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요시 사와꼬가 쓴 <소설 복합오염>을 다 읽고 난 후 다음 구보씨의 하루를 살펴보는 건 어떨까요. 뭐, 책이 나왔을 때보다 상황이 더 나빠졌으면 나빠졌지 덜하진 않을 터이고. 아주 평범한 구보씨가 하루 동안 맞닥뜨린 복합오염이 대체 어느 정도나 되는지 알아보자는 겁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스마트폰을 머리맡에 두고 잠자리에 들었던 구보씨는 7시에 맞춰 요란하게 울리는 알람 소리에 졸린 눈을 비벼대며 기지개를 켭니다.

 

“젠장, 또 하루가 시작되는 군.”

 

무선주전자에 수돗물을 받아 스위치를 올리고, 물이 끓는 동안 냉장고에서 계란 두 알을 꺼내 반수 프라이를 해 토스트기에서 튀어 오른 빵에 집어넣고, 다시 끓은 물에 커피믹스를 타내는 구보씨의 일련의 동작은 어제와도 같고, 그제와도 같습니다.

 

“오늘이 수요일, 이제 겨우 반이 지났군.”

 

서둘러 이를 닦고 머리를 감고 세수를 한 후 옷을 갈아입은 구보씨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 2층으로 내려가 차에 오릅니다. 차는 빙글빙글 돌며 주차장 출구를 빠져나와 도로로 올라갑니다. 하지만 벌써 도로 위는 차들로 가득 들어차 있습니다.

 

“음, 화장실은 회사 가서 보는 건데…”

 

조급한 마음이 든 구보씨는 차 앞 유리에 매달린 네비게이션을 켜 아침 뉴스 채널에 맞춥니다. 그리고 창문을 조금 열고 담배를 빼어 뭅니다. 휴우~. 맛나게 한 모금을 빨던 구보씨는 앞 차 배기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시꺼먼 연기를 무심코 바라봅니다.

 

“젠장, 어떻게 저런 차를 끌고 다닐 수 있는 거지?”

 

오늘은 조금 더 시간이 걸린 것 같습니다. 보통 1시간 내외면 도착하는데 1시간 30분이 걸렸으니까요.

23층에 위치한 사무실에 도착한 구보씨는 또 커피 한 잔을 탑니다. 일어난 지 2시간이 채 되지 않았는데 벌써 피로감이 몰려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오늘은 크게 신경 쓸 일이 없어 조금은 여유롭습니다. 책상 위에 놓인 노트북에 전원을 켜고 부팅이 되는 동안 어제 발표한 자료를 복사해 같은 부서 동료들에게 나눠줍니다. 상무에서 회장까지 극찬했던 사업기안입니다.

동료들과 앞으로 있을 일들에 대해 얘기하고 나니 12시간 조금 못 됐습니다. 건물 맨 위층에 자리해 전망 좋기로 인근에까지 소문 난 구내식당이 문을 닫지 않았더라면 좀 더 일을 해도 되겠지만 지난주부터 시작된 내부 공사로 서둘러야 합니다. 구보씨네 회사에서만도 5백 명이 넘는데다가 함께 구내식당을 사용하는 K사, P사까지 모두 1천여 명이 넘는 사람들이 가까운 식당에서 점심을 해결해야하니 말입니다.

 

“아, 오늘은 또 뭘 먹나?”

 

“요 길 건너 새로 개업한 백반집 어때요? 그 집 맛있다고 하던데.”

 

“그럴까? 백반이라면 가서 또 뭐 골라야할지 생각 안 해도 되니까 말이야.”

 

백반집은 생각보다 좋았습니다. 새로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아 깔끔한 데다 맛도 좋았기 때문입니다. 특히 복날이라며 특별식으로 나온 추어탕과 꽁치김치찜은 여러 번 달라고 했을 만큼 인기가 좋았습니다.

오후에는 거래처에 들러야 할 곳이 여러 곳이어서 일이 마치면 그곳에서 바로 퇴근하겠다고 구보씨는 함께 점심을 먹은 부장에게 체인커피점에서 테이크아웃한 커피를 건넵니다. 부장은 두 달 전부터 담배대신 입에 물기 시작한 전자담배를 빼들며 그렇게 해도 좋다고 말합니다. 구보씨는 부장 몰래 씨익 웃음을 짓습니다. 서둘러 일을 마치면 평소보다 일찍 집에 들어갈 수 있겠다 싶어서입니다.

