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자 삽입 이미지지금까지 역사는 인간이라는 종(種)이 걸어온 자취를 기록한 것이었습니다. 그것도 진보(進步)라는 이름으로 말이지요. 가령 석기시대니 청동기시대, 철기시대를 거쳐 호모오일리쿠스로 진화하거나 수렵채취와 정착농경을 거쳐 산업혁명, 정보사회로 변화했다는 그 어떤 설명이라도 말입니다. 
 
하지만 호모 에렉투스니 호모 사피엔스사피엔스니 하는 현생인류의 조상으로부터 시작된 이 역사를 대략 46억년 정도라고 알려진 지구의 나이와 비교해본다면. 그렇습니다. 인간의 역사는 티끌만치도 안 되는 시간을 기록한 것이며, 인간 이외의 것들에 대해서는 그다지 알려주는 게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인간이 출현한 직후뿐만 아니라 그 이전 지구의 모습이 어떠했는지, 인간 이외 다른 동물과 식물들이 어떤 변화를 겪었는지를 알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저 고고학적 연구를 통해 추정하고 추측할 수 있을 뿐이지요. 그리고 이 지구상엔 문자를 쓰는 종(種)이 인간뿐인지라, 어찌 보면 그런 서술방식밖에 나올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클라이브 폰팅은 이런 역사 서술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합니다. 그가 쓴 <The Green History of the World: 녹색세계사>에는 우리가 알고 있고, 우리가 배워왔던 역사에선 외면했던 이야기들, 아니 감추고 싶었던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지구상에서 가장 앞선 문명을 건설했다고 알려진 이스터 섬 사회가 어떤 이유로 사라졌는지를 시작으로 진보의 역사 뒤에 숨겨진 파괴의 역사를, 인간이 출현하면서부터 시작된 지구 환경 파괴의 역사를 써낸 것이지요.
 
더불어 폰팅은 역사란 인간이 걸어온 자취만을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복잡하게 상호 관련된 지구 환경을 함께 기술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럴 때에야 만이 인류라는 종 앞에 놓인, 아니 지구 앞에 높인 환경 위기에 대해 ‘녹색’ 문명사적 반성이 가능하다는 것이지요.   

 

현재의 환경 상태와 앞으로의 전망에 대한 책은 많아도 먼 과거까지 거슬러 올라가거나 환경이 어떻게 인간의 역사를 결정지었는지에 대해 서술한 책은 거의 없었으며, 기초까지 파고들어 가서 내가 보기에는 중요한 질문들을 던진 책은 아예 없었다. 그래서 나는 세계 역사를 ‘녹색’ 시각에서 보는 책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p.12

 

글을 쓴 이는 제1세계인입니다. 저자의 말대로 “‘녹색’ 주제가 단순한 자연 세계의 상태에 대한 문제가 자원과 에너지의 사용, 빈부의 격차, 사람들이 어떻게 사람들을 대하는 가의 문제, 그리고 그들이 살고 있는 세계에 대한 사람들의 사고방식의 문제”임이 틀림없다면. 좀 더 솔직한 반성, 좀 더 솔직한 고백이 있었다면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물론 폰팅이 우려하는 것처럼 제3세계 나라들의 급속한 경제성장은 주목해야 할 부분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사다리 걷어차기’가 되지 않으려면 제1세계 나라들의 뼈아픈 반성과 고백이 먼저 있어야 하겠지요. 그리고 굶주리고 있는 제3세계 나라 사람들에게 그들이 가진 식량과 부를 넘겨줘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먼저 사다리를 타고 올라간 이들이 다른 사람들은 올라오지 못하도록 걷어차는 일밖에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런 약점에도 불구하고 <녹색세계사>는 지구 환경 위기에 대한 녹색문명사적 해석과 반성을 함에 있어 매우 중요하고 소중한 책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거의 유일한 지구 환경 파괴의 역사이기 때문이지요.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13/09/15 16:43 2013/09/15 16:43

또 ‘빨갱이’ 타령입니다. 물론 이번엔 직접적으로 ‘빨갱이’라 하지 않았지요. 다만 ‘운동권’ 출신, 그것도 ‘부총학생회장을 지낸 PD계열 인물’이라고만 했습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곧이어 조.중.동을 위시해 앞 다퉈 옮기며 물 타기를 할 게 뻔하니까요. 아니, 이미 시작됐습니다. ‘주임검사’와 ‘운동권’으로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벌써 여기저기서 기사들이 올라오고 있으니요. 한쪽에선 ‘언쟁’이니 ‘감정싸움’이니 하며 국회 내 공방을 전달하는 척하면서. 또 한쪽에선 본격적으로 ‘운동권’ 검사에 대한 이력을 세세히 소개하면서 말입니다.

