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곳곳에 현수막이 요란합니다. 이제 곧 지방선거니까요. 시장이든 도지사든, 지방의회든 교육감이든 꽤 짭짤한 보수와 각종 이권에 개입할 여지가 많아서인지(선거 뒤 뇌물 수수로 처벌 받거나 직을 잃는 사람이 한 둘이 아니니 그렇습니다.) 선거가 거듭될수록 나오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래서일까요. 한 동네에서도 각 당(黨)마다 나오는 후보들이 여러 명입니다. 현수막 가게가 때 아닌 호황인 이유지요.
 
2.
선거라는 것을 하고 나서부터 말입니다. 지금까지 표를 던진 사람이 당선이 된 경우가 있었나, 되돌아보면요. 6번의 대통령선거와 또 6번의 지방선거까지. 두 번의 교육감 선거만은 분명한데요. 나머지는 기억이 없습니다. 손에 무슨 신기라도 있는 건가요. 어쩌다 산 복권도 5등 한 번 안 되는 것처럼. 아니, 꼴등이나 안 하면 다행입니다. 개표방송 본지도 오래됐으니 더 말해 뭣하겠습니까.
 
3.
선거를 흔히 민주주의의 꽃이라고 합니다. 선거라도 제대로 하자며 피 흘리며 싸운 분들을 생각하면 당연히 그래야 하겠는데. 지난 경험으로는 선뜻 동의가 되질 않습니다. 물론 처음부터 승자독식 문제까지 생각했어야 했다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그땐 체육관 대통령 말고 우리 손으로 뽑아보자, 시장도 군수도 민의를 거스르지 말라는 의지를 반영한 것이었으니까요.
 
4.
국회의원은 한 선거구에서 한 명을 선출합니다. 경상도에는 이당, 전라도에는 저당, 충청은 이저당, 지역주의가 여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광역의원과 기초의원은 한 선거구에서 한 명이나 두 명을 뽑습니다. 뭐 세 명, 많게는 네 명까지 의원이 되는 선거구도 있지만요. 그러니 늘 빨간 색 아니면 파란 무늬, 거대 양당만이 살아남게 됩니다. 1번과 2번. 기껏해야 3번 또는 4번. 그 이후는 그야말로 가뭄에 콩납니다.
 
5.
민주노동당이 처음 무상급식을 얘기했을 때 다른 정당들은 쳐다보지도 않았습니다. 기초연금도 그렇고 무상의료 역시 그랬습니다. 녹색당과 노동당이 내걸었던 기본소득은 또 어떻습니까. 지금은 그 누구도 허황되고 무책임한 공약이라며 대놓고 무시하진 못합니다. 선거연령을 낮추자는 것도 그렇고 핵발전소를 멈추자는 목소리도 헌법 개정안에 반영되고 고리 1호기는 아예 영구정지 되지 않았습니까.
 
6.
가만 생각해보니 찍은 사람이 당선되지 않아 기억이 없는 게 아닙니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아니 보수라고 자칭하는 이들이 처음 집권을 했던 10년 전쯤부터였을 겁니다. 더 이상 이대로 둬선 큰 일이 나도 여러 번 나겠다 싶은 겁니다. 그러니 어쩌겠습니까. 어차피 안 되는 사람보다는 저 사람은 꼭 떨어뜨려야 하니요. 늘 최선이 아닌 차악을 택하게 됐습니다.   
 
7.
그렇다고 민주정부라고 했던 때라고 뭐 크게 달랐겠습니까. 파병이다, FTA다, 비정규직법이다 해서 보수정권과는 얼마나 달랐나요. 하는 수 없어 다시 거리에 나서보았지만 달라지기는커녕. 이제 민주주의 사회가 됐으니 그런 ‘과격한 방법’은 버리고 선거로 의견을 표출하라는 점잖은 경고. 맞습니다. 우리 사회가 민주주의를 선거라는 제도에 가두는 순간부터 시작됐을지도 모릅니다.
 
