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 날, ‘유두류록(遊頭流錄)’길?, ‘빨치산루트’길?(2016년 5월 5일)
 
여전히 반대방향으로 걷느라 들머리가 된 동강마을에서 늦은 점심을 합니다. 당체 오가는 사투리가 암호마냥 알아들을 수 없는 긴 했지만요. 그래도 재미난 얘기도 듣고 반대쪽 길 소식도 좀 듣고요. 오늘처럼 햇볕이 따가운 날이 아니라도 잠시 쉬어가기 딱 좋은 팽나무를 못보고 시작하긴 했지만요. 오르막길 내내 선선히 부는 바람이 발걸음을 가볍게 합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둘레길 금계-동강 구간은 김종직(金宗直)이 쓴 '유두류록'을 따라 걷는 길로 알려졌습니다. 그가 함양군수로 있을 때 만든 <관영차밭조성터>가 가까운 동호마을에 있는 것부터 그렇구요. 동강마을 팽나무, 운서마을로 넘어가는 구시락재, 송대마을 함양독바위들은 고증을 거쳐 찾아낸 곳들이라고 하니요. 그도 그럴만 합니다.  
 
앞에 그냥 지나쳤던 팽나무도 그렇습니다. 수령이 600년이나 됐다는데요, 계온(季溫)이 관아를 출발해 이곳을 거쳐 지리산에 올랐다는 얘기를 들을 수 있습니다. 헌데 무엇이 그리 급했던지 그걸 놓친 거였지요. 필시 해가 지기 전에 금계를 거쳐 창원마을까지 가야한다는 부담 때문이었겠지요.   
 
사실 동강에는 지난번에도 지나친 재미난 얘기가 하나 더 있는데요. 바로 마을 입구에 있는, 엄천사 스님들이 '중이 바랑을 메고 가는 형국'이라며 깨려고 했다고도 하는, 짚신을 삼는데 쓰는 나무틀처럼 생겼다는 신틀바위가 그겁니다. 나중에야 여간해선 눈에 들어오지 않아 그냥 지나치기 일쑤라는 걸 알긴 했지만 말입니다.
 
구시락재까지는 아무리 오르막길이라 해도 뒤를 돌아보면 엄천강이 시원하게 보여 걸을만하지만요. 운서마을 쉼터를 지날 때까진 오르막과 내리막이 반복되면서 힘을 뺍니다. 그것도 경사가 급합니다. 결국 자주 쉬어 가야겠는데, 어찌된 게 아무렇게나 앉아 쉬었다 출발하면 바로 앞에 정자(亭子)가, 의자가 있습니다. 조금 약이 오르지만 하는 수 없지요.
 
다음날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기는 하지만, 송문교까지 가는 길에선 둘레길꾼들을 가장 많이 만나지 않았나 싶습니다. 짝지어 오거나 단체로 때론 혼자서. 어색하지만 인사말도 건네 보고요, 커피까지 타 먹게 해 놓은 쉼터에서 급한 볼일도 보고요, 용을 닮아 와룡대라 불리는 소나무 바위도 너머보고요. 심심할 새가 없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데도 세동마을서 모전마을까진 안내판이 친절하지 않습니다. 그냥 아스팔트길을 따라 가면 되긴 하지만요. 난데없이 나타난 [지리산 둘레길 전설 탐방로]라는 표지가 헛갈리게 합니다. 뭐 뜨끈한 길에서 내려다보자면요. 농로로 이어지기도 하고 강가에 바짝 붙어 있기도 하니요. 그쪽이 훨씬 걷는 재미가 많아 보이긴 합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동강-금계 구간은 ‘빨치산루트’라고도 불립니다. 전쟁이 끝나고도 10년이나 더 산속에 있었던 이은조가 죽었다는 선녀골과 그 주변 비트들 때문입니다. 또 가까운 벽송사 뒤편 능선을 따라서도 흔적이 여기저기 있습니다. 물론 산청 쪽에도 마지막 빨치산 정순덕이 사로잡혔던 고향 집이 있으며, 하동 쪽도 꽤 많은 자취들이 남아있습니다.*
 
그러니 시간만 된다면야 그 길들을 되짚어 가는 것도 좋을 듯싶습니다만. 송대마을까지 올라야 제대로 된 안내판을 만나게 되니까요. 갈림길인 모전마을에선 알 수가 없다는 핑계, 서둘러 걷지 않으면 숙소로 정한 창원마을까지 어렵겠다는 판단. 벽송사로 이어지는 산길 대신 둘러가는 길로 접어드니 못내 아쉽기만 합니다.     
 
