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자 삽입 이미지외국영화를 보다보면 가끔 원제목과는 전혀 다른 제목 때문에 헛웃음이 나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테리 길리암 감독이 1985년에 내놓은 ‘Brazil’이라는 컬트무비는 ‘여인의 음모’라는 제목으로 바뀌었는데요. 영화를 보는 내내 대체 저 여인이 뭔 음모를 꾸민다는 거지, 괜한 상상을 하게 만들다 끝내. 영화 속 주인공처럼 환상에서 깨어날 때쯤 영화도 끝난다는. 꽤나 어처구니없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아, 물론 반대의 경우도 없지는 않습니다. 그것도 영어식 제목을 무조건 한글로 해야 했던 웃긴 시대에 나온 'Butch Cassidy And The Sundance Kid'. 폴 뉴먼과 로버트 레드포드가 주연으로 나왔던 이 영화는 ‘내일을 향해 쏴라’라는 아주 멋진 제목으로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으니까요.
 
책도 마찬가지입니다. <문화의 수수께끼>와 <음식문화의 수수께끼>에 이어 <식인과 제왕>까지, 문화인류학 3부작을 잇달아 발표했던 마빈 해리스가 1981년도에 쓴 이 책. 첫 장부터 책을 덮을 때까지 내내 대체 제목을 왜 이따위로 한 거야, 란 말이 나왔지요. 아무리 눈에 확 들어오는 제목을 뽑는다고는 해도, <아무것도 되는 게 없어>가 모랍디까. 책 내용과 동떨어진 거는 물론이거니와 문화인류학과는 촌수를 따지기도 힘든 제목. 솔직히 마빈 해리스란 이름만 없었다면 그냥 눈길 한 번 주는 걸로 끝났을 겁니다. 하지만 저거 계속 보고 있자면 찝찝한 마음이 자꾸 생기니 말이지요. 달력이라도 한 장 죽 찢어 표지를 덮어 버린 다음, 꼼꼼히 읽어보면. 해리스가 이전에 썼던 책에서도 밝혔듯이 사회학이나 경제학만큼이나 시대를 읽어 내는 눈이 생기는 데 문화인류학 역시 큰 도움이 되겠다, 라는 것. 또 그것이 마빈 해리스가 이 책을 쓰게 된 이유이면서도 매우 적절한 분석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는 것. 그러니, 제목 따윈 신경 쓰지 않아도 될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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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3/21 17:36 2012/03/21 17:36
사용자 삽입 이미지정부가 삼척과 영덕을 핵발전소 후보지로 선정했습니다. 다른 나라들은 재검토니 폐쇄니 하는 마당인데 말이지요. 후쿠시마 핵발전소 폭발 사고가 잠잠해지길 기다렸던 모양이고. 처음부터 ‘녹색성장’ 원동력으로 삼았던 것이니. 아마도 후쿠시마 핵발전소 폭발 사고가 잠잠해질 기다렸던 모양새입니다. 물론 전부터 안전성을 높이면 문제없다고 했으니 더 큰 사고가 나도 밀어붙였을 터이지만 말입니다.
 
그래도 그렇지. 후쿠시마 폭발 사고 직후 단골로 등장하던 국내 핵공학자들 가운데 핵 발전이 가진 근본적인 문제점에 대해서 얘기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걸보고는 경악을 금치 못하겠더군요. 하기야 잘못 말했다간, 아니 진실을 얘기했다간 당장 돈줄이 막힐 터이니 그랬을 것이고, 자신들이 하고 있는 일이 결국 사상누각이란 걸 고백하는 셈이니 그리 말하는 게 당연할 겁니다.
 
하지만 후쿠시마 사고 발생 훨씬 이전에 핵발전소가 가지는 이론적이고 기술적인 문제점뿐만 아니라 핵 발전의 원리까지 알기 쉽게 짚어주는 책을 펴낸 물리학자가 있었음에도 재앙을 막지 못한 일본을 보고 있으려니. 절대 그럴 일이 있어서는 안 되겠지만 핵 발전을 포기하지 않는 이상 가지고 가야할 위험을 생각해보면 정말 끔찍합니다.
 