 

사실 새누리당이나 조.중.동.일베 등으로 대표되는 보수들이 이런 짓을 벌이는 게 한, 두 번도 아니라 새삼스럽지도 않지만. 문제는 건건이 다 통하고 있다는 게 문제입니다. 대응할 만한 가치도 없다는 얘긴 하나마나한 소리고. 전형적인 ‘물 타기’라고 길길이 날뛰며 목소리만 높이는 것도 역시 하나마나한 대응입니다. 그래봐야 ‘좌파’, ‘운동권’, ‘진보’라는 말이 ‘빨갱이’와 자동 연상되는 걸 바꿀 수도 없고. ‘빨갱이’ 소리만 들어도 움츠러들고 목소리가 작아지는 것도 바꿀 수 없으니까요. 또 엊그제 아침, 용어 혼란으로 생긴 문제를 가지고 호들갑을 떨며 “교육현장의 역사 왜곡을 바로잡겠다.”는 대통령의 생각도 바뀌는 게 아니까요.

 

김동춘 교수(성공회대 사회학과)는 한국전쟁이 우리 사회에 남긴 유산(遺産)으로 ‘전쟁이 사회 운영원리로 내재화되고 냉전적 정치경제 질서가 가장 철저하게 착근된 사회’라고 했습니다. 한마디로 우리 사회는 여전히 ‘전쟁’중이라는 건데요. 여기서 논의를 더 진전시켜 이런 질문을 던져본다면 말입니다. 예컨대 우리는 이 ‘전쟁’을 누구와의 ‘전쟁’으로 기억하고 있는지, 또 바라보고 있는 지를 묻는다면. 맞습니다. 바로 이 질문에 대한 답이야말로 ‘빨갱이’면 다 통하는 우리 현실을 온전히 드러내 줍니다. 아직도 ‘빨갱이’와 ‘전쟁’을 하고 있는 마당이니요. ‘적’으로 간주된 이는 ‘사살’되거나 ‘포로’로써 무장해제를 당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또 힘없는 민중들은 정처 없이 ‘피난’을 떠날 수밖에 없다는 얘깁니다.  

 

북쪽이 대화를 제의하면서 남.북간 막혔던 통로가 열리는 가 싶었는데. ‘격’이 맞아야 대화를 할 수 있다는 남쪽 주장으로 분위기가 다시 가라앉았습니다. 6.15 행사는 반쪽행사로 끝났고, 북미 고위급회담도 ‘선(先)비핵화 조치’라는 압력에 막혀버렸습니다. 지난 ‘잃어버린 10년’을 돌이켜보면 한, 두 번 접촉으로 화해무드가 조성될 리가 없을 겁니다. 또 5.18 당시 ‘북한군이 침투’했다는 말을 공공연히 하는 마당에. 북쪽을 대화 상대자로 인정하는 것 또한 쉽진 않을 겁니다. 더구나 한반도는 여전히 ‘전쟁’상태인데다, 자국민마저 여차하면 ‘빨갱이’로 몰아세우는 판이니 말입니다.    

 

정연주 전 KBS사장은 <작은책>에서 행한 강연에는 37이라는 숫자를 반복해서 얘기했습니다. 지난 대선과 총선, 여론조사 결과 등등. 정 전 사장에 따르면 이 37이라는 숫자는 단순한 숫자가 아닙니다. 37은 우리 사회에서 흔들리지 않는 ‘뿌리 깊은’ 보수가 얼마나 되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숫자인 겁니다. 진보는 ‘빨갱이’인 셈이고, ‘빨갱이’는 곧 ‘종북세력’이며, ‘좌파’와도 한 몸, ‘운동권’, ‘전교조’, ‘민주노총’은 물론 ‘민주당’까지도 관련 된다고 여기는 사람들인 겁니다. 다시 말해 한국전쟁 이후 지난 반세기 동안 ‘포로’로써 무장해제를 당한 사람들인 것이지요. 여기에 ‘피난’ 떠나는 사람들까지 합하면. 맞습니다. 결코 이기기 쉽지 않습니다.  

