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자 삽입 이미지첫째 날, 2년 만에 다시 찾은 둘레길, 따뜻이 품어주다(2014년 10월 10일)
 
만만치 않을 거라 생각했으나 그리 호되게 고생할 줄 몰랐던 게 지지난 여름입니다. 그리고 2년 하고도 3개월여 만에 다시 둘레길을 찾았습니다. 한 여름에, 그것도 하루에 두 구간을 걷겠다는 게 말도 안 된다는 걸 다음날 알게 됐고. 지금 와 달리 할 말은 없지만, 둘레길 역시 지리산 자락이라는 것. 그래서 여느 걷는 길과는 다르게 맘을 잡았어야 했었습니다.
 
그래서 이번엔 걷기에 딱 좋은 가을 날, 하루 5시간 내외로만 걷기로 작정하고 길을 잡았습니다. 남명 조식이라는 이름이 곳곳에 보이는 덕산에서 청계호수를 바라보는 곳까지 오늘 오후 반나절. 내일은 아침 일찍 웅석봉을 넘어 재작년 여름 이틀 동안 편히 쉬었던 성심원까지. 그렇게 말입니다.
 
일단 출발은 좋습니다. 맑은 가을 하늘에 바람이 솔솔 불어오는 게. 길 양옆 한 없이 늘어선 감나무들을 사이를 지나자마자 시작되는 긴 오르막길도 땀 흐를 새가 없으니요. 한적한 임도로 접어들면서는 시원한 계곡물 소리까지 줄곧 따라오니, 걷기엔 금상첨화입니다. 다만 마근담교를 지나자 만나게 되는 가파른 오르막길엔 잠시 숨이 가파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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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코가 닿을 만치 가파른 오르막 산길을 오르고 나면 어디서 이만한 참나무들이 있나 싶은 숲길이 기다리니 꾹 참을만합니다. 이때쯤 잠깐 숨도 돌리고 출출한 배도 채우고 가기 알맞지요. 그렇게 쉬다 한 발 내딛을 때마다 밟히는, 행여 머리에 떨어질까 싶은 도토리가 지천인 길을. 다람쥐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다보면, 곧 대죽 숲길에 내리막입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원래 진행방향 쪽에서 왔다면 가쁜 숨과 흐르는 땀에 시원하게 얼굴과 목이라도 훔칠 텐데. 한참 내리막길을 내려온 데다. 부쩍 쌀쌀해진 날씨도 그렇고 해서 백운계곡에선 손만 담그고 맙니다. 그래도 얼추 남은 거리를 보니 앞으로 2시간이면 충분 할 듯. 물장구도 치고 시간가는 줄 모르고 노닙니다.
 
산길이 끝나고 다시 딱딱한 아스팔트를 따라 내려오니 원정마을, 단속사지*가 금방입니다. 하지만 워낙 큰 산들이 둘러싸고 있어 5시가 안 됐는데도 어둑어둑하네요. 여기서 잘 거라면 모르겠지만. 청계마을까지 가야하니 잠시도 쉴 틈이 없습니다. 그래도 왠지 모르게 3층탑은 보고 가야할 것 같은 데, 다행히 길 가에서 멀지 않습니다.
 
청계호수로 가는 마지막 오르막길에 산 너머로 빨간 노을이 집니다. 저 노을, 언제 또 봤을까 싶은데. 가만 생각해 보니 지리산 자락을 걸을 때 늘 보여주던 수줍은 얼굴입니다. 붓으로 그려 넣은 것 같은 산줄기도 그렇고. 힘이 부칠 때면 어김없이 쉴 곳과 내리막을 내놓는 곳. 그렇게 또 지리산은 따뜻이 품어주고 있습니다.
 
 

둘째 날, 잠시나마 세상과 인연을 끊고 걷는 길(2014년 10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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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밤늦게까지 이어진 술자리 때문에 일정이 아침부터 어그러지고 있습니다. 일찍 길을 나서 점심 먹을 때쯤엔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에 있으려 했는데. 아침을 9시가 다 돼서야 먹은 데다, 밥 먹고 잠깐 누웠다 씻고 하니 그새 10시. 서둘러야겠습니다. 다행히 단속사지는 어제 둘러봤으니. 호수를 끼고 돌아 성불정사로 오르는 길로 접어듭니다.
 
해장도 제대로 못했으니 속은 속대로 좋지 않은데 길마저 긴 오르막입니다. 그것도 자갈길과 아스팔트가 번갈아가며. 당연지사 자주 쉴 수밖에 없고, 시간은 배 넘게 걸리는 듯합니다. 반대편에서 힘겹게 산을 올랐다 긴 내리막 임도를 걷는 사람들이 볼라치면. 연신 얼마나 남았느냐 물어보지만 야속한 대답만 돌아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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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 웅석봉 아래에 도착하고 보니 벌써 2시. 4시간을 주구장창 오르기만 한 셈입니다. 간식도 먹고 땅에 굴러다니는 도토리도 줍고. 높이 오르긴 올랐나, 어느새 빨갛고 노랗게 물든 단풍도 보고. 아는 노래 모르는 노래 중얼중얼. 둘레길 걸으면서 언제 또 이 많은 사람들 만날까 싶게, 만나는 사람들마다 정답게 인사도 해보지마. 힘든 건 어쩔 수 없습니다.
 