게다가 후쿠시마 재앙이 있은 지 불과 3일 밖에 지나지 않았음에도 UAE 원전 기공식을 하질 않나, 알려진 것만 해도 서울 월계동에 이어 부산에서도 방사능 유출이 생겼고, 한국원자력안전기술원에서 제공한 자료에 따르면 올 해에만 국내 원전사고 건수가 12건이나 되는데도 ‘닥치고 원전’만을 외치니. 때 아닌 원전 르네상스를 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알 수 없네요. 그저 앞으로 40년은 넘게 살아야 할 강원도에서만큼은 핵발전소가 들어서질 않도록 하는 게 최선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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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1/16 09:13 2012/01/16 09:13

1.

사회학도 그렇지만 경제학이란 학문은 과거뿐만 아니라 지금의 ‘현실세계’를 얼마나 잘 설명하고 있느냐 또는 얼마나 잘 이해할 수 있게 하느냐에 따라 부침이 클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시대와 장소에 따라 한때는 정설로 믿어져왔던 것들이 폐기처분되기도 하고. 새로운 이론들이 나오기도 하고. 종교나 신념과도 같이 돼버린 것들을 고수하기 위해 다양한 분석기법들을 도입하기도 하지요. 그러나 이런 노력들에도 불구하고 경제학에서만큼은 단언컨대 딱, 부러지게 정답이라 할 수 있는 건 없습니다. 인류가 경제활동이란 걸 시작하면서부터 함께 했다는 그 오랜 역사에도 불구하고 말이지요. 하지만 바로 그러한 이유들 때문에 거의 모든 대학에 경제학과가 있을 만큼 매력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비록 그것이 ‘현실’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 것을 넘어 때론 곡해하고 또 때론 자기 편의대로만 해석하기도 하지만 말입니다.

 

2.

신입생이었던 때로 기억합니다. 요즘은 워낙 여기저기서 10년, 20년 뒤로 퇴보하는 모습들이 많긴 하지만. 지금으로선 거의 상상하기조차 힘든 일이 있었지요. 교수 채용에 있어 어떤 결정권을 가진 건 아니었지만. ‘공개강의’란 형태로 학생들이 참여할 수 있는 길이 생긴 겁니다. 등록금 투쟁하다 짤리는 일도 비일비재하고 총학생회마저 유명무실한 지금으로 보면. 맞습니다. 딴 나라 얘기지요. 아무튼. 그때 당시 학과에서 ‘경제사’ 전공 교수를 뽑으려 공개채용을 했습니다. 물론 미국유학파가 대부분이었던 교수들 사이에선 입맛에 맞는 사람을 뽑으려 했고. ‘경제사’만큼은 맑스주의 경제학을 전공한 사람이 돼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학생회는 학생회대로 지원자들 가운데 적임자를 찾으려 했습니다. 정확한 기억은 아니지만. 2번 공개강의를 했었던 것 같고. 공개강의를 들었던 학생들과 학생회 측 의견도 교수들에게 전달됐던 것 같고. 일본에서 공부를 한, ‘식민지근대론’을 수용하는 한 지원자를 채용하려는 움직임에 싸움을 했던 것도 같고. 그러다 막판에 학생회가 요구하는 다른 어떤 것과 바꾼 것도 같은데. 20년도 더 된 일이니 정말 가물가물하기는 하네요. 어쨌든 결과만 놓고 보면 결국 학교와 과 교수들이 원하는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물론 임용된 그 교수는 그때까지만해도 완고하기 짝이 없는 학과를 더 공고히 하는데 일조를 했을 뿐만 아니라. 나중엔 ‘한국판 새역모’라 할 수 있는 자들이 쓴 <해방전후사의재인식>이라는 책에도 글을 써내더군요.

