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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동군은 일본이 대륙 침략을 위해 만주에 설치한 부대입니다. 1904년 러일전쟁에서 제정러시아를 이긴 후 관동주(러시아가 청나라에게 조차지(租借地)로 빼앗은 랴오둥 반도 남단 지역) 방위를 위해 배치했던 수비대가 그 시초입니다.
 
그 후 일본은 1918년에 이 수비대를 독립부대로 개편 증강하는데요. 이것이 바로 관동군입니다. 당시에는 독립수비대 6개 대대와 일본 본토에서 2년 단위로 교대 파견되는 1개 사단으로 구성했다고 합니다.
 
관동군 병력은 중일전쟁을 거치면서 점차 늘어갑니다. 특히 나치 독일이 소련을 침공한 후에는 일본, 조선, 대만에서 병력을 동원해 75만 여명까지 늘었습니다. 하지만 미국 참전 후 본토와 동남아시아 방어를 위해 관동군 병력을 빼기 시작합니다.
 
결국 소련군 참전이 우려되던 1945년, 만주에 거주하는 일본인 남자 18세에서 45세까지 총 20만 명을 소집합니다. 한때 소련을 정복하기 위한 정예군대로까지 불렸던 관동군이 크게 약화된 겁니다.
 
2.
연합국이 반격을 해오면서 전황이 불리해지자 일제는 1943년 징병제를 실시합니다. '성전(聖戰)'에 참여할 영광스런 기회라는 선전은 총알받이를 위한 강제 동원 수단에 불과했습니다. 결국 1944년과 45년 만 20세가 되는 조선 청년들이 징병으로 끌려가기 시작합니다.
 
신체검사와 짧은 군사훈련을 받은 조선 장정들은 광활한 지역으로 배치됐습니다. '반소매 군복을 입으면 남방으로, 긴소매면 북방으로' 말입니다. 만주도 예외일 수가 없습니다. 수많은 조선인들이 관동군에 편입됐던 겁니다.
 
일본이 항복을 선언하기 직전이던 8월 9일, 대일전(對日戰)에 뛰어든 소련군은 쿠릴열도, 사할린, 만주 등지에서 60여만 명을 포로로 잡았습니다. 물론 그 포로들 속에는 관동군 소속 조선 청년들도 포함됐습니다.
 
이들은 모두 일본 군인으로 간주됐습니다. 군사학교를 졸업하고 장교로 복무했던 제국주의 군인들 말고, 징병으로 끌려온 청년들까지 말입니다. 시베리아 등지로 끌려간 조선인들은 3, 4년간에 걸친 중노동 후에야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3.
'포로'들은 모스크바와 블라디보스토크를 잇는 시베리아 철도를 따라 각처로 흩어졌습니다. 몸이 쇠약해져 있던 사람들이 이 열차 안에서 첫 희생자가 됐습니다. 수용소시설은 열악했으며 혹한, 기아, 중노동이라는 '시베리아 3중주'로 떼죽음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조선 청년들은 일본군 포로에 비해 더욱 고달픈 수용소 생활을 해야만 했습니다. 일본군 계급 질서가 수용소 안에서 그대로 유지됐기 때문입니다. 극소수 장교와 지원병을 제외하고 대부분 말단이었기에 온갖 궂은일을 해야만 했던 겁니다.
 
1948년 12월이 돼서야 조선인 '포로'들은 귀향할 수 있었습니다. 그해 8월과 9월 남쪽과 북쪽에 각기 다른 정부가 차례로 수립됐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일본인 귀환자들이 자국선을 타고 돌아간 것과 달리 조선인들은 소련 화객선을 타야만 했습니다.
 
출항을 알리는 뱃고동 소리가 울리자 생존자들은 '시베리아 대지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시베리아 에니세 물결아 잘 있거라 자작나무 숲아 네 품에 자란 어린이들은 내 본향 찾아 떠나련다 시베리아여 우리들의 자유와 청춘, 보람을 심어주던 정든 고향 시베리아".
 
