2개 구간이 추가됐다. 그 중 동해안 바닷길 걷기를 하면서 11개 구간을 걸었으니 거진 바우길을 다 걸은 셈이다.  
 
이제 7번 국도를 따라 곧장 아래로 내려가야 하는데, 다행히 심심치 않게 해파랑길이 기다리고 있다. 생각해보면 바우길 대신 7번 국도를 따라 해안길을 걸었다면 울진도 더 지났을 시간이긴 하다. 하지만 바다만 끼고 걷는 것보단 바닷가 마을과 산을 이어주는 길을 걷는 게 훨씬 재미 지니, 것도 괜찮다. 
 
해파랑길은 부산 오륙도해맞이공원에서 고성 통일전망대까지 770km를 잇는 길이다. 중간 중간 강릉 바우길, 영덕 블루로드와도 겹치고 얼마 전 개통한 동해안 자전거길과도 함께한다. 이 길이 없었다면 7번 국도를 따라 지루한 아스팔트길을 걸었을 터. 덕분에 동해안 이곳저곳을 두루 걸을 수 있으니 시간이 좀 더 걸려도 상관없다.
 
옥계는 면소재지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치 조용하다. 장날이나 되어야 북적부적하려나, 토요일임에도 버스 정류장 말고는 나중에 수도 없이 만나게 되는 개조차 보이질 않는다. 다행히 해가 쨍쨍 내리쬐긴 하지만 바람이 시원하게 불어 덥진 않다. 한 시간 쯤 후에 만나게 될 산길만 빼면 동네 산책 나온 길인 듯.
 
하지만 계곡물도 바짝 마른 산길 초입에서 개 세 마리가 요란하게 짖는다. 다행히 묶여 있는 것 같은데, 어째 지나가기엔 길이 매우 좁아 보인다. 버젓이 집 방문 앞을 지나는 이 길이 맞는지도 모르겠고. 목줄이 조금이라도 길면 다리까지 닿을 수 있을 것 같다. 다행이 주인 할머니가 길이 맞으니 쭈욱 올라가면 되고, 개는 묶여 있으니 걱정 말라고 하신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30분쯤 산길을 오르니 여기서부턴 <옷재>라는 이정표와 함께 동해시와 강릉시를 구분하는 안내판이 보인다. 중간에 한 번, 개에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쉬었으니 그다지 높은 것 같진 않다. 경사도 그리 가파르지 않고, 바람만 안 불었다는 것 빼곤 힘들지 않다. 그래도 제일 높은 데 올랐으니 잠깐은 쉬었다 가야겠지. 
 
조용한 마을길을 지나 산불감시초소에서 또 잠깐 쉬었다 고개를 넘는데. 이번엔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보고 놀란다고. 멀리서 들리는 개소리에, 숲 속에서 고라니가 먹이 찾는 소리에 오금이 저린다. 고라니는 저도 놀랐는지 길 이쪽에서 저쪽으로 성큼성큼 뛰더니 숲 속으로 몸을 감춘다. 그제야 숨을 내쉬며 주의를 돌아보니 멀리 마을이 보인다. 
 
서둘러 고개를 내려와 여기가 어딘가 살펴보니 약천마을이란다. 한번쯤 들어봤을 시조, “동창이 밝았느냐....”를 지은 남구만이 살았던 곳이라는데. 가만 보니 유적지 바로 옆 우물이 꽤나 시끄러웠던 곳이다. 여기서 살고 있는 분들에겐 미안한 마음이지만 섬뜩한 기분이 드는지라 발걸음이 빨라진다. 어쩔 수 없다.
 
헌데 그 오싹함이 채 가시기도 전, 철조망 저쪽에서 울부짖는 개소리가 들린다. 그것도 한 , 두 마리가 아니다. 게다가 멀리 앞서 걷던 아주머니들이 되돌아 나오시는 모습이 꼭 개에 놀란 듯 보인다. 아니나 다를까. 그나마 주인이 어디를 가려는지 차를 빼 나오고 있어 개를 막았으니 망정이지. 산만한 개와 맞닥뜨렸을 뻔.
 
뒤도 안 돌아보고 서둘러 고개를 넘는다. 멀리 푸른 바다가 보일락 말락. 아무래도 인적 많은 곳엔 개가 없겠지, 발걸음이 빨라진다. 그런데 웬 걸. 이번엔 줄까지 풀린 개들이 떼로 몰려온다. 그나마 아까 만난 개들에 비한다면 강아지 수준. 그래도 앙칼지게 짖으며 발목까지 달라붙는데, 아무래도 동네 개들 다 나왔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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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리도 넘는다는 망상해변에서 숨도 고를 겸, 바다도 볼 겸 한참을 쉰다. 아직 물놀이하기엔 이르지만 그래도 꽤 북적북적하다. 망상역을 지나고부터는 쭉 왼편에 바다를 끼고 걷는다. 동해안 자전거길 위에 해파랑길이 얹혀있다. 간간이 자전거들이 내달리긴 하지만 그다지 위험하지도 않고. 차도하고도 멀찌감치 떨어져 있어 걷기에 좋다.
 