 

사용자 삽입 이미지3.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니. ‘봉건시대부터 현대까지 경제체제가 어떠한 점진적 발전과정을 걸어왔나를 매우 흥미 있게 관찰’할 만큼만. ‘위대한 사상가들이 전개시키는 주요사상의 역사를 추적’할 만큼만. ‘다양한 그룹들의 특수한 諸 문제와  관심이 매우 특수한 경제적 이데올로기를 만들어 냈으며, 이들 이데올로기들은 현상유지를 위한 변명으로서 또한 급진적인 변화에 대한 요구로서 사용되었다는 사실을 알 게 될 것’만큼만. 알려줄 수 있는 교수가 없었던 건가 의문이 듭니다. ‘현재의 구태의연한 경제학에 산적해 있는 개념의 쓰레기장에서 참신한 경제학이 탄생하기까지는 아직도 긴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고 말해줄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말이지요. 그래서일까요. E. K. Hunt가 쓴 <소유의 역사 Property & Prophet>를 지금에서야 읽을 수밖에 없는 건. 너무 긴 시간을 돌아오지 않았나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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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0/28 16:08 2011/10/28 16:08
1.
서울시장 선거가 뜨겁습니다. 5세훈이가 판을 깔았는데. ‘마사지걸’ 운운하는 대통령이 ‘도가니’를 보고 ‘사회의식’ 어쩌구 하는 것으로 한참 웃게 만들더니. 서울시장으로 나선 나경원은 되레 장애인을 발가벗겨 낯 뜨겁게 만들고. 이쪽 동네 얘긴, 맞아요. 어물전 꼴뚜기가 어디 가겠어요. 하지만 안철수로부터 시작된 바람이 결국 박원순이라는 폭풍으로 번지면서 후끈 달아올랐는데요. 민심보다도 더 화들짝 놀란 건 이른 바 ‘야권’들. 민주당은 당대표가 사퇴하니 마니까지 하는 소란이고. 뭐, 고만고만한 지지율이던 민주노동당은 겨우 체면치레나 했나. 에구구, 진보신당은 무너져가는 집 고치느라 강 건너 불구경했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2.
페포네라는 읍장은 사회주의자입니다. 그것도 아들에게 ‘레닌’이라는 이름으로 영세를 주려고 하는 아주 ‘골수’입니다(<영세>pp.51-58). 반면 읍에 유일한 가톨릭교회 신부인 돈 칼밀로는 읍장에게 아주 골칫거립니다. ‘레닌’이란 이름으로 영세를 주지 않으려는 것뿐만 아니라. 지구당 게시판에 ‘페포네 바보’라고 쓰질 않나(<성명서> pp.59-70). 광장집회를 방해하기 위해 성당 종을 마구 치질 않나(<경쟁> pp.81-91). 아무튼 앙숙도 이런 앙숙이 없습니다. 심지어는 성당에서 서로 치고 받으며 난투극을 벌이기도 하지요. 그러나 페포네와 돈 카밀로는 함께 파업 중인 농장에 몰래 들어가 소 먹이를 주기도 하고(<사람과 동물> pp.145-160). 쫓겨난 카밀로 대신 온 새로운 신부가 기존 질서를 허물자 이에 대항해 페포네가 나서기도 하고(<고향으로의 귀화> pp.112-125). 할머니 선생님이 남긴 유언을 지키기 위해 서로 한 발씩 물러설 줄도 알기에(<할머니 선생님> pp.227-237). 악어와 악어새의 관계라고나 할까. 실제 이런 일이 일어나는 마을이 있진 않겠지만.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사이입니다. 이렇게 조반니 과레스키(Giovanni Guareschi, 1908-1968)는 상상하지 못할 기발한 상황들 속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신부님 우리 신부님>이란 책에 담았습니다. 책 표지 날개에 ‘이념과 사상의 대립을 협력으로써 극복할 수 있다는 신념을 반영, 냉전 체제에 지친 유럽 사람들에게 대단한 평판을 얻었다’고 써 있지만. 그건 그닥 공감하기가 쉽지 않지만 말입니다.
 
