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자 삽입 이미지1.
작가도 기자도 아닌 사람이 한 주제로 책 세 권을 썼습니다. 그것도 30여 년에 걸쳐서 말입니다. <고해정토(苦海淨土)>(1969~2004) 3부작>. 미나마타병으로 죽어갔던, 고통 받았던 이들에 대한 비가(悲歌). 근대화를 상징하는 자본과 과학기술, 그리고 국가가 결합해 만들어낸 가혹한 폭력에 대한 고발. ‘미나마타’의 인류사 혹은 문명사적 의미에 대한 끈질긴 인문학적 질문을 끈질기게 던졌습니다.
 
2.
구마모토현 미나마타 시(市)에 들어선 질소 공장은 일본의 산업화, 제국주의와 궤를 같이 합니다. 승승장구하던 때엔 조선과 만주에도 공장을 지었고, 압록강에는 발전소까지 만들었습니다. 패전 후에는 공중분해가 되기도 했지만 곧 공장은 다시 가동됐습니다. 폭주하던 제국주의 기차는 멈췄지만 산업화까지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3.
14호, 나카츠 요시오, 일반인과 다를 것이 없다. 어획량도 전업자와 비슷. 야간작업도 하고 있다.
20호, 다가미 카츠요시, 자택에서 빈둥빈둥. 보행이 약간 곤란.
29호, 다나카 미노루코, 자택에서 걷게 되었다.
34호, 에고시타 마스, 가사일 전반을 돌봄. 외견상 아무렇지도 않다.
36호, 이노우에 아사노, 건강. 정상인과 다름없다. 산밭 일을 하고 있다.
43호, 다가미 요시하루, 모리오카쿠미 삼륜차 운전수, 건강체.
51호, 하마모토 츠기노리, 건강, 센쿄운수 근무, 현재 남규슈자동차학교 재학 중.
71호, 시마모토 리키조, 건강체, 2월 26일 사망.
73호, 스기모토 도시, 약간 나쁘다.
88호 스기모토 신, 완쾌라 여겨진다.
74호, 이토 세이하치, 완쾌라 여겨진다.
80호, 이와사카 키쿠에, 자택에서 빈둥빈둥.
87호, 우시지마 나오, 건강체.
(pp.224-5)
 
1964년 짓소공장에서 작성한 <미나마타병 환자 일람표>에는 환자에 대한 세심한 기록이기는커녕 ‘발병으로 비롯된 집안의 고난에 대해, 잃어버린 세월에 대해, 한마디도 말하지 않’(p.227)고 있습니다. 그저 이 기록은 행정당국이 추진했던 ‘위로금’ 개정의 근거였으며, 희생자 말소 수법이었으며, 지역감정을 악용하는 데 사용됐습니다.
 
4.
1956년부터라고 합니다. 혀와 입술이 떨리더니 말하는 게 쉽지 않아졌습니다. 근육은 맘대로 움직이다 마디마디가 꺾여 들어갔습니다. 뇌가 마비되기도 했으며 똑바로 걸을 수조차 없게 됐습니다. 사람뿐이 아니었습니다. 영물(靈物)로 여기던 고양이들은 미친 듯 춤추다 고꾸라져 죽어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바다에는 물고기들이 사라졌습니다.
 
5.
“도시라는 곳에 갔던 이들이 이야깃거리도 만들 겸, 다진 가다랭이라는 걸 먹어보자 싶어 다들 주문해서 먹어봤다는구먼. 별로 맛이 없더라는 거여. 비교를 할 수가 없더라는 거지. 몇십 종류나 있잖여, 이쪽 바다엔, 맛이 있는 물고기가. 혀에 착착 감기게 맛있는. 수은이 들어서 그랬다니까, 틀림없이.” 그리고 와아, 하고 웃음을 터뜨린다.(pp.183-4)
 
6.
언니는 사세보에서 콩 파는 장사.
일확천금.
차녀는 후쿠오카 탄광.
여동생, 나가사키 탄광.
어머니는, 돈은, 조금도 부족하지 않습니다.
또한 아버지, 3년 전 괴질로 죽었습니다.
돈은 거슬러 올라가 33만 받았습니다. 부자입니다.
(p.78)
 
어촌 마을이었던 미나마타에 들어선 공장은 바다만 망가뜨린 게 아니었습니다. 돈 벌이에 가족들을 이용한다거나 공장이 문을 닫으면 시(市)가 망한다거나 혁명을 노리는 좌익들이 설친다는 말이 흘러나왔습니다. 마을은 ‘질투와 험담과 밀고가 횡행하는’(p.328) 곳으로 변했습니다.
 
