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스물셋 청년 노동자 전태일은 자기 몸에 불을 댕겼습니다. 고된 노동에 쓰러져 가는 어린 여공들을 그냥 두고 볼 수만은 없었기 때문이었지요. 풀빵 한 봉지라도 먹이기 위해 그 먼 길을 걸어야 했던 전태일은 죽음을 앞두고 “배가 고프다”는 마지막 말을 남겼습니다.
 
더불어 그런 전태일과 한 약속에 똑같이 걸어 다녀야 했던, 그러면서도 말 한마디 하지 않던, 지금은 철거돼버린 대한문 앞 쌍용차 분향소에 매일 ‘빵’을 사다 날랐던 동생 전태삼.
 
누구 말마따나 정의가 ‘개관적’이라면 ‘버들다리’는 처음부터 ‘전태일 다리’였어야 했습니다. 또 정의가 ‘보편적’이라는 말이 진짜라면 스물 두 명이나 죽어가도록 내버려두지도, 스물세 번째 죽음을 막기 위한 싸움이 그토록 처절하지도 않아야 하지요. 
 
2.
서른아홉 혁명가 체 게바라는 볼리비아에서 체포된 후 단 하루 만인 다음날 총살을 당합니다. 쿠바 혁명을 성공으로 이끌었음에도 다시 남미 민중이 처한 착취와 억압의 사슬을 끊기 위해 모스크바, 프라하, 파리, 상파울로를 거쳐 볼리비아로 들어갔던 체.
 
그런 그가 메고 다니던 홀쭉한 배낭 속에는 색연필로 덧칠된 지도 외에 두 권의 일기와 파블로 네루다, 세사르 바예호, 니콜라스 기옌, 레온 펠리페 등이 쓴 시를 필사한 노트 한 권이 들어 있었습니다.
 
언제라도 죽음과 맞닥뜨릴 수밖에 없던 정글 지대에서 시들을 써내려갔던 체의 ‘에토스’는 ‘따뜻함’, 그것 아니었을까요. 
 
 
 
사탕수수
- 니콜라스 기옌
『송고로 코송고』에서
 
수수밭 옆에는
검둥이.
 
수수밭 위에는
양키.
 
수수밭 아래는
흙.
 
수숫대 속엔
피!
 
 
 
3.
잘 모르겠습니다. 법을 전공한 것도 아닌데다. 법이란 게 가치와 이상을 펼치기보단 되레 걸림돌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일까요. 사후매수니 공소시효니 따위의 잣대로 진실을 가늠하려는 일에는 관심도 없었습니다.
 
또 윤리학이나 철학을 공부한 것도 아닌데다. 강요되는 관습과 예의범절이란 게 결국 지배자의 습성일 뿐이라 생각하기 때문일까요. ‘정의’니 ‘에토스’니 따위의 잣대로 진심을 가늠하려는 일에도 관심이 없습니다.
 
다만 ‘정의’가 ‘객관적이고 보편적’이라는 말이. 진보의 생명인 ‘에토스’가 사람들 돌아보지 않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그 따위 ‘정의’니 ‘에토스’는 지배자들게나 줘버리는 게 낫다고 단호히 얘기하고 싶습니다. 진보에게 ‘정의’와 ‘에토스’란 ‘따뜻함’, 그것이어야 한다는 얘깁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곽노현을 손가락질하며 고고한 척 하는 ‘진보주의자’들에게 ‘정의’와 ‘에토스’를 되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정의’와 ‘에토스’엔 ‘따뜻함’이란 정녕 없는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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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4/11 21:32 2013/04/11 21:32

곽노현 전 서울시 교육감이 가석방으로 출소했습니다. 애당초 되도 않는 법과 그 법에 기댄 되도 않는 논리로 잡혀간 데다. 긴 겨울을 꼬박 다 보내고 나서야 겨우 나왔는데.

 

‘뒷돈’ 주다 걸려 검찰에 불려갈 때부터 휠체어 타더니. 들어갔나 싶으면 어느새 병원으로 실려 나가는 이들과 굳이 빗대고 싶진 않지만요. 기다렸다는 듯이 “당신 같은 사이비들이 진보의 생명인 ‘에토스’ 자체를 무너뜨렸지요. 나는 보수진영에서 그 짓 했어도 당신들이 그렇게 열렬히 옹호했을까 회의합니다.”라며 여전히 날나발을 하는 이가 있으니 마음이 아플 따름입니다.

 

물론 “정의란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겁니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니. 논리와 법 이전에 왜, 어떤 일이 있었는지까지는 알고 싶어 하지도, 알아도 상관없다고 생각할 겁니다. 마치 일이 터지자마자 앞, 뒤 재지도 않고 돌을 던지기 시작한 보수 언론, 아니 모든 언론들처럼 말이지요.

 

그러니 그런 그들에게 “당신이 생각하는 ‘에토스’는 대체 무엇입니까?” 라며 되물어봐야, ‘따뜻한 정의’를 얘기해봐야 무슨 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요. 함부로 지껄이는 허튼소리나 계속하겠지요.  

 

날나발: ‘함부로 지껄이는 허튼소리’를 속되게 이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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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4/04 21:05 2013/04/04 21:05
사용자 삽입 이미지보수(保守)와 진보(進步)를 가르는 기준은 무엇일까요. 단어가 가진 뜻만 가지고 본다면 지키려는 쪽과 나아가려는 쪽으로 나눌 수 있겠는데요. 현실에선 그렇게 단순하게 구분할 수 없다는 걸 잘 아실 겁니다.
 