3. 
연일 때리기입니다. 대기업 후원에 230만 원짜리 월세, 병역문제까지. 네거티브 안 하겠다면서 검증이라며 쏟아내는데. 이거 정신없습니다. 게다가 언제부터 정책선거를 했다고, ‘747 사기’ 당(黨)에서 공약(空約)들을 쏟아내는데. 가만 보니 이만하면 선거판이 대선급입니다. 그에 반해 박원순으로 뭉친 야권은 한참이나 어리숙해보입니다. 민주당이 부리는 몽니야 예상했던 바이지만. 거기에 놀아나고 있는 민주노동당도 그렇고. 잿밥에 더 관심 많은 참여당이나 진보신당, 탈당파들까지. 이렇다 할 정책은커녕 호기를 놓치고 있는 모양새니. 초반 기세를 전혀 이어가지 못하고 있어 보입니다. 하지만 가뜩이나 마딱치 않은 이 호들갑이 여간 거슬렀던 게 아니었던 차라. 이쯤해서 정신들 좀 차리려나 싶은데. 그러거나 말거나 아무튼. 우리나라엔 켄1)과 같은 ‘좌파’ 시장이 나오려나, 묻는 건. 뜬금없는 얘긴가요?
 

 

1) 1980년대 영국은 대처가 이끄는 보수당이 집권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런던 시정부를 이끈 사람은 노동당 내에서도 좌파에 속하는 켄 리빙스턴이었습니다. 켄은 대처가 철도를 죽이고 도로를 확충할 때 반대로 대중교통요금을 획기적으로 내려 자가용을 줄이는 정책을 폈습니다. 또 이명박이 서울시장을 재직하던 중 도입했던 대중교통 환승할인의 시초라 할 수 있는 ‘티켓 하나로(Just The Ticket)'도 시행을 했구요. 중앙정부가 ’작은 정부‘를 지향하며 공기업을 팔아치우는데 앞장섰을 때 리빙스턴은 민간기업을 인수, 공기업이나 협동조합을 만들어 일자리를 늘렸습니다. 그리고 광산 노동자들을 무차별 해고할 때 시와 주민이 함께 마주 앉아 도시개발 계획을 새로 구상했습니다. 이렇게 사사건건 보수당과 마찰을 빚게 되자 대처는 런던광역자치단체를 아예 없애버립니다. 이후 1986년부터 1995년까지 런던은 광역차원에서 자치단체가 없는 시로 남았습니다. 하지만 지난 2000년 런던 시정부가 복구되자 켄은 다시 직선시장으로 취임합니다. 그리고 도심혼잡통행료 제도를 실시해 ‘대중교통의 천국’을 되살리는 등 과거의 정책들을 더욱 발전시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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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0/12 13:58 2011/10/12 13:58
1.
어제 또 비가 내렸습니다. 처음엔 지나가는 소나기렸거니 했는데. 어째 내리는 폼이 예사롭지 않더군요. 국지성집중호우. 불과 한 시간도 안 됐는데, 내린 양도 양이지만 어찌나 세차게 내리던지. 한달 내내 내린 비로 강바닥에 쌓인 모래를 파놓았던 게 다시 쓸려내려가고. 심지어 보(洑) 아래 깔아뒀던 돌을 다시 놓으려 한쪽에 치워뒀던 것도 굴러떨어지고. 9월까진 이렇게 지역별로 집중호우가 온다고 하던데. 대체 얼마나 더 비가 오려는지 걱정이 이만저만아닙니다. 해서 기상청 홈페이지에 들어가 이것저것 통계를 보니.
 
어허. 이곳 춘천만 하더라도 글쎄. 8월 들어 비가 오지 않은 날이 겨우 4일. 7월 한 달은 11일이었습니다. 강우량은 7월에 무려 930mm가 넘었구요. 이러니 비 피해로 인한 사망 사고나 산사태 또는 침수, 범람 사고와 같은 안타까운 일들이 생기지 않아도 연일 방송에서, 신문에서 떠들어대지 않을 수가 없을 겁니다. 물론 다신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일도 터졌고. 발을 동동 구르고 목을 놓아 자실 이름을 부르는 부모들을 보고 있자니. 왜, 무엇 때문에 이런 일들이 자꾸만 반복되는 지. 정확히 알야야 합니다. 그래야 똑같은 실수나 방심을 방지할 수 있고, 무고한 인명 피해를 줄일 수 있으니까요. 또 아이들 밥 먹이는 데엔 생난리를 치면서도. 그보다 수십 배, 수백 배 많은 돈을 잡아먹는 ‘걸레둥둥’이니 ‘걸레상스’를 밀어붙이는 짓거리를 더 이상 못하게 할 수도 있으니까요.
 