7.
29세대가 싸우기로 했습니다. ‘확약서’니 ‘청원서’니 하는 것들을 들이미는 ‘짓소’를 상대로 소송에 나선 겁니다. 이들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주주총회가 열리는 곳으로 순례를 떠납니다. 순례복을 준비합니다. 노랫말을 외우기도 힘들고, 발음이 엇나가 다른 말로 들려지만 영가(靈歌) 연습도 합니다. 이들과 함께 사우겠다고 나서는 이들도 오사카역이 미어질 듯 모여들었습니다.
 
8.
이시무레 미치코는 짓소와 정부를 상대로 한 싸움을 꼼꼼히 기록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한 르포르타주(사회고발 문학)로서의 글이 아닙니다. 과학기술과 자본의 결합이라고 할 수 있는 근대문명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입니다. 인신공양(人身供養), ‘신(神)들의 마을’이야말로 상처를 보듬고 치유할 수 있다는 성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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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6/27 09:03 2017/06/27 09:03
핏빛 자락, 지리산을 걷다: <수철-동강> 구간(2015년 4월 24일)
 
지리산자락 어디 한 곳 가슴 아픈 사연을 품지 않은 곳이 있을까요. 조금 멀게 갑오년 농민군에서부터 가깝게는 한국전쟁 전, 후 '빨치산'까지. 또 이들 틈바구니에서 무고하게 목숨을 잃어야했던 무수한 이름 없는 이들 말입니다. 해서 지리산은 어느 노랫말처럼 "떨리는 비명 소리"에 숨죽어 있는 "죽음의 저 산"일 지도 모르겠습니다.
 
모처럼 파란 하늘을 보여주고 있는 오늘, 산길 따라 걷다 그 끝에 만나게 되는 방곡마을 역시 그렇습니다. 똑같은 일이 있었던 거창에서는 그래도 학살 당시 알려졌지만. 가현과 방곡, 점촌, 서주마을에서 벌어졌던 학살은, 맞습니다. '민주화' 이후에야 겨우 목소리를 낼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추모 묘역이 조성돼 있으니 이만하면 '명예회복'까진 이뤄진 걸까요.  
 
그래도 한 날, 남들 알까 모르게 제사상을 차려야했던 아픔이 어디 쉽게 치유되겠습니까. 묘역으로 오르는 저 높은 계단만큼이나 세상과 단절됐던 마음속 아픔들 말입니다. 그러니 이 구간을 걷는 동안만큼은 옷깃을 여미며 걸어야겠습니다. "당신 원통함을 내가 아오. 힘내소, 쓰러지지 마시오."라고 말하기조차 그 아픔을 오롯이 알 수는 없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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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심원에서부터 경호1교까지는 건너뛰고 시작합니다. 둘레길 걷기 첫 번째 여행 때 걸었기 때문입니다. 그땐 성심원에 게스트하우스가 생기기 전이라 수도원 피정시설에 묵었었는데요. 저녁나절 살랑살랑 부는 강바람을 맞으며 가뿐히 걸었더랬지요. 그러니 산청터미널에서부터 바로 시작해도 되겠습니다.
 
다만 잠시 둘레길 산청센터에 들릅니다. 저녁에 잘 곳을 알아봐야 하니까요. 사실 어제 낮 까지만 해도 길을 나설지 정하지 못했습니다. 해서 미리 예약을 못했습니다. 물론 방곡마을회관 전화번호를 챙겨오긴 했지만, 거기 말고도 다른 민박집들을 알아봐야 합니다. 휴일도 아닌데다 예전만치 둘레길 걷는 이들이 많지 않아 문 연 곳이 많지 않으니까요. 
 
다행이 바뀐 전화번호에, 몇 군데 민박집이 적힌 메모지를 받았습니다. 오는 버스 안에서 내내 걱정을 했는데 조금은 안심입니다. 바로 머리 위에서 내려쬐는 햇볕이 따갑기는 하지만 이제 속도를 내서 걸어야겠지요. 수철마을까진 그래도 강을 따라 걷는 길이라 수월하지만. 고동재와 쌍재를 넘는 산길은 만만치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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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처음부터 꼬였습니다. 경호1교에서 길을 잘못 들어선 겁니다. 한참을 갔다 되돌아와 봤던 이정표는 분명 강 쪽으로 향해 있는데. 대체 무슨 얘기를 하다 그리됐는지요. 아니 뭘 보다 그리됐는지도 모르겠지만, 그만 마을 길로 곧장 갔던 겁니다. 생각했던 시간보다 빨리 도착했다 싶었는데 여기서 다 까먹었습니다.
 
애초 둘레길을 역방향으로 걸으려 했던 이유는 해를 등지고 가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동에서 산청까지 길들이 대략 북쪽으로 난 길이니 말입니다. 물론 뜻대로 되진 않았습니다. 아침에 걸을 때와 낮에 걸을 때, 해질 때 걸을 때에 따라 다 달랐으니까요. 하지만 산청구간으로 오니, 그것도 오후에 걸으려니 해를 정면에서 마주보고 걷게 생긴 겁니다. 아, 어쩌지요. 
 