보드타는 사람들이 꽤 있던 대진항을 지나고, 낚시하는 사람이 유난히 많이 보이는 어달해변도 지나고나니 곧 묵호항이다. 묵호는 태백 살 때 거의 매주 놀러왔던 곳이다. 덕분에 논골담길은 수도 없이 올랐고. 까막바위며 등대, 방파제 역시 눈에 닳았다. 그래도 오랜만에 와서인지 못 보던 전망대가 새로 생겼으니 거기부터 가봐야겠다.
 
전망대에 올라 저 멀리 지나온 바닷길도 손 짚어 되 걷기도 하고. 등대로 오르는 논골담길도 손 짚어 올라보기도 하다가. 다시 방파제로 내려와 시원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땀을 식히기도 하고. 해가 뜨는 동쪽 바다에서 뉘엿뉘엿 저물어가는 저녁놀이 신기해 한참을 보기도하니. 어느새 집에 갈 시간인가 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열아홉 번째 여행에서 걸은 길
해파랑길은 부산에서 고성까지 이어진 길이다. 처음 동해안 걷기를 시작했을 땐 얼마 되지 않은 구간만 있었는데, 어느새 길을 다 잇고 번듯한 이름까지 생겼다. 덕분에 열아홉 번째 여행부터는 해파랑길이 길잡이가 됐다. 해파랑길 34구간은 동해시 묵호역에서 강릉시 옥계면 시장까지 18.9km로 제법 길다. 점심 먹고 출발해 저녁 먹기 전에 도착했으니 대략 5시간 20분 남짓 걸린 셈인데. 고성에서 내려가고 있었으니 반대방향으로 걸었다. 
 
* 가고, 오고
출발지였던 옥계까지는 강릉 시내버스를 이용했으나 올 때는 동해시외버스터미널에서 시외버스를 탔다. 묵호에서 옥계로 가는 버스를 타고 옥계에서 다시 강릉 시내로 오는 버스를 타기에는 시간 맞추기도 어려울 뿐만 아니라 시간도 시외버스보다 많이 걸리기 때문이다.  
 
* 잠잘 곳, 먹을 곳
시작하는 옥계에는 모텔이 한, 두 개 있었던 것 같다. 물론 면사무소와 시장 주변에는 식당이 여럿 있다. 이후 망상까진 마을을 몇 군데 지나긴 하나 슈퍼 하나 찾기 힘들다. 하지만 이후 망상부터 묵호역까진 숙박시설과 식당이 늘어서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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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12 16:49 2017/02/12 16:49
사용자 삽입 이미지첫 번째 여행 ② 제주의 아픈 역사를 오롯이 만나다: 10구간 화순-모슬포 올레(2015년 1월 28일)
 
제주에 가면 꼭 가야할 곳으로 두 군데는 일찌감치 정했습니다. 올레길도 마찬가지로 한 구간만큼은 걸어야겠다, 마음먹었구요. 4.3 평화공원은 도착하는 날 그리고 강정마을은 떠나기 전에 돌아보기로 했습니다. 해서 여행 첫날엔 세찬 비구름에도 기념관을 둘러봤고, 강정은 이제 내일 가보려 합니다.
 
올레길은 어제 우도가는 길이 막히는 바람에 대신 예정 없이 걸었던 21구간은 제처놓구요. 바로 오늘 걸을 10구간만은 꼭 걷고 싶었습니다. 제주 어디라고 그렇지 않은 곳이 없겠지만요. 모슬포항에서 얼마 떨어지지 섯알오름과 알뜨르비행장 그리고 송악산 자락 여기저기에 새겨져 있는 아픈 역사를 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 현대사에서 제주만큼 가시밭길을 걸어왔던 곳도 많지는 않습니다. 더구나 여전히 가슴 아픈 길을 걷고 있기에 마음이 안쓰럽기만 합니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온 몸으로 겪어온 곳이면서 여전히 미국과 중국이라는 세계 초강대국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언제 터질지 모를 화약고가 될 지경이니 말입니다.
 
화순-모슬포 올레는 이런 제주 역사를 생생히 보고 느낄 수 있는 구간입니다. 물론 중산간 마을들을 이어주는 다른 곳들에서도, 해안가 마을과 오름들을 걷는 또 다른 길들에서도 제주와 만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만큼이나 오롯이 역사와 마주설 수 있는 곳이 또 있을까요. 해서 오늘은 지난번과는 다른 마음으로 올레길을 걷습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다들 여기 10구간은 모슬포에서 시작해 화순모래해변으로 걷더군요. 내내 산방산을 품고 걷는 게 좋았다는 사람, 송악산과 섯알오름을 지나고 나면 다소 밋밋한 길이 이어져 마무리가 아쉽다던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하지만 바로 걷던 거꾸로 걷던 무슨 상관입니까. 그 안에 담긴 역사를 제대로 본다면 말이지요.
 