그늘 하나 없던 딱딱한 길을 버리고 숲길로 들어서기 전 잠시 쉬어갑니다. 하지만 철모르게 일찍 나온 모기 때들이 어찌나 극성이던지요. 곧 만나게 될 급한 오르막과 너덜겅을 앞두고, 아홉 마리 용과 마적도사 얘기는 그렇다해도. 별 소용도 없는 댐 짓겠다고 아우성치는 바람에 몸살을 앓고 있는 용유담도 제대로 못봅니다. 첫 여행 때도 그랬는데 지리산 모기, 꽤나 성가십니다.
 
매번 그랬지만 안내 책자나 둘레길 홈페이지에 나온 거리에 따른 시간은 별 도움이 안 된다는 걸 또 겪습니다. 4시간이면 충분할 거라던데, 모전마을에서부터 시작된 숲길을 지나 의중마을에 내려서니 벌써 6시 입니다. 급한 오르막길 이후 너덜겅과 오르막, 내리막이 이어져 생각보다 오래 걸었다고 해도, 4시간 반이나 지났네요.
 
사용자 삽입 이미지
 
 
둘레길 함양센터 앞에서 미리 예약한 민박집에 연락하니 40분이면 올라올 수 있을 거라 합니다. 후아, 40분이라. 줄기차게 올라야 하는 산길임을 감안하면 쉬고 있을 때가 아닌 것 같습니다. 헌데 무슨 깡인지 평상에 올라 대(大)자로 눕습니다. 아마 오르막길이 험하면 얼마나 험할까 얕잡아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정말 숨이 턱 밑까지 차오르는 산길을 한 번 제대로 쉬지 않고 내리 걸어 숲길에서 나오니 딱 40분이 걸렸습니다. 다행히 어둑어둑해지기 전에 도착했지만요. 또 민박집 주인장 걷는 모양새를 보고나서야 왜 40분이라고 했는지 알게 됐지만요. 역시 지리산 둘레길은 순례길이란 생각에 고개가 절래절래. 밥이고 뭐고 또 팔다리 쫙 펴고 눕습니다.       
 
 
 
* 인민군 야전병원으로도 사용됐던 벽송사 뒷산의 선녀굴로 피한 마지막 빨치산은 이은조와 정순덕 외에 이홍이가 있었습니다. 휴전이 되고도 근 10년 가까이 은신했던 이들 가운데 1962년 이은조가 가장 먼저 사살됐습니다. 살아남은 정순덕과 이홍이는 고향인 산청으로 피신하게 되구요. 하지만 다음해 이홍이 역시 경찰에 피살됩니다. 정순덕만이 총에 맞은 채 붙잡히게 된 것이지요. 체포된 정순덕은 무기징역형을 선고받고 20년 넘게 옥살이 하다 1985년에야 전향서를 쓰고 출옥합니다. 하지만 이 전향서 때문에 미전향장기수들이 북으로 돌아갈 수 있었음에도 거부당하게 됩니다. 마지막 빨치산 정순덕은 2004년 인천의 한 병원에서 파란만장했던 삶을 마감하게 됩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17/07/26 13:38 2017/07/26 13:38
사용자 삽입 이미지첫째 날, 2년 만에 다시 찾은 둘레길, 따뜻이 품어주다(2014년 10월 10일)
 
만만치 않을 거라 생각했으나 그리 호되게 고생할 줄 몰랐던 게 지지난 여름입니다. 그리고 2년 하고도 3개월여 만에 다시 둘레길을 찾았습니다. 한 여름에, 그것도 하루에 두 구간을 걷겠다는 게 말도 안 된다는 걸 다음날 알게 됐고. 지금 와 달리 할 말은 없지만, 둘레길 역시 지리산 자락이라는 것. 그래서 여느 걷는 길과는 다르게 맘을 잡았어야 했었습니다.
 