 

‘핵’을 앞세운 카드를 만지작, 만지작하는 북쪽을 두둔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습니다. 다른 것도 아니고 ‘핵’이라는, 돌이킬 수 없는 파멸을 초래할 무기로 현 상황을 돌파하겠다는 생각은 결코 도움이 되질 않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한반도 평화는 물론이고 급격한 우경화의 길을 걷고 있는 일본과 미국에 견줄만한 군사력을 갖추기 위해 군비 증강에 나서고 있는 중국 등 동북아지역을 놓고 봤을 때도 그렇습니다. 하지만 벼랑 끝에 내몰린 초등학교 학생에게 헤비급 권투선수가 나서 한판 붙자고 하는 건 해결책이 될 수 없습니다. 고양이가 쥐를 몰 때도 도망갈 곳은 만들어놔야 한다는 말처럼. 마냥 몰아세워서는 일이 되질 않기 때문입니다. 

 

‘빨갱이’에 ‘빨’만 나와도 눈치를 봐야 하는 사회입니다. 아니 너도나도 손가락질이라 해야 살아남는 요상한 나라입니다. 그러니 정부를 향해 이제 그만 이 ‘전쟁’을 끝내자고 말하는 건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원칙을 지켜가면서 할 말은 해야 합니다. 그리고 필요하다면 행동도 해야 합니다. ‘민주주의’와 ‘인권’, ‘평화’라는 가치를 확고히 하면서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당장 실현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꾸고 북.미간 국교도 정상화해야 합니다. 한반도, 아니 동북아 평화공동체 구성을 위한 논의도 지금 당장 시작해야 하고, 발전소를 포함한 모든 ‘핵’을 동북아에서 제거하는 일도 시작해야 합니다. 그것들이야말로 ‘빨갱이’ 콤플렉스에 빠진 우리 사회를, 여전히 ‘피난’을 떠날 수밖에 없는 우리 국민들을 ‘민주주의’의 장으로, ‘평화’의 장으로 건져내올 수 있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13/06/18 16:29 2013/06/18 16:29
1.
스물셋 청년 노동자 전태일은 자기 몸에 불을 댕겼습니다. 고된 노동에 쓰러져 가는 어린 여공들을 그냥 두고 볼 수만은 없었기 때문이었지요. 풀빵 한 봉지라도 먹이기 위해 그 먼 길을 걸어야 했던 전태일은 죽음을 앞두고 “배가 고프다”는 마지막 말을 남겼습니다.
 
더불어 그런 전태일과 한 약속에 똑같이 걸어 다녀야 했던, 그러면서도 말 한마디 하지 않던, 지금은 철거돼버린 대한문 앞 쌍용차 분향소에 매일 ‘빵’을 사다 날랐던 동생 전태삼.
 
누구 말마따나 정의가 ‘개관적’이라면 ‘버들다리’는 처음부터 ‘전태일 다리’였어야 했습니다. 또 정의가 ‘보편적’이라는 말이 진짜라면 스물 두 명이나 죽어가도록 내버려두지도, 스물세 번째 죽음을 막기 위한 싸움이 그토록 처절하지도 않아야 하지요. 
 
2.
서른아홉 혁명가 체 게바라는 볼리비아에서 체포된 후 단 하루 만인 다음날 총살을 당합니다. 쿠바 혁명을 성공으로 이끌었음에도 다시 남미 민중이 처한 착취와 억압의 사슬을 끊기 위해 모스크바, 프라하, 파리, 상파울로를 거쳐 볼리비아로 들어갔던 체.
 
그런 그가 메고 다니던 홀쭉한 배낭 속에는 색연필로 덧칠된 지도 외에 두 권의 일기와 파블로 네루다, 세사르 바예호, 니콜라스 기옌, 레온 펠리페 등이 쓴 시를 필사한 노트 한 권이 들어 있었습니다.
 
언제라도 죽음과 맞닥뜨릴 수밖에 없던 정글 지대에서 시들을 써내려갔던 체의 ‘에토스’는 ‘따뜻함’, 그것 아니었을까요. 
 
 
 
사탕수수
- 니콜라스 기옌
『송고로 코송고』에서
 
수수밭 옆에는
검둥이.
 
수수밭 위에는
양키.
 
수수밭 아래는
흙.
 
수숫대 속엔
피!
 
 
 
3.
잘 모르겠습니다. 법을 전공한 것도 아닌데다. 법이란 게 가치와 이상을 펼치기보단 되레 걸림돌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일까요. 사후매수니 공소시효니 따위의 잣대로 진실을 가늠하려는 일에는 관심도 없었습니다.
 