대장마을을 지나 평촌마을까지 땡볕에 내처 걷습니다. 길이 아니라는 표지판에 되돌아 걷기도 하고. 강을 따라 걷는 길이라 그런지 군데군데 보이는 보(洑)를 보며 4대강 얘기도 하며. 줄줄이 이어지는 다랑이 논들에 놓여있는 모판들을 보며 그새 날이 이렇게 됐나, 하며. 머리 위 따가운 해 때문에 속도는 나지 않지만 간간이 부는 강바람에 힘을 내봅니다. 
 
수철마을 매점에서 간단히 배를 채웁니다. 마음 같아서는 ‘금방 가버리면 뭐하느냐, 천천히 쉬었다 내일 아침에 가라’는 할머니 말처럼 쉬었다 가고도 싶습니다. 하지만 오랜만에 나선 길인데다 빠듯한 시간이 좀은 걱정되긴 하지만, 결국 길을 나섭니다. 곧 겹벚꽃나무에 홀려 길을 잃고 오르막길을 한참이나 올랐다 되돌아오면서도 말입니다. 
 
길이 가파르게 이어집니다. 마치 지난 번, 두 번째 여행에서 올랐던 웅석봉과도 같습니다. 이런 걸 데쟈뷰라고 하던가요. 저 고개만 돌아서면 나올 것 같은데 그렇지가 않습니다. 돌아서면 또 고개가 나오고 급기야 임도를 벗어나 산길로 말입니다. 그런데 아차차, 같이 걷던 걸음이 서서히 차이가 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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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거기선 좀 나았습니다. 산불감시초소를 지나 쌍재에 이르기까지는 보이지가 않을 정도로 떨어져 버린 겁니다. 길도 오르기만 했던 아까보단 훨씬 나은 능선길이었는데요. 산길이라 길을 잘 못 들어설 수도 있고, 자칫 미끄러지기라도 한다면 큰일이 생길수도 있는데. 뭐가 그리도 바빴던 걸까요. 소리치면 들릴 정도는 아니, 보일만큼은 거리를 뒀어야지요. 
 
아닙니다. 함께 길을 걷기로 나섰으니 좀 늦어 밤길을 걸으면 어떻고, 혹여 잘 곳이 없어 택시를 불러야 한다 해도 어떻습니까. 무조건 같이 갔었어야지요. 산길로 접어들기 전처럼, 이런 저런 얘기도 하고 경치도 보고 말입니다. 지난 번 여행 때도 그랬는데 이번에도 또 그랬습니다. 그것도 산길에서 말입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쌍재부터는 길이 좁아지는 계곡 옆을 걸을 때만 빼곤 나란히 걸었습니다. 전처럼 도란도란, 소곤소곤. 내리막길이기도 했지만 훨씬 힘이 덜 듭니다. 다만 시간이 있었다면 계곡에 발도 담그고 쉬었다 가겠지만 민박집과 전화 통화를 하지 못해 마음이 급합니다. 해서 조금은 서두릅니다. 해지기 전에 도착해야 추모 묘역도 둘러보고 할 수 있으니까요.
 
다행히 해가 뉘엿뉘엿 할 때 쯤 산길을 내려왔습니다. 하지만 우려했던 일이 생기고 말았습니다. 추모비에 들를 여유는커녕 마을 어디서고 잠 잘 곳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마을회관은 운영을 하지 않는다고 하고. 회관에서 알려준 어느 할머니는 아들 집에 와 있다 하고. 또 다른 민박집은 2명은 안 된다고 하네요. 하는 수 없습니다. 늦기 전에 동강마을로 가야겠습니다.
 
배낭에서 후레쉬도 꺼내들고 해는 져서 어둑어둑해진 길을 나섭니다. 여기저기서 개들이 짖고 난리도 아닙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잠잠했었는데, 깜깜해지니 그치들도 경계를 하는 가봅니다. 더구나 멀리서보니 줄에 묶여 있지 않아 보이는 산만한 개도 보입니다. 어찌해야 하나요. 다행히 저 쪽 길 아래 집에서 할머니, 할아버지 모습이 보입니다.
 