8.
정당등록취소 요건을 완화했다는 얘기가 들립니다. 2번 국회의원 선거, 득표율이 1% 미만일 경우로 제한한답니다. 선심이라도 쓰듯 여야 합의로 ‘국회 헌법 개정 및 정치개혁특별위원회 정치개혁소위원회’를 통과했다는데요. 4년 전, ‘득표율 2% 미만’이 위헌이라는 결정을 받아낸 소수정당들로서는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본다고. 벌써부터 다음 이름 준비해야 하는 건 아니지 모르겠습니다.
 
9.
선거구 분할은 거리낌 없이 자행되고 있습니다. 한 선거구에서 4인까지 뽑을 수 있는 곳을 반으로 쪼개 2명씩 뽑는다는 겁니다. 이럴 땐 어찌나 짝짜꿍이 잘 맞는지요. 물론 대구와 같이 한 당이 영구 집권하는 곳 얘기가 아닙니다. 서울과 같은 곳마저 4인 선거구가 모두 2인 선거구로 나눠졌으니 하는 말입니다. 이럴 거면 헌법 개정안에 ‘비례성’원칙은 왜 넣었는지 모르겠습니다.
 
10.
민주주의의 꽃은 선거가 아닙니다. 선거는 주기적으로 한 번씩 투표소로 사람들을 불러내는 대의민주주의일 뿐입니다. 하지만 그것마저도 1번이나 2번만을 강요하는 대의민주주의라면요. 다른 견해를 가졌다고 배제해버리거나 머릿수로 결정해버리겠다는 것이라면 말입니다. 맞습니다. 민주주의를 제도 안에 가두는 것도 모자라 차악을 강요하는 사표민주주의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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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03 22:41 2018/04/03 22:41

사용자 삽입 이미지첫 핵발전소는 큰 저항 없이 들어섰습니다. 지금은 이름으로만 남은 ‘고리’. 주민들은 ‘공장’이, ‘전기’를 만드는 ‘공장’이니 하며 되레 기대를 갖기도 했습니다. 물론 터무니없는 헐값에 토지를 넘기고 쫓겨나야 했던 사람들은 그 살벌한 독재체제에서도 ‘물리적 저항’을 했습니다만. 영구 정지되는 마당에까지 ‘경제발전’이라는 담론으로 치장되고 있으니 그 당시엔 오죽했을까요. 무너져 내리고 해체된 건 해당 마을 뿐. ‘조국 근대화’와 ‘산업화’라는 이름아래 순응, 동원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핵무기 개발을 꿈꿨던 박정희가 월성에 중수로 핵발전소를 지으면서 주민들에게 했던 말은 ‘남북대치 상황’과 ‘국익’이었습니다. 경수로에 비해 최고 100배까지 삼중수소(저에너지의 베타선을 방출하며, 외부피폭 위험은 적으나 체내 흡수 시 같은 이유로 모든 방사선이 주변 세포에 즉시 흡수됨)가 만들어진다는 건 알려주지도 않았습니다. 발전소를 가동 하는 중에는 거의 매일 핵연료를 교체해야 한다는 사실은 지금도 아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체르노빌 사고 이후 반핵운동이 일어나자 정부는 의도적으로 ‘낙후된 지역을’ 공략하기 시작합니다. 인근에 도시가 없는 ‘인구가 과소한 지역’이면서 ‘고학력자가 적은 곳’을 핵발전소 부지로 선정하고는 ‘소득향상과 삶의 질 개선’이라며 꼬드기기 시작한 겁니다. 그렇게 ‘트로이 목마’가 울진에도 들어왔습니다. 하지만 목마가 트로이를 집어삼켰듯 ‘돈’이 지역사회를 집어삼키기 시작했습니다. 원래 핵발전소가 들어서 있는 지역에 핵 관련 시설을 짓고 또 짓고. 그렇게 신화리는 송전탑에 포위됐습니다.  