그래서 이번엔 걷기에 딱 좋은 가을 날, 하루 5시간 내외로만 걷기로 작정하고 길을 잡았습니다. 남명 조식이라는 이름이 곳곳에 보이는 덕산에서 청계호수를 바라보는 곳까지 오늘 오후 반나절. 내일은 아침 일찍 웅석봉을 넘어 재작년 여름 이틀 동안 편히 쉬었던 성심원까지. 그렇게 말입니다.
 
일단 출발은 좋습니다. 맑은 가을 하늘에 바람이 솔솔 불어오는 게. 길 양옆 한 없이 늘어선 감나무들을 사이를 지나자마자 시작되는 긴 오르막길도 땀 흐를 새가 없으니요. 한적한 임도로 접어들면서는 시원한 계곡물 소리까지 줄곧 따라오니, 걷기엔 금상첨화입니다. 다만 마근담교를 지나자 만나게 되는 가파른 오르막길엔 잠시 숨이 가파릅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하지만 코가 닿을 만치 가파른 오르막 산길을 오르고 나면 어디서 이만한 참나무들이 있나 싶은 숲길이 기다리니 꾹 참을만합니다. 이때쯤 잠깐 숨도 돌리고 출출한 배도 채우고 가기 알맞지요. 그렇게 쉬다 한 발 내딛을 때마다 밟히는, 행여 머리에 떨어질까 싶은 도토리가 지천인 길을. 다람쥐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다보면, 곧 대죽 숲길에 내리막입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원래 진행방향 쪽에서 왔다면 가쁜 숨과 흐르는 땀에 시원하게 얼굴과 목이라도 훔칠 텐데. 한참 내리막길을 내려온 데다. 부쩍 쌀쌀해진 날씨도 그렇고 해서 백운계곡에선 손만 담그고 맙니다. 그래도 얼추 남은 거리를 보니 앞으로 2시간이면 충분 할 듯. 물장구도 치고 시간가는 줄 모르고 노닙니다.
 
산길이 끝나고 다시 딱딱한 아스팔트를 따라 내려오니 원정마을, 단속사지*가 금방입니다. 하지만 워낙 큰 산들이 둘러싸고 있어 5시가 안 됐는데도 어둑어둑하네요. 여기서 잘 거라면 모르겠지만. 청계마을까지 가야하니 잠시도 쉴 틈이 없습니다. 그래도 왠지 모르게 3층탑은 보고 가야할 것 같은 데, 다행히 길 가에서 멀지 않습니다.
 
청계호수로 가는 마지막 오르막길에 산 너머로 빨간 노을이 집니다. 저 노을, 언제 또 봤을까 싶은데. 가만 생각해 보니 지리산 자락을 걸을 때 늘 보여주던 수줍은 얼굴입니다. 붓으로 그려 넣은 것 같은 산줄기도 그렇고. 힘이 부칠 때면 어김없이 쉴 곳과 내리막을 내놓는 곳. 그렇게 또 지리산은 따뜻이 품어주고 있습니다.
 
 

둘째 날, 잠시나마 세상과 인연을 끊고 걷는 길(2014년 10월 11일)

 
사용자 삽입 이미지
 
어제 밤늦게까지 이어진 술자리 때문에 일정이 아침부터 어그러지고 있습니다. 일찍 길을 나서 점심 먹을 때쯤엔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에 있으려 했는데. 아침을 9시가 다 돼서야 먹은 데다, 밥 먹고 잠깐 누웠다 씻고 하니 그새 10시. 서둘러야겠습니다. 다행히 단속사지는 어제 둘러봤으니. 호수를 끼고 돌아 성불정사로 오르는 길로 접어듭니다.
 