두릅을 따고 계셨던 두 분 덕에 민박집을 찾았습니다. "안 되면 우리 집으로 와, 우리 집에도 방 있어"라고 하며 넉넉한 웃음을 지어어보이던 두 분이 아니었으면 어찌됐을까요. 깜깜한 밤도 밤이었지만, 그 덩치 크고 목소리도 무서운 개들을 생각하면 지금도 막막합니다. 게다가 버스는 진즉에 끊겼고 돌아가는 길은 어딘지도 모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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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레길을 걸었던 세 번째 여행 만에 처음으로 밤하늘을 올려다봅니다. 또 계곡물에 귀도 기울여보구요. 그러니 언제 잠이 들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다음 날 동강마을까지 길은 동네 산보나간 정도였으니 딱히 소개할 것이 없네요. 한 30분이나 됐을까요, 금세 도착했거든요. 아, 어제 밤 그 줄도 안 묶여 있던 산만한 개요? 어째요. 그냥 논길을 빙 둘러 갔답니다.
 
* 지리산 둘레길 걷기 세 번째 여행에서 걸은 길
여전히 둘레길을 시계 반대 방향으로 걷고 있습니다. 함양읍에서 수철마을과 방곡마을을 거쳐 동강마을까지 약 18.5km입니다. 
 
* 가고, 오고
거리가 먼만큼 시간도 많이 걸리네요. 차 시간이 잘 맞아도 대략 5시간에서 6시간 남짓 걸리니까요.   
 
* 잠잘 곳
수철마을이나 방곡마을, 동강마을에는 민박집이 많습니다. 하지만 둘레길 걷는 사람이 많을 때가 아니면 문을 열지 않는 곳이 꽤 됩니다. 그러니 출발하기 전에 확인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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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6/07 17:22 2017/06/07 17:22

나이가 든다는 것

from 말을 걸다 2017/05/10 22:25
1.
남자는 세 번 운다는 말을 철석같이 믿었던 적이 있었지요. 하지만 태어났을 때야 아무것도 모르는 때니 넘어가더라도. 두 번째 울음은 군대는커녕 대학 신입생이던 91년 5월 대한극장 앞과 종로 거리에서 맡았던 최루가스에 젠장. 앞으로 살면서 흘릴 눈물을 다 흘린 만큼이나 될까 싶게 밤낮으로 줄줄줄. 그리고는 93년, 화생방 훈련 때 남들은 죽네사네 할 때 코웃음 치며 그 말이 다시 생각났습니다. 그 후로도 저 되지도 않는 말이요. 남자아이에게는 권총을 여자아이에게는 인형을 사다주는, 뿌리 깊은 남성우월주의, 아닙니다. 마초이즘일 뿐이라는 걸 깨닫기 전까지는 그럭저럭 믿어왔던 것 같습니다. 우연인지 모르겠지만 10여 년 전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는 말이지요.
 
2.
지금은 고기를 특별한 날이 아니면 잘 입에 올리지 않지만요. 대학원 다닐 때쯤부터 해서 어머니가 돌아가신 전까지 고기는 술과 늘 함께였습니다. 일주일에 적어도 두, 세 번은 술을 마셨으니 고기 역시 삼겹살에 목살, 치킨, 적어도 껍데기를 그만큼은 먹었을 겁니다. 물론 술과 함께 먹었던 것 말고도 제육볶음이니, 불고기덮밥이니 시도 때도 없이 먹어댔으니 그 양이 꽤나 됐겠지요. 게다가 밥은 또 어찌나 많이 먹었던지요. 아버지가 쌀가게를 했던지라 어렸을 때부터 밥 하나는 걱정 없이 먹었던 게 몸에 배서였나요. 그 나에 때면 으레 그 정도는 먹어야 했던 건가요. 고봉밥을 그것도 두 그릇은 게 눈 감추듯 먹어댔었습니다. 덕분에 어머니는 도시락을 몇 개씩 싸셔야했지요.
 
3.
공부를 그리 썩 잘하지는 못했습니다. 중학교 때는 다시 선생님께 갖다드려야 하는 걸 뻔히 알면서도 성적표를 고치다 부모님께 들통 나 혼쭐이 난 적도 있었고요. 고등학교 때는 밤 10시까지 이어지던 야자를 빼먹고 당구장을 기웃거리기도 했으니. 지금 생각해도 그렇지만. 아무리 1시간 넘게 버스타고 친구 하나 없는 재수학원을 다녔다고 해도 말이지요. 대학이라는 데를 간 건. 역사책 129페이지 오른 쪽 상단에 무슨 그림이 있었는지, 사회책 몇 페이지에는 어떤 표가 있는지 까지 머릿속에 있었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곯아떨어진 이등병이 한 밤중에 불려 들어간 당직실에서 사단장부터 훈련소 동기들 이름까지 줄줄이 꿰차 몽둥이찜질을 피할 수 있었던 것 말입니다.
 