 

주민들은 핵발전소에서 나오는 폭발음에 일상적인 불안을 겪고 있습니다. ‘중고 부품’, ‘짝퉁 부품’, ‘위조된 품질보증서와 시험성적서’가 영광 5, 6호기에 집중적으로 사용됐는데... “이게 폭발을 한 건지, 그냥 트립인지 구분할 수가 없다는 거예요.” 발전소 주변 마을 도로는 고작 2차선입니다. 위급상황에서 주민들은 핵발전소가 정면으로 보이는 곳에 집결해야 한답니다. “사고 나면 피할 길이 뻔한데. 법성까지만 도망가고 홍농 사람들은 다 죽으란 말이나 마찬가지죠.” 

 

밀양 할매, 할배들은 콘센트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를 정확히 꿰뚫어봤습니다. “그것이 있음으로 해서 송전탑이 생기는 것도 알게 된” 겁니다. 그러다보니 ‘핵마피아 비리, 핵발전소 수출, 신규 핵발전소 건설 계획과 2차 에너지기본계획’은 당연스레 알게 됐습니다. ‘싸움 속에서 국가가 누구를 위해 일하는지 그 정체를 깨달’았으며, 이제는 ‘국가’의 빈자리에 ‘연대’라는 새로운 기반을 채워 넣고 있지요. 이 땅, 고통 받는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하고 있는 것입니다. 

 

<위험한 동거: 강요된 핵발전과 위험경관의 탄생>은 이상헌, 이보아, 이정필, 박배균 네 사람이 전기를 생산하는 핵발전소가 들어선 고리, 월성, 울진, 영광과 전기를 소비하는 대도시, 대공장을 연결하는 송전선로가 지나는 밀양에 사는 이들의 목소리를 담고 있습니다. 지도를 펼쳐놓고 이곳들을 찾아보면 금방 알겠지만. 달리 공통점이라고는 해안가에 있다는 것, 또 서울과 멀리 떨어진 것 외에. 맞습니다. 그들이 들려주는 이야기 역시 엇비슷합니다. 

 

국가가 나서서 전기 만드는 공장을 만든다는 것, 헐값에 토지가 수용되고 사람들은 쫓겨났다는 것. 집단 이주한 마을에서는 원주민의 마찰로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했다는 것, 발전소 건설 초기 반짝 건설 경기로 돈이 풀렸다는 것, 어장은 황폐화되고 농지는 쓸모없게 되면서 다시 핵발전소를, 또 다른 핵산업을 유치하는 악순환에 빠졌다는 것, 정치인들은 문제해결이나 대책 마련보다 자기 자리 지키기 위해 이용만 한다는 것 말입니다. 

 

밀양 송전탑 반대 싸움이 한창일 때 많은 사람들이 이런 이야기들을 했더랬습니다. “당신들은 전기 안 쓰느냐? 전기 없이 살아야 한다.” 그러면서 님비니 어쩌니 손가라질 하기 바빴지요. 하지만 조금만 시간을 내서 찾아보면요. “전력자급률 서울 3%, 경남 210%. 수도권 전기 공급 하느라 지방 사람은 죽어갑니다.”라는 광화문 앞 1인 시위 푯말이 틀린 말이 아니란 걸 알 수 있습니다. 아니요. 누군가의 고통을 대가로 값싼 전기를 쓰고 있다는 사실을 애써 눈감고, 외면하고, 모른 채 하는 겁니다.  

 

글 쓴 이들은 우리가 위험을 담보로 이룬 ‘근대적 발전의 달콤하게 소비할 수 있는 계급에 속하거나 그런 장소에 살고 있기 때문’에 외면하면서 살아가기 쉽다고 말합니다. ‘위험은 울리히 벡이 말하듯 공평하고 민주적으로 우리에게 객관적으로 존재하지만, 물리적으로 드러난 위험경관을 눈으로 확인하지 않는 경우에는 그 사실을 망각하고 살게 되는’ 것이랍니다. 해서 위험경관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확대해 한국 사회에 널리 퍼뜨리는 확성기 역할을 맡고자 이 책을 기획했다고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위험한 동거>는 확성기로써의 역할을 훌륭히 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핵발전으로부터 고통 받고 있는 주민들의 목소리를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듣는 사람이 준비가 돼 있지 않다면, 아니 여전히 듣기를 외면한다면요. 모처럼 열린 탈핵으로 가는 발걸음이 더딜 수 있습니다. 아니요. 핵 문명의 어둔 그림자가 다시 무대 위로 등장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경각심을 갖기 위해서라도 책 곳곳에 새겨 있는 목소리들에 더 귀 기울여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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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3/23 21:11 2018/03/23 21:11
스물한 번째 여행 - 해파랑길 ③ 건너뛰면서 추암에서 덕산까지 걷는 32구간
 
