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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
언제 어느 때고 ‘혁명’을 얘기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수업까지 빼먹고 참석한 학회 세미나에서도. ‘가투’가 끝난 술자리에서도. 심지어 단체 미팅을 나가서도 머릿속엔 온통 딴 생각이었지요. 그러니 영화며, 소설도 ‘혁명’을 얘기하지 않으면 취급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였던가요. <어머니, 당신의 아들>이라는 영화 한편을 보기 위해. 반나절이 넘는 치열한 ‘전투’도 마다하지 않았고. 선배들이 건네주는 두툼한 복사본, ‘정치경제학’을 두고는 순번까지 정하기도 했지요. 그리고 생각지도 않았던 책들이 번역돼 나오면. 전공 책은 선배들한테 떼써서 물려받을지언정 꼭 사보았습니다.
여기 니콜라이 알렉세비치 오스트로프스키Nikolai Alekseevich Ostrovskii가 쓴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었는가>처럼 말이지요.
2.
두 눈을 완전히 잃어버리고 몸마저 점점 마비가 되는 상황에서도 불굴의 의지로 《폭풍 속에 태어나는 자》라는 소설을 써낸 코르차긴은 글쓴이 오스트로프스키 자신이겠지요.
자구(字句)가 겹치는 것을 피하기 위해 가로로 여러 행의 홈을 만들어 놓은 판지로 된 깔개를 이용한 글쓰기. 오스트로프스키 스스로가 만든 이 방법으로 코르차긴은 글을 써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스트로프스키(1904-1936)는 소설 속 주인공 파웰이 한 번은 분실했던, 자신이 전에 코토프스키 사단에 보냈던 전시(戰時) 중 추억을 다룬 ‘폭풍 속에서 태어나는 사람들’을 두 번째 작품으로 써 내려가던 중, 32세라는 짧은 나이로 생을 마치고 맙니다.
코르차긴의 어머니 마리야 야코브레브나가 아들들에게
“그런데, 얘들아, 너희들 이제부터 어떻게 할 작정이냐?”
라고 묻자,
“다시 제자리로 들어앉는 거지요 뭐, 어머니”
하고 말하는 형 아르촘과 달리 일이 기다리고 있는 키에프로 돌아가는 파웰과도 같이, 모스크바로 향하던 도중에 말입니다.
3.
글을 옮긴이는 미하일 알렉산드로비치 숄로호프Michail Aleksandrovich Sholokhov가 쓴 <고요한 돈강>,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Lev Nikolayevich Tolstoy의 <고뇌 속에 가다>와 함께 이 책을 러시아 혁명을 무대로 한, 진정한 혁명의 서사시라고 추켜세웁니다.
물론 뒤의 두 책들이, ‘혁명을 만나서 사상적 동요와 회의(懷疑)의 포로가 된 인간의 심리를 그려낸 것으로써, 소비에트 문학에 새로운 한 장(章)을 추가한 것’(p.8)이 분명하다면.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었는가>는 그야말로 정통적인 혁명 소설임이 틀림없다고 단언하지요.
철저한 노동자 출신으로 러시아 혁명에 뛰어든 가난한 소년공 파프카. 그리고 오스트로프스키. 그들이야말로 무수한 난관을 뚫고 강철로 거듭난, 진정한 혁명가라는 것이지요.
4.
‘민주주의’만 얘기해도 ‘빨갱이’라 몰리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러니 ‘혁명’을 말한다는 건. 그래요. “쉬운 일이 아니었지.” 하지만. 그렇게만 말하기엔. 시간이 많이 흐르긴 했지만, 그건 너무 낭만적으로만 회상하는 것일지 모릅니다.
그리고 또. 지금은 다들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지만. 그저 ‘혁명’을 술안주로 올리기엔. 이 순간. 이 시대. 그리 녹녹치만은 않으니. 20년이나 지난 어제, 다시 이 책을 읽어 내려가는데. 가슴 속에 뭔가가 꿈틀꿈틀.
아직 늦지 않았지요?
‘밥심으로 일 한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육체적으로 힘든 일을 하는, 흔히는 농사짓는 사람들이 많이 썼지요. 헌데 큰 힘을 쓰려면 당연 고기를 먹어야 하겠건만. 왜 밥을 앞에 두었을까요. 그야 뭐, 옛날엔 워낙 고기를 먹는 다는 게 워낙 흔한 일이 아니어서. 겨우 명절날이나 제삿날, 생일이었으니. 늘 먹던 것이지만 밥이라도 든든히 먹어 두자, 그런 뜻이 아닐까 합니다만.