구보씨가 처음 들른 곳은 40m 높이 굴뚝이 우뚝 솟은 화학공장 M이었고 두 번째는 SF영화에서 봤을 법한 커다란 원통형 관들이 얽히고설킨 시멘트공장 S, 마지막으로 방문한 곳은 앞 두 곳과는 입구에서부터 에어샤워에 방진마스크며 방진복을 입어야만 들어갈 수 있는 반도체 공장이었습니다. 하지만 바쁘게 돌아다닌 끝에 구보씨는 애초 목표대로 5시가 조금 넘은 시간에 퇴근을 할 수 있게 됐습니다.

구보씨는 모처럼 가지게 된 저녁 시간에 친구들과 만나 술을 마실까도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도리도리 돌렸습니다. 내일이 금요일이나 토요일이라면 맘 놓고 술을 마실 수 있겠지만 목요일이니 여간 부담이 가는 게 아닙니다.

구보씨는 친구들과 밖에서 술을 마시는 것 대신 집에 들어가 따뜻한 물에 반신욕도 하고 영화도 보며 요즘 새로 마시기 시작한 막걸리나 마시기로 했습니다. 막걸리라면 밥 대신 배도 채울 수 있고 안주도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되니까요.

구보씨는 집으로 가는 길에 대형마트에 들러 막걸리도 한 통 사고 안주로 할 훈제오리며 과자, 내일 아침 해장용으로 먹을 냉동건조된 즉석식품도 삽니다. 주말이 되기까지 아직 삼일이나 남았으니 이것저것 더 사야할 게 많겠지만 빨리 집으로 가고 싶은 마음에 서둘러 마트를 빠져나옵니다.

집으로 돌아온 구보씨는 욕조에 물을 받으며 아로마 향이 나 반신욕에 좋다는 오일을 풉니다. 눈을 감고 잠깐 잠이 들 정도로 몸을 푼 구보씨는 이틀이나 미뤄뒀던 설거지부터 합니다. 뭘 먹으려고 해도 담을 접시가 있어야지요. 수세미에 세제를 듬뿍 묻혀 거품을 내고 슥삭슥삭.

전자레인지에 훈제오리를 요리 한 후 냉장고에 넣어 두었던 막걸리를 들고 소파에 기댑니다. 깜빡깜빡 잠이 들며 막걸리 한잔에 오리고기 한 점, 또 막걸리 한잔에 과자 한 봉지를 먹던 구보씨는 시계바늘이 2시를 지나는 것을 보고 침대로 갑니다. 긴 하루가 그렇게 또 가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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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31 15:15 2014/10/31 15:15
사용자 삽입 이미지우스갯말로 담배 끊은 사람이랑은 친구하지 말라고들 합니다. 마약보다 중독성이 더 강한 담배를 끊을 정도라면 그 독기가 어련하겠냐는 말이지요. 그래 그런 사람하고는 친구 관계를 끊으란 얘긴데.
 
그래도 담배는 건강하게 살겠단 마음이 있으면 끊을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일단 손에 잡으면 끊기 힘든 것이 같다는 점에서, 이렇게 말을 바꾼다면 어떨까요. “운전하다 안 하는 사람과는 부모, 자식 간이라도 돌아서야 한다.”
 
스기타 사토시는 자동차에 대해 매우 도발적인 문제 제기를 합니다. ‘문명의 이기인가, 파괴자인가.’ 물론 사토시는 주저하지 않고 자동차가 가진 폐해를 줄줄이 늘어놓습니다. 통계 자료와 피해자 진술들이 보여주는 자동차 사고에서부터 자신의 사적 이익을 위해 타인을 무시하게 만드는 ‘자동차의 도덕’에 이르기까지 말입니다. 그러니 ‘파괴자’까진 아니더라도 ‘문명의 이기’가 아닌 것만은 분명하답니다.
 
하지만 자동차로 인한 폐해는 이 책이 나왔을 때 보다 훨씬 더 늘어났을 것이 분명하지만. 그보다도 더 많은 운전자들이 생겨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저 사토시가 책 말미에 제시했던 7가지 방법들, 즉 아직까지 자동차에 대해 충분히 알지 못했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자동차의 해악에 대한 철학적인 측면의 교육이 체계화 되지 않았기 때문일까요.
 