첫째 날, 삼척 시내를 앞두고 건너뛰기(2016년 7월 9일)
 
이번 구간은 꽤 길다. 게다가 삼척 시내를 앞두고는 산길이다. 시내를 거쳐 가는 길이야 장미공원도 둘러보고 둔치를 걸으니 좀 낫긴 하겠지만. 죽서루에서 오십천도 봐야겠고, 시립미술관도 구경해야 하니 하루에 걷긴 무리다. 해서 느긋이 집을 나선다. 터미널쯤에서 마치는 걸로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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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암은 지난번에 차 기다리면서 오래 있었던 곳인데도 또 한참을 있다 가게 한다. 그게 꼭 촛대바위 때문만은 아니고, 날씨가 좋아서인가. 바닷물에 비치는 모래가 어찌나 곱던지. 발까지 담그고 놀진 않았지만 ‘어이쿠 늦겠다’ 싶을 만큼 꽤 오래 머물렀다.
 
이름 때문일까? ‘후진’, 그것도 ‘작은 후진’이라는 이름말이다. 물론 바로 옆 추암보다야 덜 하긴 하지만. 한적한 곳에 자그마한 해변이라 호젓하게 놀긴 딱 좋은데, 뭣 때문인지 황량하기만 하다. 뭐 아직 피서철이 아니니 꼭 그렇지만은 않겠지만, 지금은 그렇다.
 
‘새천년도로’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해안길을 따라 비치조각공원을 지나고 나면 산길로 올라서야 한다. 헌데 별 생각 없이 숨을 헐떡이며 언덕을 오르다 느닷없이 짖어대는 개소리에 쫓겨 내려오고 만다. 뭐 해가 살짝 지고 있는 것 같아 걱정이라는 핑계로 산길을 건너뛰긴 했지만, 어찌나 놀랐던지.
 
이런 색도 다 있나 싶으리만치 다양한 장미가 있는 공원을 지나니 해가 저문다. 삼척 시내니 큰 문제는 아니겠지만. 아까 가슴 철렁하게 한 덩치 큰 개가 아니었음 밤길을 걸을 뻔 했겠다. 또 덕분에 산길도 피하고 오롯이 해안을 따라 걸었으니 몸도 가뿐하다. 이제 어디 맛난 밥만 먹으면 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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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날, 시내 천변길은 또 건너뛰고(2016년 9월 24일)

 
결국 죽서루엔 못 올라본다. 지난 번 걷기 후에 삼척 올 일이 있어 그때 시립박물관은 구경했고. 굳이 빙 돌아 올 필요가 없어 또 건너뛰어 오십천교부터 시작하니 그렇다. 날씨가 좋아 죽서루에서 보는 오십천이 볼 만하겠는데, 좀 아쉽다.
 
겉보기에도 흉물처럼 보이는데다 노동자 탄압으로 악명 높은 시멘트 공장은 먼지도 먼지거니와 어찌나 소음이 심하던지. 사진 찍는다고 가까이 가도 눈만 껌뻑이던 고양이 말고는 호젓하기 이를 데 없던 곳인데. 하는 수 없다, 서두르는 수밖에. 햇빛에 반짝이는 오십천이 눈에 밟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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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분이라는 마을을 지나니 오르막길이 시작된다. 지도를 보니 한재로 이어지는 옛 7번 국도인 듯하다. 오랜만에 만나는 아스팔트 고개니 마음을 다잡고 오른다. 9월도 보름이 지났건만 여전히 햇볕은 따가우니. 그나마 등 뒤로 있으니 다행이다. 바람도 선선히 불어오고. 
 