재작년쯤인가. 쌀 직불금이 크게 문제가 됐었습니다. 어떤 곳은 절반 이상이, 또 어떤 곳은 거의 모든 논과 밭이 외지인 소유라는 거. 그거 별로 새삼스런 일도 아닐 지경인 상황에서 난데없이 벌어진 일입니다. 처음 이 문제가 불거졌을 때, 결국 또 애꿎게 농사짓는 사람들만 피해를 보겠군,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처음부터 부정수급쪽으로만 초점이 맞춰지더니 끝까지 그 얘기만 하더군요. 문제는 경자유전(耕者有田), 땅 투기였지만요. 결국 소작농부들, 농사지을 땅만 구하기 힘들어지게 된 채로 끝이 났습니다.
요즘 막걸리가 유행입니다. 외국으로 수출도 잘되고 물론 국내 판매량은 놀랄 만치 늘었고요. 이 유행에 편승해 막걸리를 소재로 한 드라마도 나왔으니. 이만하면 열풍인가요. 또 갈수록 높아가는 'well-being' 바람에 쌀을 재료로 한 과자도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누룽지도 인터넷으로 팔고 있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이 과자, 막걸리, 누룽지. 저 바다 건너에서 가져온 쌀로 만든 게 참 많기도 하네요.
‘여주.이천 쌀’이라면 때깔 좋고 밥맛 좋은 걸로 알아주던 때가 있었습니다. 물론 지금도 그 명성은 여전하구요. 하지만 이젠. 뭐라나, 1,500년 만에 찾아온 더 없는 지역 개발 기회라고들 하는데. ‘물은 고이면 썩는다.’는 만고진리도 얼토당토 않는 이유로 간단히 무시하고. 강물이 논물보다 높으면 자연 논은 망가진다는 순리도 들리지 않고. 강 주변 논보다도 높게 물길을 만드는 것이 바로 이 死大江 사업인 걸. 쌀농사보단 땅 파는 게 더 남는 장사란 걸 이제야 깨달았나 봅니다.
우리네 밥상(그러고 보니 이미 ‘밥상’이라는 말에 ‘밥’이 들어가 있네요)에 가장 중심이 된 밥, 정확히는 쌀. 이 쌀이 대체 언제부터 상에 올라왔던 걸까요. 기록으로 살펴보자면 멀리는 삼국사기의 백제본기와 신라본기로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한 벼농사 관련 책들이 있습니다(pp.33-38). 그리고 남아있는 유물로는 경기도 여주 흠암리 탄회미가 가장 오래 된 것으로 대략 3,000년 전 청동기 시대로 추정되는 것이 있습니다(pp29-31). 이렇듯 벼는 아주 오랜 세월동안 함께 해왔는데요. (물론 밭벼가 있기는 하지만) 이 쌀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논’. 사람에게는 ‘밥심’을 주고 자연에게는 또 다른 ‘심’을 주는 이 ‘논’에 대해. 우리는 과연 얼마나 알고 있을까요.
‘이밥에 고깃국’이라는 말도 있었습니다. 요즘 사람들이야 들어본 적이 없겠지만. 나름 쌀집 자식이었다는 비교적 유리한 환경에서도 흰 쌀밥을 먹는 게. 불과 20년 전만해도 역시나 생일이나 제사, 명절이 때였으니. ‘고기’와 ‘이밥’이 한 상에 올라오는 건. 잔치상 말고는 보기 힘들었던 때가 있었던 겁니다. 하지만 지금은 웰빙이란 이름으로 이 ‘이밥’이 찬밥 신세를 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남아도는 ‘이밥’ 때문에 애꿎은 갯벌이 통째로 메우는 데 이용만 되고. 먼 이국땅에서 자신의 배를 갈라가면서까지 지키고자 해도 늘 ‘자동차’, ‘반도체’에 밀려 뒷자리로 밀려나고. 이런 걸 격세지감(隔世之感)이라고 하는 건가요? 잘 모르겠습니다.
결국 사람이 문제인가요. 책을 쓴 이는 단호히 말합니다.