또 윤리학이나 철학을 공부한 것도 아닌데다. 강요되는 관습과 예의범절이란 게 결국 지배자의 습성일 뿐이라 생각하기 때문일까요. ‘정의’니 ‘에토스’니 따위의 잣대로 진심을 가늠하려는 일에도 관심이 없습니다.
 
다만 ‘정의’가 ‘객관적이고 보편적’이라는 말이. 진보의 생명인 ‘에토스’가 사람들 돌아보지 않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그 따위 ‘정의’니 ‘에토스’는 지배자들게나 줘버리는 게 낫다고 단호히 얘기하고 싶습니다. 진보에게 ‘정의’와 ‘에토스’란 ‘따뜻함’, 그것이어야 한다는 얘깁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곽노현을 손가락질하며 고고한 척 하는 ‘진보주의자’들에게 ‘정의’와 ‘에토스’를 되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정의’와 ‘에토스’엔 ‘따뜻함’이란 정녕 없는 겁니까?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13/04/11 21:32 2013/04/11 21:32
사용자 삽입 이미지보수(保守)와 진보(進步)를 가르는 기준은 무엇일까요. 단어가 가진 뜻만 가지고 본다면 지키려는 쪽과 나아가려는 쪽으로 나눌 수 있겠는데요. 현실에선 그렇게 단순하게 구분할 수 없다는 걸 잘 아실 겁니다.
 
가령 정의(正義)라는 문제만 놓고 봐도 그렇습니다. 보수는 정의에 대해 진보적이라 생각할지 모르지만, 실은 진보보다도 더 보수적인 모습을 보일 때가 있습니다. 예컨대 가난을 개인 탓 또는 게으름으로 돌리며 국가의 적극적인 역할을 부정하는 것이 그렇지요. 마찬가지로 진보 역시 정의에 대해 보수보다도 더 보수적인 생각을 가지기도 합니다. 곽노현 교육감이 박명기 교수에게 건넨 돈을 놓고 진보라 얘기되는 사람들이 보인 잣대가 그렇습니다.
 
하지만 법(法)을 놓고 보면 이런 구분은 매우 유효하다고 보여집니다. 수백 년간 소크라테스가 했다고 얘기되는 “악법도 법이다”는 보수가 단골로 내세우는 말이구요. 잘못된 법, 나아가 시민을 억압하고 권리를 제한하는 정부는 언제든 폐기하고 재조직할 수 있다는 ‘시민불복종’은 진보만이 가진 특권일 테니까요.   
 
그렇다면. 하워드 진이 쓴 자전적 에세이,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에서 ‘밀워키 14인’*의 변호사가 진에게 던진 질문에 우리 사회에서 진보와 보수라고 자칭하는, 대표되는 이들은 어떤 설명들을 할까요. 물론 진이 처한 상황이 보수 쪽에서 보자면 썩 내키지 않은 상황이긴 하지만 말입니다. 앞에서 봤지 않았습니까. 진보와 보수, 애매하잖아요. 
 
“진 박사님, 배심원들에게 법과 정의의 차이가 무엇인지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 ‘밀워키 14인’은 미국이 벌인 베트남 전쟁에 대한 상징적 항의로 징병위원회에 잠입해 수천 장의 서류를 빼내서 태워버린 신부와 수녀, 평신도들을 일컫습니다. 이들은 체포되어 절도및 방화죄로 기소됐으며 하워드 진은 ‘전문가 증인’으로 법정에 출두했지요. 변호사는 진이 ‘가격이 있음’을 보이기 위해 여러 질문들을 던졌으며, 이어서 문제의 본질에 접근하고자 이런 질문을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곧바로 검사는 이의를 제기했으며 판사 역시 이를 인정했습니다. 결국 진 박사는 “왜 제가 본질을 말해선 안 되는 거죠? 왜 배심원들이 본질을 들을 수 없는 겁니까?”라고 큰소리로 물을 수밖에 없었습니다만, 끝내 판사는 법정모독죄로 감옥에 넣겠다는 말로 답변을 막았습니다.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 pp.208-223.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12/09/20 14:42 2012/09/20 14:42
연일 때리기입니다. 보고 있자니 쥐 잡는 고양이도 그리 안할 터인데. 궁지로, 궁지로만 몰고 가는 격입니다. 마치 진실이란 애당초 없는 거며, 있다 한들 무슨 소용이냐는 듯 말이지요. 하지만 뭣에 홀린 걸까요. 아님 이런 걸 데쟈뷰라고 하는 건가요. 누군 ‘받았다’고 했고, 누군 ‘줬다’는 차이뿐, 노통 때와 어쩜 이리도 같을 수 있는지.
 
