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벌써 한 달이 넘었네요. 느닷없이 누나에게서 전화가 왔었더랬습니다. 어머니 장례를 치를 때이니 벌써 5년이 훌쩍 지났고. 한참 자랄 때라 그런지, 그때도 부쩍 자란 조카들에 흠칫 놀랐었는데. 지금은 길에서 마주친다고 해서 알아볼 수나 있을지. 그동안 한 번도 보질 못했으니 말입니다.
 
아무튼 아들내미, 아니 조카가 이제 문, 이과를 선택해야 하는데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며, 애 얘기를 들어봐 달라며 전화번호를 알려주더라구요. 하지만 오랫동안 연락도 없었으니 쑥스러워 전화를 하지 않겠다, 란 생각을 했더랬습니다. 그리고 낮에 누나와 통화를 했고, 저녁때쯤 전화할 거라는 문자를 받았는데. 9시 뉴스가 끝나도록 전화가 오질 않더군요. 그래, 쉽진 않을 거야, 라며 보리차물을 올리러 주전자를 닦는데.
 
요란스레 전화벨이 울리기 시작했습니다.
 
 
2. 
누나와 얘길 할 때도 그랬지요. 성적도 좋고, 앞으로 취직 문제도 좋지만 일단 자기가 좋아하고 관심 있는 게 먼저 아니겠냐고 말입니다. 물론 나중을 생각한다면 그런 것들을 무시하진 못하겠지만 우선은 지가 끌리는 게 뭔지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겁니다.
 
하지만 전화 통화는 생각지도 않은 방향으로 흘러갔습니다. 먼저 예상했던 것보다 스스럼없이 자기 성적이며, 고민하고 있는 게 뭔지를 소상히 얘길 하는 조카 목소리를 들으니 한편으론 반갑기도 하고 꽤나 기분이 좋았었지요. 헌데, 안부를 묻고 이런 저런 애기를 하다 학교생활도 묻고 어쩌고 하는데. 자꾸 성적이 어떠니, 문과 쪽 과목들하고 이과 쪽 과목들하고 어느 쪽이 더 높느니, 이런 말들을 하고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아, 물론 학교에서 진로나 진학 상담은 받아봤는지, 흥미를 느끼는 과목이 어떤 것들인지, 앞으로 어떤 일을 하며 살고 싶은 것인지 등등도 물어봤었지요.
 
하지만 돌아온 답은 들으나 마나했습니다. 가만 생각해보면 그 나이에 자기가 살아가야 할 삶을 결정해야 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닐 터이고. 학교에서도 아이 취미나 적성보다는 진학률, 취업률을 먼저 생각할 것이 뻔하고. 이제껏 받아온 교육이란 게 답이 있는 문제만을 풀어오고 암기해온 게 전부니. 조카 입장에선 어쩔 수 없었겠지만.
 
참 난감하더라구요.
 
 
사용자 삽입 이미지3. 
수업을 받는 것도 일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공동체를 위한 활동을 보고 돈을 주는 나라가 있습니다. 압박 수단으로 시험과 성적표를 쓰지 않습니다. 노는 때와 공부하는 때를 가르는 것이 의미가 없구요.
 
교사는 아이들이 갖는 자유로운 결정권을 제약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을 굴복시키는 훈육자이거나 조련사이지 않으며, 더더군다나 적대자여서는 안 됩니다. 그저 필요한 전문지식을 주는 조언자에 지나지 않으며, 학생의 장점과 단점, 충분히 발휘되고 있는 재능과 아직 계발되지 않은 발전 가능성을 의논할 뿐이지요.
 
아이들은 학교에 다니는 동안 자기가 어떤 분야에 관심이 있고 소질이 있는지 스스로 알 수 있는 시간을 충분히 갖습니다. 상급학교에 진학한 학생들은 공화국으로부터 어떤 조건도 달지 않은 재정지원을 받습니다.
 
어떤가요. 상상 속에나 있을 법한 이 나라, 그 동안 싹도 틔워 보지 못한 채 짓밟히고 말살당한 창조성을 길러내며, 지금의 사회에 순응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변화시키고, 극복하고, 개선하는 것을 기본 이념으로 삼는, ‘더 많은 것을 아는 사람’이 아니라 ‘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사람’이 되기를 소망하는 나라.
 
바로 공화국 벤포스타입니다.
 
 
4.
어떻게 전화를 끊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대학을 다닌 게 벌써 20년도 더 됐다며 발뺌을 한 것도 같고. 결국 작년까지 학교를 다녔으니 조금 더 잘 알겠거니 싶어 짝꿍한테 전화를 넘겼지요. 애기를 이어갈수록 처음에 하려고 했던 말은 안 나오고 맨 이.공계 취업이 요즘은 옛날과 다르다느니, 이과는 공부 잘하는 애들이 많이 가는 편이라느니, 당체 도움도 안 될뿐더러 다 아는 얘기만 나오니까요. 하는 수 없었습니다.
 
물론 얼떨결에 전화를 넘겨받은 짝꿍이 도움이 될 만한 정보와 경험담을 섞어 잘 얘기를 해서 결정은 했지만 말입니다. 아무튼 그렇게 전화를 끊고 나니. 내 자식도 아닌데도 끝내 남들과 똑같은 생각으로 이런 결정을 하는데. 내 자식이면 오죽하겠나, 싶더랬습니다. 틈만 나면 학교 교육에 대해 침 튀기며 열만 올릴 줄 알았지 말입니다. 또  꼴에 콩 내놔라, 팥 내놔라 남 얘기하기만 좋아할 뿐.
 
아직 멀었다, 싶었습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12/08/17 22:03 2012/08/17 22:03

Trackback Address :: https://blog.jinbo.net/nongbu/trackback/2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