해장도 제대로 못했으니 속은 속대로 좋지 않은데 길마저 긴 오르막입니다. 그것도 자갈길과 아스팔트가 번갈아가며. 당연지사 자주 쉴 수밖에 없고, 시간은 배 넘게 걸리는 듯합니다. 반대편에서 힘겹게 산을 올랐다 긴 내리막 임도를 걷는 사람들이 볼라치면. 연신 얼마나 남았느냐 물어보지만 야속한 대답만 돌아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겨우 웅석봉 아래에 도착하고 보니 벌써 2시. 4시간을 주구장창 오르기만 한 셈입니다. 간식도 먹고 땅에 굴러다니는 도토리도 줍고. 높이 오르긴 올랐나, 어느새 빨갛고 노랗게 물든 단풍도 보고. 아는 노래 모르는 노래 중얼중얼. 둘레길 걸으면서 언제 또 이 많은 사람들 만날까 싶게, 만나는 사람들마다 정답게 인사도 해보지마. 힘든 건 어쩔 수 없습니다.
 
그래도 이제부턴 내리막이다 싶으니, 시간이 늦었어도 정자에 누워 신발까지 벗어젖힙니다. 그나마 입으로 풍겨나던 술기운은 좀 가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쫄쫄 굶고 걸어야 할 생각을 하니 일어날 기운이 없네요. 주먹밥을 싸달라고 했어야했는데, 이제와 생각났으니 말입니다. 이래저래 쉬어도 쉬는 게 아닙니다.
 
그렇게 한참을 누워있다 보니, 엊저녁 술자리를 함께 했던 이들이 저쪽 고개 아래서 올라옵니다. 술 마실 땐 그리 친한 척 하게 되더니만. 아침 먹을 때도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집니다. 뭐지, 이 서먹함. 잠깐 언제 출발했느냐, 조금 더 가면 앞지르겠다, 말을 섞어보지만 금세 일어나게 되네요. 말이야 맞는 말이지, 더 쉬었다간 일 나겠다 싶기도 하니까요.
 
사용자 삽입 이미지
 
분명 꼴딱고개를 넘는 거 보다는 낫다고 했는데, 이건 오르는 게 되레 나을지 싶습니다. 어찌나 가파른 내리막길인지요. 미끄러져 엉덩방아 찧기도 여러 차례. 휘청하며 크게 구르지 않은 게 다행이지 싶습니다. 단풍구경이고 뭐고 한 발, 한 발. 조심조심 또 조심. 올라가는 것만치로 내려가는 것도 힘들고. 다행인지 시간 가는 줄만은 모릅니다.
 
그래도 어천계곡을 지나고 나니 길이 좋아지는데. 가만, 어디서 많이 본 길 같습니다. 키 큰 소나무가 쭉쭉 뻗어있고, 그 사이로 푹신한 숲길이. 버스로만 6시간을 걸려서 온 이곳에서 강릉 바우길과 같은 소나무 숲길을 만난 것입니다. 갑자기 어디서 솟았는지 반가움에 발걸음까지 가벼워집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둘레길 이정표로는 어천계곡에서 얼마 안 되는 것 같았는데. 성심원 게스트하우스에 도착하니 5시네요. 남들은 5시간 만에 걷는 다는 길을 7시간이 걸려 도착한 겁니다. 그러니 몸과 마음은 어련할까요. 염치불구하고 바구니에 담긴 사탕부터 까먹고 매점으로 달려갑니다. 산청까지 가는 버스 시간만 겨우 물어보고 말이지요.
 
금방 온다던 군내버스를 20분 넘게 기다리다 겨우 산청터미널로, 산청에서 다시 함양터미널로. 또 대구터미널로. 대구에선 서부정류장에서 북부정류장으로 택시타고 이동. 거기서 심야버스를 타고 4시간 넘게 달려 강릉에 도착하니, 새벽 1시입니다. 걷는 내내 그랬고, 버스도 그렇고. 둘레길, 역시 만만하게 볼 게 아닙니다. 아고, 힘드네요.
 
 
* 지리산 자락에는 크고 작은 절들이 그 이름을 널리 떨치고 있습니다. 하동의 쌍계사와 칠불사, 남원의 실상사, 유평의 대원사, 구례의 화엄사, 마천의 벽송사, 중산리의 법계사. 이만하면 그것들만으로도 골짜기, 골짜기 깊은 침묵과 관조로 이끌기 충분합니다. 거기다 수를 다 따지기도 어려울 만치 이쪽, 저쪽에 흩어져 있는 폐사지(廢寺址)까지 둘러본다면 더 말할 것이 없겠지요. 그 중에서도 세속과의 인연을 끊는다는 절, 단속사지(斷俗寺址)는 여러 폐사지들 가운데 단연 돋보입니다. 물론 남아있는 두 동, 서 탑(塔)이 보물로 지정돼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탑과는 무관한 듯 무심히 서 있는 당간지주도 그렇고. 이제는 절터를 중심으로 마을이 들어서 단속사(團屬寺)가 된 모습이 처량하지만은 않기 때문일 듯합니다.
 