어디서고 탁 트인 곳에는 이름도 요상한 건물들이 들어서 있다. 한재공원 아래도 그렇다. 그 보기 좋은 풍경을 다 가로막고 서 있는 꼴이라니. 그것도 절벽에 콘크리트를 처발라 지어진 것들이다. 다행히  한재공원에는 이르니 한결 낫다. 산마루가 그늘도 만들고 눈에 거슬리는 것도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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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을 쉬었다 내리막길을 내려서는데 저 밑에서 얼굴 까만 아저씨 한 분이 올라오고 있다. 얘길 들어보니 부산에서 출발해 20여일 째 걷고 있는 중이란다. 부인은 같이 못 걷고 중간에서 기다린단다. 해파랑길을 걷는 사람을 만나는 것도 드문 일인데 완주하는 이라니. 힘내시라!!
 
맹방은 꽤나 큰 곳이다. 맹방초에서 잠깐 볼 일 보고 줄곧 걸었는데 상맹방, 하맹방. 한 시간은 족히 걸었다. 사람 많을 때 라면이야 여기저기 상점도 열었을 거고 그러면 화장실도 있었을 테지만. 한 달 도 더 전에 해수욕 끝났다는 안내문이 내걸렸으니 말 다했다. 겨우 해변에서 잠깐 쉬었다 간다.
 
삼척은 오랜 시간 핵발전소 문제로 정부와 싸우고 있는 곳이다. 덕봉대교 건너 팔이구공원은 그 싸움에서 이긴 삼척 시민들이 세운 기념탑이 있는 곳이고. 80년대부터 시작된 싸움이 지난 지방 선거로 끝을 맺나 싶은데 아직은 아닌가보다. 정부가 여전히 지정고시를 철회하지 않고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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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벌써 산 너머로 넘어갔고 노을마저 어둠으로 바뀌지만 발걸음이 쉽게 떨어지지 않는다. 부안에서였던가. 집집마다 골목마다 새겨있던 원전반대 그림들도 떠오른다. 탑에는 그 고되고 지난했던 과정들을 그저 담담히 담고 있을 뿐이겠지만 그걸 어찌 모른다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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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물한 번째 여행에서 걸은 길
추암에서 덕산까지 이어지는 32구간은 22.5km로 꽤 긴 편이다. 아침 일찍부터 걸으면 해 지기 전에 마칠 수 있겠지만 오며가는 시간 때문에 두 번에 나눠 걸었다.
 
* 가고, 오고
해파랑길 홈페이지(http://www.haeparanggil.org/?main)에는 구간별 교통편이 자세히 나와 있다.
 
* 잠잘 곳, 먹을 곳
삼척 시내를 벗어나 맹방으로 가는 길은 먹을 만한 곳이 없다. 편의점이나 동네 슈퍼도 없는데다 화장실은 여름 한철이 아니면 맹방초등학교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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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3/10 17:07 2018/03/10 17:07
첫째 날, ‘유두류록(遊頭流錄)’길?, ‘빨치산루트’길?(2016년 5월 5일)
 
여전히 반대방향으로 걷느라 들머리가 된 동강마을에서 늦은 점심을 합니다. 당체 오가는 사투리가 암호마냥 알아들을 수 없는 긴 했지만요. 그래도 재미난 얘기도 듣고 반대쪽 길 소식도 좀 듣고요. 오늘처럼 햇볕이 따가운 날이 아니라도 잠시 쉬어가기 딱 좋은 팽나무를 못보고 시작하긴 했지만요. 오르막길 내내 선선히 부는 바람이 발걸음을 가볍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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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레길 금계-동강 구간은 김종직(金宗直)이 쓴 '유두류록'을 따라 걷는 길로 알려졌습니다. 그가 함양군수로 있을 때 만든 <관영차밭조성터>가 가까운 동호마을에 있는 것부터 그렇구요. 동강마을 팽나무, 운서마을로 넘어가는 구시락재, 송대마을 함양독바위들은 고증을 거쳐 찾아낸 곳들이라고 하니요. 그도 그럴만 합니다.  
 