금강산도 식후경이라지요. 맞습니다. 걷기 전에 배부터 든든히 챙깁니다. 대략 5시간 정도 걸린다고 하니 시간이 될까, 걱정되기도 하지만. 그래도 일단 먹어야지요. 그래야 힘차게 걸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서는 배 툭툭 두드리며. 엊그제 만났던 것만큼이나 예쁜 모래밭, 이름도 비스므리한 하모라는 해변을 걷는 것 또한 나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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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레길에서 만나는 풍경 가운데 가장 익숙한 것이라는 건 다음 날 알았더랬습니다. 동백꽃이 예쁘다는 위미에서 떼 지어 나돌아 다니는 덩치 큰 개들을 보고 나서 말입니다. 모래밭을 벗어나 소나무 숲길에 들어선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마주친 산만한 개. 딴에는 그저 무심한 듯 쳐다본 것 같지만, 방심하다 어찌나 놀랐던지요.
 
하는 수 없습니다. 찻길로 내려와 돌아갑니다. 다행히 얼마 가지 않아 혹시나 하며 다시 숲길로 들어섰을 때 개가 보이질 않습니다. 하지만 이런, 숲길이 금방 끝납니다. 별 도리 없네요. 올레길에 빨리 적응해야 할 터인데, 아직은 쉽질 않습니다. 지금은 돌아서 갈 수야 있겠지만 외길인 경우엔 어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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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뜨르는 ‘아래쪽 들판’이라는 뜻을 가진 예쁜 이름인데요. 이름만큼이나 정말 넓디넓은 들판이 펼쳐져 있습니다. 산방산과 섯알오름을 번갈아가며 마주고보고 걷던, 억새가 가득한 그 들판 말이지요. 하지만 이곳이요. 눈에 보이는 표지판 하나 없고, 위성지도를 통해서야 겨우 그 형태를 알아 볼 수 있는, 일본군 비행장이었다니요.
 
19개나 남아 있는 비행기 격납고며 고사포 진지, 탄약고, 지하벙커들을 하나하나 둘러보고 있자니 가슴 한편이 먹먹해집니다. 곧 만나게 될 송악산 일본군 진지들도 그렇겠지만, 대체 얼마나 많은 제주민들의 희생이 있었던 걸까요. 그저 전쟁이 미치지 않아 다행이었지, 하기엔 그 노역(勞役)이 너무 무거울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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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납고 안에 세워진 제로센을 먼발치에서 보고 난 후 섯알오름에 오릅니다. 물론 입구에 세워진 <섯알오름 희생자 추모비> 앞에서 묵도(默禱)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추모비에는 한국전쟁 당시 한국군과 경찰에 의해 집단학살 된 200여명의 제주민들의 영령이 새겨져 있습니다. 잠깐 멈췄던 아련함이 다시 밀려옵니다.
 
10구간은 알뜨르비행장에서 섯알오름, 그리고 곧 이어지는 송악산 둘레 일주가 전부라 해도 될 만합니다. 또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던가요. 이미 알고 있다면 이 길이 가진 의미를 세 곳에서 다 볼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더구나 이 세 곳에서 보는 풍경은 이 길에 보여주는 모든 풍경이라 해도 충분하니, 그것만으로도 족합니다.
 
다만 송악산에서는 다른 곳과는 달리 좀 어수선합니다. 꼭 그런 이유 때문인 것만은 아니겠지만. 중산간 지역도 모자라 여기까지 손을 뻗쳤다고 하는 중국인들이 많습니다. 거기에 들어가지 말라는 표지판도 무시하고 산 정상에 올라가는 사람들. 대낮부터 술판을 벌이고 있는 사람들까지. 서둘러 자리를 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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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머리해안은 이미 매표소가 문을 닫았습니다. 입장료가 있어 처음부터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막상 닫힌 문을 보니 들어가 보고 싶네요. 참 사람마음 간사하지요. 하지만 시간도 그렇거니와 해가 뉘엿뉘엿, 곧 어두워질 것 같으니 서둘러야겠습니다. 엊그제와 같이 예상시간은 그야말로 걷는 시간만을 따진 듯합니다.
 
아무리 까치발을 해도 볼 수 가 없었던 화석지는 분명 용머리 해안 전이었을 터인데 가물가물합니다. 또 설큼바당과 산방연대, 퇴적암지대는 어둑어둑한 가운데 걸었던 탓에 변변한 사진 한 장 남기질 못했습니다. 다만 밤하늘 반짝이는 별과 같았던 검은 모래와 조개껍데기만은 선명히 기억에 남아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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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납고 안으로 숨은 제로센에는 일제강점기 때 친일했던 이들을 써놨다던데 왜, 누가 그리로 치웠을까요. 절벽 가까이까지 데크에 계단은 만들어 놓고는 정작 일본군 진지에는 가까이 가보질 못하게 해놓은 까닭은 무엇일까요. 맞춤법조차 맞지 않고 읽기에는 숨이 찬 섯알오름 유적지 알림판을 제대로 해 놓을 수는 없는 걸까요.
 