4.
밤새 술 마시는 건 일도 아니었습니다. 2박 3일 MT를 다녀와서도 그날 바로 다른 MT를 갔습니다. 아무리 20대 때라고 해도 말이지요. MT라면 밤새 술 마시는 거 말고는 딱히 하는 것도 없으니 말 그대로 4일, 5일 내리 술만 마셨단 얘깁니다. 물론 속은 부대꼈지만 그렇다고 다음 날 수업을 빼먹거나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되레 어디 또 무슨 건수나 없나 만나는 사람마다 슬쩍 떠보기도 하고 학교 근처 술집을 배회하기도 했으니까요. 누군 40일 연속 마셨다고 하기도 하고 또 누군 두 달 째라고 하기도 하고. 그러면서도 아침엔 세미나, 오후엔 집회, 저녁엔 술, 밤에도 술. 방학이고 학기 중이고, 주중이고 주말이고 달력이 따로 필요치 않았더랬습니다.
 
5.
꼭 세월호 참사 때부터라고 말하기는 어려울 수도 있겠습니다. 전에는 영화나 특히 드라마를 볼 때 옆에서 누가 눈물이라도 흘릴라치면 좀 이해가 되질 않았는데요. 정확하진 않지만요. 아마도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40이 넘어가는 언저리부터였을까요. 그땐 옆 사람 몰래였겠지만요. 한 번씩 쓱 눈을 훔치고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화장실에 간다던가, 물을 마신다던가. 아무튼 그런 횟수가 조금씩 늘더니요. 지금은 옆에 누가 있던, 혼자 보던 말입니다. 조금만 슬픈 장면이 나올라치면 복받쳐 오르는 눈물 때문에 자꾸 멈춰보게 됩니다. 물론 세월호가 물속으로 잠기는 걸 지켜보던 그 때. 주체할 수 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에 통 일이 손에 잡히질 않았습니다.
 
6.
밥을 고봉으로 먹고 하루가 멀다 고기를 먹어도 30인치를 넘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좀 살이 불었다 싶을 땐 며칠 운동 하거나 술을 마시지 않으면 한결 몸이 가뿐해졌구요. 남들은 제대하고 난 후에는 살이 좀 졌다, 담배를 끊었더니 배가 나오더라 하던데요. 어찌된 게 변하는 게 없더라구요. 체중도 그렇고 허리도 그랬습니다. 그런데요. 하던 일을 그만두고 농사를 지어보겠다고 했던 때만 해도 괜찮았습니다. 옆구리에 살이 좀 붙는가 싶긴 했지만 배는 그대로였거든요. 헌데 지금은요. 먹는 건 예전에 비해 반도 안 됩니다. 물론 고기는 연례행사마냥 거의 먹질 않구요. 하지만 조금씩 잡히던 허리 살부터 윗배까지 만만치 않습니다. 맘먹고 산에를 오르고 아침, 저녁으로 1시간씩 걸어도 말입니다.
 
7.
책상 위는 말할 것도 없고 노트북 여기저기에도 포스트잇이 붙어있습니다. 탁상달력은 중요한 일정을 적어놓는 것하고 자잘하게 기억해야할 것들을 써 넣은 것, 두 개입니다. 일을 할 때 요긴하게 쓰기도 했지만요. 이젠 년 말이나 년 초 다이어리를 사러가는 게 자연스러워졌습니다. 들고 다니는 기자수첩에 노트만도 몇 개씩. 그런데도 약속 날을 잊기도 하고, 치과 갈 날을 놓쳐버리기가 일쑤니. 대체 이게 뭔 일란 말입니까. 어제 분명 이건 꼭 사야 돼, 하고 다짐해봐야 소용없다는 건 이미 꽤 됐습니다. 머리를 두 손으로 감싸고 “내일 꼭 하자, 무슨 일이 있어도 내일 꼭 하는 거야”라고 아무리 되새겨도 안 되기에. 메모지에 적고 수첩에 써 놓는데도 깜빡깜빡. 머리통이 비워가는 느낌입니다.
 
8.
새로 이사 한 집이 동남향집인 탓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해가 뜰 때쯤 눈이 떠졌으니까요. 또 오래된 아파트라 층간 소음 때문 아닌가도 싶었지요. 낮잠을 자든 밤이 됐든 소스라쳐 일어나고 나면 어디선가 쿵쿵 거리는 소리가 났거든요. 그런데요. 밖에 나가 잘 때도 역시 새벽녘이면 절로 깨어나고 조그만 소리나 움직임만 느껴도 쉬이 잠들 수 없는 날이 점점 늘어만 갑니다. 해서 새로 암막커튼을 달아보기도 하고 안대를 써보기도 합니다. 하지만요. 할머니가 그랬던가요. 아니요, 할아버지도 그랬던 것 같습니다. 닭이 채 울기도 전, 마당 쓸고 아궁이에 불을 지피던 모습. 단잠을 깨우던 그 소란스러움이 말입니다. 누가 알려주지도 않았건만 몸이 따라가고 있는 겁니다.
 