4.
류학구는 일제 패망을 닷새 앞둔 1945년 8월 10일 관동군에 입대했다가 소련군에 '포로'가 됐습니다. 사회주의 사상에 공명한 그는 조국으로 돌아오지 않고 소련 잔류를 택했습니다. 비록 고향에 있는 어머니 안부가 마음에 걸렸지만요.
 
오웅근은 1925년 젠다오間島 지방 쉬시엔石峴 부근에서 태어났습니다. 8월 초 소집 영장을 받고 하이라얼로 갔던 그는 세 군데나 총상을 입고 포로가 됩니다. 시베리아 포로 생활이 끝난 후 북으로 돌아와 부친과 만났으나 모친이 남아 있는 쉬시엔으로 돌아갔습니다.
 
흥남여고에 임시 수용됐던 억류자들은 고향 땅으로 돌아갔습니다. 먼저 옌변延邊 등 만주 출신 수백 명이 풀려났고, 이어 북쪽에 연고지가 있는 사람들이 돌아갔습니다. 남쪽 출신 귀환자들은 거리에 따른 여비를 지급 받고 제일 마지막에 떠났습니다.
 
이창석은 1944년 1월 10일 만주에서 입대했다 '포로'가 됐습니다. 이후 수용소에서 도망쳐 나왔으나 붙잡혀 15년 중노동형을 받았습니다. 8년간 억류생활을 마친 이창석이 도착한 곳은 한반도가 아니라 일본 땅이었습니다.
 
5.
흥남여고에 머물러 있던 귀환자들은 곧 고향에 돌아가도록 허용됐습니다. 먼저 옌벤 등 만주 출신 수백여 명이 풀려났고 이어 북쪽에 연고를 둔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물론 부친이 인민위원회 간부였던 사람은 이보다 전에 나올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임시 숙소를 떠난 사람들은 남쪽 출신들이었습니다. 신현택의 증언에 따르면 고향으로 가는 거리에 따라 북쪽 정부로부터 여비를 받았다고 합니다. 또 다른 생존자들 말에 따르면 출신 지역별로 묶어 38선을 넘었다고 합니다.
 
정읍 출신 정용환은 포로용 방한복을 바꿔 입은 바람에 공작원 의심을 받게 되고 급기야 전기 고문까지 당했습니다. 평양이 고향이었던 이병주는 가족이 모두 포항으로 내려갔다는 얘기를 전해 듣고 남으로 내려왔으나 특별한 지령을 받은 게 아니냐는 추궁을 받았습니다.
 
월경 후 연행된 사람들은 인천 귀환자들은 송현동에 있는 전재민(戰災民)수용소로 옮겨졌습니다. 이때 귀환자들은 정용환과 이병주처럼 경찰서 혹은 미군 극동군 사령부에서 조사를 받아야만 했습니다. 때론 북쪽에서 받은 여비가 문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6.
소설이 아닙니다. 한마디로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란 겁니다. 영화에서나 나올법한 삶. '파란만장', '격동', '비극'이란 말들이 결코 은유가 아닌 삶, 직접 겪어보지 않았다면 감히 상상할 수조차 없는 삶들이 말입니다.
 
남쪽으로 귀환한 사람들이나 북쪽에 남은 사람들. 혹은 남도 북도 아닌 일본, 만주, 소련으로 간 사람들. 이들은 귀환 이후에도 순탄한 삶을 살수 없었습니다. 물론 지금까지도 일본, 소련 어느 곳에서 '배상'은커녕 '사고'도 받지 못했습니다.
 
일본이 항복을 선언한 지도 65년이 넘었습니다. 한국전쟁은 끝난 지 55년이 지났습니다. 반세기도 넘게, 세 세대가 돼서야 이들이 겪은 모진 삶들이 겨우 세상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것도 역사 연구자도 아닌 한 현직 기자로부터 말입니다.
 
일본에선 평화헌법을 개정하겠다는 사람이 총리로 있습니다. 우리는 만주군관학교와 일본육사를 졸업 한 관동군 출신 아버지 후광을 업은 딸이 대를 이어 대통령입니다. '자학사관'을 극복하자는 일본, '올바른 역사'를 가르쳐야 한다며 국정교과서를 만드는 한국.
 