동아시아의 화약고가 될 수 있을 해군기지를 만들면서 ‘세계 평화의 섬 제주’라는 현수막을 내건 이유는요. 왜 지금 이 순간 ‘재심사’라는 말을 꺼낸 걸까요, 혹시 여전히 ‘빨갱이’들 때문이라고 믿는 걸까요. 조금 더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유적지들을 놔두고 오가는 버스 편도 많지 않은 곳에다 4.3 평화공원을 들여놓은 이유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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짙은 어둠이 내려앉는 화순항에 도착하니, 이런저런 답 없는 생각들이 떠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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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1/17 14:55 2016/11/17 14:55
사용자 삽입 이미지첫 번째 여행 ① 꿩 대신 닭이라고 하던데..... 이건, 닭이 아니라 꿩이었네: 21구간 세화리에서 종달리까지(2015년 1월 27일)
 
성산항에 한무더기 사람들을 내려놓은 버스가 성산일출봉 쪽으로 부리나케 달려갑니다. 하지만 무리들은 갈 길을 몰라 우왕좌왕, 스마트폰을 꺼내느니 지도를 펼치느니 부산합니다. 그 틈을 비집고 내리기 전 얼핏 봐둔 길을 어림잡아 들어서는데요. 이런, 함께 내린 사람들이 뒤따릅니다. 가만 보니 여행사 가이드라도 된 모양새입니다.
 
순간 난감해지지만 장난기도 발동합니다. 따르는 이들이 어쩌나 힐끔힐끔 뒤돌아보기도 하지만요. 이쪽이 맞는 길이라는 듯 선창가 쪽으로 앞장섭니다. 아니나 다를까. 저건 오징어잡이 배인가 보다, 저건 뭘 잡길래 저리 작지, 두런두런. 그제야 상황파악이 된 몇 몇은 다른 길을 찾기 시작하고, 또 다른 몇 몇은 왔던 길을 되짚습니다. 
 
이왕 들어선 김에 선창가를 빙 둘러봅니다. 뭐, 항구가 크면 얼마나 크다고. 또 우도 가는 배 시간도 넉넉히 남았으니 말입니다. 게다가 저 쪽 끄트머리에 해양경찰이란 글씨도 큼지막하게 보입니다. 아까 버스에서 내렸을 때 보단 바람이 좀 세게 불어 걷기가 힘들 지경이지만, 뭐. 일단 저까지 가보고 배타는 곳이 어딘지 물어봐야겠습니다.
 
첨엔 성산항이 저쪽이다 손짓을 하는 가 싶었는데, 웬만하면 오늘은 우도에 들어가지 말랍니다. 2시 쯤 주의보가 뜰 예정이고 지금은 들어가도 나오는 배가 없을 거니 가질 말라는 얘기지요. 허참, 종달리 쪽 도선항에서도 허탕을 쳤는데 여기서도 이러면 어쩌지요. 설마, 아까 사람들 놀리던 벌이라도 받으라는 건가요.
 
덕분에(?) 이른 점심을 고등어구이에 고등어추어탕으로 아주 비리게(?) 먹고 다시 세화리로 향했습니다. 꿩 대신 닭이라고 하던가요. 우도 올레길 대신, 날씨가 좋았더라면 어제 낮에 걸었을지도 몰랐을, 세화리에서 종달리까지 이어지는 21구간을 걷기로 한 겁니다. 제주도까지 와서 우도를 못 가보는 게 아쉽긴 하지만 말이지요.
 
해녀박물관은 내부를 새로 꾸미는 중이라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성산항에서도 그랬고, 여기서도 도착하자마자 무작정 바닷가 쪽으로 가 찬바람 맞고 해맨 탓에 쉬었다 가려했는데 말입니다. 다행히 가까운 곳에 비가림치곤 꽤 큰 쉼터가 있어 몸을 녹일 수 있습니다. 올레길 가운데 비교적 짧은 구간이지만, 오름도 올라야 하니 만만하게 봐선 안 되니까요. 
 
박물관 뒤편 연대동산을 넘으니 면수동 마을회관 앞을 지납니다. 그리고는 곧, 세상에. 이런 앙증맞은 무밭과 당근밭을 어디서 또 볼 수 있을까요. 까만 돌담들 사이로 푸른 무 잎과 당근 잎이 바람에 살랑살랑. 첨엔 그저 그 파랗고 까만 모습에 넋을 놓고 보았더랬는데. 그러다 뭘 심은 걸까, 하고 봤더니. 맞아요. 무와 당근이었답니다.
 
까만 돌이 지천에 널려서인가요. 아까 마을을 지나올 때 봤더니 담도, 집도 돌이요. 밭을 지날 땐 밭 경계도 돌들로 삼더니. 글쎄 묘를 두고도 빙 둘러 야트막한 돌담을 쌓은 게 보입니다. 아마 묘자리를 파다 나온 돌들을 어찌 처리하기 뭐해 그저 주위에 둘렀을 터임에 분명한데. 여기서 보니 저것도 좋은 풍경을 이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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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을 까맣고 푸른 낯불밭길을 지나고 나니 길은 다시 마을로 이어집니다. 서문동이라고 하는데요, 조선시대에 쌓은 별방진이라는 독특한 성을 두고 있는 마을입니다. 제주도에는 이런 성곽이 곳곳에 있는데요, 올라가지 말란 표지가 없으니 한번 쯤 성 위를 걷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별방진에 올라보면 마을이며 바다 먼 곳까지도 한 눈에 들어오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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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도해수욕장까진 조금은 심심한 길입니다. 물론 제주니까, 그것도 올레길이니까 하는 말이지. 실은 쪽빛과 옥빛을 번갈아 보여주는 바다를 왼편에 두고 있어 한 눈 팔고 걷다간 오른편에서 오는 차에 큰일 날 수도 있습니다. 아, 다행이도 여기 제주도 찻길엔 비교적 인도가 널찍이 있는 편이고 갓길도 여유가 넘칩니다. 그러니 여유를 가져도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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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바람의 여신이라는 영등할망에게 의례를 하는 곳인 각시당도 기웃하고. 꽃이 필 때면 섬 전체가 하얗게 문주란으로 덮여 꼭 토끼처럼 보인다는 토끼섬도 너머다 보고. 밀물 때 들어온 고기를 썰물 때 거두는 갯담, 특히나 멜(멸치)이 많이 몰려들어 잘 뜨는 개라서 붙여진 멜튼개에서는 멜이 있나 한참 들여다보기도 했으니. 여간 한 눈을 판 게 아니네요.
 