가령 정의(正義)라는 문제만 놓고 봐도 그렇습니다. 보수는 정의에 대해 진보적이라 생각할지 모르지만, 실은 진보보다도 더 보수적인 모습을 보일 때가 있습니다. 예컨대 가난을 개인 탓 또는 게으름으로 돌리며 국가의 적극적인 역할을 부정하는 것이 그렇지요. 마찬가지로 진보 역시 정의에 대해 보수보다도 더 보수적인 생각을 가지기도 합니다. 곽노현 교육감이 박명기 교수에게 건넨 돈을 놓고 진보라 얘기되는 사람들이 보인 잣대가 그렇습니다.
 
하지만 법(法)을 놓고 보면 이런 구분은 매우 유효하다고 보여집니다. 수백 년간 소크라테스가 했다고 얘기되는 “악법도 법이다”는 보수가 단골로 내세우는 말이구요. 잘못된 법, 나아가 시민을 억압하고 권리를 제한하는 정부는 언제든 폐기하고 재조직할 수 있다는 ‘시민불복종’은 진보만이 가진 특권일 테니까요.   
 
그렇다면. 하워드 진이 쓴 자전적 에세이,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에서 ‘밀워키 14인’*의 변호사가 진에게 던진 질문에 우리 사회에서 진보와 보수라고 자칭하는, 대표되는 이들은 어떤 설명들을 할까요. 물론 진이 처한 상황이 보수 쪽에서 보자면 썩 내키지 않은 상황이긴 하지만 말입니다. 앞에서 봤지 않았습니까. 진보와 보수, 애매하잖아요. 
 
“진 박사님, 배심원들에게 법과 정의의 차이가 무엇인지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 ‘밀워키 14인’은 미국이 벌인 베트남 전쟁에 대한 상징적 항의로 징병위원회에 잠입해 수천 장의 서류를 빼내서 태워버린 신부와 수녀, 평신도들을 일컫습니다. 이들은 체포되어 절도및 방화죄로 기소됐으며 하워드 진은 ‘전문가 증인’으로 법정에 출두했지요. 변호사는 진이 ‘가격이 있음’을 보이기 위해 여러 질문들을 던졌으며, 이어서 문제의 본질에 접근하고자 이런 질문을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곧바로 검사는 이의를 제기했으며 판사 역시 이를 인정했습니다. 결국 진 박사는 “왜 제가 본질을 말해선 안 되는 거죠? 왜 배심원들이 본질을 들을 수 없는 겁니까?”라고 큰소리로 물을 수밖에 없었습니다만, 끝내 판사는 법정모독죄로 감옥에 넣겠다는 말로 답변을 막았습니다.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 pp.208-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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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9/20 14:42 2012/09/20 14:42
곽노현 교육감이 풀려났습니다. 뭐 애당초 어떤 이유에서였건 잡아넣기만 하면 된다는 쪽에선 땅을 치고 분할 일이겠지만. 또 그래서 ‘화성인 판결’이니 뭐니 해대며 분개할 만도 하겠지만. 처음 일이 터졌을 때부터 다짜고짜 어울려 비난을 퍼붓던 진중권 교수가 다시 등장한 건 대체 뭐랍니까. 듣기에도 진부하고 고리타분한 진보진영의 ‘정의’와 ‘도덕’을 다시 강의하려는 건가요. 솔직히 아무리 좋게 보려 해도 진교수 입장은 그저 곽노현 교육감이 처음부터 끝까지 몹시 인정머리 없고 매정스런 태도로 일관했어야 옳았다고 얘기하고 싶은 건가, 싶은 정도인데 말입니다. 뭐, 남이 뭐라 생각하던 자기 방식의 ‘정의’와 ‘도덕’을 끝 간 데까지 밀고 가기로 작정한 거라면 달리 할 말도 없지만. 이젠 속상한 걸 넘어 대체 그가 생각하는 고매한 ‘도덕’과 ‘정의’가 뭔지 알고 싶을 정돕니다. 그러니 이제 진중권 교수가 진중하게 말해줬으면 합니다. ‘정의란 무엇인가’요? 
 
냉갈령: 몰인정하고 쌀쌀한 태도. 몹시 인정머리 없고 매정스러운 태도. _____부리다.
 
처음부터 당사자들 얘긴 들어볼 필요 없다고 한 사람들이 있었지요. 잡아넣으려는 쪽은 당연지사. 한편이라고 여겼던 사람들마저 그랬습니다. 그 가운데엔 ‘도덕’과 ‘정의’를 훈계하던 사람도 있었지요. 한마디로 곽교육감이 박명기 교수를 냉갈령하게 내쳤어야 했단 얘깁니다. 하지만 말입니다. ‘오얏나무 아래 갓끈 고쳐 매지 말라’식 ‘정의’와 ‘도덕’이 무슨 ‘도덕’과 ‘정의’랍니까. 누군 ‘화성인 판결’이라고도 하더군요. 188쪽에 달한다는 법원 판결문. 그 안에 모든 진실이 담겨 있다고는 생각지도 않습니다. 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당사자들이 어떤 생각이었는지도 다 있지는 않을 겁니다. 하지만 그 안에는 곽노현 교육감이 생각하는 ‘정의’와 ‘도덕’이, 강경선 교수가 말하는 ‘도덕’과 정의‘가 무엇인지도 조금은 있겠지요. 그래서 말입니다. 조금 많긴 하지만. 싸 잡이 옳으니, 그르니 하기 전에. 그 판결문을 한번이라도 봤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진중권 교수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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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2/07 12:39 2012/02/07 12:39