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자 삽입 이미지보수(保守)와 진보(進步)를 가르는 기준은 무엇일까요. 단어가 가진 뜻만 가지고 본다면 지키려는 쪽과 나아가려는 쪽으로 나눌 수 있겠는데요. 현실에선 그렇게 단순하게 구분할 수 없다는 걸 잘 아실 겁니다.
 
가령 정의(正義)라는 문제만 놓고 봐도 그렇습니다. 보수는 정의에 대해 진보적이라 생각할지 모르지만, 실은 진보보다도 더 보수적인 모습을 보일 때가 있습니다. 예컨대 가난을 개인 탓 또는 게으름으로 돌리며 국가의 적극적인 역할을 부정하는 것이 그렇지요. 마찬가지로 진보 역시 정의에 대해 보수보다도 더 보수적인 생각을 가지기도 합니다. 곽노현 교육감이 박명기 교수에게 건넨 돈을 놓고 진보라 얘기되는 사람들이 보인 잣대가 그렇습니다.
 
하지만 법(法)을 놓고 보면 이런 구분은 매우 유효하다고 보여집니다. 수백 년간 소크라테스가 했다고 얘기되는 “악법도 법이다”는 보수가 단골로 내세우는 말이구요. 잘못된 법, 나아가 시민을 억압하고 권리를 제한하는 정부는 언제든 폐기하고 재조직할 수 있다는 ‘시민불복종’은 진보만이 가진 특권일 테니까요.   
 
그렇다면. 하워드 진이 쓴 자전적 에세이,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에서 ‘밀워키 14인’*의 변호사가 진에게 던진 질문에 우리 사회에서 진보와 보수라고 자칭하는, 대표되는 이들은 어떤 설명들을 할까요. 물론 진이 처한 상황이 보수 쪽에서 보자면 썩 내키지 않은 상황이긴 하지만 말입니다. 앞에서 봤지 않았습니까. 진보와 보수, 애매하잖아요. 
 
“진 박사님, 배심원들에게 법과 정의의 차이가 무엇인지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 ‘밀워키 14인’은 미국이 벌인 베트남 전쟁에 대한 상징적 항의로 징병위원회에 잠입해 수천 장의 서류를 빼내서 태워버린 신부와 수녀, 평신도들을 일컫습니다. 이들은 체포되어 절도및 방화죄로 기소됐으며 하워드 진은 ‘전문가 증인’으로 법정에 출두했지요. 변호사는 진이 ‘가격이 있음’을 보이기 위해 여러 질문들을 던졌으며, 이어서 문제의 본질에 접근하고자 이런 질문을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곧바로 검사는 이의를 제기했으며 판사 역시 이를 인정했습니다. 결국 진 박사는 “왜 제가 본질을 말해선 안 되는 거죠? 왜 배심원들이 본질을 들을 수 없는 겁니까?”라고 큰소리로 물을 수밖에 없었습니다만, 끝내 판사는 법정모독죄로 감옥에 넣겠다는 말로 답변을 막았습니다.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 pp.208-223.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12/09/20 14:42 2012/09/20 14:42

사용자 삽입 이미지과학이 인간 문명을 이끌고 진보라고 하는 업적을 쌓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설사 과학 연구를 직업으로 삼는 사람이 아닐지라도 말이지요. 하지만 일상생활 속에서 과학이 차지하는 위치는 얼마나 될까요? 또 과학에 접근하는 것이 미술관에 가는 것만큼이나 쉬운 일일까요? 과학을 이해할 수 없는 불가사의로 간주하거나 단지 수동적이고 동기화가 미약하며 ‘우발적으로’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과학에 대해 잘 알고 있고 호기심을 느끼는 사람들(『과학과 대중이 만날 때.....』, p. 239)까지 이런 물음에는 선뜻 답하기가 쉽지만은 않습니다.