저 멀리 우도와 성산이 머리를 내밀 때쯤이었을까요. 또 난생 처음 이런 모래해변을 어디서 봤을까요. 어찌나 곱고 고운 모래들이 펼쳐져있던지. 게다가 바다는 또 얼마나 푸르고도 파랗던지. 이쪽에서 저쪽까지 뛰어봐야 숨 한 번 고르면 될 만큼 작은 백사장이지만. 바람만 없다면, 작은 의자라도 있었다면 오늘은 여기까지 걸어도 괜찮겠다, 싶을 지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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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핏 멀리서 보면 보아뱀 같기도 한 지미봉을 앞두고 숨고르기를 합니다. 봉우리를 아래서 돌아가는 둘레길도 있으니 마음이 흔들릴 법도 하지만. 뭍에서라면 뒷동산에도 못 미치는 166미터만 오르면 되기도 하고. 무엇보다 한라산과, 우도, 성산일출봉, 제주 바다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지미봉을 놓치는 건. 맞습니다. 앙꼬 없는 진빵입니다.
 
하지만 앙꼬 없는 진빵이라도 맛보긴 쉽지 않습니다. 시작부터 격한 오르막이거든요. 게다가 자꾸만 어디서 방송 소리가 들리는데. 좀 아까 성산항에서 들은 주의보, 어쩌구 때문이던가요. 내용이라도 알면 괜찮겠는데 웅웅 소리만 들리고. 신경이 쓰여도 너무 쓰입니다. 숨소리가 거칠어지는 만큼 스피커 소리도 거칠어지고. 아, 꼭대기 가면 좀 나아지려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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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탄이 안 나오려야 안 나올 수가 없는 풍경이 눈앞에 가득합니다. 이름 그대로 소 누운 듯 펼쳐져 있는 우도와 그 옆에 우뚝 솟은 성산일출봉. 앙증맞게 오밀조밀 붙어 있는 종달리 마을 집들과 하얀 눈을 머리에 이고 있는 한라산. 정말 어디 한 곳 눈을 뗄 수가 없습니다. 이건 분명, 꿩 대신 닭이 아니라 꿩 그 자체입니다.
 
얼마나 오래 있었던지 지미봉에서 내려오니 노을이 밀려옵니다. 출발할 때 봤던 이정표에는 3시간이나 4시간이면 된다던데. 얼추 여기까지만도 벌써 4시간이 걸렸습니다. 아마 그 시간이란 게 그냥 걷는 시간만 따진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아니면 여기 기웃 저기 기웃. 여기도 가보고 저기도 가보고. 한참을 쉬고 한참을 구경하느라 그랬을지도 모르지요.
 
서둘러야겠습니다. 근처에 잠 잘 곳을 정했더라면 느긋이 종달리 해변을 걷겠지만. 오늘은 서귀포까지 가야 하니 그렇습니다. 또 21구간이 끝나는 곳에서 짐을 맡긴 숙소까지 더 걸어야 하니. 이러다 시간이 모자랄지도 모르겠습니다. 발걸음을 빨리해 종달바당을 걷습니다. 바닷바람을 쐬고 있는 오징어도, 살랑거리는 갈대도 그저 흘긋흘긋 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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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7/12 14:49 2016/07/12 1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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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동군은 일본이 대륙 침략을 위해 만주에 설치한 부대입니다. 1904년 러일전쟁에서 제정러시아를 이긴 후 관동주(러시아가 청나라에게 조차지(租借地)로 빼앗은 랴오둥 반도 남단 지역) 방위를 위해 배치했던 수비대가 그 시초입니다.
 
그 후 일본은 1918년에 이 수비대를 독립부대로 개편 증강하는데요. 이것이 바로 관동군입니다. 당시에는 독립수비대 6개 대대와 일본 본토에서 2년 단위로 교대 파견되는 1개 사단으로 구성했다고 합니다.
 
관동군 병력은 중일전쟁을 거치면서 점차 늘어갑니다. 특히 나치 독일이 소련을 침공한 후에는 일본, 조선, 대만에서 병력을 동원해 75만 여명까지 늘었습니다. 하지만 미국 참전 후 본토와 동남아시아 방어를 위해 관동군 병력을 빼기 시작합니다.
 