 
* 지리산 둘레길 걷기 두 번째 여행에서 걸은 길
첫 날은 덕산에서 백운계곡과 운리를 차례로 지나 청계호수까지 걸었고, 다음 날은 웅석봉 턱밑까지 올랐다 성심원까지 줄곧 내려갔습니다. 덕산에서 청계호수까지는 대략 15km, 청계호수에서 성심원까지는 13km 정도 될 듯합니다.
 
* 가고, 오고
강릉에서 지리산까지는 대전을 거쳐 가는 것이 빠릅니다. 여기서 산청은 함양이나 진주로 가서 다시 버스를 갈아타니, 차를 기다리는 시간을 감안하면 적어도 6시간은 걸립니다. 다만 강릉으로 돌아올 때 대구를 거쳐서 왔던 이유는 대전보다 늦게까지 버스가 있기 때문입니다.
 
* 잠잘 곳
청게호수 주변에는 민박과 펜션이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식당은 덕산과 어천마을을 제외하고는 눈에 보이는 곳이 없습니다. 길을 나서기 전에 간식과 물은 충분히 챙겨야 하고 식사는 민박집에 미리 얘기해야 합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15/05/03 15:19 2015/05/03 15:19
둘째 날, 무더위에 지쳐 겨우 덕산까지 걷고 성심원으로 향하다(2012년 7월 28일)
 
아침에 일어나니 어제 밤 나물을 다듬던 옆 방 일행들은 편백나무 숲으로 산책을 나갔다고 한다. 누군 아무리 늦게 도착해 녹초가 됐다고는 해도, 참 부지런들 하다. 그나저나 빨래가 하나도 마르질 않았다. 새벽 서리를 맞은 건지, 피곤한 몸에 꼭 짜질 못해서인지 모르겠지만. 배낭에 주렁주렁 매달고 가야할 생각을 하니 식전부터 심란하다. 하지만 어째, 일단 밥부터 묵고, 냉장고에서 얼린 물과 빈 생수통을 바꾸고, 어제 일을 교훈 삼아 단단히 맘을 먹고 출발한다. 다만, 오늘 잘 곳이 마땅치 않으니 덕산까지만 걷기로 하고.
 
위태를 감싸 안은, 안개인지 구름인지가 걷히니 아침인데도 또 땡볕이다. 갈치재에서 만난 대나무 숲도, 유점마을 느티나무 그늘 아래 평상도, 더위를 피하기는 쉽지 않다. 점심때도 멀었건만 벌써 얼음물은 반 이상 녹았고. 길 옆 감나무가 늘어선 긴 내리막길을 지나 겨우 도착한 중태마을 안내소에 도착히니 얼음은커녕 물도 없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한 사람도 만나지 못했다며 느닷없이 사진찍자 달려든 부부 때문에 잠깐 웃기는 했지만. 이래서야 어디 덕산까지 갈 수 있을까.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자꾸만 여서 자고 가라는 할마시들을 뒤로하고 땡볕에 다시 길을 나서니 다들 걱정스런 얼굴이다. 하긴 제 정신이 아니면 이 더위에 어찌 걸을 생각을 할까. 외지에서 온 사람들이나 되니 기어코 길을 나설 터이니. 할마시들로서는 이해가 되질 않을 터이다.

 
11시가 넘어 중태마을을 출발해 1시가 다 되 덕산에 도착했으니 시간상으론 겨우 3시간을 걸었을 뿐인데. 천평마을 못 미쳐 2층 평상에서 대자로 뻗어 쉬었고. 이글이글 타오르는 아스팔트길을 느릿느릿. 달팽이 기어가듯 걸었으니 걸은 길은 얼마 되지 않을 듯. 하지만 얼굴뿐만 아니라 종아리, 허벅지까지 뜨끈뜨끈. 배는 등에 붙고 기력은 완전 소진. 여서 더 갈 수 없다는 게 되레 다행이지, 싶다. 그런데도 맛난 걸 먹겠다고 이리저리 왔다 갔다. 몸만 더 고생이다.
 