앞에 그냥 지나쳤던 팽나무도 그렇습니다. 수령이 600년이나 됐다는데요, 계온(季溫)이 관아를 출발해 이곳을 거쳐 지리산에 올랐다는 얘기를 들을 수 있습니다. 헌데 무엇이 그리 급했던지 그걸 놓친 거였지요. 필시 해가 지기 전에 금계를 거쳐 창원마을까지 가야한다는 부담 때문이었겠지요.   
 
사실 동강에는 지난번에도 지나친 재미난 얘기가 하나 더 있는데요. 바로 마을 입구에 있는, 엄천사 스님들이 '중이 바랑을 메고 가는 형국'이라며 깨려고 했다고도 하는, 짚신을 삼는데 쓰는 나무틀처럼 생겼다는 신틀바위가 그겁니다. 나중에야 여간해선 눈에 들어오지 않아 그냥 지나치기 일쑤라는 걸 알긴 했지만 말입니다.
 
구시락재까지는 아무리 오르막길이라 해도 뒤를 돌아보면 엄천강이 시원하게 보여 걸을만하지만요. 운서마을 쉼터를 지날 때까진 오르막과 내리막이 반복되면서 힘을 뺍니다. 그것도 경사가 급합니다. 결국 자주 쉬어 가야겠는데, 어찌된 게 아무렇게나 앉아 쉬었다 출발하면 바로 앞에 정자(亭子)가, 의자가 있습니다. 조금 약이 오르지만 하는 수 없지요.
 
다음날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기는 하지만, 송문교까지 가는 길에선 둘레길꾼들을 가장 많이 만나지 않았나 싶습니다. 짝지어 오거나 단체로 때론 혼자서. 어색하지만 인사말도 건네 보고요, 커피까지 타 먹게 해 놓은 쉼터에서 급한 볼일도 보고요, 용을 닮아 와룡대라 불리는 소나무 바위도 너머보고요. 심심할 새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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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데도 세동마을서 모전마을까진 안내판이 친절하지 않습니다. 그냥 아스팔트길을 따라 가면 되긴 하지만요. 난데없이 나타난 [지리산 둘레길 전설 탐방로]라는 표지가 헛갈리게 합니다. 뭐 뜨끈한 길에서 내려다보자면요. 농로로 이어지기도 하고 강가에 바짝 붙어 있기도 하니요. 그쪽이 훨씬 걷는 재미가 많아 보이긴 합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동강-금계 구간은 ‘빨치산루트’라고도 불립니다. 전쟁이 끝나고도 10년이나 더 산속에 있었던 이은조가 죽었다는 선녀골과 그 주변 비트들 때문입니다. 또 가까운 벽송사 뒤편 능선을 따라서도 흔적이 여기저기 있습니다. 물론 산청 쪽에도 마지막 빨치산 정순덕이 사로잡혔던 고향 집이 있으며, 하동 쪽도 꽤 많은 자취들이 남아있습니다.*
 
그러니 시간만 된다면야 그 길들을 되짚어 가는 것도 좋을 듯싶습니다만. 송대마을까지 올라야 제대로 된 안내판을 만나게 되니까요. 갈림길인 모전마을에선 알 수가 없다는 핑계, 서둘러 걷지 않으면 숙소로 정한 창원마을까지 어렵겠다는 판단. 벽송사로 이어지는 산길 대신 둘러가는 길로 접어드니 못내 아쉽기만 합니다.     
 
그늘 하나 없던 딱딱한 길을 버리고 숲길로 들어서기 전 잠시 쉬어갑니다. 하지만 철모르게 일찍 나온 모기 때들이 어찌나 극성이던지요. 곧 만나게 될 급한 오르막과 너덜겅을 앞두고, 아홉 마리 용과 마적도사 얘기는 그렇다해도. 별 소용도 없는 댐 짓겠다고 아우성치는 바람에 몸살을 앓고 있는 용유담도 제대로 못봅니다. 첫 여행 때도 그랬는데 지리산 모기, 꽤나 성가십니다.
 