결국 소련군 참전이 우려되던 1945년, 만주에 거주하는 일본인 남자 18세에서 45세까지 총 20만 명을 소집합니다. 한때 소련을 정복하기 위한 정예군대로까지 불렸던 관동군이 크게 약화된 겁니다.
 
2.
연합국이 반격을 해오면서 전황이 불리해지자 일제는 1943년 징병제를 실시합니다. '성전(聖戰)'에 참여할 영광스런 기회라는 선전은 총알받이를 위한 강제 동원 수단에 불과했습니다. 결국 1944년과 45년 만 20세가 되는 조선 청년들이 징병으로 끌려가기 시작합니다.
 
신체검사와 짧은 군사훈련을 받은 조선 장정들은 광활한 지역으로 배치됐습니다. '반소매 군복을 입으면 남방으로, 긴소매면 북방으로' 말입니다. 만주도 예외일 수가 없습니다. 수많은 조선인들이 관동군에 편입됐던 겁니다.
 
일본이 항복을 선언하기 직전이던 8월 9일, 대일전(對日戰)에 뛰어든 소련군은 쿠릴열도, 사할린, 만주 등지에서 60여만 명을 포로로 잡았습니다. 물론 그 포로들 속에는 관동군 소속 조선 청년들도 포함됐습니다.
 
이들은 모두 일본 군인으로 간주됐습니다. 군사학교를 졸업하고 장교로 복무했던 제국주의 군인들 말고, 징병으로 끌려온 청년들까지 말입니다. 시베리아 등지로 끌려간 조선인들은 3, 4년간에 걸친 중노동 후에야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3.
'포로'들은 모스크바와 블라디보스토크를 잇는 시베리아 철도를 따라 각처로 흩어졌습니다. 몸이 쇠약해져 있던 사람들이 이 열차 안에서 첫 희생자가 됐습니다. 수용소시설은 열악했으며 혹한, 기아, 중노동이라는 '시베리아 3중주'로 떼죽음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조선 청년들은 일본군 포로에 비해 더욱 고달픈 수용소 생활을 해야만 했습니다. 일본군 계급 질서가 수용소 안에서 그대로 유지됐기 때문입니다. 극소수 장교와 지원병을 제외하고 대부분 말단이었기에 온갖 궂은일을 해야만 했던 겁니다.
 
1948년 12월이 돼서야 조선인 '포로'들은 귀향할 수 있었습니다. 그해 8월과 9월 남쪽과 북쪽에 각기 다른 정부가 차례로 수립됐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일본인 귀환자들이 자국선을 타고 돌아간 것과 달리 조선인들은 소련 화객선을 타야만 했습니다.
 
출항을 알리는 뱃고동 소리가 울리자 생존자들은 '시베리아 대지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시베리아 에니세 물결아 잘 있거라 자작나무 숲아 네 품에 자란 어린이들은 내 본향 찾아 떠나련다 시베리아여 우리들의 자유와 청춘, 보람을 심어주던 정든 고향 시베리아".
 
4.
류학구는 일제 패망을 닷새 앞둔 1945년 8월 10일 관동군에 입대했다가 소련군에 '포로'가 됐습니다. 사회주의 사상에 공명한 그는 조국으로 돌아오지 않고 소련 잔류를 택했습니다. 비록 고향에 있는 어머니 안부가 마음에 걸렸지만요.
 
오웅근은 1925년 젠다오間島 지방 쉬시엔石峴 부근에서 태어났습니다. 8월 초 소집 영장을 받고 하이라얼로 갔던 그는 세 군데나 총상을 입고 포로가 됩니다. 시베리아 포로 생활이 끝난 후 북으로 돌아와 부친과 만났으나 모친이 남아 있는 쉬시엔으로 돌아갔습니다.
 
흥남여고에 임시 수용됐던 억류자들은 고향 땅으로 돌아갔습니다. 먼저 옌변延邊 등 만주 출신 수백 명이 풀려났고, 이어 북쪽에 연고지가 있는 사람들이 돌아갔습니다. 남쪽 출신 귀환자들은 거리에 따른 여비를 지급 받고 제일 마지막에 떠났습니다.
 
이창석은 1944년 1월 10일 만주에서 입대했다 '포로'가 됐습니다. 이후 수용소에서 도망쳐 나왔으나 붙잡혀 15년 중노동형을 받았습니다. 8년간 억류생활을 마친 이창석이 도착한 곳은 한반도가 아니라 일본 땅이었습니다.
 
5.
흥남여고에 머물러 있던 귀환자들은 곧 고향에 돌아가도록 허용됐습니다. 먼저 옌벤 등 만주 출신 수백여 명이 풀려났고 이어 북쪽에 연고를 둔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물론 부친이 인민위원회 간부였던 사람은 이보다 전에 나올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임시 숙소를 떠난 사람들은 남쪽 출신들이었습니다. 신현택의 증언에 따르면 고향으로 가는 거리에 따라 북쪽 정부로부터 여비를 받았다고 합니다. 또 다른 생존자들 말에 따르면 출신 지역별로 묶어 38선을 넘었다고 합니다.
 
