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자 삽입 이미지1936년, 스페인에서는 사회당과 공산당을 포함한 좌파 정당들과 무정부주의자들, 자유주의 정당과 자치주의자들이 연합한 <인민전선>이 선거에서 승리를 합니다. 흔히 알고 있는 칠레 아옌데 사회주의 정부보다 앞선 것이지요. 그리고 또 잘 알고 있듯이 <인민전선> 또한 낡은 사회관계를 과감히 변화시켜 나갔습니다. 토지개혁을 단행했으며 지배세력과 함께 하고 있었던 가톨릭에 맞섰던 것입니다. 하지만 너무나도 또 또렷이 기억하고 있듯, <인민전선> 역시 프랑코를 중심으로 한 파시스트 세력들이 일으킨 반동에 맞닥뜨리게 됩니다.
 
내전은 곧 파시스트 이탈리아와 나치 독일이 군대와 무기를 지원함으로써 2차 세계대전의 전초전 적인 성격을 띠게 됩니다. 하지만 파시즘에 맞선 이들은 같은 이름을 가졌던 프랑스의 <인민전선> 정부도, 되레 프랑코에게 호감을 표하고 있었던 영국도 아니었습니다. 소련은 무기를 팔아먹는 데만 급급했을 뿐만 아니라, 내전을 통해 자신들의 지배력을 확대하려는 의도만 있을 뿐이었지요.
 
스페인 동부의 대도시에서 “기관총 진지를 택시들이 시속 백 킬로미터로 달려가 부수어(「카탈로니아 찬가」, p.70)” 버리며 파시스트들을 물리친 노동자, 농민들은 “노동자 순찰대, 노동조합에 기반을 둔 노동자 의용군 등을 통해 거칠게나마 노동자 정부를 세워보려는 시도(「카탈로니아 찬가」, p.70)”를 합니다. 봉기에 우왕좌왕하던 <인민전선>을 대신해 혁명을 더욱 앞으로 밀고 나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하지만 스페인 내전은 이로 인해 더 복잡한 양상을 때게 됩니다. 조지 오웰이 「카탈로니아 찬가」를 “솔직히 정치적인 소설(「동물농장」,, <나는 왜 쓰는가>, 민음사, 2005, p.142)”이라고 한 이유가 되는 제11장을 비롯해, 제5장에 쓰여 있듯 말입니다.
 
오웰, 헤밍웨이, 앙드레 말로, 파블로 네루다 등 전 세계 지식인들뿐만 아니라 스페인 혁명과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총을 든 이들에게 “만화경 같은 정당과 노동조합들, 그리고 그 짜증나는 이름들 - P.S.U.C., P.O.U.M., F.A.I., C.N.T., U.G.T., J.C.I., J.S.U., A.I.T. - 은” 좀체 이해하기 힘들었습니다. 오웰이 말한 바대로 「파시즘과 싸우기 위해서」 또는  「공동의 품위를 위해서」라는 대의 앞에는 예상치 못했던 장벽이 놓여있었던 것이지요. 결국 혁명에 대한 약속은 너무 쉽게 깨졌고 배신과 좌절이 뒤를 따르게 됩니다.
 
「카탈로니아 찬가」는 조지 오웰이 스페인 내전에 직접 참전해 겪은 일을 기록한 ‘소설’입니다. 하지만 “스탈린주의에 적대적인 사회주의자들의 책을 많이 내는 바람에 공산주의자들의 따돌림으로 운영도 어렵던 프레드릭 워버그의 출판사에서 1928년 4월”이 돼서야 나온 것만 보더라도. 또 공공연히 오웰 자신이 정치적인 목적에 의해 썼다고 말했듯이 ‘소설’ 그 이상의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아니 <나는 왜 쓰는가>에서 말했던 ‘역사적 충동’과 ‘정치적 목적’의 동기를 가장 충실히 따른 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전체주의에 <반대>하고 내가 아는 민주적 사회주의를 <위해>(「동물농장」,, <나는 왜 쓰는가>, 민음사, 2005, p.141)” 쓴 글인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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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1/25 15:09 2012/11/25 15:09

사용자 삽입 이미지후쿠야마의 <역사의 종말>류와 같은 자본주의 예찬서와 마찬가지로 엄연히 다르건만. 심심치 않게 사회주의, 공산주의 사회에 대한 비판서로 소개되는 책이 있습니다.

 

우리 사회에서는 스스로 사회주의자임을 자처한 사람이 썼다는 이유로 더욱 그러했기도 했는데요. 하지만 꼼꼼히 책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왜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생기는지 알 수가 없는데요.