그래도 이제부턴 내리막이다 싶으니, 시간이 늦었어도 정자에 누워 신발까지 벗어젖힙니다. 그나마 입으로 풍겨나던 술기운은 좀 가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쫄쫄 굶고 걸어야 할 생각을 하니 일어날 기운이 없네요. 주먹밥을 싸달라고 했어야했는데, 이제와 생각났으니 말입니다. 이래저래 쉬어도 쉬는 게 아닙니다.
 
그렇게 한참을 누워있다 보니, 엊저녁 술자리를 함께 했던 이들이 저쪽 고개 아래서 올라옵니다. 술 마실 땐 그리 친한 척 하게 되더니만. 아침 먹을 때도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집니다. 뭐지, 이 서먹함. 잠깐 언제 출발했느냐, 조금 더 가면 앞지르겠다, 말을 섞어보지만 금세 일어나게 되네요. 말이야 맞는 말이지, 더 쉬었다간 일 나겠다 싶기도 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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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꼴딱고개를 넘는 거 보다는 낫다고 했는데, 이건 오르는 게 되레 나을지 싶습니다. 어찌나 가파른 내리막길인지요. 미끄러져 엉덩방아 찧기도 여러 차례. 휘청하며 크게 구르지 않은 게 다행이지 싶습니다. 단풍구경이고 뭐고 한 발, 한 발. 조심조심 또 조심. 올라가는 것만치로 내려가는 것도 힘들고. 다행인지 시간 가는 줄만은 모릅니다.
 
그래도 어천계곡을 지나고 나니 길이 좋아지는데. 가만, 어디서 많이 본 길 같습니다. 키 큰 소나무가 쭉쭉 뻗어있고, 그 사이로 푹신한 숲길이. 버스로만 6시간을 걸려서 온 이곳에서 강릉 바우길과 같은 소나무 숲길을 만난 것입니다. 갑자기 어디서 솟았는지 반가움에 발걸음까지 가벼워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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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레길 이정표로는 어천계곡에서 얼마 안 되는 것 같았는데. 성심원 게스트하우스에 도착하니 5시네요. 남들은 5시간 만에 걷는 다는 길을 7시간이 걸려 도착한 겁니다. 그러니 몸과 마음은 어련할까요. 염치불구하고 바구니에 담긴 사탕부터 까먹고 매점으로 달려갑니다. 산청까지 가는 버스 시간만 겨우 물어보고 말이지요.
 
금방 온다던 군내버스를 20분 넘게 기다리다 겨우 산청터미널로, 산청에서 다시 함양터미널로. 또 대구터미널로. 대구에선 서부정류장에서 북부정류장으로 택시타고 이동. 거기서 심야버스를 타고 4시간 넘게 달려 강릉에 도착하니, 새벽 1시입니다. 걷는 내내 그랬고, 버스도 그렇고. 둘레길, 역시 만만하게 볼 게 아닙니다. 아고, 힘드네요.
 
 
* 지리산 자락에는 크고 작은 절들이 그 이름을 널리 떨치고 있습니다. 하동의 쌍계사와 칠불사, 남원의 실상사, 유평의 대원사, 구례의 화엄사, 마천의 벽송사, 중산리의 법계사. 이만하면 그것들만으로도 골짜기, 골짜기 깊은 침묵과 관조로 이끌기 충분합니다. 거기다 수를 다 따지기도 어려울 만치 이쪽, 저쪽에 흩어져 있는 폐사지(廢寺址)까지 둘러본다면 더 말할 것이 없겠지요. 그 중에서도 세속과의 인연을 끊는다는 절, 단속사지(斷俗寺址)는 여러 폐사지들 가운데 단연 돋보입니다. 물론 남아있는 두 동, 서 탑(塔)이 보물로 지정돼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탑과는 무관한 듯 무심히 서 있는 당간지주도 그렇고. 이제는 절터를 중심으로 마을이 들어서 단속사(團屬寺)가 된 모습이 처량하지만은 않기 때문일 듯합니다.
 
 
* 지리산 둘레길 걷기 두 번째 여행에서 걸은 길
첫 날은 덕산에서 백운계곡과 운리를 차례로 지나 청계호수까지 걸었고, 다음 날은 웅석봉 턱밑까지 올랐다 성심원까지 줄곧 내려갔습니다. 덕산에서 청계호수까지는 대략 15km, 청계호수에서 성심원까지는 13km 정도 될 듯합니다.
 
* 가고, 오고
강릉에서 지리산까지는 대전을 거쳐 가는 것이 빠릅니다. 여기서 산청은 함양이나 진주로 가서 다시 버스를 갈아타니, 차를 기다리는 시간을 감안하면 적어도 6시간은 걸립니다. 다만 강릉으로 돌아올 때 대구를 거쳐서 왔던 이유는 대전보다 늦게까지 버스가 있기 때문입니다.
 
* 잠잘 곳
청게호수 주변에는 민박과 펜션이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식당은 덕산과 어천마을을 제외하고는 눈에 보이는 곳이 없습니다. 길을 나서기 전에 간식과 물은 충분히 챙겨야 하고 식사는 민박집에 미리 얘기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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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5/03 15:19 2015/05/03 15: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