정읍 출신 정용환은 포로용 방한복을 바꿔 입은 바람에 공작원 의심을 받게 되고 급기야 전기 고문까지 당했습니다. 평양이 고향이었던 이병주는 가족이 모두 포항으로 내려갔다는 얘기를 전해 듣고 남으로 내려왔으나 특별한 지령을 받은 게 아니냐는 추궁을 받았습니다.
 
월경 후 연행된 사람들은 인천 귀환자들은 송현동에 있는 전재민(戰災民)수용소로 옮겨졌습니다. 이때 귀환자들은 정용환과 이병주처럼 경찰서 혹은 미군 극동군 사령부에서 조사를 받아야만 했습니다. 때론 북쪽에서 받은 여비가 문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6.
소설이 아닙니다. 한마디로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란 겁니다. 영화에서나 나올법한 삶. '파란만장', '격동', '비극'이란 말들이 결코 은유가 아닌 삶, 직접 겪어보지 않았다면 감히 상상할 수조차 없는 삶들이 말입니다.
 
남쪽으로 귀환한 사람들이나 북쪽에 남은 사람들. 혹은 남도 북도 아닌 일본, 만주, 소련으로 간 사람들. 이들은 귀환 이후에도 순탄한 삶을 살수 없었습니다. 물론 지금까지도 일본, 소련 어느 곳에서 '배상'은커녕 '사고'도 받지 못했습니다.
 
일본이 항복을 선언한 지도 65년이 넘었습니다. 한국전쟁은 끝난 지 55년이 지났습니다. 반세기도 넘게, 세 세대가 돼서야 이들이 겪은 모진 삶들이 겨우 세상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것도 역사 연구자도 아닌 한 현직 기자로부터 말입니다.
 
일본에선 평화헌법을 개정하겠다는 사람이 총리로 있습니다. 우리는 만주군관학교와 일본육사를 졸업 한 관동군 출신 아버지 후광을 업은 딸이 대를 이어 대통령입니다. '자학사관'을 극복하자는 일본, '올바른 역사'를 가르쳐야 한다며 국정교과서를 만드는 한국.
 
일본 탓만 하기에는 되레 '민족주의'라는 덫에 갇힐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전후 천황제를 유지하면서까지 전범 처리에 소극적이었던 미국 탓을 해야 할까요. 아니면 일본 침략 전쟁에 협력한 추축국 진영으로 치부해 조선인들을 억류한 소련 탓을 할까요.
 
맞습니다. 독립군을 토벌하던 간도특설대 장교였던 이가 국군 원로로 받들어지고 있습니다. 일본 군함은 군국주의이자 제국주의의 상징인 '욱일승천기'를 버젓이 달고 우리 항구에 들어옵니다. 여태껏 청산하지 못한 '잔재'들을 안고 있는 우리 탓이 더 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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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6/28 11:56 2016/06/28 11:56
1.
대세라던 인기 그룹 멤버들이 안중근 의사를 몰라본 일로 시끌벅적합니다. 급기야 SNS에 사과 글을 올린데 이어 눈물까지 흘렸습니다. 하지만 논란은 쉽게 가라않지 않았는데요. 이번엔 앨범 발표회를 중계하던 포털 앱이 문제였습니다. '안중근'을 금칙어로 설정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미 찍힌 '낙인'에 겹쳐 반응이 싸늘하기만 합니다.
 
반면 늘 '바보'라는 소리를 들었던 한 연예인은 어렸을 적 안중근 이름을 알고 있다는 이유로 단번에 '천재' 소리를 들었습니다. 더구나 묘하게도 엇비슷한 때에 이런 일이 생겼으니까요. 비교당하는 건 기본이었습니다. 누군 역사의식 없는 요즘 아이돌로, 누군 '역사의 신'으로까지 등극하고 있는 겁니다.
 
그 밖에 1932년 상하이 홍커우 공원에서 도시락 폭탄을 던진 독립운동가를 묻는 질문에 안창호를 택했던 사람. 초대 대통령으로 이수만을 외쳤던 이. 급기야 주말 예능프로그램에서마저 '조선무역팀', '칠공주' 같은 답들을 써낸 아이돌들까지. 뭐, 이번 일이라고 안 그렇겠습니까마는. 한동안은 비슷한 일만 생기면 또 이러쿵저러쿵 꺼내질 게 뻔합니다.
 
2.
예전 이맘때면 중국에서 불어오는 황사가 단골 뉴스였지요. 하지만 지금은요, 철 가리지 않고 발생하기 때문인가요. 황사보다는 미세먼지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어제만 해도 그렇습니다. 대낮인데도 어둑어둑하고,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 같았던 날씨가. 글쎄 미세먼지 때문이었다고 하네요.
 
정부가 갑작스레 미세먼지 대책으로 경유 값 인상을 솔솔 흘리고 있습니다. 물론 배출가스 기준을 충족한 차량으로 '저공해차량인증제'를 통해서이긴 했지만요. 환경개선부담금 유예, 통행료 감면, 환승주차장 및 공영주차장 할인 등을 통해 디젤차 인기를 주도할 때는 언제더니 말입니다.
 