‘검찰에 따르면.....’, ‘측근에 따르면.....’으로 시작되는 검찰 발(發) ‘카더라’ 통신에서부터. 이번 참에 ‘진보진영’을 작살내겠다, 하이에나처럼 달려드는 보수우익까지. 피의사실 공표야 정치인뿐만 아니라 ‘잡범’에게도 비일비재한 일이었고. 일단 혐의만 있으면 친.인척은 물론 주변 사람들까지 죄다 소환하는 건 기본. 계좌추적에, 압수수색. ‘대가성’에서 시작해 자금출처 조사까지. 여차하면 딴 걸로라도 엮어 넣으려는 데. 웬만한 사람이라면 일찌감치 살려 달라 했을 터입니다.
 
그리고 또, 적이 강요하는 ‘항복’문서에 빨리 사인하라 등 떠미는 이들도 또 나타났으니. ‘구정물’에 담근 발 빼듯 재빨리 뒤로 물러나 거리를 두는 것도 모자라. 자기는 무슨 고매한 ‘도덕성’이라고 갖고 있는 양 손가락질하기 바쁜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여기에 ‘진보’쪽엔 겨우 체면치레나 하는 정도로 전락한 신문들까지 앞장서서. 35억을 토해내야 할 수도 있다며 사퇴를 종용하질 않나. 유죄땐 받은 사람보다 더 처벌이 크다며 경고하질 않나. 아니 그저 ‘2억’이라는 숫자에 사로잡혀 경마 중계하듯 주변 얘기만 열심히 받아쓰고 있으니. 이런 젠장. 차라리 잠자코 지켜보기나 하던지. 아님 슬슬 돌아가는 눈치나 보고 있던지. 이젠 너도 나도 앞장서서 돌 던지는 데. 참, ‘비겁’하기 짝이 없습니다.
 
물론 거금을 건네줬다는 사실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보통 사람으로는 상상도 못할 돈이 오갔으니 무슨 ‘대가’가 있는 건 아닌가하는 ‘혐의’도 짙겠지만. 게다가 ‘법학자’이자 ‘교육자’인 ‘공직자’가 돈을 줬으니 ‘의혹’이 생기는 건 당연하고. 또 그것이 선거가 맞물려 있으니 아무리 ‘선의’라고 해도 문제가 되는 건 마땅할 터입니다. 그리고 법리적인 문제를 떠나 그들 말마따나 이미 ‘도덕성’에 치명적인 흠집을 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요. 당사자 말은 들어보지도 않고.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려고도 하지 않으면서. 아니 ‘줬다’는 사실에는 집착하면서도 ‘선의’라는 ‘진심’엔 색안경을 쓰면서. 덮어놓고 돌 던지고, 매 맞으라니요. 하다못해 우익들은 대놓고 제 식구 감싸기를 밥 먹듯 하는 몰염치를 보이는데. 한 줌도 안 되는 ‘자본’과 ‘권력’과 ‘우익’들에 맞서 싸우겠다는 사람들이. 무에, ‘적하고 싸우다가 적을 닮아간다면, 굳이 싸울 필요가 없지요. 그때는 이미 자기가 적이 되어 있을 테니...’라고 훈계까지 하고. 아무리 서울시장 선거가 코앞이고. 내년 총선에, 대선까지 있다지만. 설마 벌써 ‘적’으로 삼고 내치려는 겁니까?
 
옛말에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이 있습니다. 주로 다른 사람에게 뒤통수를 맞았을 때나 생각과 다른 행동을 목격했을 때 황당함을 담아 잘 내뱉는 말이지요. 하지만 자기 머리론 이해가 안 된다고 다른 사람을 일방적으로 자기 잣대로 재버리는 일에도 빗댈 수 있다면. 지금 비겁한 ‘진보’가 되새겨볼 만한 말이 아닌가 싶습니다. 물론 교육감 말만 믿는 순진하기 짝이 없는 생각이라 치부하는 사람들에겐, 본 말이 가진 뜻을 잘 알고 쓰라며 충고할 일이겠지만 말입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11/09/02 08:47 2011/09/02 08: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