9.
지난주 연휴에 지리산 둘레길을 다녀왔습니다. 거리가 워낙 먼 탓도 있지만요. 한 이틀, 사흘 걷고 나면 그만큼은 또 쉬어야 합니다. 그러니요, 연휴가 아니면 쉽게 맘먹기도 어렵습니다. 동해안 바닷길 따라 걷기도 그렇습니다. 강릉에서 가까운 삼척을 걷고 있는 데도 말입니다. 춘천 살면서 다녔던 고성, 속초보다도 속도를 못 내고 있습니다. 아무리 거리를 짧게 잡고 무리하지 않는다고 해도 말이지요. 버스타고 걷고 그러고 나면 다음날 일요일은 종일 쉬어야 하니요. 주말이 짧게 느껴져 나서기가 쉽지 않은 겁니다. 헌데요. 이렇게 걸어서 여행한 것 말구도요. 어디 한 삼, 사일 밖에 나갔다 오거나, 혹 아침 일찍 또는 저녁에 조금만 늦게 집에 들어오기만 해도요. 다음날은 꼬박 쉬어야 합니다.
 
10.
30대엔 30km로 40대엔 40km, 50대는 50km 속도로 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또 거꾸로 매달아도 국방부 시계는 돌아간다는 말도 있지요. 젊었을 때와 나이 들었을 때 느끼는 세월의 흐름을, 갓 입대한 병사와 말년 병장이 가지는 서로 다른 마음입니다. 하지만 세월유수(歲月流水)는 30대도 70대도, 이등병도 예비역도 막지 못합니다. 다만 느낌만 저리 다를 뿐이지요. 그러면서도 마음 아린 건. 청춘이 오래지 않음을 모르는 건 그들 뿐, 나이가 든다는 걸 애써 외면하는 것도 오직 그때뿐이라는 겁니다. 쉬이 피곤하고 눈물이 많아지며, 아침잠이 없어지는 것. 나오는 배가 더는 어쩔 수 없다고 돌아서면 자꾸만 까먹는 걸요. 40이 넘고 50이 다 돼서야 이제 겨우 깨닫는 것. 언제쯤 깊고 넓어질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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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5/10 22:25 2017/05/10 22:25
메지-대다: 한 가지 일을 단락 지어 치우다
 
겨우내 든 촛불이 끝내 이겼습니다. ‘바람 불면 꺼질 거’라던 그 ‘촛불’이 말입니다. 끝까지 문 걸어 잠그고 제 하고 싶은 말만 하던 박근혜가 청와대에서 쫓겨났고. 국정을 농단했던 자들은 하나, 둘 법정에 서고. 앞장서 ‘창조’니 ‘정상화’를 소리쳤던 이들은 숨죽이고 있으니. 이만하면 ‘잘 했다’ 등 토닥이며 ‘박근혜 없는 봄’을 만끽할 만합니다. 하지만요. 쫓겨나가는 와중에도 끝까지 사과는커녕 웃음꽃을 피우는 모습, 난데없는 성조기와 이스라엘 국기를 감싸고 울고 있는 모습들을 보고 있으려니요. 이제 겨우 ‘탄핵’이라는 한 가지 일을 단락 지어 치웠을 뿐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긴요. 지난 10여 년 간 줄곧 ‘잃어버린 10년’을 외쳤던 이들이니 어디 쉽게 물러나겠습니까요. 게다가 아직 감추고 폐기하지 못한 것들이 어디 한, 두 가지 여야지요. ‘블랙리스트’도 그렇고, ‘세월호’도 그렇습니다. 또 곳곳에 남아 있는 부역자들도 어디 한, 둘이어야지요. 국정원에도 그렇고 검찰에도 그렇습니다. 그러니 아직 ‘촛불’을 꺼서는 안 되겠습니다. 권력 뒤에 숨어, 권력을 앞세워 떵떵거렸던 이들을 모두 야무지게 몰아내 메지대어야 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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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3/23 16:39 2017/03/23 16:39
사용자 삽입 이미지스무 번째 여행 - 해파랑길 ② 기찻길 따라 걷는 길: 동해시 묵호역에서 추암까지 33구간
 
첫째 날, 기찻길 따라 묵호역에서 동해역까지(2015년 7월 4일)
 
이주 만에 또 나왔다. 여기저기 산허리에 구멍 뚫고 고속전철인가를 놓느라 폐쇄된 강릉역만 아니었다면 금방 왔을 텐데. 버스타고 시외버스타고 다시 또 버스타고. 1시간이면 올 거리를 2시간은 족히 걸린 듯하다. 그래도 집 나올 땐 꾸물꾸물하던 날씨가 맑게 개여서 그걸로 괜찮다. 
 