그러니 경유차 운전자들이 뿔날 수밖에요. 더구나 담배 값 인상 때 한 차례 경험도 했습니다. 값을 올려봐야 그때뿐, 결국 세금 더 걷으려는 꼼수 아니냐며 반발하고 있는 겁니다. 또 무슨 일이 생기면 왜 그런지를 찾기보다는 말입니다. 없애버리거나 혹은 엉뚱한 곳에서 원인을 찾아왔으니 더 그렇습니다.
 
3.
정부가 역사교과서를 국가가 발행하는 단 하나의 교과서로 가르치겠다고 합니다. 또 역사교육 강화라는 목적으로 한국사를 수능필수과목으로 지정했구요. 취임 때부터 단골로 등장했던 ‘비정상의 정상화’가 역사교육에도 등장한 것인데요. ‘올바른 역사의식’과 ‘자랑스런 현대사’를 국정화와 수능으로 하겠다는 겁니다.
 
역사에서 ‘올바른’이라는 말을 쓸 수 있다는 생각부터 대단하다고 생각됐지만요. 그동안 교육부에서 검정해왔던 교과서를 이제와 '비정상'으로 내모는 지 당체 이해가 가질 않습니다. 또 ‘역사지식’말고도 외워야할 게 많은 아이들에게 뭘 더 외우라고 하는 건가요. 쿠데타로 권력을 빼앗은 아버지가 ‘자랑스런 현대사’라고 말하고 싶은 건 아닌 건가요.
 
'안중근'이 어떻게 생겼고 어렸을 적 이름이 '안응칠'이라는 것을 아는 것과 역사의식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더구나 내가 아니 너도 반드시 알아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또 그걸 강요할 수도 없는 것이구요. 역사적 사실을 줄줄 꿰어 차고 있다고, 수능 '1등급'이 수능 '6등급'보다 역사의식이 반드시 높은 것 또한 아닙니다.
 
4.
하다하다 이젠 식당에서 구어 주는 고등어에 돼지고기까지 미세먼지 주범으로 내몰고 있습니다. 하기야 정부로서는 공장과 화력발전소로 불똥이 튀는 걸 막아야 하니 무슨 얘긴들 못하겠습니까. 이쪽에서 때리고 저쪽에서 또 때리고. 기업 눈치 보랴 여론 눈치 보랴 방향을 잃는 건 당연합니다.
 
또 생색내기 대책입니다. 노후 화력발전소를 폐쇄하거나 LNG로 대체하겠다는데, 지금 만들고 있거나 만들 예정인 석탄발전소 설비용량만 그것에 6배에 달하니 그렇습니다. 또 중국발 미세먼지 탓은 하면서도 함께 대책을 만들어보자는 얘기는 없고, 나머지 미세먼지 절반을 뿜어내는 국내 기업과 공장에 대해서는 아예 무대책이니 말입니다.
 
분명 화력발전소보다야 못하겠지요. 또 공장 굴뚝보다야 낮을 겁니다. 하지만 경유차 역시 미세먼지를 내뿜으며 질주합니다. 정도만 다를 뿐이지요. 그러니 이런 저런 이유를 붙인다고 해도 말입니다. 석유 한 방울 나지 않는 나라에서 과시욕에 경쟁하듯 굳이 그렇게 큰 차들을 끌고 다닐 필요가 있을까요.
 
5.
오래 전, 한 사람은 월남 파병에는 '반항'하지 못하면서 갈비에 기름덩어리가 나왔다고 '분개'하는 옹졸한 자신을 시로 옮겼습니다.
 
지금, 우리는 역사교과서 국정화에는 '반항'하지 못하면서 안중근 의사를 몰라봤다고 '분개'하고 있는 건 아닐까요.
 
지금, 우리는 지구를 먹고 자라는 자본주의에는 '반항'하지 못하면서 세금 못 내겠다, '분개'하고 있는 건 아닐까요.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 김수영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王宮)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오십 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한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 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이십 원을 받으러 세 번씩 네 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옹졸한 나의 전통은 유구하고 이제 내 앞에 정서(情緖)로
가로놓여 있다
이를테면 이런 일이 있었다
부산에 포로수용소의 제14야전병원에 있을 때
정보원이 너어스들과 스폰지를 만들고 거즈를
개키고 있는 나를 보고 포로경찰이 되지 않는다고
남자가 뭐 이런 일을 하고 있느냐고 놀린 일이 있었다.
너어스들 옆에서
 
지금도 내가 반항하고 있는 것은 이 스폰지 만들기와
거즈 접고 있는 일과 조금도 다름없다
개의 울음소리를 듣고 그 비명에 지고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놈의 투정에 진다
떨어지는 은행나무잎도 내가 밟고 가는 가시밭
아무래도 나는 비켜서 있다 절정(絶頂) 위에는 서 있지
않고 암만해도 조금쯤 옆으로 비켜서 있다
그리고 조금쯤 옆에 서 있는 것이 조금쯤
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
이발쟁이에게
땅주인에게는 못하고 이발쟁이에게
구청직원에게는 못하고 동회 직원에게도 못하고
야경꾼에게 이십 원 때문에 십 원 때문에 일 원 때문에
우습지 않으냐 일 원 때문에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
정말 얼마큼 적으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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