셋째 날, 해질녘 강 따라 걷는 길, 성심원에서 산청읍까지(2012년 7월 29일)
 
하늘이 도왔나, 여름 성수기 때 방구하기가 쉽지 않을 터인데. 이 보다 더 좋은 민박을 구할 수 있을까 싶은 곳에 자리를 잡았다. 둘레길 안내소와 게스트하우스가 있는 경호강가 성심원.
 
어제 낮, 밥을 먹고 쉴만한 곳을 찾아 대원사까지 갔었지만 가는 곳마다 인산인해(人山人海). 여기저기 전화를 돌려보지만 역시나 방 없음 또는 턱도 없는 방 값. 이거 집에 가야 하나 전전긍긍하고 있던 차에 생각난 것이 당초 모래 자기로 했던 성심원이었는데.
 
방도 2개에 샤워실과 화장실이 따로 있고, 밥은 식당에서 먹긴 했지만 취사시설까지 있으니. 둘이 머물기엔 호사가 아닌가도 싶다. 게다가 덕산에서부터 성심원까지 건너뛰긴 했어도. 실은 백운계곡이니 웅석봉이니 하는 산들을 넘는 게 여간 부담이 되지 않아 다행이지 싶지만. 여기서 다시 둘레길을 이어가면 될 듯싶고.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조용하고 고즈넉한 분위기에 늘어지게 책도 보고 산책도 할 수 있겠다 싶어, 하루 더 빌리기로 한 것이다. 해서 어제, 오늘 이방에서 저방으로 뒹굴뒹굴, 책보다 밥 먹고 낮잠 자고. 해질녘이 돼서야 산책도 할 겸 산청까지 쉬엄쉬엄 걸었다.

 

길을 잘 못 들어 과수원을 가로질러 가기도 걷기도 하고. 산한만 개에 놀라 뛰다시피 걷기도 하고. 여름철 물놀이며 래프팅을 즐기는 사람들이 내뿜는 매연을 피해 걷기도 하고. 노을 지는 강이 이뻐 한동안 멍하니 바라보기도 하고, 그러면서 말이다.

 

* 지리산 둘레길 걷기 첫 번째 여행에서 걸은 길
보통 둘레길은 시계방향으로 걷지만, 반대 방향으로 걸었다. 하동호-삼화실, 위태(상촌),-하동호, 덕산(사리)-위태 구간을 삼화실 바로 아래 이정마을에서부터 덕산으로 걸은 것. 여기에 덧붙여 수철-어천 구간 중 풍현(성심원)에서 바람재를 넘어 산청읍까지 산책하듯 걸었다. 첫째 날은 이정마을에서부터 위태까지 약 21km, 둘째 날은 위태에서 덕산까지 10km 남짓, 셋째 날은 6km 정도.
 
* 가고, 오고
태백에서 지리산까지는 가는 길이 만만치 않다. 버스로든 기차로든 여러 번 갈아 타야하고 시간도 많이 걸리기 때문이다. 뭐든 대략 6시간 내지 7시간 정도 걸리는데, 대구 쪽으로 가야 자주 있다.
 
* 잠잘 곳
이정마을과 바로 옆 삼화실에는 민박과 게스트하우스가 있으니 출발지로는 안성맞춤이다. 하동호 주변, 궁항리, 위태, 중태에는 숙박할만한 곳이 여럿 있으니 적당한 곳에서 쉬어 가면된다. 성심원에는 게스트 하우스가 있는데 식당 이용은 사전에 알아봐야 한다. 때맞춰 자원활동을 하러 온 이들이 있다면 저렴한 가격에 밥을 먹을 수도 있으니. 지리산 둘레길 공식 홈페이지에는 교통편, 숙박, 음식 등에 대한 더 자세한 후기들이 많으니 꼭 봐야 한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12/10/18 08:49 2012/10/18 08: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