일본 탓만 하기에는 되레 '민족주의'라는 덫에 갇힐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전후 천황제를 유지하면서까지 전범 처리에 소극적이었던 미국 탓을 해야 할까요. 아니면 일본 침략 전쟁에 협력한 추축국 진영으로 치부해 조선인들을 억류한 소련 탓을 할까요.
 
맞습니다. 독립군을 토벌하던 간도특설대 장교였던 이가 국군 원로로 받들어지고 있습니다. 일본 군함은 군국주의이자 제국주의의 상징인 '욱일승천기'를 버젓이 달고 우리 항구에 들어옵니다. 여태껏 청산하지 못한 '잔재'들을 안고 있는 우리 탓이 더 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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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6/28 11:56 2016/06/28 11:56
1.
대세라던 인기 그룹 멤버들이 안중근 의사를 몰라본 일로 시끌벅적합니다. 급기야 SNS에 사과 글을 올린데 이어 눈물까지 흘렸습니다. 하지만 논란은 쉽게 가라않지 않았는데요. 이번엔 앨범 발표회를 중계하던 포털 앱이 문제였습니다. '안중근'을 금칙어로 설정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미 찍힌 '낙인'에 겹쳐 반응이 싸늘하기만 합니다.
 
반면 늘 '바보'라는 소리를 들었던 한 연예인은 어렸을 적 안중근 이름을 알고 있다는 이유로 단번에 '천재' 소리를 들었습니다. 더구나 묘하게도 엇비슷한 때에 이런 일이 생겼으니까요. 비교당하는 건 기본이었습니다. 누군 역사의식 없는 요즘 아이돌로, 누군 '역사의 신'으로까지 등극하고 있는 겁니다.
 
그 밖에 1932년 상하이 홍커우 공원에서 도시락 폭탄을 던진 독립운동가를 묻는 질문에 안창호를 택했던 사람. 초대 대통령으로 이수만을 외쳤던 이. 급기야 주말 예능프로그램에서마저 '조선무역팀', '칠공주' 같은 답들을 써낸 아이돌들까지. 뭐, 이번 일이라고 안 그렇겠습니까마는. 한동안은 비슷한 일만 생기면 또 이러쿵저러쿵 꺼내질 게 뻔합니다.
 
2.
예전 이맘때면 중국에서 불어오는 황사가 단골 뉴스였지요. 하지만 지금은요, 철 가리지 않고 발생하기 때문인가요. 황사보다는 미세먼지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어제만 해도 그렇습니다. 대낮인데도 어둑어둑하고,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 같았던 날씨가. 글쎄 미세먼지 때문이었다고 하네요.
 
정부가 갑작스레 미세먼지 대책으로 경유 값 인상을 솔솔 흘리고 있습니다. 물론 배출가스 기준을 충족한 차량으로 '저공해차량인증제'를 통해서이긴 했지만요. 환경개선부담금 유예, 통행료 감면, 환승주차장 및 공영주차장 할인 등을 통해 디젤차 인기를 주도할 때는 언제더니 말입니다.
 
그러니 경유차 운전자들이 뿔날 수밖에요. 더구나 담배 값 인상 때 한 차례 경험도 했습니다. 값을 올려봐야 그때뿐, 결국 세금 더 걷으려는 꼼수 아니냐며 반발하고 있는 겁니다. 또 무슨 일이 생기면 왜 그런지를 찾기보다는 말입니다. 없애버리거나 혹은 엉뚱한 곳에서 원인을 찾아왔으니 더 그렇습니다.
 
3.
정부가 역사교과서를 국가가 발행하는 단 하나의 교과서로 가르치겠다고 합니다. 또 역사교육 강화라는 목적으로 한국사를 수능필수과목으로 지정했구요. 취임 때부터 단골로 등장했던 ‘비정상의 정상화’가 역사교육에도 등장한 것인데요. ‘올바른 역사의식’과 ‘자랑스런 현대사’를 국정화와 수능으로 하겠다는 겁니다.
 