매번 그랬지만 안내 책자나 둘레길 홈페이지에 나온 거리에 따른 시간은 별 도움이 안 된다는 걸 또 겪습니다. 4시간이면 충분할 거라던데, 모전마을에서부터 시작된 숲길을 지나 의중마을에 내려서니 벌써 6시 입니다. 급한 오르막길 이후 너덜겅과 오르막, 내리막이 이어져 생각보다 오래 걸었다고 해도, 4시간 반이나 지났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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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레길 함양센터 앞에서 미리 예약한 민박집에 연락하니 40분이면 올라올 수 있을 거라 합니다. 후아, 40분이라. 줄기차게 올라야 하는 산길임을 감안하면 쉬고 있을 때가 아닌 것 같습니다. 헌데 무슨 깡인지 평상에 올라 대(大)자로 눕습니다. 아마 오르막길이 험하면 얼마나 험할까 얕잡아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정말 숨이 턱 밑까지 차오르는 산길을 한 번 제대로 쉬지 않고 내리 걸어 숲길에서 나오니 딱 40분이 걸렸습니다. 다행히 어둑어둑해지기 전에 도착했지만요. 또 민박집 주인장 걷는 모양새를 보고나서야 왜 40분이라고 했는지 알게 됐지만요. 역시 지리산 둘레길은 순례길이란 생각에 고개가 절래절래. 밥이고 뭐고 또 팔다리 쫙 펴고 눕습니다.       
 
 
 
* 인민군 야전병원으로도 사용됐던 벽송사 뒷산의 선녀굴로 피한 마지막 빨치산은 이은조와 정순덕 외에 이홍이가 있었습니다. 휴전이 되고도 근 10년 가까이 은신했던 이들 가운데 1962년 이은조가 가장 먼저 사살됐습니다. 살아남은 정순덕과 이홍이는 고향인 산청으로 피신하게 되구요. 하지만 다음해 이홍이 역시 경찰에 피살됩니다. 정순덕만이 총에 맞은 채 붙잡히게 된 것이지요. 체포된 정순덕은 무기징역형을 선고받고 20년 넘게 옥살이 하다 1985년에야 전향서를 쓰고 출옥합니다. 하지만 이 전향서 때문에 미전향장기수들이 북으로 돌아갈 수 있었음에도 거부당하게 됩니다. 마지막 빨치산 정순덕은 2004년 인천의 한 병원에서 파란만장했던 삶을 마감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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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7/26 13:38 2017/07/26 13:38
사용자 삽입 이미지1.
작가도 기자도 아닌 사람이 한 주제로 책 세 권을 썼습니다. 그것도 30여 년에 걸쳐서 말입니다. <고해정토(苦海淨土)>(1969~2004) 3부작>. 미나마타병으로 죽어갔던, 고통 받았던 이들에 대한 비가(悲歌). 근대화를 상징하는 자본과 과학기술, 그리고 국가가 결합해 만들어낸 가혹한 폭력에 대한 고발. ‘미나마타’의 인류사 혹은 문명사적 의미에 대한 끈질긴 인문학적 질문을 끈질기게 던졌습니다.
 
2.
구마모토현 미나마타 시(市)에 들어선 질소 공장은 일본의 산업화, 제국주의와 궤를 같이 합니다. 승승장구하던 때엔 조선과 만주에도 공장을 지었고, 압록강에는 발전소까지 만들었습니다. 패전 후에는 공중분해가 되기도 했지만 곧 공장은 다시 가동됐습니다. 폭주하던 제국주의 기차는 멈췄지만 산업화까지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3.
14호, 나카츠 요시오, 일반인과 다를 것이 없다. 어획량도 전업자와 비슷. 야간작업도 하고 있다.
20호, 다가미 카츠요시, 자택에서 빈둥빈둥. 보행이 약간 곤란.
29호, 다나카 미노루코, 자택에서 걷게 되었다.
34호, 에고시타 마스, 가사일 전반을 돌봄. 외견상 아무렇지도 않다.
36호, 이노우에 아사노, 건강. 정상인과 다름없다. 산밭 일을 하고 있다.
43호, 다가미 요시하루, 모리오카쿠미 삼륜차 운전수, 건강체.
51호, 하마모토 츠기노리, 건강, 센쿄운수 근무, 현재 남규슈자동차학교 재학 중.
71호, 시마모토 리키조, 건강체, 2월 26일 사망.
73호, 스기모토 도시, 약간 나쁘다.
88호 스기모토 신, 완쾌라 여겨진다.
74호, 이토 세이하치, 완쾌라 여겨진다.
80호, 이와사카 키쿠에, 자택에서 빈둥빈둥.
87호, 우시지마 나오, 건강체.
(pp.224-5)
 