 

아마도 마르크스와 겹쳐지는 메이저, 스탈린은 나폴레온, 트로츠키는 스노우볼로 묘사되고 있다는 점에서 그랬을 것이란 추측을 해보는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요. 딱 봐도 이건 풍자와 우화 형식으로 쓴 전체주의에 대한 경고와 비판인데. 뜻과 의도를 잘 못 이해해도 한 참 잘 못 한 것이지요.

 

아무튼, 그래서일까요. 고전 중에 고전이라고 얘기되는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을 이제야 읽게 된 것, 말입니다. 지리산 둘레길을 걷다, 땡볕을 피해 나무 그늘에서 쉬면서. 만만하게 봤다, 결국 녹초가 된 몸으로 머물렀던 성심원에서.....

 

나폴레온이 기른 사나운 개들과 입만 열면 찬양일색으로 나팔을 불어대는 오리들이 먼 곳에 있는 게 아닌데, 하며. <위건 부두로 가는 길>에 이어 다시 빠져들게 된 오웰의 글 솜씨와 생각에. <카탈로니아 찬가>며, <1984>도 찾아봐야지.....

 

참 오랜만에 휴가다운 휴가를 보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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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0/04 21:03 2012/10/04 21:03
사용자 삽입 이미지보수(保守)와 진보(進步)를 가르는 기준은 무엇일까요. 단어가 가진 뜻만 가지고 본다면 지키려는 쪽과 나아가려는 쪽으로 나눌 수 있겠는데요. 현실에선 그렇게 단순하게 구분할 수 없다는 걸 잘 아실 겁니다.
 
가령 정의(正義)라는 문제만 놓고 봐도 그렇습니다. 보수는 정의에 대해 진보적이라 생각할지 모르지만, 실은 진보보다도 더 보수적인 모습을 보일 때가 있습니다. 예컨대 가난을 개인 탓 또는 게으름으로 돌리며 국가의 적극적인 역할을 부정하는 것이 그렇지요. 마찬가지로 진보 역시 정의에 대해 보수보다도 더 보수적인 생각을 가지기도 합니다. 곽노현 교육감이 박명기 교수에게 건넨 돈을 놓고 진보라 얘기되는 사람들이 보인 잣대가 그렇습니다.
 
하지만 법(法)을 놓고 보면 이런 구분은 매우 유효하다고 보여집니다. 수백 년간 소크라테스가 했다고 얘기되는 “악법도 법이다”는 보수가 단골로 내세우는 말이구요. 잘못된 법, 나아가 시민을 억압하고 권리를 제한하는 정부는 언제든 폐기하고 재조직할 수 있다는 ‘시민불복종’은 진보만이 가진 특권일 테니까요.   
 
그렇다면. 하워드 진이 쓴 자전적 에세이,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에서 ‘밀워키 14인’*의 변호사가 진에게 던진 질문에 우리 사회에서 진보와 보수라고 자칭하는, 대표되는 이들은 어떤 설명들을 할까요. 물론 진이 처한 상황이 보수 쪽에서 보자면 썩 내키지 않은 상황이긴 하지만 말입니다. 앞에서 봤지 않았습니까. 진보와 보수, 애매하잖아요. 
 
“진 박사님, 배심원들에게 법과 정의의 차이가 무엇인지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 ‘밀워키 14인’은 미국이 벌인 베트남 전쟁에 대한 상징적 항의로 징병위원회에 잠입해 수천 장의 서류를 빼내서 태워버린 신부와 수녀, 평신도들을 일컫습니다. 이들은 체포되어 절도및 방화죄로 기소됐으며 하워드 진은 ‘전문가 증인’으로 법정에 출두했지요. 변호사는 진이 ‘가격이 있음’을 보이기 위해 여러 질문들을 던졌으며, 이어서 문제의 본질에 접근하고자 이런 질문을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곧바로 검사는 이의를 제기했으며 판사 역시 이를 인정했습니다. 결국 진 박사는 “왜 제가 본질을 말해선 안 되는 거죠? 왜 배심원들이 본질을 들을 수 없는 겁니까?”라고 큰소리로 물을 수밖에 없었습니다만, 끝내 판사는 법정모독죄로 감옥에 넣겠다는 말로 답변을 막았습니다.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 pp.208-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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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9/20 14:42 2012/09/20 14:42
1.
벌써 한 달이 넘었네요. 느닷없이 누나에게서 전화가 왔었더랬습니다. 어머니 장례를 치를 때이니 벌써 5년이 훌쩍 지났고. 한참 자랄 때라 그런지, 그때도 부쩍 자란 조카들에 흠칫 놀랐었는데. 지금은 길에서 마주친다고 해서 알아볼 수나 있을지. 그동안 한 번도 보질 못했으니 말입니다.
 