역사에서 ‘올바른’이라는 말을 쓸 수 있다는 생각부터 대단하다고 생각됐지만요. 그동안 교육부에서 검정해왔던 교과서를 이제와 '비정상'으로 내모는 지 당체 이해가 가질 않습니다. 또 ‘역사지식’말고도 외워야할 게 많은 아이들에게 뭘 더 외우라고 하는 건가요. 쿠데타로 권력을 빼앗은 아버지가 ‘자랑스런 현대사’라고 말하고 싶은 건 아닌 건가요.
 
'안중근'이 어떻게 생겼고 어렸을 적 이름이 '안응칠'이라는 것을 아는 것과 역사의식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더구나 내가 아니 너도 반드시 알아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또 그걸 강요할 수도 없는 것이구요. 역사적 사실을 줄줄 꿰어 차고 있다고, 수능 '1등급'이 수능 '6등급'보다 역사의식이 반드시 높은 것 또한 아닙니다.
 
4.
하다하다 이젠 식당에서 구어 주는 고등어에 돼지고기까지 미세먼지 주범으로 내몰고 있습니다. 하기야 정부로서는 공장과 화력발전소로 불똥이 튀는 걸 막아야 하니 무슨 얘긴들 못하겠습니까. 이쪽에서 때리고 저쪽에서 또 때리고. 기업 눈치 보랴 여론 눈치 보랴 방향을 잃는 건 당연합니다.
 
또 생색내기 대책입니다. 노후 화력발전소를 폐쇄하거나 LNG로 대체하겠다는데, 지금 만들고 있거나 만들 예정인 석탄발전소 설비용량만 그것에 6배에 달하니 그렇습니다. 또 중국발 미세먼지 탓은 하면서도 함께 대책을 만들어보자는 얘기는 없고, 나머지 미세먼지 절반을 뿜어내는 국내 기업과 공장에 대해서는 아예 무대책이니 말입니다.
 
분명 화력발전소보다야 못하겠지요. 또 공장 굴뚝보다야 낮을 겁니다. 하지만 경유차 역시 미세먼지를 내뿜으며 질주합니다. 정도만 다를 뿐이지요. 그러니 이런 저런 이유를 붙인다고 해도 말입니다. 석유 한 방울 나지 않는 나라에서 과시욕에 경쟁하듯 굳이 그렇게 큰 차들을 끌고 다닐 필요가 있을까요.
 
5.
오래 전, 한 사람은 월남 파병에는 '반항'하지 못하면서 갈비에 기름덩어리가 나왔다고 '분개'하는 옹졸한 자신을 시로 옮겼습니다.
 
지금, 우리는 역사교과서 국정화에는 '반항'하지 못하면서 안중근 의사를 몰라봤다고 '분개'하고 있는 건 아닐까요.
 
지금, 우리는 지구를 먹고 자라는 자본주의에는 '반항'하지 못하면서 세금 못 내겠다, '분개'하고 있는 건 아닐까요.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 김수영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王宮)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오십 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한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 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이십 원을 받으러 세 번씩 네 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옹졸한 나의 전통은 유구하고 이제 내 앞에 정서(情緖)로
가로놓여 있다
이를테면 이런 일이 있었다
부산에 포로수용소의 제14야전병원에 있을 때
정보원이 너어스들과 스폰지를 만들고 거즈를
개키고 있는 나를 보고 포로경찰이 되지 않는다고
남자가 뭐 이런 일을 하고 있느냐고 놀린 일이 있었다.
너어스들 옆에서
 