1964년 짓소공장에서 작성한 <미나마타병 환자 일람표>에는 환자에 대한 세심한 기록이기는커녕 ‘발병으로 비롯된 집안의 고난에 대해, 잃어버린 세월에 대해, 한마디도 말하지 않’(p.227)고 있습니다. 그저 이 기록은 행정당국이 추진했던 ‘위로금’ 개정의 근거였으며, 희생자 말소 수법이었으며, 지역감정을 악용하는 데 사용됐습니다.
 
4.
1956년부터라고 합니다. 혀와 입술이 떨리더니 말하는 게 쉽지 않아졌습니다. 근육은 맘대로 움직이다 마디마디가 꺾여 들어갔습니다. 뇌가 마비되기도 했으며 똑바로 걸을 수조차 없게 됐습니다. 사람뿐이 아니었습니다. 영물(靈物)로 여기던 고양이들은 미친 듯 춤추다 고꾸라져 죽어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바다에는 물고기들이 사라졌습니다.
 
5.
“도시라는 곳에 갔던 이들이 이야깃거리도 만들 겸, 다진 가다랭이라는 걸 먹어보자 싶어 다들 주문해서 먹어봤다는구먼. 별로 맛이 없더라는 거여. 비교를 할 수가 없더라는 거지. 몇십 종류나 있잖여, 이쪽 바다엔, 맛이 있는 물고기가. 혀에 착착 감기게 맛있는. 수은이 들어서 그랬다니까, 틀림없이.” 그리고 와아, 하고 웃음을 터뜨린다.(pp.183-4)
 
6.
언니는 사세보에서 콩 파는 장사.
일확천금.
차녀는 후쿠오카 탄광.
여동생, 나가사키 탄광.
어머니는, 돈은, 조금도 부족하지 않습니다.
또한 아버지, 3년 전 괴질로 죽었습니다.
돈은 거슬러 올라가 33만 받았습니다. 부자입니다.
(p.78)
 
어촌 마을이었던 미나마타에 들어선 공장은 바다만 망가뜨린 게 아니었습니다. 돈 벌이에 가족들을 이용한다거나 공장이 문을 닫으면 시(市)가 망한다거나 혁명을 노리는 좌익들이 설친다는 말이 흘러나왔습니다. 마을은 ‘질투와 험담과 밀고가 횡행하는’(p.328) 곳으로 변했습니다.
 
7.
29세대가 싸우기로 했습니다. ‘확약서’니 ‘청원서’니 하는 것들을 들이미는 ‘짓소’를 상대로 소송에 나선 겁니다. 이들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주주총회가 열리는 곳으로 순례를 떠납니다. 순례복을 준비합니다. 노랫말을 외우기도 힘들고, 발음이 엇나가 다른 말로 들려지만 영가(靈歌) 연습도 합니다. 이들과 함께 사우겠다고 나서는 이들도 오사카역이 미어질 듯 모여들었습니다.
 
8.
이시무레 미치코는 짓소와 정부를 상대로 한 싸움을 꼼꼼히 기록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한 르포르타주(사회고발 문학)로서의 글이 아닙니다. 과학기술과 자본의 결합이라고 할 수 있는 근대문명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입니다. 인신공양(人身供養), ‘신(神)들의 마을’이야말로 상처를 보듬고 치유할 수 있다는 성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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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6/27 09:03 2017/06/27 09: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