아무튼 아들내미, 아니 조카가 이제 문, 이과를 선택해야 하는데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며, 애 얘기를 들어봐 달라며 전화번호를 알려주더라구요. 하지만 오랫동안 연락도 없었으니 쑥스러워 전화를 하지 않겠다, 란 생각을 했더랬습니다. 그리고 낮에 누나와 통화를 했고, 저녁때쯤 전화할 거라는 문자를 받았는데. 9시 뉴스가 끝나도록 전화가 오질 않더군요. 그래, 쉽진 않을 거야, 라며 보리차물을 올리러 주전자를 닦는데.
 
요란스레 전화벨이 울리기 시작했습니다.
 
 
2. 
누나와 얘길 할 때도 그랬지요. 성적도 좋고, 앞으로 취직 문제도 좋지만 일단 자기가 좋아하고 관심 있는 게 먼저 아니겠냐고 말입니다. 물론 나중을 생각한다면 그런 것들을 무시하진 못하겠지만 우선은 지가 끌리는 게 뭔지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겁니다.
 
하지만 전화 통화는 생각지도 않은 방향으로 흘러갔습니다. 먼저 예상했던 것보다 스스럼없이 자기 성적이며, 고민하고 있는 게 뭔지를 소상히 얘길 하는 조카 목소리를 들으니 한편으론 반갑기도 하고 꽤나 기분이 좋았었지요. 헌데, 안부를 묻고 이런 저런 애기를 하다 학교생활도 묻고 어쩌고 하는데. 자꾸 성적이 어떠니, 문과 쪽 과목들하고 이과 쪽 과목들하고 어느 쪽이 더 높느니, 이런 말들을 하고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아, 물론 학교에서 진로나 진학 상담은 받아봤는지, 흥미를 느끼는 과목이 어떤 것들인지, 앞으로 어떤 일을 하며 살고 싶은 것인지 등등도 물어봤었지요.
 
하지만 돌아온 답은 들으나 마나했습니다. 가만 생각해보면 그 나이에 자기가 살아가야 할 삶을 결정해야 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닐 터이고. 학교에서도 아이 취미나 적성보다는 진학률, 취업률을 먼저 생각할 것이 뻔하고. 이제껏 받아온 교육이란 게 답이 있는 문제만을 풀어오고 암기해온 게 전부니. 조카 입장에선 어쩔 수 없었겠지만.
 
참 난감하더라구요.
 
 
사용자 삽입 이미지3. 
수업을 받는 것도 일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공동체를 위한 활동을 보고 돈을 주는 나라가 있습니다. 압박 수단으로 시험과 성적표를 쓰지 않습니다. 노는 때와 공부하는 때를 가르는 것이 의미가 없구요.
 
교사는 아이들이 갖는 자유로운 결정권을 제약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을 굴복시키는 훈육자이거나 조련사이지 않으며, 더더군다나 적대자여서는 안 됩니다. 그저 필요한 전문지식을 주는 조언자에 지나지 않으며, 학생의 장점과 단점, 충분히 발휘되고 있는 재능과 아직 계발되지 않은 발전 가능성을 의논할 뿐이지요.
 
아이들은 학교에 다니는 동안 자기가 어떤 분야에 관심이 있고 소질이 있는지 스스로 알 수 있는 시간을 충분히 갖습니다. 상급학교에 진학한 학생들은 공화국으로부터 어떤 조건도 달지 않은 재정지원을 받습니다.
 
어떤가요. 상상 속에나 있을 법한 이 나라, 그 동안 싹도 틔워 보지 못한 채 짓밟히고 말살당한 창조성을 길러내며, 지금의 사회에 순응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변화시키고, 극복하고, 개선하는 것을 기본 이념으로 삼는, ‘더 많은 것을 아는 사람’이 아니라 ‘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사람’이 되기를 소망하는 나라.
 
바로 공화국 벤포스타입니다.
 
 
4.
어떻게 전화를 끊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대학을 다닌 게 벌써 20년도 더 됐다며 발뺌을 한 것도 같고. 결국 작년까지 학교를 다녔으니 조금 더 잘 알겠거니 싶어 짝꿍한테 전화를 넘겼지요. 애기를 이어갈수록 처음에 하려고 했던 말은 안 나오고 맨 이.공계 취업이 요즘은 옛날과 다르다느니, 이과는 공부 잘하는 애들이 많이 가는 편이라느니, 당체 도움도 안 될뿐더러 다 아는 얘기만 나오니까요. 하는 수 없었습니다.
 