지금도 내가 반항하고 있는 것은 이 스폰지 만들기와
거즈 접고 있는 일과 조금도 다름없다
개의 울음소리를 듣고 그 비명에 지고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놈의 투정에 진다
떨어지는 은행나무잎도 내가 밟고 가는 가시밭
아무래도 나는 비켜서 있다 절정(絶頂) 위에는 서 있지
않고 암만해도 조금쯤 옆으로 비켜서 있다
그리고 조금쯤 옆에 서 있는 것이 조금쯤
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
이발쟁이에게
땅주인에게는 못하고 이발쟁이에게
구청직원에게는 못하고 동회 직원에게도 못하고
야경꾼에게 이십 원 때문에 십 원 때문에 일 원 때문에
우습지 않으냐 일 원 때문에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
정말 얼마큼 적으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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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6/13 23:18 2016/06/13 23:18
작가 박완서의 유년기는 해방과 한국전쟁이라는 격동의 한국 현대사 속에서 보냈습니다. 그 이야기는 "순전히 기억력에만 의지해서" '장편소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에 온전히 다 그려져있구요. 후편 격이라 할 수 있는 <그 산이 정말 거기에 있었을까>와 함께 읽으면 작가의 말처럼 "자료로서 정형화된 것보다 자상하고 진실 된 인간적인 증언"을 올곧게 마주할 수 있으니 꼭 소설이라고만 할 수 없겠습니다. 그러니 스스로 '자화상'과 같은 글이라고 밝히고 있음에도 어린 박완서가 겪은 혼란과 파탄은 동 시대를 살아왔던 모든 이들의 아픔입니다. 물론 좌익에 몸담기도 했던 오빠가 마주해야 했던 참혹함 역시 그렇습니다.
 
오빠는 거의 한 트럭분은 됨직한 죄수들을 거느리고 돌아왔다. 죄수라고 했지만 머리를 빡빡 깎고 죄수복을 입고 있어서 그렇게 부른 것이지, 그들의 표정은 훈장을 주렁주렁 단 개선장군보다 더 당당하고 위엄과 영광에 넘치고 있었다. 그들에 비해 평상복을 입은 오빠가 되레 자기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하나도 이해 못하는 사람처럼 맹하니 무표정했다. 그들 중 하나가 댓돌 아래서 역시 표정이 바랜 채 우두망찰하고 서 있는 엄마를 사뿐히 안아올려 좌정을 시키고 큰절을 하자 모두 따라했다. 엄마도 그제야 그를 알아보고 그의 손을 잡고 그간의 고생을 위로했지만 한번 바랜 핏기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박완서, p. 238
 
우두망찰하다: 갑자기 닥친 일에 정신이 얼떨하여 할 바를 모르다.
 
처음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반응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곧 공천파동과 "0박"논란이 참패를 불렀다는 얘기가 나오고. '정권 심판론'이 '국회 심판론'을 우세했다는 주장, '호남홀대론'이 3당을 만들었다는 말들이 넘쳐납니다. 이유야 어찌됐건 총선 결과는 여소야대(與小野大), 박근혜 정부와 새누리당의 일방독주에 대한 일침입니다. 하지만 갑자기 닥친 일에 정신이 얼떨하여 할 바를 모르고 있는 새누리당은 그렇다 쳐도. 더불어민주당이나 국민의당, 정의당들은 대체 뭡니까. 아무리 20대 국회가 개원하지 않았다고 해도 말이지요. 댓글이나 다는 국정원에 무소불위 권력을 쥐어준 법도 폐기해야 하고. 세월호 진실을 건져내기 위한 법도 개정해야 하는데. 아니 전경련에 청와대, 국정원까지 연루됐다는 의혹이 연일 제기되고 있는 '어버이연합게이트'를 철저히 파헤쳐야 하는데 그저 우두망찰하고만 있으니요. 그러니 말입니다. '불통' 대통령은 여전히 제 갈 길을 가는 것이겠고요. 국정원은 법 위에 군림하려는 것이겠지요. 밤새 개표방송을 보며 맘 졸였던 국민들, 풀리던 속이 다시 타들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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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11 11:56 2016/05/11 11:56

첫째 날, 하늘빛 따라 눈부시게 파란 바닷길(2015년 5월 25일) 

 

사람들은 서울 광화문에서 정(正) 동쪽에 있다는 정동진을 어떻게 기억할까. 드라마 ‘모래시계’에 잠깐 나왔다 지금까지도 그 여배우 이름으로 불리는 소나무가 있는 곳? 새해가 되면 누구랄 것도 없이 해 뜨는 것 보러 가는 곳? 세상에서 그 어느 곳보다 바다가 가까운 역(驛)? 젊은 시절 밤기차 타고와 벌건 눈으로 깡소주를 마시며 새벽을 맞이하던 곳?