 
더구나 최근 급속한 발전을 하고 있는 생명공학 기술과 IT기술의 급격한 발달에 대한 반응은 이해와 수용보다는 거부감과 불편함이 앞서는 상황입니다. 또 과학자 집단 혹은 정부가 이야기 하는 과학적 조언과 견해에는 신뢰보다는 의구심, 불신이 강하지요. 예컨대 우리 사회만 해도 광우병과 미국산 쇠고기 수입 문제를 명쾌하기 설명하지 못하는 것, 조작과 은폐로 의혹을 자초한 천안함 침몰 사건,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를 반면교사로 삼기는커녕 안전사고에 대한 축소, 은폐기도 등등으로 과학은 그 신뢰가 땅으로 떨어졌지요.
 
물론 일이 이렇게 된 데에는 과학자 집단 스스로가 자초한 면이 큽니다. 먼저 번 서평에서도 잠깐 얘기했지만, 의도했건 그렇지 않았던 간에. 과학자, 과학자 집단은 그들의 과학실, 컴퓨터와 현미경 속으로 빠져듦으로써 대중의 과학 이해라는 문제에 대해 소홀했던 것이지요. 게다가 자신들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와 소통수단을 통해 견고하고 높은 성을 쌓는데 열중했던 겁니다. 결국 과학은 인류를 보다 나은 미래로 이끌었음에도 불구하고 스포츠라 불리는 것에 참여-직접 운동장에서 공을 차거나 배트를 휘두르는 사람들에서부터 소파에 누워 프리미어리그 경기를 관람하는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그 방법은 매우 다양하지요-하는 사람들 숫자보다도 못한 관심을 받게 된 겁니다.
 
물론 상황이 이렇다고 해서 이제까지 취해왔던 접근 방식, 즉 ‘과학 대중화science popularization’라는 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질 않습니다. 대중은 잠자는 숲속의 미녀와 같아 멋진 왕자님이 키스만 해주면 깨어날 수 있다는 것이 이 해결방식의 핵심인데요. 무지몽매한 대중에게 과학 지식을 전파해야한다는 생각은 전형적인 계몽적 관점으로 대중은 수동적으로 과학 지식을 수용할 뿐인 존재이며 대중의 역할은 철저히 배제되기 마련(같은 책 옮긴이의 말, pp.268-269)이므로 그다지 좋은 방법이 아닙니다.
 
이에 새롭게 등장한 관점이 바로 ‘대중의 과학 이해Public Understanding of Science’입니다. 이 방법은 과학의 사회적 구성론이라고도 하는데요. 불균질한(heterogenous) 대중, 암묵지, 민간지 더 나아가 무지까지 확장된 과학 지식, 불명료하고(inarticulate) 암묵적인 이해의 형태라는 세 측면을 대중이 처한 상황과 대중의 능동성을 토대로 새롭게 구성하는 것입니다. 즉 대중들이 과학을 이해하는 과정이 단순한 지식의 수용이 아니라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 능동적으로 과학 지식을 재구성하는 역동적인 과정으로 보은 것이지요(같은 책 옮긴이의 말, pp269-270).
 
우리와 마찬가지로 BSE와 인간 광우병 문제로 곤욕을 치렀던 영국이 2000년에 발간한 상원 특별보고서에 따르면 “현대 사회의 민주적 시민권이 과학적 개념과 주장들을 올바로 이해하고, 비판하고, 사용할 수 있는 시민권들의 능력에 크게 좌우되며 … 이러한 신뢰는 과학자 공동체 자체에도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합니다(같은책 옮긴이의 말, pp.272-273).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광우병, 천안함, 핵발전소, 4대강 사업, 선관위 디도스 공격 등등. 2mb 정부와 기능적 지식인 아니 기능적 과학자들이 만들어낸 추문들에 대한 대중들의 반응과 반(反)대응은 우리 사회의 시민권 확장을 둘러싼 싸움이라고도 할 수 있겠는데요. 독선과 아집, 거짓과 은폐로 점철된 2mb 정부로 인해 불러 일으켜진 이 투쟁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 것인지, 어떤 결과로 귀결될 것인지는 제처 놓더라도. ‘대중의 과학 이해’라는 측면에서는 큰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만한 아이러니가 또 어디 있을까 싶습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12/06/06 13:46 2012/06/06 13: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