물론 사토시가 지적했던 대로 자동차 문제를 문제로 자각하지 못하기 때문에 개혁이 어려운 건 분명합니다. 가령 눈이나 비와 같은 외부 환경과 상관없이 목적하는 곳까지 신속하고 쾌적하게 갈 수 있다는 이유 때문에 말이지요. 거기에 차 바깥 환경과는 단절된 상황에서 걷는 사람에 대해 갖게 되는 ‘무관심’과 ‘우쭐함’을 감안한다면 말입니다.
 
맞습니다. 운전대를 놓는 일, 자동차를 버리는 일이 그리 쉬울 리가 없습니다. 더구나 그 맛을 한 번 본 사람이라면 어떻겠습니까. 그러니 이 중독성 강한 물건을 내팽긴 자, 운전 하다 안 한 사람과는 어째야할까요. 처음에 했던 말처럼, ‘부모 자식 간이라도 돌아서야 한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건 좀 심한 말이라구요? 정말 그럴까요?
 
* 다달이 나오는 ‘세상을 바꾸는 따뜻한 이야기’ <작은책> 2014년 9월 호에 특집으로 자동차를 다루고 있습니다. 함께 읽으면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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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04 17:01 2014/10/04 17:01
사용자 삽입 이미지도처에 전문가입니다. 입시전문가, 부동산전문가, 투자상담사 같이 ‘합리성’이나 ‘이성’과는 무관한 ‘짝퉁’ 전문가들도 판을 치고. 장 담그는 것조차 대학교수 정도는 돼야 말 빨이 먹히니 말입니다. 어디 토론회나 방송에라도 나설라치면 학위는 기본, 자격증에 학술논문 몇 편은 있어야 하겠지요. 하지만 미국산 쇠고기 수입 때처럼 死대강 사업 때도 그랬듯이. 밀양 송전탑 건설 현장에도 어김없었고, 제주 강정마을 구럼비에도 앞 다퉈 나섰지만.
 
천안함 침몰에 이의를 제기한 과학자가 몇 안됐던 것처럼. 死대강 사업이 재앙이라 경고한 학자들을 손으로 꼽았을 만큼. 돈과 권력으로부터 독립해 있었던, ‘관심을 올바른 방향에 두고, 인식과정에 철저한 비판의 메스’(p.92)를 가하던 전문가는 보기 힘들었습니다.  
 
‘체제 측의 프로젝트에 대항할 수 있는 비판능력을 조직적으로 확립하는 일’(p.109)은커녕 ‘어떠한 조직이나 권위에 대해서도 자신의 독립을 유지하고 모든 문제에 지적 성실성을 가지고 대처’(p.107)하는 과학자가 많지 않았던 겁니다.
 
‘아주 세분화된 자신만의 영역을 만들어 거기에서 전문가가 되려는 그야말로 전형적인 전문가의 길’(p.65)을 갈 뿐인 전문가들이 ‘인식과정에서 철저한 비판의 메스를 가해야만 사회를 더 나은 쪽으로 나가게 할 수 있는 창조적이 힘이 나온다는’(p.92) 사실을 철저히 외면했단 얘깁니다.
 
타까기 진자부로는 폐쇄된 실험실 밖으로 나와 사회와 시민과 함께하는 ‘시민의 과학’을 애기합니다. ‘이런 저런 때마다 침묵하다보면 늘 승인하는 것처럼 되어 결정적인 순간에조차 아무 말도 못하게 되는 이른바 ‘일본형 공동체’의 구조’(p.81) 속에서 벗어나, ‘체제 내의 지위를 버리고 자립적인 과학(학문).기술을 지향(p.88)’하자는 겁니다. 
 
“그것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
거대한 입을 벌리고 덤벼드는 불도저는 문자 그대로 국가권력 자체였고, 그 앞에 맨 몸으로 농토를 지키려고 싸우는 농민들이 있었다.
그리고 속수무책으로 서 있는 나 자신이 거기에 있었다.
나는 어느 편에 서 있는가.” (p.82) 
 
타까기는 스스로에게 던졌던 질문에 행동으로 답을 합니다. 안정된 대학교수 자리도 마다하고, 촉망받는 연구원 신분도 박차고. ‘농토를 지키려고 싸우는 농민’들 편에 서서 싸우기 시작한 것이지요. ‘시민과학자’로서 말입니다. 
 