 

작년 이맘 때 한 청년이 이곳에서 목숨을 끊었다. ‘해가 뜨는 곳’에서, ‘빛을 잃지 않고 내일도 뜨는 해처럼’, 함께 했던 사람들이 승리하길 기원하면서. 그 청년은 자신을 이곳에 뿌려 달라 했다. 하지만 유언을 배반하도록 부추긴 자본에 의해 어딘지도 모를 곳에 뿌려졌고. 그렇게 정동진에는 자본이 세운 거대한 모래시계만 남았다. 

 

씁쓸한 모래바람이 산 쪽으로 휘몰아치는 정동진을 뒤로하고 산길로 접어드는데. 이 산길, 만만치가 않다. 헉헉 숨을 참고 뒤돌아 멀리 바다를 볼 땐 좀 낫지만. 저기가 끝이겠지 싶은 고갯길이 계속 이어지고. 이건 숫제 등산이다. 그나마 등에 짊어진 것도 없고, 어느 정도 예상을 했으니 망정이지. 만만하게 봤다간 딱 큰 코 닥치게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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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가파른 산길을 올라서보니 높이 올라온 만치 보이는 풍경이 장관이다. 또 산길을 다 내려와 만나는 심곡항 바다색은 눈이 다 부시다. 뭐, 이제 바닷길을 걷겠거니 싶었는데 또 숨이 꼴딱 넘어가는 고개를 넘긴 하지만. 그 정도야 아까 지나온 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니 보상치곤 꽤나 크다.

 

헌화로(獻花路)는 신라시대 강릉 태수로 부임한 순정공(純貞公)과 그 부인, 그리고 한 노인이 얽힌 일화로부터 붙여졌다고 한다. 예컨대 순정공 부인이 절벽에 핀 철쭉을 탐냈고, 소를 끌고 가던 노인이 위험을 무릎 쓰고 꽃을 꺾어 바치면서 부른 노래가 헌화가(獻花歌)라는 설(說)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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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여차하면 바닷물이 넘쳐 길을 덮치는 헌화로는 옥계면 낙풍리에서 정동진리 정동진역 삼거리까지 이어진다. 그러고 보니 정동진에서 산길을 타는 바우길만 아니었다면 이 헌화로를 따라 쭉 왔을 것을. 때론 에둘러가는 길이 아기자기하고 색다른 볼거리를 주긴 해도. 이번처럼 때 아닌 고생길이기도 하다.

 

여름 피서철에는 북적이는 차들로 몸살을 앓았겠지만 다행히 지나는 차도 드물다. 덕분에 심곡에서 금진해변까지 헌화로를 제대로 걸을 수 있다. 해안 단구와 해안 절벽이 만들어내는 다양한 바위들, 떡두꺼비바위, 구선암, 괴면암, 합궁골, 저승골, 백두대간, 해룡신전, 공룡가족 등을 차례로 둘러보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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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진항에서 출출한 배를 채우고 나니 시간이 빠듯해 보인다. 옥계까지는 해변길과 솔숲길, 아스팔트길을 차례로 지나야하지만 평지길이라 해 넘어가기 전에 갈 것도 같고. 하지만 곧 금진초 앞에서 시내로 돌아가는 버스를 기다릴 수밖에 없다. 좀 전에 먹은 음식에 문제가 있었나. 배가 살살 아파오는 게 탈났나보다. 딴 건 몰라도 이건 수가 없기 때문이다.

 

 

둘째 날, 바우길 안녕(2015년 5월 30일)

 

분명 비가 오질 않는다고 했는데 오락가락한다. 버스 안에서도 그랬고 종점인 여기 금진초등학교 앞도 그렇다. 비 핑계 삼아 어디 먹을 데 없나 찾아 두리번 두리번. 다행히 지난 번엔 문을 닫았던 바로 앞 카페가 문을 열었다. 떼 지어 오토바이 타는 사람들이 입구에서 왁자지껄하지만 재고자시고 할 것 없다. 일단 문 열고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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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이 요기를 하고 나니 요란한 오토바이들도 안 보이고. 하늘을 보니 잔뜩 흐르긴 해도 비는 그친 듯. 솔숲 길로 접어들어 발걸음을 빨리 한다. 거리상으로 따지자면 넉넉잡아 한 시간 반이면 될 듯해도 언제 또 비가 올지 모르니. 게다가 얼마 전 오염물질 유출로 크게 문제가 됐던 곳이 코앞이라. 더 머물러 있으라고 해도 서둘렀을 터.