게다가 이런 일이 해가 갈수록 더하면 더해지겠지 줄어들진 않을 터인데도. 보다 근본적인 성찰과 반성을 하기 보단. “방재개념을 재정립하겠다”느니, “방재관련 예산에 최우선 배정하겠다”느니 하면서 사후양박문식 말잔치만 벌이는 일들을 고칠 수 있으니까요. 하기야 홍수 예방이라는 되도 않는 속임수로 수십조 원을 삽질하는 데 쏟아 붇는 걸 보고 있으려면. 그나마 나온 말이라도 제대로 할지 걱정이긴 합니다만.
 
2.
무엇이건 ‘상품’으로 거래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태’까지 ‘상품화’되고 있다면. 뭐, 당연한 일이 아니냐, 며 대수롭지 않게 여겨도 되는 걸까요. 고삐 풀린 망아지인지, ‘역사의 종말’인지는 모르겠지만. 한때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대안으로 현실세계에 존재했던 ‘사회주의’가 몰락한 후, 전세계는 ‘자본화’라는 물결을 더 이상 거스를 수 없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이 무슨 기막힌 우연이었던가요.
 
이념은 달랐어도 ‘성장’과 ‘개발’만큼은 하나였던, 그래서 전지구적 생태 위기를 유발시키는데 일조했던 사회주의가 붕괴하고. 끝 간 데까지 상품관계를 밀고 나가는 자본주의가 최후 승자로 깃발을 꽂자마자. 돌연 ‘생태주의’ 사상이 급속히 퍼져나갔으니. 땅을 정복하고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는 명령에 충실한 인간이 개과천선한 건가요. 아님 명령불복종인가요.
 
아무튼 ‘생태학적’ 사고와 행동이 낯설거나 가당치않은 이념 혹은 사상으로 치부되지 않게 됐으니. 한편으론 이 극적인 반전이 인류 역사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반성에 기반한 새로운 삶에 대한 기대로 반갑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또 다른 ‘성장’과 ‘개발’ 동력이라는 밑받침으로 재반전 되고 있는 걸 보면. 극적인 결말을 기대하기란 아직 이른가 봅니다.
 
3.
하루걸러 내리다시피하는 비를 피해 간간히 밭엘 나갑니다. 할 수 있는 한 석유로부터 먼 농사를 짓겠다고. 농약에 화학비료는 물론 작년부턴 비닐도 쓰지 않고 있으니. 올 해 처음 시작한 잡곡과 콩, 팥, 고구마를 제외하곤. 고추를 시작해 가지, 토마토와 같은 열매채소가 시들시들합니다. 그나마 고추는 예년에 비해 반에 반으로 줄여 심었고, 열매채소도 딱 반만 심어 다행이지요. 그래도 그렇지.
 
연일 내리는 비에 밭 한쪽은 여전히 물이 빠지지 않은 채 작은 웅덩이까지 생겼고. 풀이 무릎까지 올라왔는데도 발이 푹푹 빠지는 바람에 낫질 한 번 제대로 하지 못한 곳도 있으니. 가을 수확이 걱정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도 지금은 그저 우리 먹는 것만 농사짓고 있다는 걸 다행이라고 여겨야 하나.
 
빨리 찾아오는 추석도 추석이거니와 한 달 내내 계속되는 비 때문에. 여기저기 농사짓는 사람들 한숨소리가 깊어지는 걸 보면. 과연 앞으로 버텨낼 수 있을지 걱정이 이만저만 아닙니다. 둘 중 하나라도 돈을 버는 게 대책이라면 대책인데 말이지요. 하지만 무슨 일만 터지면 대책이라곤 그저 농산물 수입량만 늘리는 정부만 처다 보고 있으려니. 솔직히 농사를 제대로 지어볼까 하는 마음이 생기다가도 그냥저냥 중국산 배추며 미국산 쌀 사먹게 낫질 않나 싶기도 합니다. 몸은 망가질지 몰라도 당장 마음은 편하니까요.
 