발한삼거리에서 늘 지나던 묵호역 앞 대신 뒤편 골목길로 해파랑길이 이어진다. 여길 얼마나 왔다 갔다 했는데 이런 길이 있나 싶다. 지도를 보니 묵호역이 아닌 묵호항역으로 향한다. 묵호역이 아니라 묵호항역이라, 이것도 처음이다. 호기심에 길 이쪽저쪽을 둘러보니 어렸을 적 뛰놀던 골목들과 고개 마루다. 배고프단 핑계 삼아 향로시장으로 들어선다.
 
묵호는 묵호항이 석탄을 실어 날랐던 곳이어서 종종 거기서 잘 못 연상하기도 한다. 하지만 깊고 맑은 바닷물이 검게 보이는 것처럼 거기서 따왔다고 보는 것이 맞다. “이 곳은 물도 검고 바다도 검고 물새도 검으니 먹 묵(墨)자를 써서 묵호(墨湖)라고 하는 게 좋을 듯하구나."라는 유래는 곧 몸이 까만 새, 가마우지와도 연결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묵호항역은 화물을 실어 나르는 역이라 처음부터 광장이란 것도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역 바로 앞 길 건너편으로 집들이 붙어 있다. 하지만 오래 전에 비워졌는지 깨진 창들이며 열려진 문들, 무너져 내린 벽까지 을씨년스럽다. 역 안쪽에 뜬금없이 서 있는 돌하르방만이  쇄락한 마을을 지키고 있다.
 
빈집 지키는 개들 소리만 요란한 묵호항역을 뒤로하고 철길 따라 바다 쪽으로 향하니 작지만 아기자기한 모래사장이 나온다. 하평해변이다. 정식으로 문을 연 건 아닌데 그래도 사람들이 많다. 열풍이 불고 있는 캠핑 족들이 풍기는 고기 냄새만 아니라면 딱 발 담그고 놀기 좋으련만. 쫓기듯 냄새 때문에 자리를 뜬다.
 
멀리 묵호항이 내려다보이는 전망 좋은 정자가 가까이 있다. 아까 쉬지 못한 보상일까. 발 뻗고 바닷바람 맞으면 한참을 쉰다. 헌데 가만 보니 누군가 벗어놓고 간 신발 한 짝과 밀짚모자가 보인다. 해변은 아까 왔던 데까지 가면 꽤나 멀고, 정자 앞은 낭떠러지로 아래가 철길인데. 무슨 일이야 있겠냐싶지만 괜히 등골이 서늘해진다.
 
정자에서 내려오니 땡볕이다. 한낮을 피해 걷는다고 4시 다돼서 걷기 시작했는데도 이렇다. 대로 건너편은 그나마 그늘이 지는데 이쪽으론 해가 바로 머리 위다. 아까까진 좋았는데 괜한 걱정에 서둘러 나섰나 보다. 해가 잦아들 때까지 천천히 기다리며 한숨 자둘 것을. 어쩔 수 없다. 모자라도 푹 눌러쓰고 부채로 피해봐야지.
 
다행히 한섬해변에서부터 솔 숲 산책길이다. 강릉에서 한참을 걸었던 소나무 숲에 비하면 미니어처 같기도 하지만, 요리조리 소나무 사이를 피해가는 재미가 쏠쏠하다. 또 감로수가 나온다는 감추사(甘秋寺)를 지나서부터는 야생화가 잔뜩 핀 곳, 조릿대가 늘어선 곳, 기찻길 따라 바다도 보였다 안 보였다. 산책길이 다 같은 산책길이 아니네.
 
아이들 급식할 돈은 없다면서도 골프 사랑만큼은 지극하신 어느 도지사를 떠올리게 하는 골프장에서부터 산책길이 끝이다. 산책길이 끝났다는 건 곧 땡볕이라는 뜻. 동해역이 코앞이지만 그늘 하나 없는 길이 계속된다. 아무래도 오늘은 여기까진가보다. 어차피 추암은 버스 편이 좋지 않아 버스가 자주 다니는 곳 어디서 멈출 생각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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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날, 기찻길 따라 동해역에서 추암을 지나 삼척 증산마을까지(2016년 5월 14일)
 
강릉이 생각보단 외진 곳이라 연휴가 아니면 전라도나 경상도, 아니 충청도 쪽은 생각지도 못한다. 그래서 일 년에 한두 번 있을까하는 연휴 때면 곧장 밖으로 쏘다닌다. 덕분에 바닷길 걷기 속도가 느리다. 물론 바우길을 이어 붙여 걷는다고 시간을 보냈다지만. 2010년 2월 7일에 고성에서 출발했는데 이제 동해니, 말 다했다.
 