인간의 문제가 간과된다면, 인간은 자신의 분신인 문명을 희생양으로 삼아서 면죄부를 얻으려는 위선적 장치를 마련하고 있다는 비판을 외면할 수 없음이 분명하다. p.196
그리고
문명비판론자들이 우리 시대가 직면한 위기의 근원을 문명으로 지목하는 과정의 영악성과 이기성을 지적 p.200
하고자 글을 썼다고 합니다. 예컨대 글쓴이가 말하듯이 ‘수질오염’이라는 현상으로 나타난 ‘생태위기’의 주범을 가정용세제로 몰아가는 것은 “자본논리의 시녀노릇을 수행하기 위해서 만만한 가정주부들을 속죄양으로 삼고”있는 것에 문제를 제기하고자 하는 것이지요.
이를 위해 글쓴이는 <숲속에 사는 사람, 숲밖에 사는 사람>(pp.96-119), <씨를 말리는 화학무기>(pp.165-183>와 같은 글들을 통해.
또, <문명론과 문명비판론의 반생태학: 에필로그>(pp.184-205)라는 글에서는 세 가지 중요한 사건(북미 동남부의 행여비둘기(passenger pigeon), 북극권의 雪車革命, 사회주의혁명과 아랄海)들을 살펴봅니다. 그리고는 다시 한 번
편리함을 추구하는 인간의지가 우리 시대의 생태학적 위기의 근원이라는 결론이 가능하다. 편리함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사람은 다른 사람의 삶을 부수는 작업을 해왔다. 편리함의 부산물로 생성된 쓰레기는 편리함을 만들어내는 과정에서 파괴된 다른 種과 다른 사람을 適所(niche)를 대체함으로써 돌이키기 어려운 “適所置換”(niche displacement)의 현상을 보이고 있다. 파괴된 다른 종과 다른 사람의 삶을 밑거름으로 삼아서 피어난 편리함의 꽃을 우리는 문명이라고 불러왔고, 그러한 논리를 정당화하려는 노력으로서 인간은 문명론과 문화이론을 구축해왔다는 점을 부인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사람이라는 종의 편리함을 구축하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생태권이 시달림을 당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 우리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생태위기의 본질임을 알 수 있다. p.203
고 일갈합니다.
이런 문제의식은 글쓴이가 말하는 문명을 구성하는 세 요소, 즉 기술과 이념, 이 양자가 함께 생산한 조직 가운데 ‘본질적으로 중립적인’ 기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는데요. 즉,
어떤 기술이 “좋다, 아니다”하는 가치판단의 기준 속에 들어가는 것은 그 기술이 적용된 상황과 적용방법에 의해서 결정될 수 있을 뿐이다. 즉 그 기술이 적용되는 과정에 개입하는 인간의 의지에 의해서 기술의 의미는 선악의 가면을 쓰게 되는 것 p.187
이라고 합니다. 어때요. 이만하면 글쓴이가 매우 일관되게 ‘무엇’이 문제다, 라고 말하고 있지 않나요.
헌데, ‘인류학자의 환경론’이라는 부제가 달린 이 책. 왜 제목이 ‘똥이 자원이다’ 일까요. 도올 김용옥씨가 쓴 추천하는 글을 보니 이렇습니다.
애초에 전경수 선생이 이 책의 좋은 제목을 하나 생각해 달라고 하기에 “문명을 어떻게 운영하나?”로 하자고 제안하였다. 그랬더니 몇일 후에 전경수 선생은 “똥은 자원이다”로 가자고 하였다. 나는 역시 그의 등치다웁게 과감한 판단에 대해 찬탄을 금할 수 없었다. 나의 제목은 매우 소극적 제안이나 질문에 지나지 않은 것에 불과한데 반하여 전경수 선생은 그 핵심적 해답을 이미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똥이 밥이다! 문명의 똥을 다시 문명의 밥으로 삼아야 한다는 그의 논의야말로 노동의 결실로서 성스러운 “밥”이라는 기존의 논의를 한차원 뛰어넘는 것이다. 밥과 똥은 지나가는 엘리멘타리 트랙(the alimentary tract)이라고 하는 소화기계의 캐널에 의하여 연결된 개념이며 그것은 一心二門과도 같은, 一體二用의 개념인 것이다. 밥과 똥은 天地自然의 에코체인에 있어서 연기론적(화엄실상론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총체적 일환의 두 측면인 것이다. pp.32-33
버릴 것이 하나도 없는. 애당초 쓰레기라는 말이 없었던. 순환만이 존재하는 자연계에서 일탈한 인간이 이제는 이 순환의 고리로 되돌아가야만 한다는. 역시 문제는 사람인 셈이다, 는 그 말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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