 

오랜만에 갓길도 좁은 2차선 도로를 걷는다. 때맞췄는지 잠잠하던 하늘에 비가 다시 내리고. 산만한 덤프트럭들은 속도도 줄이지 않은 채 질주한다. 급기야 도로 공사로 한 차선이 없어지고 그나마 있던 갓길도 없다. 그래도 지난 번 해질 녘에 멈추길 잘했지. 어둑어둑한 시간에 여길 지났을 생각을 하니 아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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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옥계IC를 지나면서부터는 동네 마실 나온 듯. 농로를 따라 이제 막 모내기한 논 사이를 걷기도 하고. 한참 잘 여문 마늘밭과 이제 막 모종을 옮겨 심은 옥수수밭도 곁을 지나고. 옥계초등학교 옆으로 난 길을 놓치긴 했어도, 이제 딱 한 시간 지났으니 딱 여기까지다. 그래도 바우길이 이제 끝이다 싶으니, 좀은 아쉽다.

 

 

* 열여덟 번째 여행에서 걸은 길

헌화로 산책길을 마지막으로 바우길 걷기는 끝이다. 바우길 9구간 헌화로 산책길은 12.8km로 그다지 길지 않지만 정동진에서 심곡항까지는 등산에 가까운 길을 걸어야 하기 때문에 넉넉히 시간을 잡아야한다. 첫날은 등산을 한데다 여기서 쉬고 저기서 쉬고, 밥 먹고 어쩌고 하느라 5시간 정도 걸렸고 다음엔 동네 산보 하듯 2시간 정도 걸었다.

 

 

* 가고, 오고

강릉 시내버스 노선(http://www.gangneung.go.kr/sub/bustime/main.jsp?pp=sub01) 참고.

 

 

* 잠잘 곳, 먹을 곳

정동진에는 너무 복잡하다 싶을 만치 식당도, 숙박할 곳도 많다. 이후 심곡항, 금진항, 옥계로 이어지는 길에는 제법 맛집들이 있으니 찾아가는 재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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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4/07 14:43 2016/04/07 14:43

두동지다 : 앞뒤가 서로 모순이 되어 맞지 아니하다.

 
국회에서 합의한 법안을 놓고 여당 원내대표에게 “심판”이란 말까지 해가며 호통을 치는 대통령과 “중앙행정기관의 장은 대통령령 등 행정입법이 법률에 위배되거나 법률의 위임절위를 일탈한다는 등의 의견이 제시된 때에는 정당한 이유가 없는 한 이에 따르도록 함”을 주요 내용으로 한 국회법 개정안을 공동발의 했던 사람은 다른 사람인가요?
 
유가족과 만난 자리에서 “무엇보다 진상규명에 있어서 유족 여러분들이 여한이 없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던 대통령과 세월호 특별조사위원회 활동을 무력화시킬 시행령을 만든데 이어 예산 집행까지 하지 않아 그나마 출범한 특조위가 제대로 된 활동을 할 수 없게 만들고 있는 정부를 이끌고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인가요?
 
취임 일 년도 되지 않아 두동진 말을 한 게 어디 한 두 번이었어야지요. 기초연금에서 누리과정, 경제민주화까지. 그러더니 사면권 남용을 거부하겠다는 말을 뒤집고 특별사면을 하겠답니다. 메르스로 떨어진 지지율 때문인가요, 세월호특별법시행령 때문인가요. 이렇게 앞뒤가 서로 모순이 되어 맞지 아니하는 사람을 대체 언제까지 두고 봐야 하는지 답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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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7/17 12:00 2015/07/17 12: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