이는 ‘인간의 관심을 어디에다 두어야 하는가를 문제 삼고, 그러한 관심을 전제로 인식이 나아가는 과정을 성찰한다. 그러한 성찰 없이 객관성이라는 명분만 가지고 측정 데이터 등을 절대적인 진리라고 강요하는 것은 자연과학의 전형적인 이데올로기이다. 관심을 올바른 방향에 두고, 인식과정에서 철저한 비판의 메스를 가해야만 사회를 더 나은 쪽으로 나가게 할 수 있는 창조적이 힘이 나온다는 것을 하버마스에게 배운 것’(p.92)이라는 고백을 실천한 것이기도 합니다.
 
MB 정권이 물러나기를 손꼽아 기다리기라도 했던 것 같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그 뻔 한 걸 가지고 이제와 새삼스럽게 말하는 것도 눈꼴 시린데. 그것도 토목공학이나 환경학이나 하는 전문가라는 사람들이 그러고들 있으니. 이젠 보(洑)  철거를 두고 한 자리 또 해먹겠다는 심보들인 것만 같아 한숨만 나옵니다. 대체 우린 언제까지 이런 전문가들 입만 바라봐야 하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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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8/09 22:16 2014/08/09 22:16
사용자 삽입 이미지지금까지 역사는 인간이라는 종(種)이 걸어온 자취를 기록한 것이었습니다. 그것도 진보(進步)라는 이름으로 말이지요. 가령 석기시대니 청동기시대, 철기시대를 거쳐 호모오일리쿠스로 진화하거나 수렵채취와 정착농경을 거쳐 산업혁명, 정보사회로 변화했다는 그 어떤 설명이라도 말입니다. 
 
하지만 호모 에렉투스니 호모 사피엔스사피엔스니 하는 현생인류의 조상으로부터 시작된 이 역사를 대략 46억년 정도라고 알려진 지구의 나이와 비교해본다면. 그렇습니다. 인간의 역사는 티끌만치도 안 되는 시간을 기록한 것이며, 인간 이외의 것들에 대해서는 그다지 알려주는 게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인간이 출현한 직후뿐만 아니라 그 이전 지구의 모습이 어떠했는지, 인간 이외 다른 동물과 식물들이 어떤 변화를 겪었는지를 알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저 고고학적 연구를 통해 추정하고 추측할 수 있을 뿐이지요. 그리고 이 지구상엔 문자를 쓰는 종(種)이 인간뿐인지라, 어찌 보면 그런 서술방식밖에 나올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클라이브 폰팅은 이런 역사 서술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합니다. 그가 쓴 <The Green History of the World: 녹색세계사>에는 우리가 알고 있고, 우리가 배워왔던 역사에선 외면했던 이야기들, 아니 감추고 싶었던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지구상에서 가장 앞선 문명을 건설했다고 알려진 이스터 섬 사회가 어떤 이유로 사라졌는지를 시작으로 진보의 역사 뒤에 숨겨진 파괴의 역사를, 인간이 출현하면서부터 시작된 지구 환경 파괴의 역사를 써낸 것이지요.
 
더불어 폰팅은 역사란 인간이 걸어온 자취만을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복잡하게 상호 관련된 지구 환경을 함께 기술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럴 때에야 만이 인류라는 종 앞에 놓인, 아니 지구 앞에 높인 환경 위기에 대해 ‘녹색’ 문명사적 반성이 가능하다는 것이지요.   

 

현재의 환경 상태와 앞으로의 전망에 대한 책은 많아도 먼 과거까지 거슬러 올라가거나 환경이 어떻게 인간의 역사를 결정지었는지에 대해 서술한 책은 거의 없었으며, 기초까지 파고들어 가서 내가 보기에는 중요한 질문들을 던진 책은 아예 없었다. 그래서 나는 세계 역사를 ‘녹색’ 시각에서 보는 책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p.12

 