해서 이주 전에 지리산을 다녀와 조금은 피곤한데도 날 좋다는 핑계로 길을 나섰다. 생각해보면 땅끝에서 고성까진 한 달에 두, 세 번 걸을 때도 있었지만 3년 만에 다 걸었는데. 바닷길 걷기는, 맞다. 아직 반도 채 안 됐는데 5년 넘게 걸었으니. 아무래도 이러다간 10년은 족히 걸리지 않을 듯싶다. 허나 언제까지다 정해놓은 것 없으니 서두를 필요도 없다.
 
더구나 오늘처럼 강릉 살면서도 손꼽을 만치 파란 바다와 파란 하늘이 맞닿은 수평선을 볼 수 있는 날엔 더 그렇다. 그러니 한 번에 오는 시외버스대신 버스타고 다시 셔틀버스를 타야 하는 번거로움도 다 마다한다. 하지만 배고픔 앞엔 장사 없고 금강산도 식후경이다. 얼른 자장면이라도 한 그릇씩 후딱 비워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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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찻길 옆에 이런 길이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실은 해파랑길 홈페이지에서 지도를 출력할 때만 긴가민가했다. 아무리 봐도 여기로 가는 게 맞나. 헌데 버젓이 리본도 달려 있고 표시도 명확하다. ‘해파랑길 33코스 해물금길’. 처음엔 그래도 차가 다닐 만치 길이 뚜렷한데, 밭인지 공원인지 불분명한 곳도 지나고. 고가도로 밑을 지나더니 하천을 건너다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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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평과선교 밑을 지나고 나니 거의 모든 도시가 앞 다퉈 만들어내고 있는 예의 그 하천 옆 산책길로 연결된다. 다른 게 있다면 바다가 가깝고 물이 맑아서일까. 물고기 비늘처럼 반짝반짝 빛나는 강물에 낚싯대를 드리운 사람들이 많다는 것. 자전길과 산책길이 나누어져 있는 것부터 운동기구, 잔디밭, 의자, 운동장까지 강릉 남대천변과 엇비슷하다.  
 
산책길이 끝나니 바다다. 하지만 아까부터 눈에 거슬렸던 시멘트 공장이 바다 풍경을 가로막고 있다. 게다가 군부대 철조망까지 더해지니 이건 영 아니지 싶다. 그래도 잠깐이지만 철책을 끼고 소나무 숲길을 걸을 땐 조금 낫는가 싶었는데. 이번엔 미세먼지 주범, 화력발전소에 석탄을 실어 나르는 트럭이 쉼 없이 질주하는 대로다. 그것도 땡볕에.
 
추암을 바로 코앞에 두고 리본이 이쪽저쪽이다. 조각공원 쪽에도 보이고 지금껏 걸어왔던 공단길에도 바람에 날린다. 공사를 하고 있어서 더 그런지 모르겠는데, 암튼 길이 헛갈린다. 모로 가도 추암만 가면 되겠거니 싶은데 쉽지 않은 셈. 에라, 모르겠다. 일단 조각공원 쪽으로 올라선다. 그쪽이 바다도 가깝고 나무도 있으니 해는 피할 수 있겠지.
 
다행이 아까처럼 철조망을 바로 옆에 끼고 데크로 만든 길이 보이니 잘 찾아온 셈. 더구나 아찔한 절벽 옆에 있는 만큼 바다 풍경이 끝내준다. 또 촛대바위 하나 보겠다고 온 수 많은 사람들을 비켜서서 추암을 볼 수 있는 전망대로도 훌륭하다. 북평해암정하고 추암촛대만 건너뛰면 발 담그고 논 추암해수욕장까지. 해물금길 마지막 화룡점정(畵龍點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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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무 번째 여행에서 걸은 길
지난번부터 해파랑길을 걷는다. 앞으로도 쭉 그 길을 걸을지 바다를 따라 갈지 딱히 정하지는 않았다. 이번도 해파랑길을 걸었는데 아기자기한 맛이 바우길 못지않다. 아무래도 차도를 다니는 것보다 낫기도 하니 부산까진 이 길을 걸을 듯하다. 추암에서 묵호역까지 어이지는 33구간은 13.3km로 바삐 걸으면 반나절도 채 걸리지 않는다.   
 
* 가고, 오고
묵호역은 강릉역이 폐쇄되기 전엔 참 쉽게 갔을 터인데. 정동진까지 버스타고 가서 기차를 타던가, 터미널 가서 시외버스타고 또 버스타고 가던가. 암튼 1시간 남짓이면 될 것을 2시간 걸려 가야한다. 2017년 말까진 하는 수 없다. 
 
* 잠잘 곳, 먹을 곳
동해역에서 추암까지를 제외하면 곳곳에 먹을 곳, 잠잘 곳 천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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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3/17 09:56 2017/03/17 09: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