4.
대표적인 인터넷 서점 Y사이트 검색창에 ‘생태학’을 치니. 국내서적이 모두 179권이네요. 또 다른 온.오프라인 서점 ㄱ문고에선 이보다 조금 많은 215권이 검색됐는데요. 가만보니 대학 교재 수준인 이론서부터 아이들 동화책에 이르기까지. 이거 생각했던 것만큼이나 꽤나 다양한 책들이 보입니다. 또 책값이 3만원 훌쩍 넘는 양장본 번역서부터 6, 7천원으로 사 볼 수 있는 입문서에, 환경부 선정 우수환경도서, 문화관광부 추천 우수학술도서까지. 그야말로 <인간해방을 위한 생태학>(스테판 크롤 원작, 공해추방운동청년협의회 번역. 온누리. 1988)이란 책이 나오던 때하곤 격세지감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많은 책들이 나왔다는 건.
 
그만큼이나 ‘생태학’이란 ‘주의’, ‘이념’, ‘사상’, ‘철학’이 더 풍부하고 폭넓게 됐다는 걸 뜻하는 것일 터이고. 또 20세기를 지배해왔던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에 대한 성찰적 태도와 행동이 활발해졌다는 것이니. 쌍수들고 환영할만한 일이지요. 하지만 ‘나’ 수준에서, ‘지역’ 또는 ‘국가’ 수준에서, 크롤이 던지는 다음 물음에 올바른 답을 찾을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뭐, 누구, 누군가에겐 물어보나마나 빤한 답을 내놓겠지만 말입니다.
 
아, 그리고 또. 아무리 책이 처음 나왔던 때를 감안해도 말이죠. 또 책 자체가 ‘생태학’에 처음 접하는 이들에게 생태주의 자연관과 사회인식, 그리고 그와 관련된 용어를 이해하기 쉬운 삽화를 곁들여 소개하는 입문서라 하더라도 말이죠. 아직까지도 이런 질문에 명확한 답을 찾지 못하고 있다면 말입니다. 아니, 우리 사회 여기저기서 벌어지고 있는 이해하지 못할 일들을 보고 있으면 말입니다. 여전히 이런 책들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지고 또 읽혀져야 할 것만 같으니. 그저 헌책방에서만, 도서관에서만 겨우 찾을 수 있다는 게 아쉬울 따름입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내가 하고 있는 일이 진정 쓸모 있는 것인가 그리고 필요한 것인가?

내가 하는 일이 더욱 나아질 수 있는가?

나의 작업장에서 설비나 서비스의 부족은 없는가?

생산이 어떻게 하여 재조직화될 수 있는가?

작업환경의 개선이 필요한가? 작업 그 자체가 보다 즐겁게 이루어질 수 있는가?

내가 속한 노동조합은 이러한 질문에 관심이 있는가?

내가 속한 정당은 환경에 관하여 어떤 정책을 가지고 있는가?

내가 속한 환경그룹은 바른 실천을 하고 있는가?

나는 교통수단을 자전거로 대체할 수 있는가?

나는 친구, 이웃, 직장동료와 함께 자동차를 공동 이용할 수 있는가?

내가 구입하는 모든 물건들이 진정 필요한 것인가?

누군가 자원을 낭비하고 환경을 파괴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누군가 다국적 농기업에 이익을 주고 있는 것은 아닌가?

누군가 제3세계를 착취하고 있지는 않은가?

내가 구입할 만한 다른 더 좋은 상품이 있는가?

내가 지역단체를 도와줄 입장에 있는가?

내가 대안을 가진 소비자일 수 있도록 품목구입서를 작성할 수 있는가?

내가 스스로 경작할 수 있는 땅이 있는가?

그 외에 또 다른 할 일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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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8/24 13:11 2011/08/24 13: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