물론 얼떨결에 전화를 넘겨받은 짝꿍이 도움이 될 만한 정보와 경험담을 섞어 잘 얘기를 해서 결정은 했지만 말입니다. 아무튼 그렇게 전화를 끊고 나니. 내 자식도 아닌데도 끝내 남들과 똑같은 생각으로 이런 결정을 하는데. 내 자식이면 오죽하겠나, 싶더랬습니다. 틈만 나면 학교 교육에 대해 침 튀기며 열만 올릴 줄 알았지 말입니다. 또  꼴에 콩 내놔라, 팥 내놔라 남 얘기하기만 좋아할 뿐.
 
아직 멀었다,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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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8/17 22:03 2012/08/17 22:03
사용자 삽입 이미지예전엔 ‘선거투쟁’이란 말도 있었더랬습니다. 듣기엔 거창할지도 모르겠지만. 솔까, 당선되긴 어려우니 하고 싶은 말이라도 실컷 해보자던 건데. 지금 봐도 참 그럴듯한 말을 갖다 붙였지요. 아무튼 그땐 소로우가 누군지 몰랐었음이 틀림없었을 터인데.   
 
투표란 장기나 주사위 놀음과 같은 일정의 놀음이다. 다만 옳고 그름이라는 도덕적인 문제들을 가지고 노는 약간 도덕적 냄새가 풍기는 놀음인 것이다. 그러므로 내기에 자연스럽게 따른다. 투표하는 사람의 인격은 내기가 상관없다. 나는 어쩌다가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쪽에 표를 던진다. 그러나 그 옳은 것이 승리해야만 한다는 사실이 나에게 생명을 건 관심사는 아닌 것이다. 나는 기꺼이 그 결과를 다수자들에게 맡긴다. 그러므로 투표의 의무는 결코 편의(便宜)의 의무를 넘지 못한다. 옳은 것을 위해 던진 표도 진작 그 옳은 것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다. 그것은 다만 사람들에게 정의가 이기기를 바라는 당신의 소원을 미약하게 나타낼 뿐인 것이다. 현명한 사람은 정의를 다수자의 손에 맡기거나 아니면 그 다수자들의 힘을 통해 승리에 이르게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다수자들이 결국에 가서 노예 폐지를 위해 투표를 하게 된다면 그것은 그들이 노예에 대하여 흥미를 잃었거나 아니면 그들의 투표로 해방될 노예들이 거의 없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 때에 그들은 남아있는 유일한 노예가 될 것이다. 다만 자신의 투표로 자신의 자유를 주장할 수 있는 노예들의 투표만이 이 노예제도의 폐지를 빠르게 할 것이다. pp.193-194
 
라는 말을 들었더라면. ‘선거투쟁’보다는 좀 세련된 말을 만들었을지도 모르겠단 생각도 듭니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그 당시엔 선거에 통 관심이 없었었지요. 누가 되도 상관없단 식은 아니었지만. ‘부르주아 선거’에서 얻을 거라곤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했던 시절이었으니까요. 물론 김대중과 노무현이 잇따라 대통령이 되고. 진보정당들도 의회에 들어가는 호시절을 지났어도 별로 달라진 게 없는 현실을 보면. 영 틀린 말도 아니다, 싶기도 합니다. 하지만
 
투표를 하되 옹근 표를 던지라. 그저 한 장의 종이쪽만 던질 것이 아니라 당신의 전 영향력을 던지라. 소수자는 다수자에게 고개를 숙이는 한 무력하다. 그렇게 되면 소수자라고 할 수 없다. 그러나 소수자가 그 온 힘을 다하여 버티면 그것을 당해낼 수는 없는 것이다. p.203
 
라는 소로우의 말도 또한 여전히 유효하단 생각도 듭니다. 금배지 달아보겠다고 과거에 잘못한 일들을 반성조차 하지 않는 이들과 손잡는 일도 벌어지고. 대중의 마음을 얻어 보겠다며, 고매한 ‘도덕’을 강요하고 손가락질하는 사람들도 생기지만 말입니다. 그래도 종이쪽만 던지는 게 아니라 내 온 영향력을 던진다면. 더 이상 죽을 수 없다며 다시 싸움을 시작한 쌍용자동차 노동자들, 평화로운 제주를 만들기 위해 싸우고 있는 강정마을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고 어깨를 건 이들에게 표를 던진다면. 맞습니다. 한 발은 더 내딛는 거란 얘깁니다. 물론 지금도 정부는 최소한도여야 한다는 소로우의 생각에 무조건 동의하지만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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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8/06 13:37 2012/08/06 13: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