글을 쓴 이는 제1세계인입니다. 저자의 말대로 “‘녹색’ 주제가 단순한 자연 세계의 상태에 대한 문제가 자원과 에너지의 사용, 빈부의 격차, 사람들이 어떻게 사람들을 대하는 가의 문제, 그리고 그들이 살고 있는 세계에 대한 사람들의 사고방식의 문제”임이 틀림없다면. 좀 더 솔직한 반성, 좀 더 솔직한 고백이 있었다면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물론 폰팅이 우려하는 것처럼 제3세계 나라들의 급속한 경제성장은 주목해야 할 부분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사다리 걷어차기’가 되지 않으려면 제1세계 나라들의 뼈아픈 반성과 고백이 먼저 있어야 하겠지요. 그리고 굶주리고 있는 제3세계 나라 사람들에게 그들이 가진 식량과 부를 넘겨줘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먼저 사다리를 타고 올라간 이들이 다른 사람들은 올라오지 못하도록 걷어차는 일밖에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런 약점에도 불구하고 <녹색세계사>는 지구 환경 위기에 대한 녹색문명사적 해석과 반성을 함에 있어 매우 중요하고 소중한 책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거의 유일한 지구 환경 파괴의 역사이기 때문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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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9/15 16:43 2013/09/15 16:43
사용자 삽입 이미지귀농(歸農) 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일찌감치 일자리에서 밀려난 사람들이 새로운 돈 벌이를 위해 하는 것이든. 은퇴 후 전원생활을 위한 것이든 말입니다. 그래서인지 많은 지자체가 귀농 지원 사업들을 합니다. 빈집 찾아주기, 정착 지원금 지원, 농지 구입 지원 등등. 어떤 곳에서는 꽤 좋은 성과를 내기도 합니다. 상반기에만 150세대 300여 가구를 정착시킨 곳도 있으니까요. WTO와 FTA가 거스를 수 없는 대세인 것을 염두에 둔다면 참으로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셈인데요. 왜 지금, 귀농일까요? 혹 텔레비전에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억대 농부(農副)들 때문일까요?. 아님 농사야말로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어떤 가치가 있기 때문일까요?
 
농업전문가이면서 농사꾼인 글쓴이는 차분하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소농(小農)이야말로 인류 생존의 기초인 땅을 지키는 사람들이라고 말합니다. 본래의 자연인 ‘무위자연’이 하는 일을 대신하는 이 소농들이야말로 ‘누가 지구를 지켜왔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이라는 것이지요.  끊임없이 땅을 갈고 유기물을 넣으며 표토를 지키는, 비록 그것들이 자신과 가족들을 먹여 살리기 위한 일이었다 할지라도 말입니다. 하지만 인간이 지구에 뿌리를 내린 이후 가장 많은 풍요를 가져다 줬다고 칭송받는 근대화는 어떻습니까요. 맞습니다. ‘대우주의 의지’를 묵묵히 대행해왔던, 지구를 지켜왔고 지켜나갈 소농들을 밀어내고 있습니다. 그것도 아주 가혹하게 말이지요. 규모 확대와 단위 면적당 수확량 증가라는 ‘자본주의적 발전’만이 유일한 길이라고 강요하면서 말입니다.
 
일본은 여전히 소농이 많다고 합니다. 우리와 그다지 다를 바 없는 환경일 터인데 말입니다. 규모 확대와 단위 면적당 수확량 증가라는 ‘자본주의적 발전’만이 유일한 길이라고 강요하는 상황들 말이지요. 그런 면에서 본다면 일본은 아직 희망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분명 부러운 일이지요. 물론 그것이 예전 소농과는 다른, 다양한 형태의 겸업이라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아니요. 귀농을 지속적으로 유지할 방법 중 하나라는 점에서 더 관심 있게 봐야합니다. 지금 사는 사회가 자본주의인 만큼 먹고 사는 문제에 대해 더 이상 금욕적 삶을 강요할 필요는 없으니까요. 부부 중 한 사람은 고정적인 수입이 있거나 자급적 소농이더라도 일정한 수입이 있는 겸업농가라면 오래도록 땅을 지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책을 펴낸 녹색평론사 대표는 편집자 후기에 ‘문명사회의 지속적인 생존 여부를 결정하는 사활적인 문제’로 소농의 존재를 되살리느냐 마느냐를 얘기합니다. ‘문명사회’라는 말이 거슬리기는 하나 이 말을 지구와 인간으로 바꾼다면 글을 쓴 쓰노 유킨도가 가진 고민을 온전히 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소농을 ‘환경위기’나 ‘식량문제’로만 한정시키는 것이 아니라 인류 생존의 기초인 땅을 지키기 위한 유일한 방법으로 보는 것 말입니다. 더불어 편집자는 저자가 소개했던 일화 속에서 소농과 민주주의에 대해서도 문제를 제기합니다. ‘소농은 참다운 의미에서 민주주의 초석이 된다는, 흔히 간과되고 있지만, 결정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할 필요가 있다.’고 말이지요. 사실 정확하게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는 다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인과관계가 명확치 않았거든요. 하지만 대략적인 뜻은 책을 다 읽은 사람들이라면 짐작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니 이 부분은 굳이 더 설명하지 않더라도 좋을 듯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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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7/30 20:49 2013/07/30 20: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